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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내 영혼의 중재자 (욥기 16:18-22, 호세아서 6:3-6)

by 소리벼리 2022. 1. 9.

내 영혼의 중재자 (욥기 16:18-22, 호세아서 6:3-6)

 

1. 중재자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서의 본문을 보면 고난 당한 욥이 누군가 나를 위해서 나와 친구들 사이에, 나와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있었으면 간절한 바람이 나옵니다. 왜 욥은 중재자가 필요합니까? 

자기의 억울함, 자기의 풀리지 않는 신앙의 회의를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2. 욥과 고난의 시작 

욥은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나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1) 

 

자녀들에게도 신앙 교육을 엄격히 시키면서 항상 예배하기를 즐겨하고, 열심내어 신앙생활 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자기에게 모든 고난이 닥칩니다. 우리는 욥기서 1장을 통해 사탄이 욥의 삶에 훼방놓는 일들의 배경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욥기 1장의 사탄과 하나님과의 대화장면은 신학적으로 큰 논쟁과 위험을 지닌 부분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하고 당신의 자녀를 사탄이 장난치도록 허락하시는 장면은 하나님이 악의 방관자인가하는 큰 의문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인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고난이 있고, 그러한 삶에도 실패와 죽음이 있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이기에 욥기서 1장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신앙적 물음에 대한 답중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여하튼 하루아침에 욥은 자녀들이 죽고, 재산은 날아가고 몸은 병들고 아내마저 그를 떠나가는 불행을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욥은 

[욥 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3. 욥의 친구들 

그런데 멀리서 욥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러 와서 욥의 곁에 거합니다. 친구들이 보기에도 욥의 당한 처지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처음에는 그냥 할 말을 잃고 함께 울어주며 일주일을 유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한 두 마디씩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두 마디씩 하는 그 친구들의 말에 욥이 상처를 입습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어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난 당한 자 앞에서 빨리 하나님께 회개하라 권합니다. 

 

친구들의 말을 듣다 보니까 점점 감정이 격해집니다. 내 앞에 이런 일이 실제로 닥친다면 어떻하시겠습니까?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왜 욥이라고 자신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자신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신의 삶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제사하며, 교제했을 때에 분명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함께 하시는 분임을 경험해왔기에 자신이 당하는 문제를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답답한 심정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토로합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 하나님이 내 모든 삶을 아신다. 그가 나의 증인이시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 친구들은 내가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나를 조롱하고 내 삶의 증인되시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니 난 눈물만 흘린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 나와 하나님 사이를 누가 좀 중재해 달라. 내 친구와 나 사이에 쌓인 장벽을 누가 좀 치워달라"

 

4. 중재자의 필요 

 

사람의 말 - 우리의 생각을 다 표현할 수 있는가? 생각의 총량과 말의 총량은 다릅니다 .수없이 많은 생각을 선택하여 하나로 표현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말해도 내 생각이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목회하면서도 가장 힘들 때, 아니 살아가면서 제일 힘들 때- 말을 해도 내 생각이 전달되지 않고, 내 생각을 말로 다 표현 못할 때에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사람 사이 뿐만 아니라 때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 분의 뜻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기도가 내 마음을 잘 전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바벨탑의 사람들에게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의사소통의 단절이었습니다.  

결국 욥기서 끝에 가서야 하나님은 욥에게 다시 말을 걸어오십니다. 그의 물음에 답하기 보다는, 온 우주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알게 함으로 생각으로만 믿어오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욥기의 클라이막스 

욥 42: 4-6)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소통이 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간접적 믿음이 아닌 직접적 관계)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당신께 품었던 분노와 억울함을 풀고 다시 주를 바라보겠나이다)

 

결국 누가 중재자가 되었습니까? 하나님 스스로가 욥과 하나님 사이를, 친구들과 욥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나타납니다. 그저 섬김의 대상인줄로만 알았던 하나님이 결국 자기와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섬김의 대상, 예배의 대상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인간과 소통코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성탄이고 성육신입니다. 중재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은 창조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중재하시는 소통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이 말씀이 있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흔히들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많이 듣던 말이 "그냥 믿어! 믿으면 알아..."라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을 반지성적이고, 비이성적인가 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아는 것에 근거해야 하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을 통해야 합니다. 다른 왕도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호세아 오늘 본문 3절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성경은 절대 우리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알고 믿으라고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합니다. 제사도 번제도 다 그 다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예배 잘 참석했으면 신앙생활의 본분을 다 한 것이라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알 생각은 않고, 주일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한 주간의 신앙을 떼웁니다. 물론 그것조차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덮어두고 자기 소신껏 예배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미신이라고 합니다. 미신이나 무속에는 말씀이 없습니다. 미신이나 무속은 그 대상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신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빌면 됩니다. 치성만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소원이 다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미신이고 우상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소원 이전에 내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기도하며, 살기를 바라시는지를 알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기호, 판단, 생각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미신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과거 미신 믿던 버릇이 남아있어서 알려고 하지 않고 치성만 드리려고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게 우리 신앙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도 미신스럽게 믿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믿어’, ‘신앙은 원래 무식하게 믿는거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알고 믿어야 합니다. 알고 기도하고, 알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속신앙입니다. 다른 데는 관심이 없고 내 소원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돈 잘 벌고, 좋은 데 취직하고, 자식 잘 되고, 결혼 잘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목적은 아닙니다. 미신이나 무속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성경을 통해 깨달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다른 은혜는 거저 받습니다. 굳이 내 소원에 목을 맬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에 복무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모르기에 자기 소원에 매달립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만큼 신앙합니다. 모르는 만큼 못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덮어 놓고는 못 합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기 대문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자기 느낌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신뢰입니다. 신뢰는 상대를 알아야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신뢰가 생깁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결단하게 됩니다.

호세아 4장 6절 말씀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무슨 지식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예배한다고는 하는데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신앙생활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한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린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느낌대로,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열심히 성경을 보며 성경의 가르침대로 신앙생활합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자가 승리합니다. 

 

새해의 첫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주제로 말씀을 전할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중재자 되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힘써 알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정했습니다. 

 

의사마다 자기 전공이 있듯, 목회자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정승구 목사를 생각할 때, 말씀을 잘 전하시는 목사,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쓴 목사, 그 말씀대로 목회하려고 힘쓴 목사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트레이시제일교회 하면 말씀 잘 배우고, 말씀대로 살도록 훈련받고, 말씀이 이루어지는 교회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왜 말씀이 곧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면 교회의 본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치고 배우고, 훈련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아침묵상과 금요예배를 통해 성경 66권을 차곡 차곡 경험할 것이고 주일예배를 통해 그 때 그 떄 우리가 힘써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하나의 예화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8세기의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 메리 존스라는 8살짜리 소녀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산간지방 시골에 위치한 곳으로 대부분의 집이 가난하고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힘든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메리에게는 매 주일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로 성경이 번역되어 일반 성도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실재로 일반인이 집에서 성경을 가지고 읽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성경책의 값이 굉장히 비쌌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산골지방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메리의 동네에는 마을에 성경책을 가진 사람은 몇명 되지 않았습니다. 주일날 성경공부를 하고 메리는 자기가 배운 것을 확인하고 성경을 더 읽고 싶어가지고 매주 토요일마다 에반스 아주머니 집에 가서 성경책을 읽곤 했습니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메리는 내가 돈을 모아서 꼭 성경책을 사야지 하곤 했지요. 

메리는 성경을 사야겠다는 일념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아버지 병세의 악화와 집안 일로 돈을 모으지 못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굴하지 않고 6년간 각종 허드렛일을 마다 않고 돈을 모은 끝에 결국 겨우 한 권의 성경책 값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메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30km나 되는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 당시 성경을 보급하던 찰스 목사님을 만났지만 더 이상 판매할 수 있는 성경이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메리는 절망감에 울음을 터트렸고, 이를 안타까워하며 지켜보던 찰스 목사님은 자신의 성경을 메리에게 건네며 격려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성경을 갖게 된 메리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피곤함과 배고픔도 다 잊은 채 30km를 단숨에 걸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모님과 함께『메리의 성경』을 상 위에 놓고 공경하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웨일즈 성경이 더 이상 인쇄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절망적인 눈물을 흘린 메리의 이야기, 즉 성경에 대한 메리의 열망에 깊이 감동한 찰스 목사는 사람들의 갈급한 필요를 인식하게 되었고 1802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기독교서회 회의에서 메리존스의 이야기를 전하며 성경 보급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이 회의를 계기로 드디어 1804년 영국성서공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력으로 대강절 두번째 주에 지키는 성서주일의 유래입니다. 

 

이후 세계 여러나라에서 성서공회가 생겨 세계 여러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저가로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882년 우리나라에도 존로스라는 선교사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도움을 받아 첫 성경인 누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되었고 1899년 우리나라에도 성서공회가 생겨 일반에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한 권을 갖기 위한 한 소녀의 간절한 소망과 눈물과 노력이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결국 성경을 갖지 못하는 세계 수많은 영혼들의 말씀의 공급처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고 늘 성경을 곁에 두고 말씀을 살아가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