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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병자 (요한복음 5장 1-15절) 


  1. 배경 

  • 유대인의 명절 (시간) 
  • 예루살렘
  • 양문 : 이중적인 장소 - 희생과 제물의 문 Vs 절기 때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 왜? 가지고 온 제물을 검사맞고 교환하고... 성전 정화- 예배를 두고 장사하는 곳. 
  • 베데스다 : "은혜의 집, 자비의 집" 이라는 뜻.


2. 문제제기 

  • 그런데 은혜의 집에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은혜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은혜를 찾을 수가 없다. 정작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3. 그들이 지금 기대하고 있는 은혜는 어떤 은혜인가?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올 때 물이 진동하고 그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을 듣고 기대하고 있다. 


4. 이것이 정말 은혜인가? 

  • 때- 가끔 (결코 풍성한 은혜가 아니다). 백화점 경품 추천보다도 확률이 낫다. 그런데 백화점 경품은 추첨이라도 하지 이 은혜는 언제 있을지 모를 물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야 한다. 그럼 이건 은혜라기 보다는 경주이다. 1등하면 상주는 것은 어디에서나 있는 경제적 거래이지 더 이상 은혜라는 말을 쓰기가 민망한 것이다. 
  • 대상- 그리고 지금 이 곳에 은혜를 기다리고 있는 대상들을 보면 더욱 은혜라는 말을 의심하게 된다. 

               맹인(보지 못하기 때문에 물이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다) 

               다리 저는 사람 (그는 다리가 불편에 경주할 수 없는 사람이다)

               혈기 마른 사람 (중풍병자, 그 역시 기력이 없어 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을 모아 놓고 눈에 불을 키고 있다가 아주 가끔 천사가 나타나 요이 땅 하면 제일 먼저 들어오는 자에게 기적을 베푼다. 이건 은혜라기 보다는 정말 잔인한 게임이다. 이건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도 더 불가능한 확률을 가지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만약 어떤 돈 많은 사람이 경품을 걸고 이러한 일을 진행한다고 하면 그를 칭찬하기 보다는 잔인하다고 비판을 할 것이다.  


5. 기독교인들의 믿음 

언젠가 나에게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나타날 거야...(막연한 기대) 

내가 은혜받지 못하는 이유는 정성이 모잘라서, 남보다 믿음이 없어서, 열정이 없어서 그래...

언젠가 나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거야

먼저 못에 들어간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막연한 기대를 품지만 정말 그런 은혜는 희귀한... 


6. 율법 주의자들의 신앙

은혜가 임할 때에 그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입니다. 무능한 사람은 절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에 얽매인 자들의 구원관이 이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것도 흠없고 거룩한 율법의 완수자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어린 양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릴 때에만 선택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은혜라는 말을 쓰기 민망할 정도로 시험보고 면접 보아서 뽑힌 영적인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아주 가끔 받을 수 있는 은혜였습니다. 


7. 38년된 병자

여기에 삼십팔년 된 병자가 누워 있습니다. 그는 그나마 전혀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누워서 일어날 수 없는 자가 기껏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동할 때에 남들이 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요 5:7)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가 38년 못에 있으면서 경험한 것은 남들이 고침받는 모습을 보거나 들은 것이 전부... 그에게는 절대로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갈 기대나 확률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그가 살아가는 목적은 확률없는 기대에 의지해서 헛된 소망을 품고 매일 같이 이 곳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38년이나 지나면서 그의 기대는 절망으로 바뀌고, 은혜는 메말라가고 목마름은 더해갑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남들에 대한 원망으로 변했습니다.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 가데스 바데아 - 여호수아가 열두 정탐꾼을 보낸 땅. 우리 힘으로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한 땅. 

        ->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 곳에 들어가리라 하며 38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의 모습과 광야 가운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우리 힘으로 절대로 그곳에 들어갈 수 없어하면서 유리구걸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우리는 삼십 팔년이라는 그 환자의 병력에서 구약에 나와 있는 어떤 영적인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가데스 바네아가 어느 땅입니까? 바로 여호수아가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낸 땅입니다. 그들의 보고가 무엇입니까? 우리 힘으로는 그 땅에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그들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힘만을 생각하다가 가나안 땅 앞에서 38년동이나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 곳에 들어가리라 하며 38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의 모습과 광야 가운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우리 힘으로 절대로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어 하면서 방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자기 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다가가고자 하는 비참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똑같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 모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거한 곳은 모두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정작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은 한없이 무력하고 무능하고 연약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분명 존재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내 여호와가 되지 못합니다. 

남들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너무 무정하고 엄격한 분이십니다. 

 

8.  예수, 복음으로 다가오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주님: 자기 힘으로 노력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다가 38년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하며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이것이 복음이다!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데스다만 죽어라 바라보고 있다. 자기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열심히 달려 구원을 이루리라 베데스다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은혜가 임했다고 다 잘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열두제자에게 찾아오셨다. 그들에게 은혜가 임한 것이다. 그런데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그 은혜를 저버렸다. 은혜에 원수로 반응했다. 

       부활하신 후 500여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은혜가 임한 것이다. 그들 중 120명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께서 약속한 더 큰 은혜를 기다렸다. 500명이 다 그 말씀을 들었는데 380명은 떠나고 120명은 끝까지 기다렸다. 

  •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마음 속에 낫고 싶은 소원을 일깨워 주시는 질문. 그 소원 때문에 38년을 기다림.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소원이 약해지기 시작.. 누워 있으면서 좌절도 경험... 소원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어느 날 부터인가 소원의 강도가 약해지기 시작. 그 사실을 알고 그의 마음의 소원에 불을 붙여 주신다. 
  • 이것이 38년된 병자에게는 얼마나 울화통 터지는 질문입니까? 

아니 그가 여기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낫기 위해서입니다. 

낫기를 포기하면 여기 나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운데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앞에 두고 그들은 자기들은 힘이 없어 못들어간다고 포기하고 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는 어느덧 낫기를 포기하고 그저 익숙한 공간에서 남들이 은혜받는 것을 바라보는데에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왜 교회 나오십니까?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우리 영혼이 낫기를 원해서 아닙니까?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사람들로 부터 상처 받고, 나 자신으로부터도 상처받은 영혼 낫기를 기대해서 나온 것 아닙니까? 

아니면 아무 기대도 없이 이 자리에 와서 앉아 계십니까? 

그저 익숙해서 이렇게 하다보면 하나님이 나에게도 기회를 주시겠지 하고 앉아 계십니까? 


9. 네가 정말 낫고자 원하느냐? 

은혜는 내가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오시는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경주해서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주의 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분이 오셨을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땅에 오신 예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남들의 이목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리를 재치고 앞에 나와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도발적인 질문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질문입니다. 

아니 병낫고자 베데스다 연못에 나와 있는 환자에게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 이 질문을 하십니까? 

정작 은혜받으러 온 사람들이 은혜 받는 통로를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익숙해져 버린 방법에 의지하다가 그저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두리뭉실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그저 난 할 도리 다한다고 자기 위안 삼으면서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기 때문입니다.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건 자기 변명입니다. 하느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그러는 것입니다. 


정말 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내가 익숙한 방법이 아닌 그 분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분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10.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변화는 변명이 아닌 순종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여자가....

당신이 만드신 뱀이....

다윗 때문에...


핑계는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 입니다. 


능력은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순종할 때에 일어납니다. 


예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지금까지 그는 자리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 자리는 38년동안 그가 의지하던 그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에 의지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똑같이 38년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날 변화시키지 못하고 내 영혼을 치유하지 못하고, 내 삶에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방법을 버리고 내 말을 좀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의지하던 방법을 버리고 내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닌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38년된 신자는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우리 안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타성에 젖어 버리고, 자기 변명하기에 급급한 신앙입니다. 

어떻게든 다가가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우리 신앙의 어두운 과거입니다. 


은혜는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오심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분의 지시하신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래된 병자들 입니다. 

죄악의 병에 너무 오래 빠져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 지, 빠져 나와야 될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으니....

확률은 없지만 그냥 막연히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믿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이삭을 바치기까지 순종해서 믿은 것이지 어떻게 될꺼야 하고 막연히 믿은 것이 아닙니다. 

타성에 젖어 신앙생활 하면 우리는 똑같이 38년된 병자처럼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인생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무런 변화없이 평생 막연하고 메마른 병자와 같은 신앙생활 할 것입니다. 

그저 원망하고 남탓 하면서 그래도 언젠간...하는 무기력한 신앙생활....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진짜 낫기를 원하냐? 네가 진짜 은혜받기를 원하냐? 

그럼 일어나라. 떠나라. 자리를 들고 안주하지 말고,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하라! 




Posted by 소리벼리

 

네가 낫고자 원하느냐? (요한복음 5장 1-14절)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요한복음만의 특별한 기사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2장의 가나 혼인잔치,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 4장의 혼인 잔치, 그리고 오늘 함께 나눌 38년된 병자의 이야기도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사건들입니다.


이 사건들에는 예수의 공생애의 목적과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핵심에는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 즉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는 새 언약, 새 계명으로의 연합된 관계입니다. 


2장의 가나 혼인 잔치- 예수의 오신 목적은 잔치를 여시기 위함입니다. 그 분은 심판이 아니라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잔치를 열어 주십니다.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잔치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서 출발함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 분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지 수학 공식 외우듯이 "그 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심을 내가 믿습니다"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을 내 영혼의 신랑으로, 연합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헬라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 헬라적 사고는 지식으로 알면 이해, 히브리적 사고는 경험을 해야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가 내 주인임을, 신랑임을 계속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영접이 아니라 실재적인 삶의 경험으로서의 고백인 것입니다.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이 관계를 더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녀는 냠편을 다섯이나 둔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에게서 남편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피난처요, 자신의 삶의 공급처요,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함께 하는 동반자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지만 지금 홀로 우물에 나와 물을 길러야만 하는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 어느 남편도 자신의 보호자가, 공급자가, 동반자가 되어 주지 못합니다. 갈급함은 부족함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해야 하는데 그는 다섯명의 남편을 두고도 늘 부족합니다. 갈급합니다. 세상을 남편 삼은 자들의 삶입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주님을 실재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38년된 병자에게서 사랑이 없는 신앙생활, 결코 연합됨이 없이 신앙생활 하는 자의 고통을 보게 됩니다.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장소를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 바로 성전이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입니다. 

양문 - 이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여러 문들 중에서 특별히 제물로 쓸 양들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제물은 곧 희생입니다. 피의 값, 죄의 값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의미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38년된 환자가 거하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 양문 곁의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희생의 제물이 있고, 은혜가 충만한 곳입니다. 아니 은혜가 충만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곳에 은혜가 없습니다. 만족이 없고, 즐거움이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이 환자는 자그만치 38년 동안이나 매일 같이 나와서 언제 물이 동하나? 자기에게 은혜가 임하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38년된 병자의 모습을 은혜를 갈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은혜의 궁핍함에 거하는 율법주의자들, 전형적인 유대교 주의자들로 해석을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어떤 자들이 은혜를 입습니까?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병이 낫게 됩니다. 

은혜 자체도 풍성한 것이 아니라 가끔, 언젠지도 모르게 아주 막연한 때에 나타납니다. 

그나마 은혜가 임할 때에 그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입니다. 무능한 사람은 절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에 얽매인 자들의 구원관이 이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것도 흠없고 거룩한 율법의 완수자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어린 양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릴 때에만 선택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은혜라는 말을 쓰기 민망할 정도로 시험보고 면접 보아서 뽑힌 영적인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아주 가끔 받을 수 있는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얼마나 큰 착각인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못에는 성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다 불구자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은 언제 물이 동할는지 보지 못합니다. 

절뚝박이는 절뚝이기 때문에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자입니다. 

혈기 마른 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혈기 마른 자는 요새 말로 하면 중풍병자 입니다. 절뚝박이와 마찬가지로 몸을 자유스럽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런 자들이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서로 제가 가장 먼저 들어가기를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은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율법의 목적인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서로 자기가 잘낫다고 으시댑니다. 남을 비난하고 자신을 치켜세웁니다. 


마치 소경과 절뚝박이와 혈기 마른 자들이 서로 자기가 가장 먼저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삼십팔년 된 병자가 누워 있습니다. 

그는 그나마 전혀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누워서 일어날 수 없는 자가 기껏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동할 때에 남들이 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요 5:7)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자의 심경을 좀 헤아려 봅시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남들이 병고침 받는 것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절대로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갈 기대나 확률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그가 살아가는 목적은 확률없는 기대에 의지해서 헛된 소망을 품고 매일 같이 이 곳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38년이나 지나면서 그의 기대는 절망으로 바뀌고, 은혜는 메말라가고 목마름은 더해갑니다. 


우리는 삼십 팔년이라는 그 환자의 병력에서 구약에 나와 있는 어떤 영적인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가데스 바네아가 어느 땅입니까? 바로 여호수아가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낸 땅입니다. 그들의 보고가 무엇입니까? 우리 힘으로는 그 땅에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그들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힘만을 생각하다가 가나안 땅 앞에서 38년동이나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 곳에 들어가리라 하며 38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의 모습과 광야 가운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우리 힘으로 절대로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어 하면서 방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자기 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다가가고자 하는 비참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똑같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 모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거한 곳은 모두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정작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은 한없이 무력하고 무능하고 연약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분명 존재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내 여호와가 되지 못합니다. 

남들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너무 무정하고 엄격한 분이십니다. 


그런 38년된 병자를 주님이 어느 날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누운 것을 보시고: 지금 그는 누워 있습니다. 뛰질 못하고 서있지도 못하고 이젠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자와 같습니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 무력하고 무능하고 자신이 이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할 적에 찾아오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젠 99세가 되어 자신의 육체적인 기대가 다 끝났다고 할 적에 그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서 이젠 내 인생의 끝을 생각할 때에 바로 왕은 그를 찾습니다. 

모세가 연약하여 져서 미디안 광야에서 무기력하게 살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내가 가장 연약할 때에 나를 찾아오시는 분, 

찾아 오실 뿐 아니라 그런 우리 연약하고 경건치 못한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분, 그분이 우리 신랑, 우리 그리스도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 


이것이 38년된 병자에게는 얼마나 울화통 터지는 질문입니까? 

아니 그가 여기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낫기 위해서입니다. 

낫기를 포기하면 여기 나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운데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앞에 두고 그들은 자기들은 힘이 없어 못들어간다고 포기하고 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는 어느덧 낫기를 포기하고 그저 익숙한 공간에서 남들이 은혜받는 것을 바라보는데에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왜 교회 나오십니까?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우리 영혼이 낫기를 원해서 아닙니까?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사람들로 부터 상처 받고, 나 자신으로부터도 상처받은 영혼 낫기를 기대해서 나온 것 아닙니까? 

아니면 아무 기대도 없이 이 자리에 와서 앉아 계십니까? 

그저 익숙해서 이렇게 하다보면 하나님이 나에게도 기회를 주시겠지 하고 앉아 계십니까? 


은혜는 내가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오시는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내가 노력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주의 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분이 오셨을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땅에 오신 예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남들의 이목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리를 재치고 앞에 나와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도발적인 질문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질문입니다. 

아니 병낫고자 베데스다 연못에 나와 있는 환자에게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 이 질문을 하십니까? 

정작 은혜받으러 온 사람들이 은혜 받는 통로를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익숙해져 버린 방법에 의지하다가 그저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두리뭉실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그저 난 할 도리 다한다고 자기 위안 삼으면서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기 때문입니다.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건 자기 변명입니다. 하느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그러는 것입니다. 

저도 나름대고 소심해서 설교 단상 위에서 외에는 잘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 위해 중보기도하다가 참다 참다 기도하러 나오세요. 예배 나오세요...하고 권면하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아세요? 

저 집에서 나름대로 기도해요...

제가 요즘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그럽니다. 


힘드니까 더 나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나와야 승리하는 것입니다. 거기 머물고 있으면 더 어려워 지니까 나오라는 것입니다. 


병자의 말을 보십시오. 누구를 탓합니까? 다 남의 탓 입니다. 

남들이 나를 안 도와 줘서 그렇습니다. 

남들이 나보다 먼저 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입니까? 


남 탓 해서 하나라도 나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변화는 변명이 아닌 순종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여자가....

당신이 만드신 뱀이....

다윗 때문에...


핑계는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 입니다. 


능력은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순종할 때에 일어납니다. 


예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지금까지 그는 자리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 자리는 38년동안 그가 의지하던 그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에 의지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똑같이 38년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날 변화시키지 못하고 내 영혼을 치유하지 못하고, 내 삶에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방법을 버리고 내 말을 좀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의지하던 방법을 버리고 내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닌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38년된 신자는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우리 안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타성에 젖어 버리고, 자기 변명하기에 급급한 신앙입니다. 

어떻게든 다가가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우리 신앙의 어두운 과거입니다. 


은혜는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오심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분의 지시하신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주부터 4주간의 집회가 있습니다. 

낫고자 하는 자들은 빠짐없이 참여하시기를 당부합니다. 

제자들은 3년간이나 예수와 함께 했지만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지막 말씀, "위로 부터 능력이 임할 때까지 이 전에 머물라"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비로서 참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일상의 영성은 중요합니다. 

특별한 때에만 열심내는 자는 일상에 실패합니다. 

그런데 일상에 충실하다가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자들도 똑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결은 곧 성령의 세례입니다. 

성령 세례는 마가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쓸 그 순간에 임했습니다. 

3년간의 공생애의 결실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열매 맺었습니다. 


지신 뿐만 아니라 타교인도 괜찮습니다. 

금요일날 예배 없는 교회의 성도들은 누구나 초청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전파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38년된 병자와 예수


1. 시간적 배경-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느니라.(5:1)  

                       어차피 예수님 당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유대인, 그런데도 유대인이라 칭할 때는 유대인들- 절기와 율법, 예루살렘성전에 근거를 둔 예수의 복음에 반대되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 쓴다.  

2. 공간적 배경-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2)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 예배가 있는 곳. 

                    양문-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문 중 제물로 쓸 양들이 들어오는 문. 희생과 생명을 의미.

                    베데스다 -  은혜의 집, 자비의 집


  • 그런데 은혜의 집에 풍성한 은혜가 없다. 은혜를 사모해서 사람들이 찾아갔는데 풍성한 은혜가 없다. 가장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갔는데 필요한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다. 
  • 가끔 천사가 나타나 은혜를 주고 있다. 누가 은혜를 입었는가? 

      은혜라고 하면 무능한 사람에게 임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사람이 은혜의 혜택을 받음. 

  • 구약의 은혜, 율법의 은혜- 선택된 백성에게 임한 은혜, 구별된 사람에게 임한 은혜, 예배 제도, 성막, 성전, 하나님이 명하신 어린 양을 잡아 피를 흘릴 때 죄인에게 은혜가 임함. 
  • 신약의 은혜 - 누구나 은혜를 사모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 예수님의 은혜는 특별히 가장 무력한 사람에게 임함. 


3. 상황적 배경-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이 움직임을 기다리니 (요 5:3) 

  •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 -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서 자신들의 행위(내달려서...) 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    
  • 죄인들은 값없이 주는 은혜에 분노한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데 왜 다 해주냐면 오히려 은혜베푸는 자를 경멸합니다. 나도 힘있고 능력있는데 왜 나를 그딴 식으로 대우하냐며 오히려 큰소리칩니다. 이게 바로 선악과의 마음입니다. 나 스스로 살 수 있는데 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하는 마음이 곧 선악과 아닙니까? 
  • 그럼 죄인들의 모습을 보자. 소경이 물이 동하는 것을 볼 수 있는가? 절뚝발이가 물이 동하면 달려갈 수 있는가? 혈기마른 자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중풍병자이다. 제대로 거동 못하는 자다. 그가 물이 동하면 제일 먼저 달려 갈 수 있는가? -> 절대 자기 힘으로 가장 먼저 달려 갈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달려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 세상살이 - 결코 혼자서 달려갈 수 없는 길을 가장 먼저 달려가기 위해서 기다리며 가장 먼저 도달하기 위해서 무슨일도 서슴치 않고자 하는 자들... 자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것이라고 믿고 남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먼저 달려가려고 생각하지만 실재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이다. 결국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
  • 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누군가 나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갔기 때문이다고 생각하기 때문... 나도 언젠가 그 연못에만 들어가면 세상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그러나 정작 자기 힘으로 그 연못에 들어간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세상의 죄인들이 바로 소경이요 절뚝발이고 중풍병자들이다. 


4. 38년 된 병자- (요 5: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자기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뼈져지게 느끼고 있는 죄인. 그렇지만 무능력하고 불가능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자신들의 힘을 생각하며 유리 방랑하는 사람들 

  •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 가데스 바데아 - 여호수아가 열두 정탐꾼을 보낸 땅. 우리 힘으로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한 땅. 

                                 ->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 곳에 들어가리라 하며 38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의 모습과 광야 가운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우리 힘으로 절대로 그곳에 들어갈 수 없어하면서 유리구걸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5. 예수님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주님: 자기 힘으로 노력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다가 38년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하며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이것이 복음이다!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데스다만 죽어라 바라보고 있다. 자기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열심히 달려 구원을 이루리라 베데스다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은혜가 임했다고 다 잘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열두제자에게 찾아오셨다. 그들에게 은혜가 임한 것이다. 그런데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그 은혜를 저버렸다. 은혜에 원수로 반응했다. 

       부활하신 후 500여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은혜가 임한 것이다. 그들 중 120명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께서 약속한 더 큰 은혜를 기다렸다. 500명이 다 그 말씀을 들었는데 380명은 떠나고 120명은 끝까지 기다렸다. 

  •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마음 속에 낫고 싶은 소원을 일깨워 주시는 질문. 그 소원 때문에 38년을 기다림.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소원이 약해지기 시작.. 누워 있으면서 좌절도 경험... 소원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어느 날 부터인가 소원의 강도가 약해지기 시작. 그 사실을 알고 그의 마음의 소원에 불을 붙여 주신다. 
  • 어떤 사람은 큰 병을 앓고 있는데도 전혀 낫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픈 데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 건강한 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다. 병보다 낫기를 포기하는 절망이 더 무거운 짐이다. 
  • 아프다고 하면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아프기 때문에 아무도 귀찮게하지 않는다.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병에 익숙한 사람은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천덕꾸러기가 되어서 무능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 미국에서는 정신 질환자로 판명되면 나라에서 돈을 받는다. 사회적인 책임,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가난을 즐기고, 병약함을 즐기고, 정신질환 속에 갇혀 지낸다. 나으려고 소망하지 않는다. 
  •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일부러 감옥에 가는 사람도 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어가는 것이다. 삶의 목적도 없고, 소망도 없고, 미래도 없는 삶이다. 
  • 은혜가 임할 때 우리는 책임지는 존재가 된다. 신세지는 자에게서 책임지는 자가 되고 섬기는 자가 된다.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도전한다.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낫고 싶으냐? 그 방법을 가르쳐 주랴?  -> 상식적인 대답- 네 낫고 싶어요. 어떻게 하지요? 

                

6. 병자의 대답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 이 말을 하고 있는 병자의 심정을 생각해보자. 
  • 물이 동할 때마다 그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내려가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포자기하고 누워있지 않았습니다. 계속적으로 힘썼습니다. 38년을 할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고 원했습니다. 기다리고 인내했습니다. 

      절망을 참았고, 좌절을 참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열심히 노력해도 안된다고 포기하지 말라. 아직 끝난것이 아니다. 끝나기 전에 내 마음에서 먼저 포기가 일어나면 안된다. 

성도는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때가 되면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의 간구에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한다. 하던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믿음을 지켜야 한다. 하던 봉사 힘들어도 계속해야 하고 읽던 성경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어느 순간 눈이 열린다. 힘이 생긴다. 축복이 임한다. 우리가 기다릴 때 하나님도 기다린다. 때가 차기를 기다린다.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조급하면 이스마엘을 만들지만 기다리면 이삭을 만든다. 조급함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소중한 것일 수록 기다리게 하신다. 귀중하게 쓰일 물건일수록 감추어 놓으신다. 요셉은 13년을 기다렸고 모세는 40년, 80년을 기다렸다. 다윗도 기름부어 왕으로 삼기까지 13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수천년을 기다리심. 

  • 그런데 병자의 잘못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쫓는 방법만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에도 불구하고 베데스다만 바라보고 있다. 길은 여기 있는데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길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7. 이르시되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 그동안 그 사람은 자리를 의지해서 살았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하심다. 그가 의지해 왔던, 도움을 받았던 것을 뒤로하고 네 길을 가라는 것이다. 

은혜가 임하면 우리가 의지해왔던 사람들이 우리를 의지하게 되는 역사가 나타난다.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를 의지해서 베들레헴에 왔는데 자신이 의지했던 시어머니가 어느덧 자신을 의지하게 된다. 

은혜를 받으면 오랜 습관을 버리고 새역사를 창조하는 능력을 받게된다. 38년이나 된 병자의 사고와 습관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된다. 

  • 내가 지금껏 의지하던 너의 길, 너의 가치관, 너의 터전을 뒤로하고 말씀에 순종해 보라. 나를 믿어보라. 전적으로 신뢰하라. 
  •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이 환자의 답변은 그야말로 회한이 묻어 나옵니다.  아무도 자기에게 말을 걸어 준 사람도 아무도 자신을 쳐다 보지도 않은 세월이 38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자하신 목소리에 그는 자기의 38년 동안의 눈물의 탄식을 쏟아 놓습니다. 
  •  "주여" 이 낮아진 마음으로 고백을 합니다.
  •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치 않습니다. 낫겠다는 일념으로 예수님의 권능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38년동안 누워있던 사람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는 말에 의심도 없습니다. 즉각 일어납니다.
  • 이것이 그 사람이 고침을 받은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이 먼저 입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어떻게 그럴수가!! 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는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적은자여라며  물 위를 걷다 실족한 베드로에게 한 말씀 그대로 입니다. 순종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믿습니다 하고 내가 먼저 일어나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오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오시기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38년된 병자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처럼 말입니다. 


8. 결론 

지금도 38년된 병자처럼 기적만 바라고 누워있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고, 말씀 보고 기도도 하지만 결국 자기가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는 나도 성공할 꺼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은혜 받는 사람들을 곁에서 보면서 나도 조금만 누가 도와주면 할 수 있을텐데 하며 남을 원망하며 자신의 무기력을 비통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38년 동안 광야에서 헤메면서 언젠가 주어질 은혜만을 갈망하며 하나 둘 희망을 잃어가던 자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신다. 

자기 방법대로, 자기 의, 자기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무력한 신앙생활 하는 자에게 주님은 나타나셔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다. 

내가 지금껏 기대오고 의지하던 방법을 뒤로하고 이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새 삶을 살아보라 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