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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14-2-2) 


엔게디 광야에서의 두 사람 (사무엘상 24:1-7) 



사울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겸손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백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자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셔서 예언도 하고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임명하여 그것에 필요한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누구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세례를 주어 그 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한 자에게 모든 권세와 함께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름부음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케 하십니다. 

(삼상 14:47-48)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그런데 승리하게 되면서 사울이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힘으로 승리한 줄 알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하지 않고 선지자의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전쟁에서 얻은 것들을 취하고 마음대로 자기가 재단을 쌓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교만하여져서 타락하게 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승리를 하게 해 주시는데 승리를 거듭하면서 사울은 순종을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이 다윗입니다. 새롭게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받자 마자 새 마음이 부어지고 능력이 임하게 되는데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 바로 왕이 되지 않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의 궁에 들어가 그를 섬기게 합니다. 사울에게 임한 악령을 떠나가도록 찬양을 부르게 합니다. 

사울이 불순종하자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는데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물리치게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섬기는 자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이렇게 자기를 섬기면서 찬양을 불러주면 사울에게 다윗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를 기억하고 아껴야 하는데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나타날 때 다윗이 등장해서 그를 무찌르자 사울이 아니 네가 찬양하던 그 소년이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본 소년인 것 처럼 네가 누구의 자녀인가?하면서 그를 대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가까이에서 사울을 섬기며 수종들었지만 사울에게 다윗은 기억조차 안된는 사소한 존재였다는 것이지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기 주위의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다 자기를 위해 수종드는 자이지 그가 귀하거나 아끼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벽을 무너뜨리자 비로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여 그를 군대장관으로 삼는데 거기서부터 기나 긴 갈등이 시작됩니다. 다윗이 블레셋 군사들을 무찌르자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는 소리를 듣고 그 때부터 다윗은 자기를 위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위협하는 자로 시기와 질투심이 폭발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자들이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위해야 하는데 자기보다 더 칭찬을 받으니까 왕이건 뭐건 모든 일을 중단하고 이제 사울의 삶의 모든 것이 다윗을 죽이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때부터 무엇을 느끼는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났고 다윗과 함께 함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라면 자신에게 기름부어 주시고 능력주시고 함께 해 주시던 하나님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자기 주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해야 지요. 회개하고 "하나님 성령을 거두지 마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세요."해야 하는게 마땅한 일인데 현실에서 그런일이 일어나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쟤 때문에 내가 버림을 받았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다시 사랑받을텐데"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실패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누가 그랬습니까? 가인에서 부터 시작된 시기의 역사, 살인의 역사입니다. 아니 아담에게 와서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부르실 때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나와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 주신 저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이렇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 했음면 내가 그 앞에 나와서 무릎꿇고 회개하는 것이지 핑계되면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놀아나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왕의 직분을 다 내려놓고 오직 사울은 다윗을 주이는 것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라고 왕으로 기름부어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삶의 목적이 다윗을 없애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내 마음에 그런 것이 들어오면 당장 쫓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윗은 지금 사울을 피해 엔게디 광야의 깊은 굴 속에 숨어들었습니다. 

엔게디라는 이름은 '염소새끼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어린 염소새끼를 먹이는 물, 은혜, 피난처의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 10명만 데리고 와서 나를 위협한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이 지금 3000명을 데리고 와서 다윗의 목숨을 위협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순간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은혜의 처소, 깊은 굴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위험이 있어도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생명을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누군가 나를 위협하면 은혜의 굴,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이 주시는 샘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안전합니다. 

그곳엔 3000명의 군사라도 다윗을 칠 수가 없습니다. 


은혜 안에 들어오니까 다윗은 사울을 볼 수 있는데 사울은 다윗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에 나가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목숨이지만 은혜 안에 들어오니까 어떤 위협도 침범칠 못합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 방황하는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아주 특별한 유혹을 받습니다. 

은혜 아래 거하면서 나를 위협하는 자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무기력한지를 발견했을 때에 내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를죽이려 하는 자를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두고 망설이게 됩니다. 

마음 속 한 편에서 드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는 시험입니다. 이건 내게 준 기회이니까 내 마음대로 행해보자. "네 생각에 좋은대로..." 

"내 생각에 좋은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이것은 사사기서에 나오는 구절들 아닙니까? 그 때에 왕이 없었더니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어떤 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합니까? 왕이 없는자,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자가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다윗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삼상 24:15)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결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어서 치리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장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 누구도 대들지 못하는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어서 블레셋 군사들을 무찔렀던 자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쫓으며 자기 목숨을 위협하는 사울을 앞에두고 결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대언자, 대리자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불손종해서 악령이 지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셔서 지금 다윗에게 새로 기름을 부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능히 "당신이 하나님을 떠났음으로 내가 기름부음을 받고 당신을 주의 이름으로 칩니다"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많은 정치적인 반란이 이렇게 일어났지요. 


그런데 다윗은 끝까지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칠 수 없다고 합니다. 당신을 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다윗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면 누군가는 다윗을 욕하고 저주했을 것입니다. 

왕이 되기 위해 선왕을 살인한 자라는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후에 사울이 죽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을 때, 그가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지 않은 일 때문에 정치의 평화가 왔고 전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또한 다윗이 그의 적에게 베푼 선으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가 복을 받고 모든 백성은 그를 청종하지 않았습니까!


(삼상 24:13)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악한 방법을 통하여 선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지만 악은 악인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선인에게서 악한 행동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다윗을 보면서 사울은 울며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어찌보면 사울의 마지막 성령의 임재가 이 때 이루어 집니다. 

성령의 예언들이 사울의 입술을 통해서 펼쳐 집니다. 


비록 사울은 이후에도 또 다시 다윗을 치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자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24장의 마지막 구절은 엔게디 광야의 굴 속에서의 두 사람의 갈림길을 보여 줍니다. 

사울은 기름부은 자였지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주신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결국 자기만의 처소, 자기길,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기름부은 자로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시기를 기도하며 요새로 돌아갑니다. 요새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견고한 성입니다. 그의 신앙과 삶과 환경을 더욱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다보면 한 사람의 왕의 인격과 신앙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국가이지만 그것을 이끌고 있는 한 사람의 신앙과 삶의 모습이 국가의 흥망성쇄를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얼마나 약했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현실의 문제에 매일같이 넘어지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모세의 온유함과 신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니뭐니해도 교회는 우선 목사가 바로서야 합니다. 

가정은 부모가 바로서야 합니다. 가장이 바로서야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위에서 누군가가 바로서지 못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입니다. 

왕이 바로서지 못하고 집안의 가장이 바로서지 못하고 때론 교회의 목사가 바로 서지 못할 때에 도대체 그로부터 말미암은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사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 보면 많은 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부패되고 잘못된 정치와 권력을 바꾸기 위해서 사람들은 데모를 하고 무력시위를 하며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으려 합니다. 

목사를 쫓아내는 교회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가장이 잘못하면 아내로부터도 자녀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습니다. 

봐주지 않습니다.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바꾸고, 뒤집고, 흔들어도 좀처럼 사회가, 교회가, 가정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점점 더 혼탁한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보복은 보복을 낳습니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가인은, 사울은 시기와 질투로 폭력의 역사를 써 내려갔지만 다윗은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보복과 폭력의 역사를 끊고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요새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반드시 살아계서서 우리의 괴로움을 갚아주시고 보호하시고 선한 일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합시다. 결코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지 말고 그 분께서 일하심을 믿고 의지합시다. 

 

나라에, 교회에, 가정에 리더가 바로서지 못한 곳은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그런 현실을 가만히 눈감아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폭력으로, 내 소견에 옳은대로 이것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려 그 분께서 일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힐데가르트와 한국의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통해 본 여성의 영셩, 여성의 리더십.

최초의 여성 대통령, 그리고 여성 리더십

지난 2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취임했다. 작년 말 대통령 선거의 과정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측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모토로 많은 여성유권자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 하였지만, 실제로 국내외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의 딸이라는 정체성에 더 큰 의미를 주었다. 그것이 보수에게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국가 부흥에 대한 열망을 일깨우는 결집의 이미지가 되었고 진보에게는 독재자로서의 억압과 착취를 상기시키는 불안과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 사이로 여성 최초의 대통령의 소리는 점점 묻혀가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그녀는 부인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그렇다면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 실천할 수 있는 여성의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오가고 있지만 정작 그들 내용의 대부분은 엄마 같은 따뜻함’, ‘부드러움’, ‘섬세함등을 갖추어야 한다는 등의 추상적이고도 얕은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또는 통속적인 관념을 그대로 투사(projection)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여성 리더에게 자기가 생각하는 여자이기를 요구한다. 이것이 지나치면 여성에 대한 또 하나의 폭력 또는 성차별이 되지 않을까?

이러한 것들에 주의하면서, 이 글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으로 잠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이른바 중세 중기 시대(High Middle Age)인 당시는,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교회에서는 남성 성직자의 권위가 절대적이던 시대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대체로 가정 안에서의 아내나 어머니로 제한되어 왔고, 그 역할을 넘어 사회에서 리더십을 보이는 여성들은 극단적인 경우 이단으로 정죄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몇몇 경건한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요구된 아내 또는 어머니라는 제한된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중세의 여성들은 수도원 공동체를 중심으로, 독신 수도자 (anchoress), 베긴회 (Beguins)와 같은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여성 공동체로 점차 다양하게 그들의 신앙적 삶을 넓혀가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중세 여성들의 영성 시대를 열게 된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때의 여성 신비가들의 활동을 가부장적 신앙 체계에 대한 대안 영성’, 또는 남성 중심의 사고체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평가한다.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is Bingensis, 1098-1179)는 그 중심에 서 있는 여성이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와 비리디타스(Viriditas)

힐데가르트는 최초의 여성 수도원장, 전기가 남아있는 최초의 여성 작곡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특출한 인물이다. 그녀는 1098년 지금의 독일 영토인 뵈켈하임(Böckelheim)에서 한 귀족 가문의 열 번째 자녀로 태어나 가정의 십일조로 여덟 살 때에 수도원에 맡겨진다. 그리고 열다섯 살에 평생 수도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하고, 삼십팔 세에 최초의 여성 수도원장에 선출된다. 그녀는 여덟 살 때부터 환상을 본 것으로 전해지는데, 당시 사회 여건상 그러한 사실을 숨겨왔다고 한다. 그러다 마흔세 살 때에 네가 본 것을 적어 세상에 알리라.”는 강한 음성을 듣고, 그 후 10여년에 걸쳐 길을 알라(Scivias는 역작을 남기게 된다. 그녀는 신학자로서뿐 아니라, 작곡가, 시인, 의학자, 식품학자로서 다양한 작품과 저술을 남겼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비리디타스는 그녀의 방대한 사상과 영성을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비리디타스는 라틴어 ‘virtus’ (virtue, ), vis (strength, ), 그리고 ‘vivere’ (life, 생명)가 결합된 말로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다양한 작품과 글을 통하여 비리디타스를 녹색 생명력’, ‘푸르른 힘또는 만물에 깃든 생명력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매튜 폭스(Matthew Fox)나 바바라 뉴먼(Barbara Newman) 같은 학자들은 힐데가르트의 비리디타스 사상은 이전의 남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그녀의 독특한 창조영성, 생태영성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그녀는 비리디타스를 통해 모든 창조물 안에 하나님의 영과 그 분의 영이 전하는 치유력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어떠한 생명도 죽어야 할 운명에서 나오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은 바로 생명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한 그루의 나무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수액을 통해 자라고, 하나의 돌조차도 그 안의 습기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살아있는 것은 자신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의 생명력은 생명을 낳는 능력, 즉 영원한 하나님의 비리디타스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 빙엔의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의 편지들(The Letters of Hildegard of Bingen), vol 1. Oxford Univ. Press (1994), p.95.

힐데가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대우주 안에 존재하는 소우주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은 하나이다. 자연을 이루는 것들이 인간의 몸을 이루고 또한 정신을 이룬다. 몸과 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 구원은 곧 몸의 치유와도 같다. 그래서 힐데가르트는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자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악행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자연의 탄식에도 귀를 기울였다.

만물의 요소들이 외쳤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지시해 주신 우리의 과제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악행을 저질러 우리를 파멸시키고 휘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악취를 풍기고 정의에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푸르른 힘의 원천(viriditas)은 눈 먼 인간 무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 빙엔의 힐데가르트, 생명의 보상(The Book of the Rewards of Life), Oxford Univ. Press (1997), p.125-126.

나아가 힐데가르트에게 있어서 음악은 잠시나마 모든 생각을 접어두고 자연의 빛과 소리에 자신을 개방하고 머무르도록 인도하는 기도이다. 음악은 전체 창조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자신의 위치를 깨닫도록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인도한다. 그녀에게는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생명력, 비리디타스를 대하게 되는 통로이다. 따라서 힐데가르트는 예배뿐만 아니라 바른 식생활과 자연치료법, 보석치료, 음악, 그림이 모두 영성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신앙적 책들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 치료법에 대한 책들과 일흔일곱 곡의 노래, 그리고 한 편의 음악극을 남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에코페미니즘

힐데가르트의 비리디타스 영성이 얼마나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지는 지구의 환경 문제와 더불어 주목되어지고 있는 최근의 에코페미니스트들(생태여성주의자)의 주장을 보면 가늠할 수 있다. 생태학(ecology)과 여성주의(feminism)가 결합된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은 여성의 차별과 자연의 파괴가 결국 동일한 원인에 기인하였음을 주장한다. 유력한 에코페미니스트 이론가인 벨 플룸우드(Val Plumwood)은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의 뿌리에는 결국 가부장적 위계질서,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만 여기는 도구적 세계관, 약자를 정복하려는 군사주의, 극대 이윤과 욕망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등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상하 질서를 강조하는 서구의 가부장제에서는 인간/자연, 남성/여성, 영혼/, 이성/감정 등이 양극을 이루며 분리되어 있고, 이 구조에서 전자는 항상 후자보다 우월하다. 이러한 가부장제 안에서 강자(남성, 인간, 영혼, 이성)는 약자(여성, 자연, , 감정)를 통제와 억압을 통해서 정복하고 이용한다. 이것은 자연히 폭력을 통한 정복, 즉 군사주의적 해결책을 정당화시키게 된다. 군사작전이 이루어지는 전쟁터에서 특히 여성과 자연이 파괴되어온 역사는 여성과 자연을 타자로 보아온 가부장적 이원론의 결과이다. 이러한 억압의 구조가 현대의 자본주의와 만날 때 자연 억압, 여성 억압은 그 극에 달하게 된다. 극대 생산, 극대 소비의 추구는 자연히 남성이 여성을 무임금 또는 저임금의 노동자로, 소비문화의 희생자로 만드는 것을 용인하게 되고, 동시에 자연을 인간을 위한 무한한 착취의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그 결과 지구 전체가 공멸할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며, 그 대안으로 종전까지의 이분법적 사고(여성=자연, 남성=문명)를 탈피하고,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조화와 균형의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이 모든 억압의 근원이 되는 자연의 지배의 전통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자연의 의지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 인간이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과의 차이점은 물론 공통점을 가지고 지구에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힐데가르트와 마찬가지로 이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연을 비롯한 모든 만물에 대한 관심과 회복을 통해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라는 생태계와 여성 리더십

남성 중심의 질서가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중세 시대에,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명성을 듣고 지혜를 구하는 수많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더 이상 억압을 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독특한 영성을 통해서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여성 리더였다. 또한 그녀는 남성 중심,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여성과 자연의 희생이 정당화되던 시대에 모든 만물 안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생명력, 비리디타스를 발견하고,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모두가 조화와 평화 속에서 사는 세상을 추구함으로써 창조 영성, 생태 영성, 그리고 에코페미니즘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다시 우리 시대로 돌아와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당선은 우리나라의 발전과 여성 리더십의 발전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악재가 될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힐데가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 고유의 통찰과 영성으로 자신의 고유한 철학과 영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국정 수행에 적용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그저 치마만 입는 수준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이미지로 치장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대한민국의 여성 리더십의 발전은 기회를 놓치고 정체되거나 퇴보하고 말 것이다. 여러 면에서 매우 남성적이었던지난 정부 집권 기간 동안, 4대강 개발과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으로 자연은 신음하고, 중산층의 붕괴와 빈곤층의 확대로 대한민국 사회라는 생태계는 균형이 무너졌다. 소망하기는 박근혜가 단지 박정희의 딸로서만 역사에 남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녀에게는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운 나라의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훗날의 여성들에게 건내 줄 역사적 사명이 있다. 이전의 남성들과는 다른, 여성 고유의 통찰과 영성으로 역사적 사명을 다한 힐데가르트의 비리디타스 영성이 첫 해를 시작하는 여성대통령에게 조그마한 영감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정승구 /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프리몬트에서 로고스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성결교 첫 여성 목사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성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미국 버클리 소재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 과정에서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에 기초한 해석학적 영성연구를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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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주일예배 설교

본문: 119:97-105

제목: 어떻게 말씀을 사랑하나?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지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해도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그 대상이 막막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이 막막합니다. 더군다나 아담 이후 우리의 본성은 여전히 죄악에 물들어 있어서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자기만을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해요. 하나님 교제해요.’하고 기도하고 찬양해도 어느덧 자기의 생각에 갇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지, 어떤 것이 내 생각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다가 하나님과 교제했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교제를 위해, 사랑의 관계를 위해 열어두신 통로가 똑같이 믿는 이웃, 형제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확증하라 하셨고 또한 말씀을 지킴으로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요일 4: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2:4-5]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해 놓고 말씀을 읽지도 않고, 또한 읽은 말씀을 지키지도 않는 사람은 성경에서 뭐라 합니까?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라고 말씀합니다결국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은 하지만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만 위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코자 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말씀을 읽고 지킴을 통해서 그 사랑의 표현하는 것이지요.

, 부부가, 친한 친구가 지금 난 너를 정말 사랑해 라고 말은 하는데 무슨 부탁을 하거나 약속을 해도 한 번도 안지킨다면 한 두번이야 그래 사정이 있었겠지.. 이해해야지 하면서도 번번히 말을 듣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고백을 누가 곶이 듣겠습니까? 그러니까 번번히 예배하러 와서 난 주님을 사랑합니다. 찬양하는 사람이 있었도 그것으로 사랑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을 지켜 행하는 자라야 날 사랑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성경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접하지 구태여 책을 통해서 수고하며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요. 긴 소설도 두 세시간 짜리 영화 한 편 보면 그 내용을 다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짜그마한 글씨로 뺵뺵히 씌여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읽어도 몇장 넘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읽어도 1년에 걸쳐 한 번 읽기도 쉽지가 않지요.

저도 유치원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대학 졸업할 때까지 수십 번 성경을 통독하려고 하다가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창세기랑 출애굽기는 너무 많이 읽었지만 그 다음을 넘기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부터 시작해서 복음서 읽다가 그만 둔 적도 많지요. 하두 끝을 못내서 차라리 뒷 부분부터 읽자 해서 말라기서와 계시록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끝을 못맺습니다. 신학교 가서야 비로소 이젠 신학생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1년에 한 독은 하자 하면서 읽었는데 그것도 잘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힘들 때 마다 도전을 준 말씀이 요한 일서 2 4-5절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어 볼까요?

[요일 2:4-5]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러니까 성경 읽기 힘들고 고될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아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그의 말씀을 읽지도 지키지도 않으면 내가 어찌 그리스도인인가 생각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들고 고되지만 말씀을 읽었습니다. 물론 어느정도 말씀을 읽는 것이 습관화되고 꾸준히 읽게 되니까 이젠 말씀 읽지 않으면 무언가 허전하고 불안해 지지요. 말씀을 읽는 것도 더 이상 고되거나 지루해지지 않고 읽을 때마다 은혜도 주시고 새롭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은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주에 성경 공부를 준비하다가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읽었습니다.

(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그러다가 시편 기자가 쓴 주의 법을 내가 어찌 그리 사랑하는가?하는 표현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내가 말씀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읽은 본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 97-주의 법, 98-주의 계명, 99-주의 증거, 100-주의 법도(104), 101-주의 말씀(103), 102-주의 규례등으로 그 용도나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었지만,, 말씀을 읽은 것은 하나의 의무이고, 숙제이고, 책임이었지 내게 정말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면서 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고, 때로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지만 그 말씀을 정말 사랑했는가 생각하니 그렇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뭐가 다른가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하나님 앞에서나 성도들 앞에서 바른 목사가 되고 싶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말씀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만큼은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할 때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대하는가 하면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뭐 빠뜨리는 것은 없을까? 이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하고 항상 말씀을 연구의 대상, 숨긴 것을 펼쳐놓아야 할 비밀로서만 보았지 그 말씀 자체를 내 사랑의 대상으로 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러면서 기도를 하니까 말씀이 곧 나다. 말씀이 내가 한 어떤 것이 아니라 말씀이 곧 나다.”하면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지요.

그러면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고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읊조리다.

- 오늘 본문에서 97절과 99. 두 절에서 반복되는읊조리다라는 단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읊조리다는 말의 뜻은 국어사전에서는뜻을 음미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시를 읊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 97절에서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어성경에서는읊조리다라는 말을 ‘meditate’라고 합니다. 이것은묵상하다, 깊이 생각하다. 뜻을 되새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읊조리다는 말은하나님의 말씀을 늘 깊이 생각하고 묵상한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그읊조림은 언제 해야 하는지도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97절에서종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가 어떻게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까? 시간적으로 그건 불가능하지요. 그럼 이 표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술을 통해서 깊이 새기고 귀에 들리게 소리 냄으로서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라. 교제하라는 의미이겠지요. 종일 묵상하는도다는 곧 항상 동행하고 교제한다는 의미입니다.

           • 주야로 말씀을 묵상할 때의 결과 -> ~보다 지혜롭게 됩니다.

           1. 누구보다 지혜롭게 됩니다.(98-100) 오늘 본문 98-100까지 보면 그 세 종류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1) 원수(98)보다 지혜롭습니다. (wiser: 현명함 - 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덕행이 높다)

사울이 다윗을 괴롭힐 때.

           2) 모든 스승(99)보다 지혜롭고 명철합니다. (insight: 통찰력-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

부활 후 예수님의 제자들

           3) 노인(100)보다 지혜롭습니다. (understanding ; 이해력, 납득, 분별, 해석이 뛰어남)

요셉

          

           2.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1) 악한 길로 가지 않습니다

( 119: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2)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됩니다.

( 119:104)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된다는 의미는 죄인의 길에서 떠나 의인의 길로 들어선다는 의미입니다.

           - 시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의인들의 길에 선다고 말씀합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관계가 바른 것이 의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한 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니까 곧 의이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가 곧 의인인 것입니다.

 

(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 이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여기기까지 시인이 얼마나 연단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라는 말씀은 입에 넣기에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의 배후에 담겨 있는, 이 시인이 주님의 말씀에 향미를 느끼기까지 겪었을 연단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 하나님 말씀을 우유처럼 부드러워 마시기 좋은 때도 있으나 고기처럼 질기기도 하며. 어떤 때는 방망이처럼. 어떨 때는 날카로운 칼처럼. 어떨 때는 불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으로 연단되지 않은 자에게 있어서 말씀은 단 것이 아니라 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말씀으로 연단된 자에게는 모든 말씀이 꿀처럼 달게 여겨지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인생길을 변함없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삶은 일종의 길입니다. 길에 대하여 시편 저자는 빛이 없으면 걷기 어려운 험준하거나 어두운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생의 길이 어둡다는 암시입니다. 말씀이 비취지 않는 인생길은 보이지 않는 미로와 같습니다. 마음먹은 길로 나오질 않습니다. 항상 뜻밖의 상황 때문에 놀라고 불안해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동행하는 자는 어둡지 않습니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밝은 빛을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갈 길을 밝히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로고스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나요?

그럼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항상, 꾸준히 말씀을 읽는다는 것이고, 그것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항상 울리도록 읊조린 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악한 길에서 떠나 내 발걸음을 선한 곳으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우리의 모든 부족함이 채워집니다. 악인이 두렵지 않고, 좋은 스승이 부럽지 않고, 솔로몬보다 지혜롭게 됩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아 본인이 간직하며 사용하다가 악한 길에도 빠졌지만 말씀과 동행하면 악한 길에 들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애해 보시길 바랍니다. 시인이 되어 내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소리가 울리도록 읊조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길을 밝히실 것입니다. 외롭지 않게 보호하실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