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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그리스도인의 복 4 –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마태복음 5 1-12

어렸을 때에 부모님은 혹이나 제가 나쁜 친구들을 사귀어 타락하지는 않을까 걱정하시면서 키웠습니다. 특히나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남학생들에게 타락의 길은 얼마나 많이 열려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혹시 나쁜 영향을 받을까 봐 친구를 사귀는 것도 힘들었고, 학교 끝나면 도서관과 집, 주일에는 교회만 오가는 단순한 삶을 살곤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끼리 말을 하다 보면 말하는 것의 절반이 욕이 섞인 말을 합니다. 학급의 절반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친구들입니다. 저는 그 절반의 친구들 사이에 끼지 않기 위해서 항상 친구를 사귀는 데에 조심했습니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곧 나를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중고등학교 6년동안 고 3때를 제외한 5년동안을 반장을 했는데 반장하는 기간 중에 절반의 친구들과는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 반쪽짜리 반장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고 2 겨울 방학 때 인천에 교회를 개척하자 어느 날 갑자기 가정이라는 보호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학교 끝나면 도서관 갔다가 곧장 피해 있어야 할 가정이 없어지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반에서 소위 논다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욕이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고 그들이 하는 행동, 문화들도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같이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려워하던 노는 애들이 가까이서 보니까, 함께 어울려 보니까 별게 아닙니다. 물론 정말 주먹 잘 쓰고 험악한 아이들도 가끔 있지만 대개는, 공부 잘하고, 나쁜 짓 않하고, 부모에게 보호받는 아이들과 똑같이 착하고, 나름대로 마음 씀씀이가 있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그런 애들이었습니다. 단지 부모로부터, 선생님들로부터 언제 부턴가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고, 오해 받고, 외면당했던 아이들이라 상처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 때의 경험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 바꾸어 놓았습니다. 반장으로서 일한 5년보다 노는 아이들과 지냈던 1년간의 기억이 훨씬 더 많고 또한 값집니다.

대학에 와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프로이드란 사람을 깊이 공부했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교육이나 종교로서 가면을 쓰고 살지만 행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이 배운 사람이든 아니든, 사회적 지위가 높던 아니든 결국 인간은 본능과 욕망에 지배받아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과 행동으로 포장할 뿐이지 결국 사람들은 본능적이고 욕망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사회를 살펴보니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본능적인 삶을 피하라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죄의 근본이고, 이 세상의 풍조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정욕적인 삶, 본능적인 삶, 육신적인 삶을 피할 수가 있습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열심이 대단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613개에 달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청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율법과 전통에 의하면 씻지 않은 손은 부정하다 하여 손을 씻지 않고서는 절대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7:15-16)

마태복음에는 그들에게 더 심한 말씀도 하십니다.

[ 23: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하얗게 회칠한 무덤은 겉에서 보기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무덤이 어떤 것입니까? 아무리 밖을 깨끗하게 칠하고 단장해도 무덤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 마음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눈 먼 바리새인들이라 부르시면서 안을 깨끗이 하라고 하십니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 23:26)

ex) 소경 바디메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주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바디메오는 눈이 열려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가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게 되자 행한 것은 바로 길에서 예수를 좇게 되는 장면입니다. 그가 만일 육신의 눈만 열리기 원했다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디메오가 본적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니까 온전히 예수님을 좇습니다. 예수님을 봄으로 천지의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신령한 눈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전 삶을 바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영적인 눈이 열렸기에 삶의 변화가 왔음... 마음도 몸도 물질도 예수님을 따름...

“나를 따르라.” 주님의 말씀...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게 되면 이때부터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을 따르게 됨.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좇아갑니다. 세상을 보고 탄식합니다. 그의 눈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열려서 예수를 본 사람은 예수 안에서 자기를 보고 세상을 봅니다. 불평이 없고 원망이 없고 탄식이 없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6:5절의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은자신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막 12:30절의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나님께 집중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청결하다는 말은 키질하고 채로 쳐서 모든 겨를 제거한 곡식에 사용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지고, 하나님의 의를 사모함으로 말씀으로 나를 가다듬고, 닦아서 마음 속의 불순물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마음이 청결한 것의 반대로서 쓰인 표현은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해로운 것이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결혼한 남편이 바람을 피다가 아내에게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한다는 말이 당신도 사랑하고 그 여자도 사랑해.”하면서 어느 쪽 하나 포기하지 못하면 그 삶은 망가져 버립니다. 모든 사람을 다 불행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상을 겸하여 섬긴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두 마음을 품는 자에 대해 얼마나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1:8절을 보면두 마음을 품은 자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 호세아 10:2절은 두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벌을 받을 것이다며 분명한 어조로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두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라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 실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복을 받아야, 내 자식이 잘 되어야, 내 남편이 출세해야 하나님도 영광이요, 나도 영광이요라는 식의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잘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스스로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높으나 낮으나 변함없이 그 분은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한 마음을 품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에 주시는 복이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항상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 ‘마음을 하나님께만 집중한 채 무슨 일을 하든 순수한 동기로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마음뿐 아니라 평소 행동과 삶도 순수한 동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마음이 청결한 자에 대해 시편 24: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 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마음이 청결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출애굽기 19:3절을 보면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모세를 연단하신 후에 세상적인 모든 정욕과 기대를 버리게 한 후에 그를 산에 오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친밀한 교제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항상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늘 말씀드리며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려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입이요. ( 5: 9)

평화의 복은 팔복 중 일곱 번 째의 복입니다. 일곱은 유대인에게 완전한 숫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일곱 번 째 복인 평화의 복은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를 온전한 자로 보셨습니다. 인간이 사는 동안 모든 일을 완전케 하는 복이 바로 평화의 복입니다. 이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 다음으로 받는 복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갈라진 마음, 두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했다.

일곱 번째의 복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케 하는 것이 바로 평화임을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먼저 자기 마음 속에 화평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평화를 복 중의 가장 최고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 샬롬하면서 인사했는데 샬롬은 바로 평화라는 히브리어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평화, 평강, 평안, 화평 이라는 단어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말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히브리어로는 모두다샬롬으로 같습니다. 즉 샬롬이 화평이 평화이고, 평안이고 평강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화평하게 하는 자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화평케 하는 사람,  샬롬의 사람, Peacemaker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이 왜 참 복이 되지 못하는가? 물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명예가, 권력이 아무리 높아도 평화를 간직할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복들은 성공하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평화를 잃어버리고 깨뜨리고 사라지게 합니다.

또한 이 복이 왜 최고의 복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되는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아들이 되면 천국, 위로, 만족, 긍휼, 기업, 하나님과 살 수 있는 모든 복을 다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은 완전한 복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복의 모델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화평케 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나실 때부터 평화의 왕으로 나셨다. 베들레헴에 나실 때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찬송하여 가로되 “(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친히 제자들에게 “(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2:14)

하나님의 평화는 둘로 하나를 만드는 평화입니다. 나뉘었던 것이 하나가 되는 평화입니다. 서로 달랐던 것들이 담이 허물어지면서 같은 하나가 되는 평화입니다.

예수는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심으로 평화의 복음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화평케하는 자의 온전한 일생이었다.

우리가 화평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세계 평화를 외치는 평화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또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생각으로만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내 손과 발을 통해 화평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7)

 

평화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이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내 속에 있는 분쟁을 없애지 않고는 평화를 창조할 수가 없다.

 

인류의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미움과 증오와 원수 맺는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이것은 교육으로 될 수 없다. 사상으로도 안된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성령은 평화의 왕이다. 평화의 왕이 임할 때에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평화의 사도로 임명했지만 그들은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평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배웠지만 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었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없었다. 그들 안에 평화의 복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뒤를 따르면서도 그 마음 속에는 평화가 없었다. 제자들은 서로 시기하며 다투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냐고 자리다툼을 하고 분을 내고 있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평화의 복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도 언제나 마음 속으로는 칼을 품고 있었다. 자기를 압제하는 로마를 정복하는 꿈... 자기 실현 자기 목적, 오직 성령이 임할 때에 평화를 누릴 수가 있다.

 

형제들과 화평을 이룰 하나님의 아들이 ...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까지 용서하시고 평화를 이루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미움받고도 사랑하고, 욕을 먹고도 축복하고, 핍박을 받고도 핍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죽지 않고는 다른 사람과 평화를 누릴 수가 없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를 누려야 한다. 평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을 계속 해야 한다.

 

ex) 아브라함...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양보하고 포기...

우애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 자기 욕심을 다 채우고는 결코 화목하기가 힘들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신을 부정하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형제들과 화목하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하다. 서로 원수 맺고 싸우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인류의 가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자기를 죽여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지금도 이 민족 역사에 평화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죽이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는 가정이나, 교회, 이 사회 어느 곳에도 평화를 이룰 수가 없다.

순교는 평화의 사도가 되는 신앙행위이다. 순교는 원수의 손에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원수와 평화를 이루는 행위이다.

원수의 칼에 죽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자기 죽음을 자원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만약 원수의 손에 죽으면서 마음 속에 미움을 품고 죽어간다면 이것은 순교가 아니다. 자기를 적대하는 사람에게 평화를 이루고 자신이 먼저 죽어서 원수의 마음 속에 평화를 심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화해의 재물로 바치셨다. 그는 죽으면서도 원수의 밥이 되어 돌아가셨다. 자기를 죽이는 그 악한 무리들을 위하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알지 못하여 그러하나이다.”라고 기도드리며 그들을 용서했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 자기 할 일을 알고 계셨다. 그것은 원수에게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자기를 죽여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평화의 산 증인이다. 순교의 제물은 어디나 있어야 한다. 자기를 죽이고 가정에 들어가면 가족들의 마음에 평화가 임한다. 직장에 순교자로 들어가면 동료 직장인의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

 

 

 

 

Posted by 소리벼리

주일예배 설교

제목 : 그리스도인의 복 3

본문 : 마태복음 5 1-12

팔복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팔복은 이 땅의 복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한 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함을 얻은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삶을 보면 너무나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는데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싶게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 하고 말씀 없인 한 시도 못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평생 성경 한 번 읽지 않고도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매일 같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 투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팔복의 말씀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천국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연습입니다. 천국의 삶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을 통해서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해 주시는 약속은 너희가 이제 천국을 소유한 자다. 이미 천국을 얻은 자다. 벌써 천국에서 사는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능함과 무가치함, 자신의 허물과 욕망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 안에서 여전히 바로 서지 못하고 온전히 믿음 가운데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통회하고 자복하고, 자신을 위해 우는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신이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알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여전히 죄의 흔적 가운데 사는 자신을 이기지 못해서 울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애통하는 자만이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가다듬고, 자신을 말씀에 맞추어서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바로 말씀으로 길들여진 사람입니다. 날마다 말씀 안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고치고, 회개하고, 순종하면서 말씀이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성령의 성품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거칠고 제멋대로였던 자신의 천성을 버리고 성령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대표적인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에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성숙한 신앙의 확장에 대해 말씀하시며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언급하십니다. 신앙은 나 혼자 잘 믿고 나 혼자 잘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을 인간을 통해서 번영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나부터 새로워지고 교회, 이웃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라는 말은 바르다, 정의롭다의 말인데 특별히 성경에서 뜻하는 의는 관계가 바르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의 정치와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은 성전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성전 역시 율법에 의해 세워지고 운영되는 것이기에 결국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곧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수호하는 일에 그 무엇보다도 열과 성을 다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언약의 관계였습니다. 언약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신앙이나 도덕성 때문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주권으로 맺어진 것입니다. (행위 이전에 관계가 중심)

그러나 점차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였던 유대인들이 율법의 관계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요 신앙인의 의로움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에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율법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외적인 행위가 강조되었고,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를 정의롭고 의롭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라지고 오직 행위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64 6절을 통해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부정하기만 한 우리는 아무리 우리의 의를 드러낸다 해도 다 더러운 옷 같을 뿐입니다. 그래서 언제가는 시들어 없어지는 잎사귀와 같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 정의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의 굶주린 사람들, 그들이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의에 먼저 주리고 목마른 사람, 그들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의가 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줄 알아야 그 의를 구하기 위해 주리고 목말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때를 씁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산은 오직 부모님 사후에만 물려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모님 살아 생전에 유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탕자는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불효 중의 불효요,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처사였습니다. 아버지를 부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면 탕자가 그 유산으로 좋은 일을 하면서 착하게 살았습니까? (아버지와의 관계는 필요 없고 당신 가지신 복만을 주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든 탕자는 세상으로 나가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죠. 그 결과가 어떤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모두 탕진하고 굶어죽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탕자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종이 되기 위해서 돌아옵니다. 15 19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 들어선 아들에게 맨발로 달려나갑니다. 그를 끌어안고 입맞추며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며 큰 잔치를 엽니다. 아들은 집을 나갈 때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여겼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의 아버지로 계셨고, 끝까지 아들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적에 그 행위를 보지 않고 탕자여도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오는 자를 하나님께서 아들로 맞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로마서 1:17에서 이같이 외쳤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것은 복음을 믿고, 복음의 은혜에 감사하고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 내가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에 급급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훗날 사도 바울이 되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최고의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최고의 학문과 지성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가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유대인들 가운데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이렇듯 사울은, 가문으로 보나, 학문으로 보다 그리고 정치력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최고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이같은 청년 사울의 자부심이 얼마나 컸겠으며, 또 그의 삶은 얼마나 자기 자랑과 교만이 팽배했겠는지 우리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의 의가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230킬로나 떨어진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잔멸하기 위해 길을 갈 때에도, 사울은 스스로의 자부심과 자기의 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메섹에 도착할 즈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했던 그 길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의가 담긴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바울의 뜻이멈추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사울은멈춘 사람바울이 되었습니다.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던 사울이, 자기 의를 멈추고, 자기 자랑을 멈추고 자기 교만을 멈추는 바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사울은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의로는 털끝 만큼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기에, 자기 의를 멈춘 사람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대신 평생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리고 목말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복음이 있고 그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의는 먼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세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허물이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이웃과 세상과도 바른 관계를 맺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신앙을 바로 세우고, 동시에 이 땅에 도덕과 윤리를 바로 세우면서,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을 때 이웃도 세상도 바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목사건 성도님들이건 처음엔 하나님의 역사를 자랑하다가 결국은 자기 자랑, 자기 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끝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 주셔서 내가 얼마나 많이 바쳤는데요, 내가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는데요, 내가 얼마나 충성했는데요…. 결국은 내가 무엇했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고 그 자기 의 때문에 성도들끼리 분쟁을 일으키고, 시기를 일으키고,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 나타낼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것입니다.

온유는 말씀으로 자신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의에 주린다는 것은 그 말씀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갈급하게, 갈망하며 찾아 다니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영의 양식입니다. 말씀에 갈급하면 말씀으로 우리 영을 채웁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내 영을 채우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이고,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5번째 복,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7)

세상은 받을만한 사람에게만 베풀고 있습니다. 은혜도 그렇고 상도 그렇고 축하도 그렇고 받을만한 사람에게만 베풉니다. 상을 받을만한 사람, 축하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은혜도 받을만한 수고와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사랑도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베풀게 됩니다.

그러나 긍휼은 이와 다릅니다. 긍휼은 받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벌을 받아야 사람에게 오히려 따스한 손을 내미는 것이 긍휼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베푸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저 사랑하고픈 마음으로 베풀기만 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Ex) 한솔이가 요리하다가 뻔한 사건. -> 안아주니까 오히려 펑펑 울며 잘못했다고 하면서 기도함.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6-47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가족에게 문안하는 것은 긍휼이 없이도 가능합니다. 이미 사랑을 받고 문안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죄인 취급을 하던 세리를 사랑하고, 짐승 취급을 하던 이방인을 문안하기 위해서는 긍휼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렇듯 긍휼은 자격을 묻지 않습니다. 긍휼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에는 조건도 없지만 대가도 없습니다.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불쌍한 느낌의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언제나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세상이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긍휼에는 대가가 없기 때문입니. 아무리 긍휼을 베풀어봐야 내게 이득이 되는 대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또한 긍휼은 타인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자기가 상처받고 자신이 아파하는 것처럼 동일시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남의 고통과 불행을 못본 척 할 수가 없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쉽게 외면합니다. 나 혼자 살기에도 바쁘다고 생각하며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합니다. 원수 지간일 경우 타인의 고통과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긍휼이 그다지 인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약점이나 아픔을 이용해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은 미움의 대상이나 대적자들에게 복수하기를 즐겨합니다. 되로 받으면 말로 주려고 앙심을 품습니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으셨겠습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긍휼이 불붙듯 일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8: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여전히 불의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것,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없었던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나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이처럼 귀한 예배의 자리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들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 때문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선 긍휼은 동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을 돕지는 않습니다. 그저 마음 뿐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때우는 것, 그것은 동정일 뿐 긍휼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자기 이름을 위해 구제하고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는 타인을 위한 사랑이나 이해가 없이, 그저 자기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경우입니다. 즉 마음에는 없는 구제와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선일 뿐 긍휼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그럴싸 해보이지만 실상은 긍휼에서 시작된 선행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토록 혐오하셨던 이유도 바로 그들의 긍휼이 없는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본심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자기 명예를 위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식적인 행위를 일삼는 바리새인들을 몹시도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도 없는 선행이나 구제는 긍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긍휼에 대해 정리를 해보면,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불쌍한 느낌의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말 긍휼로 번역된 헬라어엘레에오는 마음으로 느끼는 자비, 용서, 친철, 은혜의 구체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즉 마음과 행위가 동반된 것이 긍휼입니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직접 병문안을 가거나 아니면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해 주고, 가슴이 답답한 일을 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간을 내어서 들어준다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언제나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설파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참된 긍휼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안 인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때 율법사가 이같이 답했습니다. (누가복음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우리말자비로 번역된 단어가엘레오스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을 베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에게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윗입니다. 다윗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둘람 굴에서의 다윗.

[삼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자가 사백 가량이었더라

다윗에게 긍휼이 없었던들,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광야에서 400명을 거둘 수가 있었겠습니까? 압제 받은 , 빚을 , 원통한 , 억울한 자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한들, 어디 자랑거리나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다윗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을 책임졌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긍휼을 베풀었던 400명을, 하나님은 다윗의 용감한 군사로 만드셨고, 400명의 손으로 다윗의 생명을 지켜주셨고, 400명을 통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다윗의 거처를 광야의 동굴에서 이스라엘의 왕궁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사랑은 참된 사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랑의 출발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말로만 하는 것이거나 마음으로만 품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돕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십시다. 우리 성도끼리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세상에서 억눌린자 원통한 억울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십시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우리의 몸으로 긍휼을 나타내십시다.

그때,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긍휼의 사람이 것이요 우리 교회는 아둘람의 동굴처럼, 긍휼의 처소가 것이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제목 : 그리스도인의 복 2

본문 : 마태복음 5 1-12

구약시대 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 신명기 28

è  땅의 복, 자녀의 복, 물질의 복, 번영의 복

그 복의 시작은 아브라함을 부름에서 시작/ 아브라함: 우상을 섬기던 자, 하나님을 모르던 자.

è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리라.

è  떠나서, 나의 땅으로 가라. 너를 하나님이 예비한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을 얻게 하고 그 복의 기원으로 삼겠다.

l  구약의 역사: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의 우상에서부터 떠나서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우상을 왜 믿느냐? 땅의 복을 달라고그런데 그 땅의 복도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누구냐? 애굽이냐, 가나안이냐? 바알이냐 하나님이냐의 싸움.

신약시대 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 마태복음 5장 팔복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얻은 것 - 영생, 천국

천국이 주어진 우리에게 장수하고, 배부르게 살고, 땅의 소산이 많고, 그러한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 수훈은 무엇인가? 천국의 복음.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예수의 가르침.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인 팔복-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8가지 통로, . 하늘 나라의 통로,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8가지 단계의 통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수많은 무리들 중에서 산에 오르는 자, 예수와 함께 산에 오르는 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바로 산상수훈이고 그 중의 핵심이 팔복의 말씀이다.

: 노아가 사람들의 온갖 조롱을 받으며 온 평생 힘을 모아 방주를 만든 곳. 모세가 자기 자신이 완전히 낮아져서 자신의 모든 욕심, ,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교제 했던 호렙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시내산. 그곳으로 무리들을 이끌고 가신다. 그 곳은 어떤 곳? 땅의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있는 곳.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무리, 여러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수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무리들 중 일부가 예수님을 따라 그 가파르고 험난한 산을 함께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이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쫓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편안한 들판에도 미련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혀 무가치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설 수 없는 불쌍하고도 불쌍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던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 예수님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제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향해심령이 가난한 너희들이 복이 있다. 천국이 너희들의 것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다시 입을 열어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말 “애통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펜테오”는, 가슴이 찢어지도록 처절하게 우는 것입니다. 통곡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슬퍼서 가슴을 치며 소리내에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온 자들 중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따로 있고, 또 애통하는 무리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곧 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들, 전혀 무가치한 그들, 심령이 텅 비어버린 그들이 바로 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애통은 누구를 위한 애통이겠습니까? 바로 나를 위한 애통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며 우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도 불쌍해서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때문에 슬피 우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거짓과 이기심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배신과 불신을 통회하며 우는 것입니다. 질병과 실패와 좌절로 인해 그저 가슴이 찢어지도록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애통하는 자입니다. 내 안에게는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절망 밖에 없어서, 그저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 애통은, 회개의 애통이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애통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는 자, 그들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로는 우리의 상상과 이성과 지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늘의 위로, 천상의 위로, 온 우주만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것입니다.

ex) 요셉의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형들은 그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원수같은 존재였습니다. 형들에게 버림을 받은지 20년이 지난 어느날,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극심한 흉년으로 곡식을 꾸러 온 형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그 원수와도 같은 형들은 마침내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형들을 보고서 한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창세기 45:1-2의 증언입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은 형들이 찾아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가운데 곡식을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을 억제하기 못하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얼마나 크게 울었던지 애굽 사람에게도 들렸고 바로의 궁중에도 들릴 정도로 방성대곡을 했습니다. 자기를 버렸던 형들을 보고,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은 방성대곡하는 것 애통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요셉의 애통은, 먼저는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형들에게는 동생이면서도 교만했었고, 아버지의 편애를 자랑하면서 형들의 시기심을 유발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옛 모습에 대한 애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와도 같았던 형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애통이었습니다.

용서는 내가 아파야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내가 아픔의 눈물, 애통의 눈물을 흘려야지만 진정으로 남을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이 박히시는 고통, 보혈을 흘리시는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내가 아파야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형들을 만난 요셉은 회개와 용서의 애통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è  초대교회 교인들의 기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먼저 용서하는 연습.. 용서는 아프지만 그 용서를 통해서 나의 죄가 사해진다. -> 그런데 왜 용서하지 못하는가?

우리도 울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울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릴 눈물이 너무도 메말라버렸습니다. 영혼은 갈급해 하면서도 울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날마나 불행하다고만 여깁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한숨만 내쉽니다. 힘들어 죽겠다고 탄식만 합니다. 병들어 아프다고 걱정과 염려만 쌓아갑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허물과 욕망이 내 안에 가득한데도 도무지 반성할 줄도 모르고 회개할 줄도 모르고, 뻔뻔하기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왜 울어야 되는지 그 이유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이 병들었습니까? 인생이 답답하십니까? 질병 때문에 고통 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깊이 통회하고 우십시오. 절망과 좌절 속에서 탄식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그렇게 울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눈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하늘의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체 온유한 자가 누구이기에 복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온유한 사람을 온순하고 부드러운 천성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매사에 화를 내지 않고 큰 소리 치지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받아들이는 사람을 향해 온유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온유한 사람은 천성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말온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프라우스길 들여진 온유함, 가르침을 통해 변화된 온유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된 성품, 믿음으로 성숙해진 온유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온유함은 하나님에게 속한 온유함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온유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온유함입니다.

마치 거친 야생마가 주인에게 길들여진 후에 철저하게 주인에게 속하여 주인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거친 야생마와도 같았습니다.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성이 조용하든 시끄럽든, 또 우리의 성향이 부드럽든 거칠든, 우리의 행동이 온순하든 난폭하든 그것에 상관없이,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 속에 있을 때에는 주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거친 야생마였습니다. 오직 천성의 성품을 가지고 있을 뿐 성령으로 변화된 성품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온유함에 관한 말씀은 수십 번 나오지만, 온유하다고 불린 사람은 딱 두 사람 뿐입니다. 바로 모세와 예수님, 둘 뿐입니다. 예수님이야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에 온유하다고 불린 사람은 모세가 유일합니다. 민수기 12:3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은 모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천성은 결코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로의 궁에서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에, 자기 동족이 애굽의 군사에게 핍박을 당하자,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군사를 쳐 죽였던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인을 저지르고는 비겁하게 도망을 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나 숨어지냈습니다. 그리고 80세가 된 어느날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5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종은 신발을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인이나 신발을 신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종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없는 거친 야생마처럼 제 마음대로 날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의 거친 천성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된 성품으로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온유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29에서 스스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내가 온유하니, 내게서 온유함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베 푸신 성품들은 한결같이 온유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소외된 세리와 병든 자들, 죄인 취급을 받던 창기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한없이 부드러우셨고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실 정도로 친절하셨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대해서는 놀라우실만큼 부드러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2:13-15의 증언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모세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단순히 성품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서, 경쟁에서 뒤졌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분노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무시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손상될 때, 하나님의 집이 더렵혀질 때 분노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상처를 입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친절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토해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 때부터 교회는 참 복음을 쫓는 사람과 상인들, 신앙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의 전쟁이 늘 있어왔습니다.

 

중세의 신학자 중에 에크하르트 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1 12절에 대한 설교에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던 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모두 상인들(businessmen)입니다. 심각한 죄를 짓지 않으려 주의하고, 좋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일들을 합니다. 곧 금식과 철야와 기도, 그리고 다른 무슨 선한 일들이 있으면 그것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 보답으로 뭔가를 되돌려 주시도록 그렇게 합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쁘게 하시려고 뭔가를 해 주시기를 바래서 그 일들을 합니다. 이것은 순수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것에 대한 답례로 무언가를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주님과 상업적인 거래를 하기를 원합니다.

그에 따르면 성전 안의 장사꾼들은 악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들이란 적당한 수준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면서 살지만 온전히 주님만을 사랑하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이들은 심각하게 악한 죄를 짓지 않는 주의력이 있으며, 선한 행동들을 할 줄 아는 양식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좋은 삶'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자기 사랑의 표현이다. 주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대가로 얻기를 바라서 드리는 일종의 ‘뇌물’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이들은 예배자가 아니라 주님과 “상업적인 거래”를 하려고 드는 “상인”이라고 말한다.

유진 피터슨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영성 저술가는 미국교회가 회중을 소비자 집단으로 만들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교회에서 화려한 무대나 연출된 예배를 통해서 성도를 소비자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파는 거래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성의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자기 희생과 부인의 길의 정반대로 걸어가게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옮기는 소비자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7-80년대의 한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는 강단에서 대량 생산해 낸 ‘축복’이라는 상품이 인기리에 판매된 데에 한 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소비주의 영성에서 교회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라 시장과 같이 흥정을 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연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기도자의 만족을 목표로 하는 ‘굿 딜’을 위한 거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신앙을 이제는 벗어던지고 정말 복음을 따르는 건전하고 온전한 신앙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한번 둘러봅시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고분고분하고 있습니까? 나의 욕망과 이기심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한없이 고분고분하고, 세상과 하나님께 양다리를 걸치고 우유부단하게 살아가고, 교회가 상처입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질 때도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볼 뿐 침묵하지는 않았습니까?

반대로, 내 작은 자존심에 생채기가 좀 났다고 해서 벌컥 화를 내고, 내가 손해 좀 봤다고 해서 내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분노하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무례히 행했던 적은 없습니까? 이같은 모습은 결코 온유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다. 약한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분노할 수 있는 온유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천성대로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길들여지고, 성령의 성품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겸손한 친절을 베풀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끌어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욕망이나 자존심 때문에 성내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발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