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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을 보았다. (사무엘상 16장 1-13절) 


작년 말에 올해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무엘상을 택하게 된 이유... 

시편과 함께 다윗의 삶과 영성을 깊이있게 살펴보고자 하는 갈망때문에. 

이제 2017년 전반기를 지나고 7월이 되어서야 사무엘상 18번째 강해로서 다윗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역사적인 사건의 배경을 살펴 본 후에 몇 가지 구절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고, 그 다음 이 사건과 구절들이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역사적 배경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 그 명령을 준행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회개하지 않고, 거짓으로 변명으로 자기의 잘못을 감추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베들레헴 이새의 마을로 보내어 이스라엘의 새 왕을 뽑게 하신다. 

사무엘이 도착하자 베들레헴은 긴장이 흐른다. 

사울을 꾸짖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 사무엘이 이름없는 마을에 온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읍 장로들이 떨며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4절) 

하나님의 진로와 심판이 두려웠던 장로들을 안심시키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함께 제사하자. 예배하자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모으로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예배에 참여했지만 사무엘의 관심은 오직 이새의 아들들에게 가 있었다. 

엘리압에서부터 아비나답, 삼마, 그 뒤의 모든 아들들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 유명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7절) 하시면서 사무엘에게 응답하지 않으신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초대받지 못했던 막내 다윗을 불러오게 한 후에 그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한다. 


2. 말씀 들여다 보기 

  • 내가 그를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으니...(1절) 


사울의 실패 - 

그는 겸손한 자였다. 성실한 자였다. 그리고 충성된 자였다. 용기있는 자였다. 

한 마디로 해서 왕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자였다. 

그런데 왕이라는 타이틀이 그의 자질을 다 감추어 버렸다. 자리가 그를 망쳤다. 

왕이라는 자리로 말미암아 그는 겸손한 자대신 사무엘의 영적인 자리를 탐하는 교만한 자가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과 백성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자가 되었고, 자기의 속 마음을 숨기는 거짓된 자가 되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 구약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메시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 불렀다. 

기름부음을 받는 자는 세가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왕, 선지자, 제사장. 

신학적인 용어로 이 세가지 부류를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다. 

선지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백성을 인도하는 자이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들의 죄를 예배를 통해 사하도록 하는 중보자였다. 


결론적으로 기름부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나타내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하나님께는 인간의 기도를 말씀드리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사울은 이 역할을 망각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려 하기 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 했다. 

하나님께 백성의 소리를 전하고 백성의 죄를 회개하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마저도 백성에게 돌리는 자가 되었다. 그것 하나로서 그의 기름부은 자로서의 역할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 (1절 후반) 

누구도 다윗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조차, 그의 형제들에게 조차 다윗은 주목받지 못한 자였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았다. 메시야, 그리스도의 역할을 잘 감당할 기름부은 자로서 합당한 그의 존재를 보았다. 

그 특성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다리 역할, 메신저 역할, 통로역할을 가장 잘 담당할 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시편 23편 - 목동으로서 경험한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만족했고 충만했고 풍요했다) 

그가 나를 푸른 풀 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는 롯 처럼 좋은 땅,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좋은 땅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이다. 그 땅을 그는 쉼이 있는 땅, 안식의 땅으로 불렀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안식을 준다. 평안을 준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한다. 그 인도하심으로 날마다 새로와지는 경험을 한다.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때로 자기가 부족해도 자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뢰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는 때로 인생의 고난이 와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능히 이기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미 그는 기름부은 자였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고 그를 통해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거하면... 산다는 것은 함께 거한다는 것.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동행하는 것) 


거룩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꾸밈이 없다는 말이다. 첨가되지 않은, 인공적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람의 모습 그대로 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다. 

왜 그런 사람이 중요한가? 죄를 지은 인간은 자꾸만 자기를 포장하고 가리고 숨기고 외식하기 때문이다. 

외식하는 자들을 주님은 독사의 자식, 죄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 부르셨다. 

사울은 외식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다윗은 목동일 때나 왕일 때나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였다. 사람들 앞에서도 그대로였다.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었다. 기름부음 받기에 합당한 자였다. 


  •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12절) 

이것은 언뜻 보면  7절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외로를 아름답다고 칭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지목하기 전에 누구도, 사무엘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를 데리고 오자 비로서 그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감추었던 그의 존재가 빛을 발한다. 마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씨의 시처럼 하나님의 안목을 통해 그의 존재가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이다. 감추었던 존재가 꽃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감추었던 우리 존재를 드러내 주신다. 숨겨졌던 우리 아름다움을 피어나게 하신다. 

나를 부정하고 더럽게 생각했던 나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해 주신다. 

ex) 피부병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던 나를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게 하셨다.


  •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11절) 

여기서 막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카탄"이라는 말은 the youngest, the least, 

가장 적은, 혹은 가장 작은, 하찮은, 중요하지 않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사람들 대다수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업신여기는, 그런 존재이다. 

그의 존재가 하찮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가 하는 일이 정말 하찮은 일이라는 의미도 된다. 

하나님이 왕으로 부르시는 자는 이런 하찮은 자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그 어린아이, 하찮은 존재가 바로 막내라고 번역된 카탄이라는 말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쳐주지 않는 양을 지키는 일, 그렇지만 그 양을 지키는 자들이 가장 먼저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접하고 전하게 된다. 가장 작은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충실히 행했던 그 자를 하나님은 가장 큰 일을 감당하는 왕으로 부르셨다. 

사울이 자기 스스로를 왕으로 여기고 사무엘보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우선하자 하나님은 그를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셨다. 

하늘나라의 왕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가장 작은 자이다. 


3. 적용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쓰신다. 하찮은 자를, 연약한 자를, 작고, 적은 것을 쓰신다. 

그런 자를 왕으로 부르시고 기름부은 자를 만들어 주신다. 

이것은 단지 작은 자를 크게 만들어 주신다는 성공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 앞에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야기 할 수 있수 있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큰 전문적인, 능력있는 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자들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포장되고, 과장되고, 왜곡되어지는 하나님이 될 수 있고, 그들이 드리는 중보기도는 외식적인, 자기 합리화와 변명에 일관한 그릇된 중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외에는 중보자가 필요없다. 성령 외에는 참 선생이 필요없다. 

내가 목사로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도같은 목사, 목사 같은 성도는 우리가 주 안에서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고 무언가 특별한 목사를 기대하는 성도는 종교라는 물건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일 뿐이다. 

좋은 상품이 나오면 열광하면서 달려들지만 거기에 하자가 발견되면 반품하고, 항의하고, 언제나 손님으로서 왕노릇 하려고 하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언제나 신상품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종교의 소비자일 뿐이다. 


이런 성도를 기대하는 교회와 목사는 종교라는 포장된 물건을 파는 상인일 뿐이다. 

끊임없이 소비자의 입맛대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출시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비싼 가격을 요구하면서 소비자가 가진 돈과 시간과 마음을 빼앗으려 하는 악독 기업주일 뿐이다. 


다윗은 구약에만 600번이상, 신약에서 60번이상 그 이름이 나타난다. 

영어권에서 가장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름이 다윗과 요한이다. 

흔하디 흔한 이름, 가장 하찮은 이름. 그 이름을 하나님은 왕으로 부르셨다. 


다윗은 성경의 인물 중 가장 자세히 다룬 인물이다. 

그런데 다윗의 일생을 보면 거기엔 어떠한 기적의 일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브라함처럼 100세의 나이에 아이를 갖는 이야기도, 홍해를 가르는 이야기도, 태양을 멈추는 사건도, 불이 나와 우상과 적을 뿌찌르는 일도, 하다못해 병자들을 치유하는 일도, 어떤 신비한 기록도 다윗의 삶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 기다림의 연속, 방황의 연속, 때로는 유혹에 넘어가고, 죄에 괴로와하면서, 자식때문에 걱정하고, 우정을 나누며, 춤추고, 울고, 슬퍼하고, 때로는 증오하면서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담은 가장 평범한 삶을 보여준다. 

그는 가장 평범한 인생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우리 모두가 다윗이고 다윗이 될 수 있다. 

가장 거룩한 영성은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고, 신령한 것에 잠겨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장 평범하고 일상으로 가득찬 것이 가장 깊고 거룩한 영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과 사무엘 사이에서 있었던 기름부음의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새도, 아니 다윗 마저도 사무엘이 행한 것이 어떤 의미의 일인지 알지 못하고 사무엘은 그 자리를 떠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사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한 왕을 찾으신다. 

한영혼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기름부어 주신다. 성령을 부어 주신다. 


세상을 보며 타이틀에, 성도수에, 성공을 표현하는 세상 앞에서 때때로 초라해지지만 다윗의 영성은 가장 작은 나를, 가장 연약한 우리 로고스 교회를 왕으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워주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맡은 일을 사랑하십니까? (사무엘상 16장 14-23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신약 성경의 복음의 핵심 사건이라면 구약의 구원의 핵심사건은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노예된 백성이 어떻게 죄로 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 출애굽이 구원의 사건, 즉 우리의 신분이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중생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 중생은 신앙생활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신앙생활의 시작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출애굽을 통해서 광야생활로 들어간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을 훈련시키십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 출애굽이 믿음으로 주를 고백하는 세례의 사건이라면 그것을 통해 시작된 광야의 사건은 이른바 성결의 과정이요, 성화의 과정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성화, 성결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세상적인 나, 정욕적인 나, 이기적인 나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나,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나로 바뀌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 집니까? 

만나를 먹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함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삶으로...

반석의 물을 먹음으로 - 은혜와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일어났어도 신약시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늘에서는 구원의 사건을 기뻐했을 지언정 이 땅에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움으로 제자들은 문을 걸어잠그거나 뿔뿔히 흩어져 고기 잡으러 가기도 했습니다. 마치 출애굽한 백성에게 더 큰 삶의 어려움인 광야 생활이 주어지듯 예수는 부활했지만 제자들의 삶엔 오히려 두려움과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언제 그들의 삶이 변화되는가? 

그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함으로 성령이 임함으로 그들의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들의 삶의 능력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는 곧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사도행전과 이후의 신약성경은 구원받은 자들이 교회를 통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교회 생활이 무엇이냐? 바로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생활 하는 곳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모여 성화를 이루어져 가는 것이 교회 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기 위해서 교회에 모인 곳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한 자들이 모여 주의 자녀답게 사는 연습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가 성결을 이루어 가는 곳, 성화를 이루어 가는 곳, 성령의 충만함을 향해 가도록 훈련받는 곳이라기 보다는 구원받기 위한, 구원을 위한 문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열린예배, 구도자를 위한 예배- 이런 예배를 통해서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 점점 사람 중심의,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예배로서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자들을 모아두고 안믿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이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변론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복음은 설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포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복음은 있는데 변화가 없다. 고백은 있는데 삶은 엉망이다. 말씀으로 성화, 성결,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훈련받아야 할 교회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가르치는데만 급급한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성화, 성결, 성령 충만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바르고, 깨끗하고, 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중심이 바르고, 행동이 다르고, 삶이 바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의 모델을 오늘 읽은 다윗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바울은 다윗을 가르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혹은 요즘 성경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자가 되었을까?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 사울을 버렸습니까? 

기름 부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택했다는 것이고 홍해를 건넌 것이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 받은 자가 다시 버림받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신학에서 첨예하게 논쟁되어 온 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요 10: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의 구절과 

(히 6:4-6)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등의 구절이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 잘 하다가 이단으로 빠지거나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거짓 신앙,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사람이나 당사자가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시기에 분명한 답은 하나님이 아실 것이지만 구원을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표현이 다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구원의 모든 조건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구원받는 자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구원받은 자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짓고, 멀어지더라도 마치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구원의 사실을 알려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또한 성령으로 중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하냐면 신앙 생활 하다가 우리가 고의던 고의가 아니던 죄를 짓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하냐면 이제 나는 자격이 없다. 버림받았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다. 신앙의 어두운 밤에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돌이키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시고 또 돌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맞아주십니다. 

구약의 악한 왕들도 심판을 약속하시지만 그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는 부분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지만 사람의 완악함이,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할 수가 있습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하고, 무언가에 사로잡혀서 되돌아올 줄 모를 때에, 천상천하에서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할 자유를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지로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의지를 꺾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아말렉을 진멸하여 남은 것을 다 불태우라고 하셨지만 순종치 아니하고, 자신이 사무엘을 대신하여 예배를 드리고...

사무엘을 통해서 거듭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데도 절대 회개하지 않고 거짓과 변명만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 위에 오르기까지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요나단을 통해, 그리고 다윗을 통해 끊임없이 사울에게 기회를 주시지만 사울은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몇번 다윗 앞에서 후회하는 척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다윗으로 시선을 옮겨봅시다. 

사울이 하나님을 등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한 왕을 예비하십니다. 

16장 1절 후반절에 "내가 그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도 잘 띄지 않는, 굳은 일 도맡아 하는 막둥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의 무엇을 보고 그를 왕으로 택하셨을까? 

바로 양을 치는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양을 돌보는 그의 모습이 특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대화에서 목동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삼상 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목동이라는 것 자체를 천한 일로 여겼습니다. 집 안에 있지 못하고 계속 집 밖에 머물러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동을 하면 집 밖 사람으로 대우 받았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청하여 아들을 불러 오라고 했는데 다윗을 부르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식구가리 보다는 언제나 집 밖의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로 믿을 수 있는 종들이 목동의 역할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목동을 하는 것만 해도 억울한 일인데 다윗은 그 일을 소흘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여러분이 양들을 지키고 있는데 사자나 곰이 나타났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자와 곰과 맞서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집에 와서 사자와 곰이 나타나서 도망왔다면 아버지도 "넌 괜찮냐, 다치지 않았냐?" 하지 왜 양을 버리고 왔느냐라고 말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종이라 하더라도 양을 버리고 온 종을 나무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자와 곰 앞에서 양을 지켰습니다. 지키기 위해서 돌팔매를 연습했습니다. 

처음 한 두 번은 도망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양을 놓고 오니 억울하고 분합니다. 아버지의 것을 내 것으로 여기고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돌팔매를 갈고 닦습니다. 그런데 양을 지키기 위해 갈고 닦은 돌팔매가 나중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는 무기가 됩니다. 

양을 아끼는 마음이 자기에게로 피해온 소외된 자들을 지켜 결국 이스라엘의 주축을 이루는 토대로 그들을 세웁니다. 

결국 목동인 다윗을 통해 하나님은 왕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 입니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긴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큰 일과 작은 일을 구별합니다. 

그 사람의 외모로 판단합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했고 어떤 학교를 나왔고 어떤 집안 사람인지를 따집니다. 

심지어 사무엘 조차도 다윗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사무엘 조차 사울처럼 키 크고 준수한 사람을 왕으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이제 중심을 보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찾습니다. 


오늘 제 마음에 꽂힌 말씀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사울이 악령이 드니까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하는 자가 바로 "수금타는 자"입니다. 

다윗은 수금타는 자로서 사울에게 불려왔습니다. 

양들을 돌보며 수금을 탄다고 하니까 그저 그림책 보듯이 낭만적으로 한가하게 들판에 앉아 노래하는 다윗을 연상합니다. 

그런데 양을 돌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안듣기로 소문난 양을 끌고 가는 일도 어려운 일이고 양을 데려간 이후에도 눈길을 떼면 안됩니다. 

또 다윗이 말했듯이 사자나 곰이 오면 싸우기도 해야 합니다. 돌팔매도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수금타는 자가 됩니다. 

그냥 유행가 부르듯 아무 노래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은 그가 수금을 타며 지은 시입니다. 

성가곡들 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입니다. 


형들은 다 아버지에게 대접받고 멋진 군복도 입고 나라를 위해, 가정을 위해 인정받는 일들을 하는데 다윗은 가정에서도 집 밖 사람으로 여기면서 소외된 삶을 삽니다.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심부름꾼이요, 형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천덕꾸러기 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일에 충실합니다. 그것이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기쁘게 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일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즐겁게 일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양들의 목자이듯, 그는 자신을 지키는 자신의 목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사자와 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실 분이라는 믿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일, 자기에게 맡기워진 일을 다윗은 사랑했고 충성을 다했고 기쁘게 일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러니 일을 하면서도 찬양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는 목동의 일을 하면서 그냥 떼우듯이 일하지 않았습니다. 

양을 돌보기 위해서 돌팔매의 전문가가 되었고, 찬양을 하면서 찬양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양을 돌보는 전문가에서 시작해서 돌팔매의 전문가, 찬양의 전문가, 나중엔 나라 목회의 전문가, 왕이 되었습니다. 


숙제 하듯 어렵게 일하는 사람은 전문가가 되지 못합니다. 그 일을 정말 사랑하고 더 잘하고 싶고, 더 오래 하는 사람이 전문가가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사랑했습니다. 

그 삶을 통해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일을 잘 하기 위해 남는 시간 동안 연습하고, 가꾸고, 훈련하고, 그 일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목동일 때부터 그를 왕으로 점찍으셨습다. 목동인 다윗을 처음부터 왕이라고 기름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왕궁으로 보내어 사울을 섬기게 합니다. 

그를 위해 수금 타는 자로서, 무기 드는 자로서, 군대 장관으로서 서서히 그를 왕으로 만들어가십니다.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을 그는 사랑했고 충성했고 정직했습니다. 

이 일은 마음에 안들어, 이 일은 적성에 안 맞어, 자신의 마음에 따라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일은 곧 사명이었고, 십자가였고, 그는 그 십자가를, 사명을 기꺼히 지었고 사랑했고 책임졌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님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청지기 들에게 주고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맡긴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남긴 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 종은 남들은 다섯 달란트 주고 두 달란트 주었는데 자신에게는 한달란트만 주어서 뿔이 났는지도 모릅니다. 

이것같고 무엇하냐 하고 불평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선 다섯 달란트나 한 달란트나 적은 일입니다. 적은 일을 통해 큰 일을 맡기십니다. 

그저 자기에게 맡기운 것을 통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흔히들 작은 교회에서 무엇을 할려고 하면 우린 큰 교회도 아닌데, 재정이 좀 모이면 하지..하고 스스로 소극적이 됩니다. 

그래서 큰 교회는 더 세련되고 더 완벽하게 일하는데 작은 교회는 더 대충, 더 소극적으로 일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마음가짐이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가 큰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따라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한국의 공교육이 위기다 위기다 하면서 여러가지 대안 학교들이 등장합니다. 

공교육이 제시하지 못하는 인성 교육, 인문 교육, 자연 교육, 예절 교육, 교양 교육 등 각 대안 학교 마다 각자의 색깔, 각자의 목적과 특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주목을 끕니다. 

저는 우리 로고스 교회가 단지 시스템이 잘 갖추어 있는 교회들을 따라가느라 헉헉대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특성있고 대안적인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쏠티와 함께 라는 음반

작은 교회 주일학교를 통해 시작된 노래와 율동이 지금까지 계속될 정도로...


이왕하는 성가대, 정말 잘 교육하고 하나님께 영광이요,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찬양의 전문가들로 훈련시키고 싶고

영성학교를 통해서 다른 교회에서 맛볼 수 없는 영성의 깊은 훈련과 교육을 행하고 싶습니다. 


작아서 대충하고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여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기쁘게 헌신하고, 즐겁게 열매맺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 그런 목회를 꿈꿉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고난 중에 세워지는 나라 (하나님 나라의 인턴십) 삼상 22:1-5


저희 형이 어렸을 때 꿈이 파일롯 이었습니다. 탑 건이란 영화를 보고 꿈을 꾸더니 나중에는 이것 저것 자료들도 모았습니다. 이것 저것 자료를 모으면서 형이 어린 저에게 말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너, 파일럿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얼마만큼의 돈이 드는지 알아? 훈련시키는 비용만 해도 2억이 넘게 든데..." 무슨 근거에서 그런 말을 한 지는 알 지 못하지만 초등학생이었던 저에게 2억이라는 금액은 상상할 수 없었던 큰 금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형도 파일롯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한국의 한 교회에서는 거의 목회자 자녀들로만 구성된 찬양팀을 조직하여 합숙하며 신앙훈련도 하고 공부도 같이 하게 하며 그러면서 찬양 사역자로 훈련시키는데 그들에게 들어가는 재정만 해도 한 해 1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대단히 큰 것 같지요. 요즘 한 자녀가 고등학교때부터 대학교때까지 교육을 마칠때 드는 돈이 거의 2억에서 3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학생활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가장 고민 되는 것 중의 하나도 바로 자녀 교육 문제이지요. 참 돈이 많이 듭니다. 돈 만 드는 것이 아니라 온 관심이 다 필요합니다. 여기 집사님도 계시지만 고 3 수험생 둔 가정은 온 가정이 그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오히려 가족들이 그 수험생의 눈치를 보고 삽니다. 


요즘 왠만한 기업들을 보면 처음부터 계약하는 경우는 왠만해서 없습니다. 좋은 직장, 전문 직장일수록 인턴 기간을 두고 그 직업에 필요한 소양을 쌓게 만듭니다. 간을 보면서 그 사람이 이 직장에 어울리는지, 그리고 필요한 기능을 익히도록, 그 직책이 맡겨 졌을 때에 시행착오하지 않도록 미리 훈련시키는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한 사람의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신중하고 엄격하게 훈련시키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클 수록, 중대할 수록 그에게 투자하고, 훈련시키고, 다듬어 가십니다. 

모세, 야곱, 요셉, 12제자....


오늘 함께 나눌 다윗의 인생도 살펴보면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나이가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16-17세 때로 여겨집니다. 30세때 유다의 왕이 되고 7년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 기름 붙고 15년정도를 하나님께서 왕으로서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일종의 인턴십인 경우이죠. 

다윗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확하고 엄격하게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훈련시키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가 기름부을 당시 그는 이새의 여덟 아이들 중의 막내로 목동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이 다른 성경의 인물들과 달리 좀 특이한 점은 어머니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 후 왕들의 족보로 보면 이것은 되게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오히려 시편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자신의 출생이 아름답지 못하였음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골리앗 사건을 계기로 그는 왕궁에 들어가 사울왕 옆에서 그야말로 왕궁에서의 인턴십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에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였습니까? 둘도 없는 친구 요나단이었지요. 왕 옆에서, 그것도 왕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과 친구가 되어 왕으로서, 왕자로서의 삶을 몸소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어린 시절 바로의 궁정에서 자라면서 지도자로서의 인턴십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의 출생으로 보면 그가 왕궁에서 사울의 옆에서, 그것도 요나단을 가장 제일 친한 친구로서 사귀면서 왕으로서의 삶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이 없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골리앗을 물리치고 왕의 군대장관으로까지 임명되어 승승장구하여 기세가 등등할 때 오히려 그의 인생의 위기가 닥칩니다. 가장 잘 나갈 때,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를 낮추시어 이제 사울에게 쫓기는 도망자가 되게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겸손과 인내를 배워나가는 것이지요.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인구조사를 하는 등,  역시 잘 나갈 때에 죄악의 유혹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솔로몬 이라던지 이후 이스라엘의 왕들에 비해보면 다윗은 끝까지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었습니다. 


이후 30세때 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그는 사울을 피해 끝없이 도망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여러분, 일국의 왕이 군사를 모아 자기 하나를 따라다니면서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년을 통해서 자기를 죽이기 위해 쫓아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모든 과정에서 다윗을 지탱하고 있는 가장 강한 그의 영성은 찬양입니다. 목동일 때부터 그는 찬양하는 자였고, 왕궁에 있을 때도 그는 찬양하는 자로서 사울 곁에 있었고, 아삽이라는 성가대장을 따로 세우고 전쟁의 가장 앞에도 나팔불고 성가대가 앞장 서게 함으로서 그의 외적신분이 바뀌어도 전혀 바뀌지 않고 다윗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모습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도망중에, 그리고 오늘 우리가 나눌 아둘람 굴속으로 피신하여 있을 때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은 찬양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장인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가드왕 아기스에게 피합니다. 그런데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두려워하여 그가 사울의 군대장관인데 어찌 왕앞에 둡니까하면서 말하니까 이것을 듣고 다윗이 입에 침을 흘리며 문에다 낙서를 하면서 미친척하면서 도망을 나옵니다. 

얼마나 서글픈 광경입니까?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친 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때가 이때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 보게 되지요. 

이 때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러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불면증에 걸려서 자살 충동을 느끼고, 기도는 커녕 원망하고 불평하고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이 때에도 시를 씁니다. 

시편 34편이 이 때에 쓴 시지요. 몇 부분만 읽어 볼까요? 

(시 34: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34: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시 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9-20]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그는 아기스왕에게서도 미친척 하고 쫓겨나서  지금 아둘라 굴 속에 피신하고 맙니다. 

'아둘라'의 뜻은 격리된 것, 즉 피난처, 도피처라는 뜻입니다.  동굴은 어떤 곳입니까? 앞이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요, 앞이 꽉 막혀 더 이상 나갈 수도 없는 곳입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일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인턴십과정에 있어서 어쩌면 이곳은 가장 중요하고 왕국의 기초를 닦는 중요한 장소, 중요한 시간이 됩니다. 


- 다윗의 아둘람 동굴에서 얻은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다윗은 아둘람은 피상적인 하나님, 막연한 하나님은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마치 욥이 고난을 통해서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 아둘람은 다윗이 자원해서 들어간 동굴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간 어둠의 터널이었지만, 절망의 터널이었지만 그는 이 곳을 나올 때 밝은 빛을 경험하고 나옵니다. 
  • 시련과 원망의 동굴이 어떤 동굴로 바뀝니까?
  •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노래 

1. 시 57편

(시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8-시 57:9]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 (시편 142편) 

(시 142: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 142: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 142: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시 142: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시 14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142: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시 142: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 이방 왕에게 가서라도 자기가 안전하게 피해볼까하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침을 질질 흘르며 미친척하고 쫓겨나서 이제 하나님이 인도하신 아둘람 속에서 들어갔더니 이젠 정말 하나님밖에는 의지 할 때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피난처인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 의지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피할 다른 것, 다른 곳을 예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이 굴속에서 자신의 피난처, 자신의 보호자는 오직, 오직 하나님 밖에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 이들은 깜깜한 고난의 동굴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고난의 동굴 속에서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겸손함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고난의 동굴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2. 다윗은 아둘람 굴 속에서 전정한 동역자를 만납니다. 그 동역자는 그의 평생의 동역자요 이스라엘 왕국의 초석이 됩니다. 

  • 오늘 추방자요 도망자인 다윗의 곁에 찾아온 자들은 누구입니까?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 지금 자기 혼자 감당하기도 힘든 상황인데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아니 세상에 힘든 사람이란 힘든 사람이 다 모여서 그에게 모여듭니다. 우리는 힘이 들고 기분이 안좋으면 좀 밝은 곳, 좋은 사람을 만나서 기분전환이라고 하고 싶지요. 내 기분도 안좋은데 더 안좋은 사람 만나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지금 다윗이 이방땅에서 미친척 하면서 쫓겨나서 가까스로 이곳에 피신했는데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환난당한 모든 자들이 이 곳에 모여든 것입니다. 
  • 자신의 문제도 감당하지 못하고 숨으려 할 때 자신이 부담해야 할 더 많은 일들이 닥치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쫓기는 다윗에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그에게 더욱 위험스런 일이었고 부담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에게 모여드는 이런 일들을 결코 무시하거나 돌려보내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책무를 다했고 그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들은 10년 이상을 동고동락하며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갔고 또한 위험을 극복하고 그들의 신앙을 더욱 넓혀 갔습니다. 
  • 그들은 장차 어떤 사람들이 됩니까? 
  • 삼하 23장에는 다윗이 자신에게 가장 귀한 나라의 장수들, 기둥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이 아둘람 굴 속에서부터 만나 동거동락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굴람굴에서부터 같이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다윗의 왕국의 기초가 되고 장수가 되고 기둥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자신에게 부담만을 안기어주었던 사람들이 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그런 왕국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3. 다윗의 인생에서 아둘람 굴

  • 다윗에게 아둘람은 결코 비련과 회한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아둘람(고난과 시련의 장소)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렵니까?
  • 원망과 좌절 대신, 무릎으로 나아갑시다

      [시 142:1-2]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 울분과 상처대신, 주의 날개 아래로 나아갑시다

     (시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이런 깜깜한 고난의 동굴에 갇혀있는 분이 있습니까? 낙심하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이 동굴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훈련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동굴에서 여러분들을 훈련시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일꾼으로, 또 하나님께서 복주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낙심하지 마시고 피로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상처를 치유 받고, 열심히 훈련받아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크게 쓰임받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은 양을 치던 목동 다윗에게,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형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맡기기로 작정하시고 그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왕으로 기름 부었던 다윗을 아둘람 굴로 보내어 다른 영혼들을 또한 돌보게 하십니다. 왕중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 충만한 다윗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파 본 것 까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의인이 고난이 많은 이유는 어쩌면 다른 영혼들의 아픔을 미리 경험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낮추셔서 아둘람 굴로 보내셨습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만 모여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좋아 보이고, 멋져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 자신도 지금 기가 막힌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데 자신처럼 힘든 길을 걷는 영혼들을 돌봐야 하는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윗은 그들과 함께 울어주고, 내 문제 네 문제 할 것 없이 함께 울고 함께 견디고 함께 힘을 키웠습니다. 왕으로 기름부었다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 굴속의 영혼들을 돌보는데 생명 걸었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영혼들을?"하고 물어 볼 세도 없이 절박하게 이들과 함께 하루 하루를 이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갔습니다. 수많은 영혼을 품을 수 있는 위대한 왕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초석은 왕궁이 아닌 이 아둘람 굴속에서 다듬어져 갔고 세워져 갔습니다. 아둘람 굴 속의 사람들이 다윗의 왕국, 하나님 나라의 왕국에서 기둥이 되고 장수가 되고 유산이 되었습니다. 
  • 나는 우리 로소스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어떤 상황에도 요동치 않고 폭풍 속에서도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고 훈련받아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려움 중에도 남에게 도움을 주고, 맡겨진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우리 로고스 모든 식구들이 다윗의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