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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죽은 자를 살리다 (요한복음 11장 35-44절) 


예수의 삶에 있어서 변곡점, Turning Point가 되는 몇 사건들 

  • 세례를 받음- 공생애의 시작 
  •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힘으로 예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마 4:14, 17)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 예수의 사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오병이어 사건..) 
  •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베드로의 고백 사건-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사건.
  •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기록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 이 때부터 예루살렘이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기 시작, 요한복음의 이른바 일곱가지 기적 (Seven Sign) 중 가장 마지막 사건 


  • 베다니- 예루살렘 남쪽의 인근 마을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면 늘 들리던 마을, 베다니라는 의미는 "가난한 이의 집"이라는 의미로 가난한 자와 나병환자들의 거주촌, 서울로 치면 달동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살던 마을. 
  • 나사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 베다니에서 아내도 없이 두 누이와 함께 살던 가장. 
  • 성경은 특별히 나사로를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 또 예수님은 나사로를 가리켜 "친구"라고 불렀던 사람. 
  • 또 두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가난한 형편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대접했던 가정, 특히 마리아는 전에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방되고 구원을 얻은 여인,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여인- 주님과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   


1. 그런데 그가 병들었다. 그것도 아주 위급한 병, 죽을 병에 걸렸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이 때 사랑하시더니는 히브리어로 신적 사랑, 최고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들었습니다. 

-> 주님이 우리를 최고로 사랑해도 우리는 병드는 존재, 병들수 밖에 없는 존재,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안에 있는 존재....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수 있다. 죽을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들으면 당연하게 여기는데 막상 그러한 일을 당하면 부정한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 

(행 14:22)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립니다. 당연히 빨리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요, 또 주님만 오시면 나으리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6절) 


이틀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달리 다른 일을 했더라면 기록되었을텐데 주님은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왜 이틀을 유하셨는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힌트가 되는 구절이 4절과 15절입니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오해하기 쉬운 해석- 병을 고치는 것 보다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지 오래된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믿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기 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멀쩡한 사람을 병나게 하고 죽게 하고 살려냄으로써 자기를 증명했다. 혹은 빨리 고칠 수 있었는데 예수님의 능력을 보이려고 이틀 동안 기다리셨다. 그 생각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백성을 희생시키는 자을 우리는 독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그는 나사로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틀을 그냥 기다리신 것이라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짓된 눈물이요, 가식일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단어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을 오해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무렇게나 희생당하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살리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요,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3. 이틀을 유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시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느 고로 실족하느니라" (9-10절) 

그러면서 곧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이제 깨우러 가자!" 합니다. 


  • 두 가지 종류의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자들 

1) 주 밖에서 죽은 사람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첫째 사망은 몸이 죽는 것이요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받는 영원한 영혼의 저주-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 둘째 사망이라 표현합니다. 


2) 주 안에서 죽은 자들 -> 잔다라고 표현 

-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 잔다. 

(마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 스데반이 죽었을 때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바울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가리켜 잔다고 표현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 

사데교회: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예수의 생명이 없는 이들은 모두 죽은 자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 

거급났으나 죽은 자들 - 자서는 안될 잠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잠자던 자 

깨어서 기도하라 했는데 잠을 자던 제자들 -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경험 한 것 - 배 밑창에서 잠을 잠 

삼손이 향락에 취해서 타락할 때마다 행한 것 - 들릴라의 허벅지를 베고 잠든 것 


다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시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느 고로 실족하느니라" (9-10절) 

그러면서 곧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이제 깨우러 가자!" 합니다. 


나사로가 잠들어있다. 왜? 빛이 없이 다녔기 때문에, 믿는 자가, 예수의 사랑하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던 자가 예수 없이, 성령 없이, 믿음 없이, 어둠에 다녔기 때문에 그는 잠들었다. 죽었다. 주님은 요나가 배밑에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신 것처럼, 나사로가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왜? 그것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실상, 내 민낯, 내 더러운 죄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둘기 처럼 순전한 선지자 요나가 잠을 통해 하나님가 평평히 맟서듯,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가장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 가정 안에 있는 죄의 민낯을 보게 하신다. 


4. 마리아와 마르다. 

두 가지 유형의 성도- 행동하는 신앙, 사색하는 신앙

영성가들은 이 둘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요 신앙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함께 가야하는,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신앙의 두 모습이라 여겼다. 즉 이 둘이 함께 할 때에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해하는 믿음이 아닌 살아가는 믿음이 된다는 것이다. 


나사로의 집- 주인은 나사로이지만 신기하게도 성경에는 나사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 반면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대화하는 장면은 여러군데서 나온다. 나사로를 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는 나사로인데 그것을 전하는 것도,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도, 그리고 돌문을 치우는 것도, 꽁꽁 싸여진 베를 풀어 놓는 것도 누이들을 통해서이다. 즉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두 누이에 대한 믿음의 단련이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두 누이다. 부모도 없이 살았는데 이제 가장 역할을 하던 오라버니마저 없다. 간절히 기다리던 예수님도 오지 않고, 이제 장례식마저 다 치루었다. 오라버니는 이미 장례를 치루고 무덤 속에 안치했다. 그 며칠 간의 시간은 두 자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자 마르다가 예수를 맞이합니다. 마르다는 행동이 먼저인 사람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서두르고, 서성대고, 먼저 행동합니다. 남자로 치면 베드로같은 신앙인입니다.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자 먼저 달려나가 예수님 앞에 섭섭함을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섭섭함을 표현합니까? 아얘 나오지 않음으로 그의 서운함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 자매와 대화하시면서 그들이 주님과 대면하게 합니다. 

어둠에서 잠자던 자들이 이제 빛된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신앙은 해결되지 않은 내 삶의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비추이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주님 앞에 나온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나리라" (23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제가 이것을 믿느냐?"  

하면서 잠자던 영혼을 깨웁니다. 

어둠 가운데, 절망에 빠져 있던 마르다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줄 내가 믿나이다." 베드로의 고백, 반석의 고백, 교회의 고백을 하게 합니다.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무작정 달려가서 위로하지 않습니다. 

(요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르다가 고백했더 바로 그 장소, 야곱이 거꾸러지고, 다윗이 회개하고, 베드로가 고백하고, 마르다가 고백했던 바로 그 장면처럼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아와서 비로서 마르다처럼 똑같이 "주님, 내가 섭섭합니다. 왜 일찍 안오셨습니까?" 하면서 그 발 앞에 무릎꿇은 마리아를 보고 함께 우십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 하다가 아무리 이해 안 가고, 납득할 수 없고, 때로는 성도에게, 목사에게, 주님꼐, 하나님께 서운한 것이 있을 때도 피하면 안됩니다. 그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 같이 눈물을 흘리십니다. 


5. 돌을 옮겨 놓으라! 

  • 마리아의 원망의 소리를 듣고 우신 주님은 무덤으로 갑니다. 무덤은 무엇입니까? 죄악된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를 삼키는 고통, 염려, 두려움, 부정적인 생각,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내 약점....
  • 지금 예수님이 그 곳에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성령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하는데 무덤 앞에 무엇이 있습니까? 큰 돌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행동파인 마르다가 정작 행동해야 하는 것에는 머뭇거리고 피하고 외면한다. 왜? 자기를 대면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우니까... 외적인 다른 일은 다 하는데 정작 자신의 마음 속 깊은 무덤 속은 열지 못하는 것이다. 
  • 내 아픈 속마음, 내가 여전히 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연약한 모습, 부정하고 싶은, 내가 홀로 만나고 싶지 않은, 하나님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내 굳는 마음, 타락한 마음, 몸에 배여 있는 죄악의 습관들....
  • 예수님은 내 마음 밖에 오셔서 이제 네 마음의 돌을 치워라하십니다. 하나님, 냄새가 나서 열 수가 없어요....썪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주님과 대면하는 시간, 내 이름이 변하는 시간, 온전히 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날 살리는 시간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돌을 치우고, 예수님께 내 연약함을 모두 내어 드리고 주님 내 마음의 굴로 들어오세요. 내가 죽어있는 공간, 죽이고 싶은 나의 모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살려 주세요... 그러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임하고 생명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오직 여인들만이 예수가 계신 동굴로 새벽부터 일어나 갑니다.

그녀들에게 있는 한 가지 걱정은 무엇입니까? 누가 무덤을 가로 막은 돌을 치워줄까?

예수와 우리를 가로막은 돌을 치워줄까??

다른 제자들은 그 돌을 치우려고도 하지 않고 그 곳에 오려고도 하지 않는데 여인들은 어떻게 돌을 치울까 염려하면서도 아무런 대책이나 도움이 없이 그냥 예수 앞에 나옵니다. 무조건적으로 예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오니까 어떻습니까? 이미 돌이 치워져 있습니다. 예수와 우리 앞에 놓였던 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무작정 나오니까 어느 덧 돌이 굴려져 있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돌을 치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능으로 우리 모습 그대로 주님앞에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 다 아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께서 그 돌을 치워주십니다.

주님 앞에 가로막혀 있는 돌문을 주님께서 제거해 주십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그렇습니다.


6.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의 전부를 열면 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회개의 사건이요, 중생의 사건입니다. 중생은 한 번 일어나는 것이지만 회개는 우리가 주님을 잃어버릴 때마다, 잠에 빠질 때마다, 영적인 죽음에 빠질 때마다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영혼이 살아난 자는 이제 수족은 싸맨 수의를 벗어야 합니다. 수의는 죽은 자가 입는 옷입니다. 죄로 인한 옛 구습이요, 습관이요, 삶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새 영을 받은 자는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구원입니다. 신앙은 깨달음이 아니라 삶입니다. 


결론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을 사랑했던 나사로도 병들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도 역시 병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자들도 병들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도 끊임없이 병듭니다. 

병든 자는 서운함이 가득찹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교회가 원망스럽습니다. 만사가 귀찮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나오는 자는 빛이 비추입니다. 생명이 솟아납니다. 회복됩니다. 

예수께 나아오는 것- 놋뱀을 바라보는 것, 예수께 마음의 깊은 무덤을 여는 것

이것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듯, 우리는 주님께 나아와서 내 잠을 좀 깨워 달라고, 내 맘 깊은 악취나는 곳에도 빛을 비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오는 자는 살아납니다. "나사로야 나아오라" 외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산 인생을 삽시다. 살았으나 죽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산 사람 처럼 삽시다. 새 옷을 입읍시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