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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 욥 (욥 23:10) 


(욥 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새벽예배를 쭉 하다보니까 성경을 전체적으로 강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7-8년을 설교하면서 강해하지 않은 성경- 계시록과 욥. 지금 계시록이 거의 끝나가는데 지나간 설교들을 보니까 욥에 대한 설교가 거의 없다. 

어렸을 때엔 피부병으로 한 참 고생을 해서 주위에서 욥과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왔던 욥이라는 인물이 어느덧 고난의 대명사로 피하고 싶은, 외면하고 싶은 성경으로 만들어 버렸는지 모른다.   

성경을 읽으면서 날마다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읽어왔기 때문에 웬지 욥기를 읽으면 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것 같은...그래서 욥기를 피해왔나보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욥기서의 특별함에 대해서 가끔 접하곤 한다. 

욥은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인물이지만 그가 내보이고 있는 신학이나 표현은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문학적이고 또한 가장 심오한 신학을 담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대척점에 서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주위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신앙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신앙이 때론 누군가에게 가장 아픔이 되고 가시가 되기도 하다.  . 


지금 계시록을 다루면서 새벽에 많은 은혜를 접하기도 하는데 계시록이 끝나면 욥기서를 깊이 읽으면서 성도들과 함꼐 은혜를 나누고픈 도전이 들었다. 

욥기를 대하면서 우리가 욥기를 깊이 있게 읽지 않고 내용만 이해하다가는 많은 구절을 오해할 수 있는 많은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 


우리가 읽었던 욥기 23:10절의 말씀은 욥기에서도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고 욥기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문장이기도 하다. 


많은 설교나 찬양의 가사로도 쓰이지만 욥기의 대략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자연스럽게 

"욥이 여러 고난 가운데 연단을 받아서 정금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리라는 미래의 소망, 현재의 고난을 이김으로 미래의 희망을 고백하는 것"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데 여러 성경의 해석을 보면서 이 구절이 잘못 읽히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이 구절의 여러 번역을 함께 읽어보자 


개역개정 -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공동번역 -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새번역 -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그런데 여기서 "단련"이라는 단어는 훈련이나 연단의 의미가 아니다,. 히브리어 "바한"은 "검사하다, 조사하다, 시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영어로는 test 혹은 examine의 의미이다. 훈련이나 연단은 미래를 기약하며 현재를 힘들게 하는 것이지만 test나 examine은 현재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은 

"내가 걸어온 길을 그가 아십니다. 그가 나를 시험해 보신다면, 혹은 주목하여 세심히 보신다면 내가 순금이라는 것을 아실것 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즉, 주님이 날 보신다면 내가 순금이라는 것을 잘 아실것이다는 표현이다.  

이 말씀은 욥의 친구였던 엘리바스가 욥에 대해서 정죄하고 공격할 때에 욥의 대답으로 나온 말이다.  

엘리바스와 세 친구는 "고난은 죄에 대한 징벌이다"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욥에게 이야기한다.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까닭없이 너를 치시겠느냐?
네가 말로는 의롭다고 하나 실상은 네가 악인의 길을 가고있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거야!
그 길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뜻을 돌이키시고 너를 환란에서 건지실거야!"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세 친구의 한 명이었던 발닷은 욥의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한 날에 죽은 것이라 말하면서 지금이라도 하나님꼐 죄를 자백하면 "너의 지금 모습은 형편없지만 나중에는 다시 창대할 것이라" 말한다. 


즉 이 말은 위로나 격려가 아니라 "너의 죄를 이실직고 하라"는 말이다.  


그러한 친구들의 추궁에 대한 대답이 이리가 읽은 23장의 말씀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뵈옵고 따져보면 
내가 얼마나 의인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텐데, (2-3절) 
전후좌우에도 아니계시니 답답하구나.(8-9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길이 주의 길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는데,
언약을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왜 나를 낙심케 하시는가???"


이런 말을 하니까 친구들은 더욱 화가 나서 네가 교만하다. 아직도 네 죄를 깨닫지 못하였다. 빨리 회개하라라고 다그친다.  

우리도 어떤 신앙인이 이렇게 고백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물며 욥같이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친구들과 같이 반응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있을까? 

그것도 축복받고 아무 걱정이 없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교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인생의 가장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의 의로움을 말하고 있다면 아마도 충격에 정신이 나갔거나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들도 똑같이 욥의 친구들처럼 그를 대할 것이다.  


그러면 욥은 왜 이러한 고백을 한 것일까? 그리고 욥만 이런 고백을 한 것일까? 

욥의 이 탄식, 하나님이 나를 바라 보신다면 내가 정금이라는 것을 아실텐데...라는 이 구절의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해 보자. 


욥기 1장에 보면 욥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가 나온다.  

1절에 보면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한다.  

5절에 보면 그는 자녀들이 잔치를 하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며 명수대로 번제를 드리면서 혹시라도 그들이 범죄할까 하나님께 항상 예배하는 자였다. 


이 때 사탄이 욥을 침소한다.  

9절에 보니까 "욥이 어찌 까닭없이 주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묻는다. 

사탄은 욥의 예배는 다 까닭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기 때문에 그가 예배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 자녀, 축복을 좋아하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지 하나님 당신 자체를 좋아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돈이 있으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지 돈 없으면 당신도 내침을 당할꺼라 말하는 것과 같다.  


사탄의 말대로 욥이 지닌 복이 다 사라져 버렸다. 하루 아침에 자녀들이 죽고 재산은 불타고 종들은 피를 흘린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 고백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욥 1:21) 

모든 축복이 거두어지고 난 후 욥은 범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예배한다.  


여기에 욥의 몸에까지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온 몸을 긁게 되자 아내가 무엇이라 말하고 떠나가냐면

"당신이 그래도 자가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 

무슨 소리인가? 

이지경인데도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겠느냐? 하나님을 찬송하겠느냐? 차라리 욕하고 죽어라하는 것이다.  

달리말하면 그 지경이 되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욥때문에 욥의 아내는 질려서 떠나간 것이다.  

욥의 예배에 기가 질린 것이다.  


그 후에 소문을 듣고 욥의 친구들이 멀리서부터 욥을 위로하러 온다.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도 처음에는 같이 재를 무릎쓰고 7일동안 욥에게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같이 머문다. 배려심이 있는 모습이다. 

달리 위로 할 수 없을 때에 그저 함께 머무는 것이다. 좋은 친구들이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욥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이 고난에는 까닭이 있지 않겠느냐? 왜 하나님이 무죄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겠느냐? 너의 죄를 기억해내서 하나님께 고백해라. 그러면 너에게 다시 복을 주실 것이다.  


그들이 욥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빨리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라. 너의 잘못을 찾으라.  

그런데 욥은 그 와중에도 예배하며 하나님께 묻는다.  

"내 예배를 다 열납하신 후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자기 예배가 의로왔다고 하니까 친구들은 말한다. 네가 의롭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결국 친구들은 무엇 때문에 욥을 정죄하는가?  

극심한 고난 중에도 욥이 여전히 이전과 같은 예배를 드리니까 화가 난 것이다.  

그런 고난이라면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데, 자기가 늘 해오던 대로 기도하고 예배하는 욥을 보고 화가 난 것이다.  


어떻게 욥은 그러한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자신을 의롭다고 여길 수 있을까? 친구들이 화날 만도 하지요?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의인을 없나니 하나도 없지요. 

왜, 어떻게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 할 수 있는가? 

그곳에 이 말씀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시편 26편 1-2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test me, try me, examine me..) 

-> 다윗의 시

여기서도 똑같이 단련이라고 해석한 구절-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다윗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완전하게 행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그는 온전히 예배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자들은 내가 의롭기 때문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깨끗이 하시고 온전케 하심을 믿기에 온전하다고 인정함을 얻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내 모든 죄가 사함받고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를 적시기 때문에 주 앞에서 내가 의로운 것이다. 주 안에서 내가 의로운 것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의 상황을 살피면서 욥의 회개를 원했지만 한 번도 예배의 처소를 떠난 적이 없는 욥은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불의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심을 믿었기에 고난 중에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신앙을 불순물이 없는 예배, 조건이 따르지 않는 예배, 고난 중에도 주를 예배하는 예배를 바로 정금으로 나타낸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온전함을 입는 것입니다. 

예배하기 전과 예배 드린 이후의 우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어야 합니다. 

예배 드리러 올 때는 상한 심령으로, 죄를 짊어지고, 연약함 가운데 올지라도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나갈 때에는 용서함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이제는 죄와 상관없이, 순전한 정금이 되어서 세상의 등불이 되어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욥은 이 예배를 비밀을 알고 경험하고 누렸기에 하나님 앞에서 난 변화했음을 오늘도, 자녀들이 죽고, 아내가 떠나가고, 몸은 긁어서 피투성이가 되어도 자기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예배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와 세상 앞에서 의롭게 해 줍니다. 

예배는 단지 위로가 아닙니다. 

예배는 단지 격려가 아닙니다. 

예배는 단지 봉사가 아닙니다. 

예배는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고, 불완전한 우리가 온전케 되고, 불구자 였던 우리가 정상인이 되는 하나님의 수술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예배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앞에 우리의 모든 불의와 죄를 씻고 다시는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전의 옛사람은 벗어 버리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 자는 온전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예배자 욥은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하나님 앞에 대면합니다. 

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예배 드렸는데 내 예배를 받으신 여호와께서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욥의 고민이고 하나님을 향한 간구였습니다. 

이 질문에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38장부터 41장까지 하나님이 욥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하나님은 오히려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에 넌 어디 있었는가?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룬 경륜을 넌 다 이해하는가? 

이 모든 것을 넌 다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던지시는 계속되는 질문에 압도되는 욥은 자신의 질문을 포기해 버립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해 주실 때도 있지만 욥의 경우처럼 그 질문에는 대답치 않으시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실 때가 있습니다. 

"너의 질문을 버리고 나의 질문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고 내 질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질문이 하나님 앞에서 소용없음을, 무의미함을 알았기에 내 질문을 버리고 하나님의 질문을 품는 것입니다. 


(욥 42:2)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 42: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 42:4)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 42: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그렇게 친구들이 회개하라 할 때는 할 수 없었던 욥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뵙고 진정한 회개를 드린다. 

예배는 바로 내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질문을 가지고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결자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분은 주권자이고 전능자 입니다. 그분의 질문 앞에 우리가 설 때에 우리가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벗어나 그 분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됩시다.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됩시다. 

예배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과의 동행을 이루시는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