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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 (요한복음 1:29절)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이름, 그리스도는 직함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말로 야훼와 호세아가 결합된 말입니다. 야훼는 하나님이고 호세아는 구원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말이 예수의 의미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즉,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구원자라는 뜻이지요.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 메시야라는 말의 헬라어입니다.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붙여진 직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즉, 유대인들의 용어로 메시야임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고유명사입니다. 즉, 예수에게만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메시야는 고유명사입니까? 보통명사입니까? 

기름부음을 받은 자- 왕, 제사장, 선지자... 복수--그들은 여러 메시야를 가지고 있었고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끊겨졌던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어떤 메시야입니까? 

그들을 가난과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줄 하나님의 종.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서 중보해줄 수 있는 중보자.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해방자를 기다리고 있었고 세례요한이나 예수를 그런 메시야중 하나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즉 예수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다윗같은 왕, 사무엘 같은 선지자, 아론같은 제사장같은 사람은 떠오르지만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신앙과 배격되는 일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을 토대로 야훼라는 말을 부르는 것조차 삼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야훼를 쓸 때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만을 이어서 썼습니다. 죄인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예수란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사역이요, 그 이후에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바로 십자가의 일을 갈 것을 말씀하시고 또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 두 부분을 경계짓는 사건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 사건입니다. 


[마 16:14-17]

(마 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여러 메시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의 고백,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일반적인 유대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서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베드로마저 이 말씀을 듣고는 펄쩍 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다른 모든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 그들에게 메시야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는,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같은, 삼손같은, 기드온 같은 장수요, 홍해를 가르고 바로를 항복하게 하는 능력자요, 모든 문제를 풀어줄 솔로몬 같은 지혜자였지 십자가를 지는 메시야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께서 스스로 나는 십자가를 질 것이다. 나는 고난 당하여 죽을 것이라고 거듭 말씀을 하셔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가 무릎 꿇듯 헤롯이 무릎 꿇을 것이요, 홍해를 가르듯 이적이 나타나서 로마 군사들이 다 멸절 될 것이요, 다윗왕국의 태평성대같은 해방의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전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는 이전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요, 인도자요, 그들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능력자요 치료자로 오셨지만 그의 사명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요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메시야는 잠시 잠깐 승리를 주고 평안을 주고 복을 주었다면 예수는 영원한 승리,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복을 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잠시 잠깐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훼방놓았던 사탄의 일을 멸하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두시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려, 죄로 인해 막혀 있었던 그 모든 장벽을 제거하시러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1. 성막, 제사, 제물 

 우리는 성막, 성전, 제사 하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가대가 늘 찬양하고, 향기로운 향이 가득한 아름다운 처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막, 성전, 제사의 모습을 재현하면 그 모든 환상이 깨어져 버립니다.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서 임재하셨고 그곳에서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죄 때문입니다

 그곳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기름부음을 받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함께 거하던 그 평안은 죄로 말미암아 거룩함 가운데 절대로 서지 못하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아름답고, 기쁨에 넘치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날마다 번제가, 속죄제가, 화목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동물의 피가 진동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백성들이 가져온 동물들을 죽여 각을 뜨고 내장을 씻고, 그 피를 담아 제단에 뿌리고, 불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어쩔 땐 하루에도 몇번씩 그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성막은 동물들을 잡는 비명 소리가 늘 가득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며 동물을 태우는 냄새로 그을렸습니다. 

 그 모습은 천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수라장이요, 도살장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장소, 그와 같은 예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했던, 마음 속에 품었던 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외면하고, 불순종하고, 무시하고 비웃었던 모든 죄...

 사람들끼리 전쟁하고 죽이고 간음하고 빼앗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정죄하는 그 모든 죄가 그런 아수라장 같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흠없는 어린양, 송아지, 더럽혀지지 않았고, 다른 것을 위해 사용되지 않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태어나고 갓 자란 흠없는 제물들의 피를 통해서 예배해야 했습니다. 

 레위기 16장에는 일년에 한 차례 드렸던 대 속죄일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대 속죄일과 아사셀 염소 

 대속죄일은 일 년에 한 번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속죄 받고 정결하게 함을 입는 날이었고, 일 년 동안의 삶을 종결 짓는 엄숙한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이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1)성소와 제사장 또 2) 백성을 정결하게 하려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 그들은 일 년 내내 죄들을 고백하며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면서 용서를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매년 한 번 대속죄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그들의 회개가 정말 참된 것이었는지, 지금도 회개할 때와 같은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지, 정말로 죄를 참회하고 버렸는지를 심판하시는 일을 하셨다. 대속죄일에는 온 이스라엘 백성이 혹시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또 버리지 못한 죄가 있는지 자신들을 철저히 살피고 조사해야 하였다. 어떤 지파나 종족이나 가족 중에 회개하지 않은 죄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돌로 침을 당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이었다. 이날에, 진실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또다시 바치는 경험을 하였으며, 그들의 회개를 확고히 하였다. 그리하여 대속죄일에는 전에 이미 용서를 받은 죄의 기록들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지만,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영원히 끊어짐을 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소는 한 해 동안 쌓여온 죄의 기록들로부터 정결케 함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속은 완성되었으며, 더는 죄에 대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 대속죄일 예배의식의 절차 및 방법
  • 수 송아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수소를 잡아 속죄제물로 바침. 
  • 숫 염소 한마리를 잡아 그 피를 성소에 뿌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와 회막과 지성소를 성결케 하는 의식
  • 나머지 한 염소 (아사셀 염소): 대 제사장 아론은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의 그동안 지은 모든 불의와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다 보냅니다. (죄의 전가) 그리고 정한 사람 하나를 통해 그 염소를 끌고 나가 아무도 살지 않고 살지 못하는 사막 한가운데 광야에 가져다 버리게 되는데 이 사이 백성들의 사이를 지나게 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다 없애기 위해서 지나가는 염소의 몸과 머리에 침을 뱉고 자신의 죄를 마치 그 염소 때문인 것 처럼 다 저주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 괴롭히게 됩니다. 심하게 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죄가 깨끗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염소를 끌고 가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맞고 괴롭힘 당한 염소를 끌고 광야 가운데 던져놓고 한 편으로 건너와 염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염소의 울음 소리만이 근근히 들려오지요. 염소는 힘없이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어느 덧 턱 하고 쓰러지고 결국은 독수리나 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끌고 갔던 사람은 염소의 죽음을 확인 한 후에 백성들에게 알리면 백성들은 환호하며 우리의 죄가 다 사해지고 사라졌다고 기뻐하며 아론은 다시 회막에 들어와 나머지 한 양을 가지고 번제를 드려 제사를 마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1년에 한 번씩 드렸던 대 속죄제의 의식입니다. 

 

 이 아사셀 염소에 대한 말씀은 오직 레위기 16장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사셀이란 말은 scapegoat, 희생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염소 하나를 희생시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염소의 모습은 정확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서 재현되었습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죄없는, 흠없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에 백성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채찍질을 했으며 돌을 던지고 모욕했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해를 가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안의 모든 죄를 전가하듯, 예수를 괴롭히면서 그의 십가가길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그렇게 우리의 죄를 감당할 어린양으로, 희생양으로 오셨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묵묵히 그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어린양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분이 그 고통을 감당하신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인해 도저히 하나님을 쳐다볼 수 없었던 우리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분에게 무엇이든 구하고, 피비린내가 아닌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즐겁게, 평화롭게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어린양으로서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지성소의 큰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어린 양 예수의 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벽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맘껏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면서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닫혔던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벧전 1:18-벧전 1:19]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아담때부터 내려온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속된 것- 금때문에 은때문에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모든 신앙은 어린양 예수의 피의 공로에 의지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피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없습니다.

예수의 피에 의지하지 않는 우리의 열심은 자기의에 대한 환상일 뿐이요,

그것 자체가 우상숭배요 죄입니다. 교만과 허영의 죄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열심, 모든, 헌신, 모든 찬양, 모든 헌금, 모든 기도는 오직 예수의 피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어린양 예수....

이것은 그저 찬양을 위한 수사여구가 아닙니다.

이 이름에는 우리를 향한 그의 십자가의 의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그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이 세겨진 신비 중의 신비요, 은혜인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