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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보다 더 큰 고통  (마 27:46)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보면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동물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빚어 만드셨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를 지닌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고 증거합니다. 물론 그 형상이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동물들과 다른 점으로 이성적인 존재임을 들고 있지만 이것으로 설명이 되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되면서 인간과 비슷하거나 때로 높은 지능을 가진 동물들도 연구가 됩니다. (돌고래 - 80, 침팬지 120, 까마귀 40..) 


성경에서는 영이 없는 모든 생명체를 가리킬 때 짐승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도 영적인 활동을 전혀 못하면 성경은 짐승이라 표현합니다. 

불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있는데 흔히들 윤회라고 할 때에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 아수라- 인간도- 천신도의 서열이 있어서 전생의 업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데 동물과 인간 사이의 세계, 즉 동물같은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아수라"라고 표현합니다. 

흔히들 세상에서 개 만도 못한 인간...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 죽었다. 짐승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니 서로 탓하고, 변명하고,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는 짐승같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잠 12: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영의 양식은 말씀이요, 영의 호흡은 기도다! 기도와 말씀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 인간이지만 짐승이다. 그리고 그 짐승과 같은 자들이 받는 표가 666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짐승들과 같은 인간에게도, 아니 정말 짐승들에게도 하나님의 흔적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궃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동물들도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 만큼은 특별한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을 모르는 부모라 하더라도 자식만큼은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물론 안그런 예들도 간혹 있지만 그런 사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정말 이건 짐승보다 못하다고 충격을 받는 일들 입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농사짓던 땅을 팔고 집을 팔아 대학 보내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간혹 자녀가 공부에 대한 욕심이 더 있어서 유학을 간다고 하면 가진 것 다 팔아도 모잘라 부모는 빚덩이에 않습니다. 

그래도 자녀를 위해서면 그것이 고통인줄 모르고 감당했습니다.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도 자녀를 위해서는 희생하는 마음으로 신기하게도 바뀌었습니다. 


옛날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그렇게 집팔고 땅팔아서 아들을 유학보내어 뒷바라지를 합니다. 뒷바라지 하느라 부모의 가세는 더욱 기울고 몸은 늙어 병들기도 합니다. 

아들은 그런 부모의 희생으로 오랜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해서 부잣집에 사위로 들어갑니다. 

부잣집 딸은 가난하고 늙고 병든 시부모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급기야 아들도 부모와 점점 멀어져 갑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 사람들은 분노하고 아들을 욕하기도 하고,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저게 사람이냐고 한 마디씩 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주위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들이라 부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막상 부모된 마음에서 보면 비록 그런 자녀를 위해 평생 일해 모은 집도 땅도 다 주고 나서도 자식에게 버림받는 인생이지만, 자신을 홀대하는 자녀가 서운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지들 잘살면 되지 하면서 누가 자식이라도 욕할까봐 우리끼리 사는게 편해...그러면서 살아오셨습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 안믿어도 부모이기에 품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짐승에게라도 남아있는 사랑의 흔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 마음은 부모의 마음보다 큽니다. 부모의 사랑보다 큰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것 입니다. 

하나님 명령 지키기 위해서 금욕하고, 스스로 불행한 것을 선택하는 그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고 하나님 주신 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자녀를 희생하고 다 주면 늙고 병들게 됩니다. 그 인생은 시들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자녀는 점점 강하고 유능해지며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부모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자녀를 보며 흐뭇해하며 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는 늙지도 쇠하지도 않는 창조주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살고자 하는 것- 성경은 그것이 죄요, 불행이요, 저주요, 결국 사망이라고 합니다. 

왜? 이 땅은 이미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고, 그 사탄이 인간을 종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맡는 현실을 실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고 싶어합니다. 아니 정성하지 않아도 부모를 떠나고 살고 싶은 것처럼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는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마음, 그러한 가능성이 곁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떠나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은 억지로 붙잡지 않습니다. 

내 분깃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떠나 살고자 하는 자를 붙잡지 않습니다. 

아담, 가인, 이스마엘- 하나님의 주권의 입장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바로가 악행을 행하고, 사울이 범죄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아담을 추방했다. 가인을 내어 쫓았다. 이스라엘을 내 보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넘기셨다고 기록하지만 삶의 현실에서 언제나 나가는 것은 인간입니다. 

추방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집을,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향해서도, 이스라엘 나라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은신처를 제공하시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탕자가 원한 것- 하나님이 가진 능력, 힘, 물질... 

그런데 하나님을 벗어나서 그것을 소유하면 더 행복할 줄 아는데 그 결과는 "허랑방탕" 

인간에게는 그것을 소유할 능력도, 그것을 누릴 능력도 없기 때문에....

자유가 선한 것이 되러면 나에게 계속적으로 유익해야 하는데 인간의 절제력이 없고, 무분별하고, 탐닉하고, 중독되는 존재, 종된 존재.. 


하나님을 떠난 인간- 결국 돼지의 식량을 먹으며 돼지와 함께 생활하는 짐승이 되어 버리는 것

탕자의 은혜- 깨달았다는 것, 아버지의 집을 기억했다는 것, 그리고 돌아왔다는 것, 자격이 없지만, 염치가 없지만,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돌아왔다는 것 - 돌아오는 자를 하나님은 이유없이 맞아 주신다. 회복시키신다. 잔치를 배푸신다. 


그런데 대부분 인간의 더 큰 문제, 깨닫지도 못하고, 돌아오지도 못한다. 자기들이 짐승처럼 산다는 것 조차 모른다. 그저 잘 먹고, 집있고, 차 있고, 돈 있으면 행복한 것 처럼 산다. 

영은 병들고, 관계는 깨어지고, 주위는 자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데 자기 자신에만 갇혀 있어서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롬 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예수의 성육신- 기다리던 아버지가 이젠 기다림을 벗어나 찾아오신 것... 

찾아와서 문등병자 (자기가 죄의 병에 들었지만 병을 느끼지도 못하는 자), 중풍병자 (말씀을 들어도 움직이지 못하는 자) 장님 (참 현실을 보지 못하는 자), 귀머거리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는 자) 찾아다니시면서 고치시는 것 


매인 자로부터 풀어주신 것, 우리를 붙잡고 있는 공중권세 잡은 자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것. 


우리를 풀어주기 위해서 감당하신 것 -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 형벌 - 인류의 역사상 가장 가혹하고 고통스런 형벌 


십자가 형은 죄수의 복숭아뼈 부분에 못을 박거나 또는 밧줄로 묶어서 고정시키고, 다시 두 팔을 벌리게 한 다음 두 손목을 묶고 거기에 못을 박아서 고정시킵니다. 이런 상태로 십자가를 세우면 죄수의 몸은 아래로 쳐집니다. 이때 두 팔이 벌려진 자세이기 때문에 횡격막을 압박하여 숨을 쉴 수 없게 됩니다. 죄수는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자신의 몸을 위로 올려야 합니다. 즉, 복숭아뼈에 박힌 못에 의지해서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하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이 과정이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게다가 그런 자세로 상체를 지탱하는 것은 고통과 함께 극심한 체력 소모로 이어집니다. 결국 죄수의 몸은 다시 아래로 쳐지고, 죽음의 고통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죄수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억지로 몸을 위로 끌어당기고, 그 과정은 극심한 고통을 낳고... 십자가 형벌은 이런 프로세스의 연속입니다. 숨을 쉬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스스로의 몸에 고통을 가하면서 몸을 일으키고, 힘이 빠지면 아래로 쳐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이죠.

죄수의 숨을 대번에 끊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고통을 2-3일간 겪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며 심지어 어떤 죄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일주일 가량을 살아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십자가 처형을 받는 죄수에게는 그의 목숨을 빨리 끊어주는 것이 매우 자비로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을 빨리 끊어주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리를 부러뜨리면 죄수는 더 이상 복숭아뼈에 박힌 못에 몸무게를 지탱해 자세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냥 몸이 아래로 축 쳐지면서 횡격막의 압박으로 질식해 죽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 이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 심한 채찍질... 

      -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비아돌로로사- 거리를 걸으시고 

      - 십자가에 달리심.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것 - 

탕자는 깨닫고 돌아오기라도 하는데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 그렇기에 돌아오지 못하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 가장 쉬운 방법, 그저 그 이름을 통해, 예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그 고통의 중심에서 뱉으신 한 마디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언제나 아버지라 불렀다. 

가상 칠언에 있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모세, 다윗, 선지자...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야훼, 여호와...나와 관계 맺으신, 나를 사랑하시는....


그런데 이 구절에서 만큼은 아버지나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 

왜? 

'하나님'은 공적이고 법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지금 예수께서 부르짖고 있는 탄식의 상대인 하나님은, 더 이상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법정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 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개인적 감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법적인 엄정한 관계가 우선하는 분위기임을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죄악의 심판관으로서의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내용. 


 '버렸다'로 번역되는 아람어 '사박크'는 히브리어로 '아자브'이다. '아자브'는 '내어버리다'는 뜻인데, 단순한 내어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유기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께 완전히 등을 돌리셨고, 예수께서는 영적 소외감과 고독감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은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것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화목, 그 거룩한 지성소에 쳐져 있던 휘장을 몸으로 찢으신 것. 

왜?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 앞으로, 그들을 데려오시기 위해...


그런데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님께 일어난 것 - 늘 교통하던, 대화하던, 지켜보시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져 버렸다. 

우리는 그 고통을 모른다. 

왜 우리는 늘 끊어져 있었고, 가끔 연결될 뿐이고, 또 끊어지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은 늘 붙어 있었다. 

그분이 기도하시면 아버지는 늘 들어주셨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기다리다 못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런데 십자가 상에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감당해야 했던 예수는 인간의 죄악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지는 고통을 경험하셔야 했다. 

영적인 존재가 오로지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이 없는 짐승이 되셨다. 


언제 깨어날 지 모르는 그 시간,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우리는 그 고통의 시간을 기도하면서 이기는데 

예수는 기도의 대상을 잃어버렸다. 끊어져 버렸다. 


[요 19:31-요 19:35]

(요 19: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요 19: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요 19: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왜 다리를 꺾으려 하는가? 십자가의 형틀에 있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려고?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일찍 치우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치워버리려고 행한 것 - 다리를  꺾은 것 - 그러나 예수는 이미 죽어 있었다. 

확인- 옆구리를 찌름 -물과 피


전 의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또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이 구절을 설명하고 있는 의학적 설명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방금 죽은 시체의 옆구리를 찌르면 피와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의학의 권위자들에 따르면 정상적인 심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드문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의학적으로 본문에서 피와 물이 나올 수 잇는 것은 심장이 파열되었을 때뿐이라고 합니다.  

그릇에 피를 담아두면 위아래 두 층으로 나눠지는데, 그것은 핏덩어리와 그 위의 액체인 혈청입니다. 곧 피와 물입니다. 

 

이 일에 대한 의학적으로 적절한 설명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심장은 병사가 옆구리를 찌르기 이전에 이미 파열되어 있었다는 것, 기르고 그 피가 심실이나 그 너머까지 넘쳐서 고여 있다가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핏덩어리와 혈청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은 심장의 파열이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심장은 파열되었을까?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육신의 가장 마지막 상태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 집중하셨던 것- 바로 사랑이라는 것 

심장이 파열될 정도로 십자가 상에서 주님을 죽음으로 인도했던 가장 결정적인 원인- 

바로 나를 위한 사랑. 심장이 말 그대로 터져버린 사랑. 

십자가의 형틀의 고통보다 더 컸던, 어떤 고통보다 더 컸던 것은 바로 나를 위한 사랑.  

내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그 사랑.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