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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 회귀 (사무엘하 6장)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부스족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탈환하므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된 다윗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5장 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브론에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그것을 어떻게 나누냐면 다윗이 삼십세에 왕위에 올라 40년을 다스렸다고 말하면서 헤브론에서 7년동안 유다를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삼심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가 되었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까지는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정해지기까지 다윗은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인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가나안 7족속 중의 하나였던 여부스 족속이 이삭과 야곱을 조롱하는 맹인과 절뚝박이를 조롱삼아 우상으로 만들어 이스라엘을 농락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조롱했던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여부스족속의 그러한 행태를 미워하며 그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 중심을 탈환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온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 중심부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서 통치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목자 삼은 다윗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목자로서 삼았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게 하는 것, 이것이 온전한 구원의 모델입니다. 


다윗의 삶은 왕이 되기 전의 여정과 왕이 된 후의 여정으로 구분합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울 때, 연약할 때, 힘이 들때, 하나님께 매달려서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받은 후에 타락합니다.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노아가 홍수가 그치자마자 포도주에 취해서 범죄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다시 바알과 앗세라에게 무너집니다. 

축복받은 삼손이 데릴라에게 취해 머리를 잘리게 됩니다. 

목숨을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이스라엘의 비밀을 바벨론에게 다 누설합니다. 

40년을 치리했던 엘리 제사장은 나이 많고 비둔하여져서 이스라엘의 타락을 눈감아 버립니다. 

수 많은 교회가, 목사가, 성도가 왕이 된 이후, 축복 받은 이후의 삶에서 무너집니다. 


다윗도 물론 앞으로 나누겠지만 왕이 되고 난 후에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유혹에 때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돌아옵니다. 철저히 회개 합니다.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왕이 되기 전과 후의 신앙이 바뀌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에 신앙의 적은 어려움이 아니라 부유함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신앙을 떠납니다. 

부유하여서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다윗은 부유함에도 늘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왕의 힘으로, 권력으로 이스라엘을 다시리지 않고 믿음으로,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자신을 다시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자는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물질 앞에서 비굴해지지도, 교만해지지도 않습니다. 


사무엘하 6장은 왕이 된 이후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 실로에서부터 나간 법궤는 지금 성전을 떠나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온성을 삼은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셔올 일을 생각합니다. 법궤는 길이가 1.2미터 너비와 높이가 60센티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궤였습니다. 조각목 위에 순금이 입혀져 있었으며 그 안에는 돌판과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 물건들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며 (골판),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고 (만나), 그들의 능력이 되심(지팡이)을 상징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그 중심부의 또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올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고 한 일- 산당, 흩어지는 예배, 자기 편의에 맞춘 예배. 사사기 후반부의 예화들, 자기집에 산당을 세워두고 제사장을 고용하여 자기만을 위한 예배를 드리게 한 것..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한 일- 벧엘과 단에 또 다른 예배 처소를 세운 일, 왜? 자기 편의를 위하여... 


주 5일 근무제로 바뀌니까 주일 예배 시간을 바꾸자. 금요일날 예배를 드리자. 새벽예배를 없애자. 

우리는 10시 반에 예배를 드리지만 거의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대예배 시간- 11시 

1900년도 초반 우리나라가 힘들었을 때ㅡ농경문화가 중심이던 시기에 11시라는 의미- 하루를 온전히 드리기 위한 가장 중심부의 시간. 자기 편의에 맞춘 것이 아니라 중심을, 전부를 헌신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수요예배- 일주일의 가장 가운데 시간- 예배 하자! 

금요철야- 한주일의 일을 끝내고 이젠 푹 쉬고 싶은 시간- 밤세워 기도하자, 부르짖자! 


자기 편의에 예배 시간을 맞춘 것이 아니라 중심을 드리고, 전부를 헌신한 예배였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 중심에 법궤를 모시고자 한 다윗의 믿음 - 

중심을 드리자!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자! 


[신 8:12-14a]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이 사건에서 해석의 논란이 되는 부분- 웃사의 죽음 

법궤를 되찾아오는 길에 그 짐수레를 끄는 황소들이 비틀거리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법궤가 짐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내민다. 


(삼하 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아비나답과 더불어 하나님의 법궤를 오랫동안 보관하던 자. 

그리고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궤를 붙잡다가 죽은 것 -어떠한 악한 의도도 없지 않습니까?

성경은 웃사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 않습니다. .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은 웃사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합의되는 공통된 의견은 그는 법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법궤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 10:8 출 25장 37장, 역대상 15:12-15) 


법궤는 절대로 사람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되고, 레위인들이 법궤에 부착된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서 운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첫 째 레위인이 아닌 수레에 태워 법궤를 운반하면서, 소들이 날뛰어 법궤가 요동하니까 손으로 법궤를 잡은 것입니다. 


왜 법궤를 반드시 레위인들의 어깨에 의해서 운반하게 했을까? 

[대상 15:12-15]

(대상 15:12)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대상 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대상 15:14)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대상 15:1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이것은 법궤를 물건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체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법궤는 반드시 구별된 레위인들이 자신을 성결케 한 후에 메게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로서, 영으로서, 인격체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 법궤를 대할 때 거룩하지 못한 제사장들은 죽어서 나왔습니다. 왜? 법궤는 하나님의 현존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웃사는 법궤를 수레에 실어 황소들이 끌게 했습니다. 황소들이 미쳐 날뛰어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자신의 손을 내밀어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자, 지금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법궤도, 레위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 살아가고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럼 이 말씀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의 현대적 적용은 우리에게 주제넘게 하나님을 관리하려 들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상자 안에 가두고, 수레에 실어나르면서 그것이 훼손될까봐 우리가 하나님을 지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서 어느덧 신앙생활이 오래되다 보면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보호하는 사람인양 교만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 보다 자기 수레에 담은 하나님이 깨지지 않게 내 손으로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교회에는 자기 손으로 하나님을 책임관리하려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자신은 하나님처럼 높아져 가고 하나님은 죽은 물건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한 자들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신앙을 "회칠한 무덤이요,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 23:27) 하셨습니다. 


(삼하 6: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은 지금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까? 웃사를 친 하나님께 분노한 것입니까? 웃사에게 분노한 것입니까? 

웃사에게 분노한 것입니다. 왜? 법궤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웃사로 말이암아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다윗의 뜨거움이 웃사로 말이암아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다윗은 웃사를 탓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반성합니다. 자기가 아직 부족하다고 근신합니다. 

[삼하 6:9-삼하 6:10]

(삼하 6: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그런데 법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이 축복받게 되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순종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 됨을 깨달아 다시 법궤를 모셔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삼하 6:13-삼하 6:14]

(삼하 6: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 6: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레위 사람들이 어깨에 법궤를 메고 여섯 걸음을 걸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겸손을 상징하는 베 옷을 입고 춤을 추며.... 


Dancing with God. 


춤은 홀로 추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추는 것입니다. 음악과 더불어 파트너와 더불어 춥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신실한 기독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나님과 춤추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을 따라 예배하며, 자기의 왕의 복장을 벗어 던지고, 겸손과 회개, 그리고 성결의 배옷을 입고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춤추었습니다. 기쁨과 환호의 순간임과 동시에 거룩하고 진지하며, 엄숙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은 겸손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겸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왕의 직함이 다윗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가장 중심에, 가장 뜨껍게 하나님의 법궤,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132편 


떠돌아 다니는 법궤- 왜? 쉴 곳을 찾을 수 없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지만 머물 곳이 없어서 베다니로 향했던 주님....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하자 하나님의 응답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라." (시 132편 13-14절) 


지난 주 시편 23편을 나누면서 그가 나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그는 우리의 쉴만한 물가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쉴만한 처소인가? 주님이 우리 안에 영원히 머무시기를 원하는가? 

내가 어려울 때에 우리는 늘 주님께 우리의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달라고 인도해 달라 기도하며 또 그렇게 응답받으며 사는데 우리는 주님이 거하시고자 할 때에 외면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만 원하지 않는가?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