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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주일예배 설교'에 해당되는 글 229건

  1. 2018.09.15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히 11:17-19) (1)
  2. 2018.09.08 여로보암의 길 (왕상 11:28-38절)
  3. 2018.09.01 기도로 마음을 치유하라 (행 1:20) (1)
  4. 2018.08.18 머리깎인 용사 (사사기 16장 22-31절)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히 11:17-19) 


히브리서 -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주는 말씀. 

당시의 상황- 그들이 당한 처지- 로마의 극심한 핍박과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의 조롱과 핍박, 회유로 인해 모이기를 폐하는 무리가 생겨나는 등 기독교 공동체에 심각한 위기가 생겨난 때에. 

히브리 기자의 요지- 지금 공동체 위기의 원인은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다. 상황 때문에 신앙의 어려움이 생긴 것이 아니라 결국 믿음이 없어서다. 


그리고 그 믿음의 정체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벨의 믿음에서 부터 시작해서 에녹의 믿음, 노아의 믿음을 거쳐 아브라함에게로 이어집니다. 


금요일날 살펴 보았듯이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제사, 삶의 제사를 드립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그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증거합니다. 에녹의 믿음을 나누면서 우리는 므두셀라의 이름의 의미가 "그가 죽는 날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나누고 에녹은 그 이름의 게시를 통해 그 이전의 삶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은 정확히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세상을 심판하셨음을 창세기의 족보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 때에는 아직 이스라엘 공동체가 세워지기 이 전의 시대입니다. 세상은 타락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찾아보기 힘들 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순종했고, 그 열매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히 11:6)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 하면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을 떠올리며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대인들조차도 그들 이스라엘 공동체의 조상으로 노아도 아니고 실질적인 민족의 조상 야곱도 아니고 아브라함을 그 민족의 시조로 삼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에녹보다, 노아보다 훌륭하기때문에 그러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 쪽의 확신이나 신념,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때론 연약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온전한 하나님의 증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는가 하는 믿음의 대 전환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굳센 마음, 확신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의가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지 못했던 자가,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 분을 믿지 않을 수 없도록 그를 만들어가실 때에 믿음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이지요.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믿음은 어떤 자가 믿음을 가져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택하시고 지으셔서 그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아브라함의 형제,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 어디서 거주하던 자인가- 갈데아 땅의 우르지방- 바벨론 땅.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우르 지방에 있을 때에 주신 말씀- 그래서 데라와 조카 롯과 사래와 아브라함이 같이 출발. 

그런데 아버지 데라가 죽을 때가지 하란에 머물다가 데라가 죽자 그제서야 비로서 가나안 땅으로 출발. 


오히려 아브라함을 택하사 그가 가나안에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믿음과 인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기 까지 모든 상황을 정리하신 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데라를 먼저 데려가심으로 아비집을 떠나게 하셨고, 롯의 종과 다툼을 일으켜 그와 헤어지게 하셨다. 


  • (히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약속의 땅에 갔지만 그들의 신분은 외국인, 나그네, 땅을 소유할 수 없다. 그저 빌려서 살 뿐이다. 

아브라함이 소유한 땅은 오직 막벨라 굴- 굉장히 비싼 값을 치루고 그 무덤을 소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런데 그가, 이삭이, 야곱이 믿음을 갖고 그 땅을 떠나지 않고 거했는가? 

무슨 사정만 생기면 그들은 언제든지 떠나려고 했다. 도착하자 마자 기근이 생기자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은 아식과 형 에서를 피해 라반이 거하고 있는 땅으로.... 


그런데 그것을 돌이켜 다시금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이- 하나님- 출애굽을 통해 그것을 완성하신 하나님 . 

누구의 믿음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이 아니라 그곳에 거하도록 참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인내와 경륜. 

어떻게 아브라함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는가? 그들이 의지하는 애굽보다,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크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믿음으로 사래는 이삭을 낳았는가? 


[창 17:15-19]

(창 17: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창 17: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창 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8:10-15]

(창 18: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창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 18: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창 18: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온전히 믿었는? 사라가 온전히 믿었는가? 

그들은 웃엇다. 그런데 그 비웃음을 참 웃음으로 바꾸신 이는 하나님 이시다. 

이것을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능치 못한 것이 없으신 분- 전능하신 하나님, 내 이성으로, 과학으로, 상식으로, 도저히 안 될 것을 이루신 분. 


[창 21:1-7]

(창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 그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 

(창 21: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창 21: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창 21: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비로서 순종하는 아브라함) - 아브라함의 순종을 의로 여길 수 있을까?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창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누가 믿곗냐만은 그것이 내게 일어났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다. 경험했다. 하나님은 애굽보다 크고 강하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그 분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러면 끝인가? 


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신다. 

왜 시험하실까? 시험은 왜 치나? (그냥 공부하면 좋지 시험은 왜 치나? 공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약 1:2-4]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가 없어서 생긴 결과 - 이스마엘, 사울- 불순종의 예배)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완성시킨다. 끝마치신다. 

무엇을 통해서? 시험을 통해서 


시험이 없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또 기근이 오고, 또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방법대로 이루려 하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으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매 번복되는 실패... 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기에... 


  • [히 11:17-19]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히 11: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말씀을 읽다보면 아브라함은 아삭이 안 죽을 줄 알고 드렸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다? 

이 시험의 중심은 두가지

 - 외아들을 드리는 것 (가장 귀한 것, 보물 같은...) -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브라함이 우상을 섬기는 자였고, 이스라엘의 힌놈의 골짜기에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치루어졌던 제사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는 시험) 

 -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갈등, 충돌.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창 22장 1-2절 :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 지금까지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그 분의 음성을 들음.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3일길을 가고 

5절 - 종들에게 이르되 여기서 기다리라. 


3절에서 먼저 이삭을 누구에게서 분리 - 사라에게서, 이것을 상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솔로몬의 재판 - 너의 믿음을 위해 네 아들을 죽일 수 있는가? 

                      - 엄마는 못한다. 절대 못 가게 하지... 

                      

 그리고 종들에게서 이삭을 분리 - 왜 데리고 가는가? 제사 할 때 필요한 나무 및 제사 기구들을 위해서 

 그런데 이삭을 바칠 때 그들과 분리 - 갈등을 미연에 방지 

-> 외아들을 바치는 시험 


두 번째 -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의 갈등 - 이삭이 죽기까지 풀 수 없는 문제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절)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절)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왜? 이삭을 통하여 자손을, 민족을 이룬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이건 죽이는 척 한 것일까, 정말 죽이려 한 것일까? 


이 납득이 안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99세 때 나타나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막혔을 때에 그 분의 전능하심으로 이삭을 주셨던 하나님. 

그 분의 방법을 믿지 못하고 조롱헀던 나를 이삭을 통해 믿게 하시고 진짜 웃음을 주셨던 하나님.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내 모든 이성과 생각과 방법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비로서, 마침내 믿은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십자가의 신앙을 넘어 부활의 신앙을 본 것이다. 


지금까지 우상숭배하며, 늘 머뭇거리고, 비겁하고, 하나님을 비웃으며, 인간적이 방법을 앞세웠던 아브라함이 온전히, 부족함 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그 결과가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창 22:12) ...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곳이 모리아산 - 다윗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 


모든 우상의 제사가 사람으로서, 자식을 바침으로서 드려졌던 그 시대에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믿음은 이제 하나님을 믿는 어떤 예배에서도 사람의 제사가 아닌 반대로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이 일어나게 되는 

오직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 이성과 믿음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믿음 - 임마누엘 칸트, 

스피노자 - 성경 안에서의 모든 이적과 신비를 제거

내 한계에서 못 벗어나는 것 

그런데 신앙은 끊임없이 나를 벗어나는 것 


  • 맹신과 신앙 

맹신은 말씀이 기초가 아니고, 자기의 신념에 근거한 맹목적 믿음- 시작이 나에서 시작하고 말씀이 아닌 다른 권위에의 복종 

신앙은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시작 - 영적 분별이 반드시 필요. 


그는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인내와 믿음과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분량에까지 자란 우리 모두의 신앙의 여정의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여로보암의 길 (왕상 11:28-38절) 


지난 주 나눈 솔로몬 - 인류 역사상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인물- 지혜와 더불어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 

그런데 왜? 그가 여호와를 사랑헀다. 일천번제를 드린 이유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듣는 마음, 곧 지혜를 구한 이유도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 


(왕상 3: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을 그의 아버지 다윗이 말한 것을 따라 삶으로 보여 주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혹은 훈련에 의해서 말씀을 따라 살 수는 있다. 바리새인들처럼... 

달리 말하면 율법대로,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다. 댜른  목적을 위해서..인정받고, 복받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데 거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랑하는 경우는 없다. 

성경은 꼭 찝어서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라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사랑받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말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지금도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고 도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았던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왜? 이방여인들과 결혼하면서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왕상 11: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계명 - 너희는 그들과 통혼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그러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2절)  


그 결과 -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3절) 


9절) 솔로몬이 마음을 둘려- 완전히 뒤 돌아섰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11절)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런데 12절에 보면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바로 그 신하가 여로보암 -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다윗과 솔로몬이 속한 유다지파와 또 다른 한 지파 베냐민 지파만 제외하고 통째로 주었던 그 신하. 


이 후로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유다와 베냐민) 북왕국 이스라엘 (10지파) 

북왕국 이스라엘 - 19왕

남왕국 유다 =- 20왕 

남왕국 유다- 대개가 악햇지만 간간히 선한 왕들, 아사왕, 여호사밧왕, 히스기야, 요시야,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19명의 왕중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악한 왕들이 나올 때마다 후렴구처럼 따라오는 말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가 처음부터 악한 것을 위해 선택된 악한 왕이었을까? 그는 왜 악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우리는 그를 통해 어떤 자가 실패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왜? 성경은 역사의 객관적 기록이기 보다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떄문이다.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 아버지 느밧을 이어 솔로몬의 신하였다. 


(왕상 11: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청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더니


그는 용감했을 분만 아니라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로부터 하나님이 그에게 열지파를 주게 될 것을 듣게 된다. 

그것을 예언하는 것도 마치 그를 위한 이벤트를 여는 것과 같이 특이하게 예언을 합니다. 

선지자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고 그와 단 둘이 들에 있을 때에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으로 찢어 여로보암에게 "너는 열 두 조각을 가지라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찢어 주겠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갈라서게 되리라는 표현도 되지만 그것을 찢을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요. 마치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먹이시며 내 살과 피를 떼어 주시는 모습처럼 하나님을 떠난 솔로몬을 향한 안타까운 모습과 그것을 용감하고 부지런한 종 여로보암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나는 표현입니다. 


32절) 내 종 다윗과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그 한 지파?> 베냐민 

에브라임과 베냐민 - 사사기 마지막 부분 

에브라임 출신의 레위인의 아내가 바람이 나서 예루살렘으로 와있는 것을 데리고 가다가 베냐민 땅에서 아내는 그 지역 사람들로부터 강간을 당하여 죽고 이에 그 레위인이 시체를 토막내어 열두 지파에게 보냄으로 베냐민 지파가 거의 멸종되다시피...


그러니까 에브라임 사람 여로보암의 입장에서는 큰 혹을 떼어 주는 것과 같은 

 

 솔로몬에게는? 그 베냐민 지파에서 누가 나오는가? 바로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 

 그럼 다윗왕이 속한 유다 지파와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사이가 좋을까? 

 솔로몬에게는 혹을 붙여준 격.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하는 이유를 33절 

(왕상 11:33)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


왜? 나를 버리고 우상숭배 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여로보암에게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왕상 11:37-왕상 11:38]

(왕상 11:37)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왕상 11:38)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마음대로 다스려라. 그런데 내 말을 지켜 행하면 다윗에게 한 것 같이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얼마나 큰 은혜인가? 왜 그 영광이 솔로몬에게서 떠나 자신에게 주어졌는지를 가르쳐주고 네 마음대로 다스려라 . 그런데 내 말에 순종하면 네 집- 대대로 왕조를 이루게 하리라. 


그 후 솔로몬이 죽고 이 말씀대로 여로보암이 열지파를 소유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이스라엘 나라의 이름을 그가 취하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베냐민 지파와 유다지파만을 다스리는 그야말로 처참한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그럼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경배하고 솔로몬이 한 것처럼 예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로보암이 왕이 되자 가장 걱정 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왕이라는 자리를 배앗길 염려부터 합니다. 


[왕상 12:25-33]

(왕상 12: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왕상 12: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이 나라가 다시 다윗에게 가면 어떡하지?) 

(왕상 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왕상 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애굽에서 인도한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신들이라-> 하나님이 아닌 완전한 우상으로... (출애굽기의 황금 송아지... 자기들이 경험한 하나님, 여로보암의 황금 송아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그저 자기들을 이롭게 하는 신) 


(왕상 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 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왕상 12:31)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왕상 12:32)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 12:33)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그들의 예배 - 하나님 아닌 황금 송아지 - 그들의 신들 .. 

                  - 레위인 아닌 자격없는 제사장 

                  - 그들이 마음대로 정한 절기.

                  - 성전이 아닌 산당 예배 


그래서 이 행위로 말미암아 전국에 흩어졌던 모든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유다에 집결하게 되는 결과 

전국에 흩어졌던 참 예배자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유다로 향하게 되는 결과. 


두 번의 경고 


1.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 

[왕상 13:1-왕상 13:2]

(왕상 13:1)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왕상 13: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유다 말기의 요시아왕에 대한 예언을 이미 여러보암 때에....


2. 아히야를 통해 (왕상 14:1-20) 

자기 아들 아비야가 병들어서 자기 아내를 변장시켜 실로의 제사장 아히야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헀던 선지자에게) 

그는 이미 노쇄하여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 


이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 


[왕상 14:7-왕상 14:10]

(왕상 14:7) 가서 여로보암에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왕상 14:8)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내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따르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왕상 14:9)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왕상 14:10)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 그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심 

(왕상 14:16)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니라


  • 솔로몬과 여로보암 

여로보암 - 솔로몬 못지 않은 축복을 받은 사람. 과부의 아들이었던 솔로몬의 신하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나라 전체의 왕이 됨. 

왕이 되기 전의 그의 모습 - 큰 용사, 부지런한 자 

왕이 되고 나서 그의 모습 - 왕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자 

그의 두려움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


자기의 죄가 드러나자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두 왕 - 사울과 다윗 

사울: 자기가 왕에서 물러나게 될 까봐,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봐 

다윗: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그의 두려움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솔로몬의 실패 원인: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김... 그러다가 하나님보다 여인들을 더 사랑하게 됨 

여로보암의 실패 원인 :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세상을 잃어버릴까 더 두려워함. 

 

 만약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 세상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Posted by 소리벼리
 

기도로 마음을 치유하라 (행 1:20) 


(행 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를 배반하고 은 30냥에 팔아넘긴 가룟유다가 그 값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오면서 죽은 후에 그 유명한 마가 다락방에 120여명의 문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유다의 직분을 대신할 새로운 사도를 뽑기 위해 구약성서의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이 말씀 그대로 유다가 샀던 밭은 피밭이라 불리우며 아무도 사지 않는 황폐한 땅이 되었고 잘 알다시피 유다의 직분은 제비뽑기를 통해 맛디아가 대신하게 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다윗의 이 시편은 과연 다윗이 미래의 유다를 예언하기 위해 영감을 받아 지은 시인가? 


베드로가 인용한 구절은 시편 109편에서 인용된 말입니다. 

시편 109편을 펴놓고 함께 읽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시 109:1-3]

(시 109: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시 109:2)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시 109: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 이 구절은 어떤 주석을 보아도 그 배경이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추측하기로 다윗이 누군가에게 굉장히 심한 공격과 핍박을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절까지는 다윗을 핍박하는 자가 복수로 나오다가 6절부터는 특정한 한 개인에게 집중되어 그를 향해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런데 이 6절부터의 내용을 보면 이게 과연 기도인가? 과연 다윗이 이러한 기도를 드렸을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6절)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의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절)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절) 베드로가 인용한 바로 그 구절-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여기까지만 해도 감히 읽어 내려가기가 힘이 든데 그 뒷 구절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9절)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절)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머먹게 하소서 

11절)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이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3절을 보면 -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도의 저주를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17-19절)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그들이 날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 기도를 보면 누가 누구를 저주하는 것인지...


21절)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나를 건지소셔->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주소서 

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며 중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시 109:28)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 이 구절은 형대에서는 거의 읽혀지지 않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에 의해 과연 다윗이 썼을까 의문시 되었던 본문입니다. 


왜? 

다윗은 구약의 인물 중 누구보다도 인격적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핍박했던 사울도 다윗은 두 번이나 죽을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용서하고 그가 죽을 때에는 진심을 다해서 울었습니다. 

그의 자녀 압살롬이 배반을 하여 그를 죽이려 할 때에도 말없이 피해 있다가 그가 죽자 통곡을 하며 그를 죽인 장수들을 짍책합니다. 

왕으로 피난을 갈 때에 시므온이라는 일개 백성이 그를 저주하였어도 그는 그 저주를 들으면서 복수하지도 반응하지도 않고 묵묵히 그 앞을 지나 갔습니다. 


온유함의 대 명사 모세 조차도 백성들의 거듭되는 원망에도 화를 내는데 다윗은 자기를 핍박하는 자에게 악으로 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다윗이 109편의 시를 썼을까? 그렇게 기도했을까? 


다윗은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목자일 때나 왕일 때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습니다. 실수는 해도 반역은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린아이 같이 순전하며 목자일 때나 왕일 때나 찬양이 끊이지 않습니다. 

저는 다윗을 좋아하고 다윗을 닮고 싶고 다윗같이 목사가 아닌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다윗을 좋아하고 다윗의 영성을 연구하다가 저는 이 기도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어떤 시편보다 이 109편의 시편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 강해가 끝나고 지금까지 저는 2011년부터 제가 깊이 묵상하며 해왔던 설교를 창세기부터 시기별로 정리하며 다시 한 번 제 설교와 신학, 신앙을 되돌아 보고 있습니다. 

제가 해 온 설교 중에서 시편 109편의 설교는 제가 가장 깊이 은혜 받고 또 아끼는 설교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행했던 기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하는 기도, 스데반이 똑같이 행했던 기도에 익숙합니다. 

어제 새벽기도회 말씀 제목이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나누었는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상대하며 받은 상처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실꺼야.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이 비록 이러이러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상하게 기도해 놓고 나서 정작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우르르 무너집니다. 고상하게 기도해놓고 나서 저질스럽게 삽니다. 


  • 창세기 3장 15절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옷을 지어 입는 것이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고서는 부끄러워 서로를 바라볼 수도,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이후, 사람이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도, 그리고 사람들 끼리 상대할 때에도 민낯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가려야 합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내 죄를 가려야 하고, 옷으로 피부를 가려야 하고, 천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고, 화장으로 민낯을 가립니다. 맨 모습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악의 결과입니다. 


  • 20세기를 변화시킨 가장 위대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정신 분석학의 프로이트는 사람의 본질은 결국 본능, 이드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육이나 교양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포장하지만 깊은 곳에는 결국 식욕, 성욕, 탐욕같은 본능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리고 있는 것을 다 걷어내면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원초적인 욕망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육이나 종교를 통해 교양을 쌓아 자신을 가리는데 그렇게 가려진 인격을 가리켜 Super Ego 하고 하지만 이 super ego는 본래의 자기가 아니라 억압되고 포장되고 가려진 자기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느정도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악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연 상태의 인간입니다. 

그런데 과연 super ego가 억압된 자아만을 가리키나요? 

신앙으로 정말 의롭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가요? 


  • 저는 목사이고 목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성령과 피로 거듭남을 체험하고 성화를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과 사랑과 은혜가 나를 정결하게 바꾸어 줍니다. 

그것은 왜곡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 안에서 우리가 죄악을 벗고 참 자유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된 우리가 저절고 깨끗해 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긾은 내면에 주님이 임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 모습, 자기의 민낯, 자기의 본능을 우리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가릴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가리는데 익숙합니다. 

기도는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깊은 은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더럽고 죄악된 세상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똑같이 그 분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가장 깊은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죄와 어둠의 공간에 거하시길 원합니다.


  •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죽자 예수님은 삼일을 지체하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원망을 하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 거하는데도 주님은 심일을 지체하시고 삼일 만에 오셔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무덤 앞에 서서 "돌 문을 치워라"고 하십니다. 그 돌문을 치운 후에 "나사로야 나오아, 사망과 절망과 어둠에서 나와 이제 새 사람을 입으라"고 외치십니다. 

 

 다윗의 영성의 가장 깊은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어떤 필터링도 없이 가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통스러운데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고, 미워하는데도 사랑한다고 사랑하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미워 죽겠다고, 저 사람 좀 죽여 달라고, 그것도 모잘라서 그의 자녀도 후손들도 아얘 뿌리채 뽑아 달라고.... 

 

 하나님은 다윗이 그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나무라지 않습니다.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언어를 다 품으시고 안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다윗은 자신의 언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 보다 더 심하게 저주하고 더 극단적으로 미워하는 자신을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의로운 자기가 아니라 그들과 똑같고,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러워서 감히 얼굴을 들 수 조차 없는 자기의 소리를 듣고 몸서리 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그 추한 모습을 보는 순간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것입니다. 

 누구도 자기보다 악하지 않으며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으시며 인내하시고 사랑하셨는지 다윗은 울었을 것입니다.

 

 내 모습을 다 보였을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납니다. 

 

 고상하게 기도한다고 해도, 화장을 이쁘게 했다고 해도 우리의 본질이 바뀌진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고상하게 기도하면서 저질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저질스럽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만지심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모습이고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다윗은 이런 개인적인 내용을 하나님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앞에서 부르면 회중들이 따라 불렀다는 소리입니다. 따라 부르면서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이 저질스런 기도를 합창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합창하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습니다. 

어떨 때에는 정말로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기도도 너무 고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고상한 척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예수님 앞에서 위선자, 누룩이라는 혹독한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미워하는 데에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꼭 정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 본문에는 두 사람의 서로 저주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그 미움을 사람들에게 푸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미워하게끔 하면서 자신은 의로운 양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그러한 미움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저주를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직접 저주하면 사단이 납니다. 부작용이 심합니다. 뒷 감당하기 힘듭니다. 자기가 견디고 참으면 홧병납니다. 우리의 육체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아뢰면 그 분이 우리를 만지십니다. 때로는 기도하는 그 대상을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만지시고 위로하신 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간관계에서 빈틈이 없던 자였습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도, 압살롬과의 관계에서도,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와의 관계에서도 다윗은 언제나 인격적인 승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감정을 가지고 자신이 필터링 하고 검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 가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민낯을 가져 가십시오. 

그리고 그 분께 아뢰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십시오. 기도로서 마음을 치유하십시오

 

 

Posted by 소리벼리

 

머리깎인 용사 (사사기 16장 22-31절) 


사사기 - 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실패했는가? 

왜 은혜의 땅에서 은혜롭게 살지 못하는가? 


지난 주 - 기드온: 소심하고 연약한 자를 큰 용사로 부르시는 하나님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숫자를 철저히 줄이고 빈항아리와 횃불 (자기 뜻, 자기 의를 버리고 오직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신) 을 가지고 미디안을 대적하게 함. 

큰 용사는 무엇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 골리앗이라는 외형을 보았더면 대적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오직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능멸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나서게 된다. 무모한 용기가 아니다. 그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울이 그에게 사울의 검과 갑옷을 주었을 때에 "익숙하지 않은 고로..." 그는 자신의 삶에서 익숙한 방법을 가지고 나왔다. 양들을 돌볼때 그들을 지키는 수단이었던 돌팔매의 명수 

   그것을 통해 담력을 키웠다. 사자도 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적인 믿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용되고 훈련된 믿음이 있엇다. 그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임상 경험이 있었다. 

                                                         

 기드온과 다윗과 정 반대의 편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용사 - 삼손 

 오히려 교회 바깥에서 많이 회자 되는 인물 - 

 머리 기른 남자를 보면 삼손...영화와 연극, 회화나 조각의 주요 주제.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 

 사사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예하여 다룬다. (13장- 16장) 

  

 그의 출생- 영웅의 서사 

천사가 그의 출생을 알림 - 셰레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경에 나와 있는 가장 큰 능력을 부여 받은 인물 - 솔로몬 (지혜), 삼손 (힘)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사건으로 유명 

삼손은 혼자서 블레셋을 상대 - 나귀으 턱뼈를 가지고 천명의 블레셋 군사를 죽임. 

삼국지의 조자룡, 관우보다 더한 역사상 유래없는 용사. 


그러나 그의 끝은 시작처럼 훌륭하지 않다. 

비참하고 비장하고 초라하다. 

이스라엘을 20년간 이끌었던 그의 죽음 앞에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옹족인 유다인들에 의해서 블레셋에게 넘겨졌다. 


사사기의 전형이다.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행복하지 않고 은혜는 경험했는데 기쁨이 사라졌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가 아니라 시작은 좋았는데 끝은 비참하다. 

왜 그랬을까? 


13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 또 짓는 죄, 다시 짓는 죄.... 회개 후에 또, 토한 것을 먹음...

왜? 자존감이 무너지고, 정체성이 사라지고 사탄의 참소의 빌미를 제공.. 한 번 습관들이면 벗어나기 힘들다. 


그 결과 -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다. (2절) -> 일을 해도 열매가 없다. 결과가 없다. 이것이 죄의 결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을 이야기한다. 

12절) 마노아가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14절)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마노나- 나로 염소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15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지 못함이니라 

-> 그럼 15절은 무엇을 위해 준비한 것인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자식 준다니까 신에게 바치는 우상제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17절) 

달리 말하면 그 말이 안 이루어지면 하찮게 여긴다는 소리? 그들의 복을 기원하는 우상에게 하는 소리 

이름을 왜 묻는가? 넌 어떤 존재이구나. 그 정체와 한계를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이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 내 본질,

그리고 피조물에게 지어주라 하시는 것 - 이름을 통해서 지배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 기묘자 (Beyond Understanding)-> 네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이름,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이 물으면 누가 보냈다 하리이까? 

스스로 있는 자가 보냈다 하라. 

아니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 마라. 난 나다. 난 이름으로 제어받지 않는다. 


그래서 삼손이 태어난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라는 의미 


그런데 삼손이 커서 제일 먼저 한 일 - 블레셋의 여인을 보고 결혼시켜 달라. 

삼손 - 여인들 이야기 

세명의 여인 - 첫 번째 아내, 블레셋 인

들릴라 

그리고 들릴라 만나기 전에 갸사의 기생(16절) . 

 

딤나 -  에돔의 후손이며 아멜렉의 본거지가 딤나이고 야곱의 아들 유다가 창녀로 둔갑한 다말과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곳. 여러가지 죄악의 본산지가 이 곳 딤나인데 하필이면 삼손은 그곳으로 내려가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

딤나에서 한 일 - 젊은 사자를 찢어 죽인 일 - 8절_) 그 사자의 주검을 본 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끌이 있는지라. 

9절)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않았다. 

-> 사자의 주검에서 나온 꿀- 부정한 것. 죽은 것은 부정한 것 그런데 그것을 먹고 부모에게도.... 


자, 삼손은 그 출중한 능력에도 실패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자신의 삶을 허비했고, 방탕하여 스스로 온갖 고난을 자처했습니다. 우리는 삼손이 저지른 실수를 통해 우리 신앙인이 저지르기 쉬운 전형적인 방식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신앙적인 실패들을 진단할 수 있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잘못된 신앙습관으로 인해 다가올 문제들도 피할 수 있습니다. 

 

1. 그는 자기 성질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라 감정의 사람. 

 그는 자기 성질을 다스리지 못했고 빈번히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를 내곤 했습니다. 그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기는 복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내를 꾀어 자신이 낸 수수께끼를 푼 블레셋 사람 30여명을 불같이 화를 내며 죽여 그들의 옷을 취하기도 했고 그렇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들판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15장 7절을 보면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11절에 보면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그러면서 또 다시 1000명을 죽여 버립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한 번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나 명령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감정대로 움직였고, 자기 맘에 안들면 다 쓸어버리는 자였습니다. 


2. 다른 그의 약점은 그는 정욕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당할 자가 없을 만큼 강한 자였지만 도덕적으로는 자기를 통제할 수 없는, 아니 주위의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는 육체의 정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이면서도 늘 여인들과의 추문이 뒤따르는 자. 여자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세상적인 욕망을 쫓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능력을 다 잃어버리고 결국은 눈이 빠져서 맷돌이나 돌리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가진 힘의 원천을 끊질기게 묻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강, 지혜, 능력, 사랑을 끊질기게 물어 못쓰게 해버리지요. 

어느 누구도 실패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는 우리의 삶의 습관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실수를 통해 회개하지 않고 고치지 않고 돌이키지 않을 때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점점 죄에 무딘 자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가 신앙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완전히 소진시키고서야 비로서 자신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해구나 후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는 “이건 내 삶 속에서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야. 난 그 부분엔 항상 넘어질 수 밖에 없어. 이건 내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부분이야. 이게 바로 내 모습이야”하고 포기하거나 합리화시킬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어두운 한 부분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내어놓기를 바라십니다. 삼손이 잘못한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지도 않고 단지 습관적으로 죄를 반복했던 그의 무감각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의 악순환을 끊을 능력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고 지금도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솔직하게 그 분에게 내어 놓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실수, 허물을 내어놓고 정면으로 부딪치고자 할 때에 우리에게 그것을 이길 능력을 주십니다. 


3. 세 번째 그의 실수는 그가 주위에 좋은 친구들을 두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특별한 임무를 위해 그를 선택하셨지만 그는 건전하지 못한 친구들과 어울렸고, 그의 친구들은 그를 잘못된 길로만 인도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면서 누구와 어울리는가? 그것은 우리의 전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선택입니다. 우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그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에 방해가 되는가?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를 살펴보아 신앙에 유익이 되는 사람을 즐겨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다양하게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인간관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인간관계의 중심, 내가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고, 만족을 얻으며, 즐거음과 행복을 느끼는가? 그 사람들이 내 신앙의 유익한 사람인가? 아니면 내 신앙을 소진시키는 사람인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잘못된 교제는 우리의 사고를 방해하고 삶을 망가뜨립니다. 


4.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삼손의 실수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는가? 영적인 일에 진지하고 하나님을 진지하게, 성실하게 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이면서도 항상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 일에 매달렸습니다. 자기 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은 욕망에 이끌리며 행동했습니다. “해서 기분 좋으면 했고, 기분 나쁘면 죽이거나 불을 지르는 것”이 삼손의 행동양식이었습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서 태어났지만 삼손은 늘 하나님의 계획엔 무관심했고, 자기 육신의 욕구대로만 살았으며 그 결과 그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상으로부터도 버림받은 무가치한 사람으로 되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린 20년 동안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지 못하다가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었던 것은 단 두 번 나오는데 한 번 죽기 전 자신이 묶여있던 집을 무너뜨릴 때를 제외하면 그가 목이 말라 부르짖었을 때입니다. 육신적인 목마름이라 할지라도 그가 부르짖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물을 내리셨고 그래서 그는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이름붙이기도 했지요. 인생의 대부분을 그는 충동적으로 성급하게 자기 능력대로 행동했지 결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 분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예비하시고, 도움을 주십니다. 삼손은 자신이 목마를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목마름이 지나자 또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이라는 것, 하나님을 진지하게 예배한다는 것은 날마다, 매 순간 마다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분의 인도하심과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손의 생이 마감했으면 그는 정말 비참한 삶으로 끝을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후였지만 그는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기도했습니다. 
(삿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그렇게 마음먹자 하나님은 잃어버린 그의 힘을 회복케 하셨고 그가 영웅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도록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수많은 적들이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기 위해 세운 다곤 신전에서 삼손은 가운데의두 기둥 사이에서 그 기둥을 밀어내어 모든 이방신전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 3000명을 죽게 합니다. 애초에 삼손을 보내신 목적을 완성하고 죽게 합니다. 

대개의 경우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파했던 다른 일반적인 사사와는 달리 삼손은 영웅으로 태어납니다. 날 때부터 천사가 그의 탄생을 예비했고 그는 블레셋 사람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삼손과 같은 능력을 모두 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 세상에서 눈멀고 머리 잘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능력이 있음을 알고 교만하여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 합니다. 내 뜻, 내 정욕, 내 욕심, 내 성질대로만 살아가다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모두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엉망이 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이젠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날 사용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삼손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무릎꿇고 부르짖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택하신 어떤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누구에게나 창조의 목적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뜻의 중심을 발견할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고 발휘활 수 있습니다. 

큰 격려가 되는 부분은 실패의 연속을 살다 간 삼손이지만 하나님의 명예의 전당, 믿음의 선진들을 기록한 히브리서 11장에 그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야기 해 줍니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들어 쓰시고 그를 사용하여 선하고 위대한 일, 그가 맡기신 사명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삼손과 같은 능력,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이상 허비하지 말고 마지막 남은 여생. 하나님께 진지하게 우리의 삶의 목적과 사명을 물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너를 넘어지게 하고, 네게 장애가 되며, 내가 네 삶 가운데 역사하게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을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잘못된 성질, 정욕대로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내어놓고 주님을 찾을 때에 주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가치를 아시고 우리 안에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아십니다. 우리 혼자 사용하면 그것은 사라지고 결국 눈먼 삼손처럼 맷돌만 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이 그 분의 능력대로 일하게 하실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