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012018  이전 다음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무릎꿇지 아니한 자 (롬 11:1-5)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역사에 있어서 그들의 반대편에 있었던 자들.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며, 때로는 그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게 하던 나라들.

공의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의 것을 취하고자 했던 나라.... 

 

애굽-바벨론-아말렉-가나안민족-블레셋-앗수르- 페르시아- 로마-알렉산더 제국....

의 공통점- 물질문명, 힘, 권력, 지식, 그 시대의 최고가 되고자 했던 나라...

신앙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돈과 성공이 최고다. 인간의 행복을 물질에서 찾는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는 마르크스, 레닌이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다 실패한 돌연변이나라. 

이미 역사적으로 실패가 판명된 인간 스스로 공의로울 수 없음을, 스스로 나눌 수 없는 존재임을 알려준 실패한 나라...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나날이 변함없이, 인간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아직도 건재한 신앙의 적.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냐 물으셨던 장소.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의 도시, 로마의 황제 캐샤르와 이스라엘에 파견된 분봉왕 빌립을 기리며 세웠던 바로 그 도시의 중심에서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난 저들과 반대로 낮은 자를 위하여, 가장 낮은 모습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외쳤던 바로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 


[딤후 2:20-21]

(딤후 2: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큰 집- 하나님의 나라 

금그릇 은그릇 - 세상이 추구하는 인간상, 목적...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금그릇 은그릇 뿐만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


세상- 금그릇은 귀하게 쓰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 천한 그릇.... 

하나님 나라- 주인에 쓰기에 합당한 그릇은 그릇의 종류에 관계 없이, 세상의 지위나, 학벌이나, 혈연이나, 어떤 배경에도 관계없이 깨끗한 그릇... 


교회는 금그릇 은그릇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만드는 곳이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 인간을 질그릇이라 한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서 은혜를 정의한다. 

우리는 자기가 금그릇이라 부르건, 은그릇이라 여기건 하나님 앞에서 깨지고 비틀어진 조각목이요, 질그릇이다. 


교회가 왜 불패하는가? 깨끗한 그릇 만드는데 애쓰는 것이 아니라 금그릇 만들려고 하기 때문...

더러운 금그릇은 버림받는 그릇-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 예수님을 버리고 뒤돌아 서는 부자 청년이다. 


그런데 깨끗한 그릇을 추구하는 삶의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다. 단절이다. 

하나님으로 가득 찰 때는 세상과 맞서고 승리할 때도 있지만 세상을 만나고 어울리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외로워진다. 

상처를 입는다. 실망하게 되고, 때론 절망하게 된다. 타협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다.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물리쳤던 엘리야가 그 고통 속에서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이제 죽어도 좋습니다. "라고 절규한다. 

모세도 그랬다. 

이제 죽어도 괜찮다고 제발 데려가 달라고 외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엘리야에게 사람을 세우라고 전한다. 돕는 자가 있다고 말한다. 

너와 같은 자, 너를 도울 자, 너와 함께 할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7천명의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세상에 무릎꿇지 않은 남은 자가 있다고 전한다. 


나 혼자라면 외로울 수도 있고 책임이 무거울 수도 있고, 그리고 자칫 교만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칠천명 중 하나라면 여유가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위로를 얻는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명, 돕는 자, 동역자, 함께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곳이 교회요, 특별히 로고스 교회이다. 

그들 하나 하나에게 임한 조각 구름같은 은혜가 모여 큰 비가 된다. 큰 은혜의 강물이 된다. 

이런 교회, 이런 새해, 이런 우리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송구 예배

에벤에셀의 하나님 (삼상 7:12) 


(삼상 7:12)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론 평원의 아벡에 포진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포진했던 장소이다.

이스라엘은 이 싸움에 패하여 4천여명이 전사하게 된다. 


블레셋군에게 대패를 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제사장이 있는 실로에 보관되어 있는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와서 전쟁을 다시 치루자고 해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온다.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이 진동할 정도로 환호하게 되고 블레셋 군인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전쟁터에 도착했다고 하면서 두려워 떨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도 떨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블레셋 군사들이 추스려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홉니와 비느하스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 3만명이 죽게되고 하나님의 궤마저 빼앗기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서 죽게 된다. 

성경은 엘리가 죽은 이유가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다."(삼상 5:18절)라고 증거한다. 


이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 제사장과 제사장의 두 아들은 죽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대패했으며 여호와의 궤는 빼앗긴 상황- 


사무엘상 4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브레셋과의 전쟁에서 대패,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 법궤를 빼았기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가 죽은 이야기, 그 충격으로 갑자기 애를 낳다가 죽은 엘리의 며느리, 그가 외친 말 ‘이가봇’, 말 그대로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난 상태입니다. 


반대로 블레셋군사들은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자기들의 신인 다곤 신전에 두었는데 이튿날 깨어보니 다곤 신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려저 얼굴을 땅에 떨어지고 머리와 두 손목이 잘려 나가 버리게 된다. 또한 그 지역에 독한 종기가 퍼져서 다른 지역, 가드로 옮기니까 그 다른 지역마저 환난이 더하여 독한 종기가 나게 된다. 옮기는 곳마다 환난이 오는 것이다. 그렇게 일곱달을 여기 저기 옮겨 다니다가 결국 블레셋 군사들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데 자기들의 죄를 사하게 되는 속건제로서 금과 송아지 같은 제물까지 더하여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게 된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성별하여 20년동안 거함 

-> 누가 여호와의 궤를 담당할 수 있는가? 거룩한 자. 아주 무명의 한 가정을 택하사 궤를 담당하게 함. 


이 때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고하여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저의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라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세상 즐거움과 향락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결국 그것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림)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하며 여호와께 회개하고 구원을 노래함. 

블레셋이 쳐 들어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뢰를 내려서 그들을 어지럽게 하여 전쟁에서 승리.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 실패했던 바로 그 장소가 승리의 장소가 됨. 


7:13절)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 왜 에벤에셀의 첫째 전쟁에서 실패하고 대패하고 제사장의 일가가 죽임을 당했는가? 

"나이가 많고 비대하여져서..." 

악한 제사장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의로운 자, 그러나 눈이 어두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두웠고, 자식들이 범죄해도 막지 못했다. 

어느 덧 모르게 굳어져서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못하고 몸이 비대해져서 영적인 것에 민감하지 못함. 

신앙생활은 삶이 어려워서 실패하지 않는다. 게을러서, 비대해서, 부유해서 실패한다. 

부유함의 의미: 애굽의 바로가 열가지 재앙중에 재앙이 조금만 지나가도 다시금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원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태도.... 부유함의 표현... 


2. 왜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보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단이 점령하지 못한다. 아무리 신천지가, 안산홍이가 기독교 흉내를 내어 본들 그들의 정체는 드러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다. 

 

3.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 작은 무명의 집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법궤를 보관하게 함. 

거할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법궤.

홉니와 비느하스-

다곤 신전- 

벧세메스- 

(베다니를 찾은 예수 그리스도) 


도저히 함께 거할 수 없는 그런 곳을 떠나 거처를 찾아 헤메는 법궤. 


4. 실패의 장소에서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돌이킴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축복의 장소가 됨" 

신앙은 부적이 아니다. 신앙은 철저한 관계다. 

초대교회 최대의 이단은 영지주의- 지식으로 믿으려 했던 자들... 지금의 추세.... 

 

Posted by 소리벼리

열매 없는 삶 (마가복음 11장 11-14절) 


마가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자들과 함께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백성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면서 왕의 입성에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성전을 둘러 보시고는 성전에 머물지 못하시고 베다니로 와서 주무십니다.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3km쯤 떨어진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 촌과도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남매의 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가난한 마을 베다니에 적어도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왜? 예루살렘에, 그 성전에 도저히 예수께서 머무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밤을 유하신 후에 이튿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12절에 보니까 길을 나섰는데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가난한 집에서 한꺼번에 열세 명을 대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예수님은 한 끼라도 부담을 덜어주시려고 아침도 드시지 않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길을 나선 것일 겁니다. 그렇게 지나가시다가 무화가 나무를 본 것입니다.  

 

당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아주 흔한 나무여서 어디를 가든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열매는 맛도 좋고 사람 몸에도 좋아 가난한 자들이 길에서 먹을 수 있는 식사대용이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유대 땅에 널려 있었고, 길 거리에 있는 무화과 열매는 누구든 따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시장하신 예수님도 무화과 열매로 식사를 대신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는 잎사귀만 있고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 열매 없는 나무를 보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건너 뛰어서 마가복음 11:20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는 잎만 시들해지고 줄기만 마른 것이 아니라 뿌리째. 아예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 완전히 말라버려 죽게 된 것입니다. 아니, 아무리 열매가 없어서 실망하셨다고는 하지만,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13절에 보니까 "아직 무화가의 때가 아니라"고 까지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기적은 남을 살리는데만 사용하셨다. 본인을 위해서는 어느 기적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배가 고파서 때가 아닌 무화과의 열매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니 곧 뿌리째 말라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표면적인 이 구절의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이상했던지 베드로가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니까 이 구절은 '어찌하여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까?'하고 묻는 구절로 나옵니다. 순식간에 무화나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 제철이 아닌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행위 또한 이상했기에 질문한 것일 것입니다. 

 

어떤 의도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단지 주님이 배고프신데 배를 채울 수가 없었기에 화가나서 아직 제철도 아닌 나무를 죽기까지 하신 것일까요? 

자신의 화풀이의 대상으로 나무를 저주하셨을까? 그것은 주님의 속성상 인정할 수 없는 가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적인 문제, 즉 육신의 배고픔의 문제 때문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배가 고파서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의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영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가 먹을 수 있도록 풍성했던 것이 무화과 나무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전은 화려해지고, 성전에서 매일같이 제사가 드려지고, 성전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지만, 허울 좋은 잎사귀 뿐이었던 것이다. 열매없는 형식만 남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모습이 바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지자 마자 관심을 가지고 돌아본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그 곳에 머물수가 없어서 날이 저물면 베다니로 피신하셨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금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도저히 주님이 머물 수 없게 되어 버린 성전. 왜?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화화 나무 사건 중간에 나오는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성전 정화의 사건입니다. 그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 그 이면에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욕망에 눈 먼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사치들, 환전상들이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기 보다는 오직 자기 중심적, 자기 의, 사랑은 없고 오직 자기 의로움만 있는 겉만 화려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외형적인 신앙만 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자기 이익만을 밝히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이 더럽혀지게 된 이유- 처음엔 좋은 의도였을 것입니다.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아니 이방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까지 그들은 예루살렘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제물, 양과 염소와 같은 가축, 성전세....그런데 성전세는 반드시 세겔로만 납부...

오는 길에 제물은 상하고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바꾸기 위해서, 예배의 편의를 위해서 성전에 환전상과 장사치를 허락...

그런데 유월절 같은 절기에 드나드는 사람들만 백만명 이상- 환전이나 매매를 통해 이루는 수입이 어마어마...-> 결국 이 수입을 놓고 제사장들과 세금을 걷는 관리들, 장사치들이 서로 뒤엉킨 이익집단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였다.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었다. 헤롯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화려하고 장엄하게 지어지고 있었고 그 곳에서는 수 많은 제사장과 서기관들,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도, 그 분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그들의 전통이나 고집하며 주님을 오히려 죽이는데 앞장을 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예로 들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고, 성전이라 하더라도 열매가 없다면 말라버릴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그러면 이같은 심판의 메시지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No! 

 

(마 7: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소용이 없다. 즉,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의 저주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고의 메시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열매와 잎사귀입니다. 

여기서 무성한 입사귀가 뜻하는 것과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과연 무엇인가가 우리 신앙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혼동이 일어나니까 신앙생활도 혼동스러운 것이요, 목적이 뒤틀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서 내 삶에 열매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가 이룬 성과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공부해서 그 만큼 성적이 나와야 열매가 있는 것이고,  일하는 자에게는 그 만큼 소득이 있어야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농사 짓는 자에게는 그 만큼의 소출이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신앙생활의 열매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앙 생활을 통해 거둔 내 소득, 내 성과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신앙생활해서 얼마나 부유하게 되었는가? 내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열매는 숫자와 업적과 함께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과 무화과 나무를 통해서 본 열매와 무성한 잎사귀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 삶의 열매는 무엇이고, 잎사귀는 무엇인가 분별할 수 있고, 또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이 무성한 잎사귀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그 어느 성전보다 크고 화려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기 보다는 로마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세상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다. 거기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오히려 넘쳐났습니다. 아이들과 여인들의 출입을 제한했고, 부정한 자들이나 병자들의 출입은 제한 되었습니다. 

그곳은 수입이 넘쳐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받은 제물은 가난한 자들에게 되팔아져 또 부정한 소득을 거두었고 성전세를 환전하는 것도 그들의 마음대로 였습니다. 


교회의 크기, 교회의 사람, 교회의 제정....이런 것들이 바로 잎사귀이지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교회의 열매를 교회 크기, 사람 수, 그 교회의 제정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은 잎사귀이지 열매가 아닙니다. 


그럼 주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열매의 첫번째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1)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겉모양인 잎사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직분을 받았는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판단하는 것입니이다.  성령의 열매는 외적으로 여는 열매가 아니라 성품의 열매요 삶의 열매입니다.  

 

2. 빛의 열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8-9)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다. 또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빛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 빛의 열매는 우리의 행실로 나타납니다.  즉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행실이 빛의 열매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반드시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두운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질 수 있습니다. 

 

3. 의의 열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9)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야고보 사도는 여기에 덧붙여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을 심는데, 그때 맺는 것이 의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의의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공동체를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공동체에 불화를 주고,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킨다면 그 사람은 의의 열매가 없는 사람이다.  

4. 입술의 열매 (히 3:15)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5. 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8) 


아니, 하나의 열매도 맺기 어려운데 이런 다섯가지 열매를 어떻게 맺습니까? 죽어도 못합니다. 난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가? 

열매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무진장 애써야 되는가? 


(막 11: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제사장과 서기관들, 장사치들, 환전상들이 그렇게 성전 안에서 사리사욕을 탐하고 욕망에 눈이 멀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그 말씀을 의심했다. 당장이 이익 앞에서 말씀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고 자기 당장 앞의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다. 그런 삶의 끝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사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무화과 나무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제대로 믿어야 한다.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믿음의 구체적인 행위가 기도이다.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해서 구하는 것을 다 받아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기도하는 삶에 달려 있다. 기도의 양과 질은 곧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과 비례하는 것이다.


열매를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으로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잉태하는 것입니다. 여인이 해산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열매 없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잉태치 못하는 자들이 해산하는 것으로 구원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잉태하지 못하는 자가 해산하는 역사와 함께 합니다. 

 

 어찌보면 구원의 이야기는 잉태치 못하는 자가 잉태하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잉태치 못하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하지 못하는 마노아가 순종함으로 삼손을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하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앙태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잉태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한 해 동안 다루었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입니다. 

한나는 자기가 잉태하지 못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브닌나가 속을 뒤짚어 놓아도 브닌나를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했던 한나는 술에 취하듯 성령에 취했고 그런 그에게 엘리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다시는 근심하지 않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열매맺은 신앙의 모델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부자인고로 (누가복음 18장 18-23절) 


올 한 해 교계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문제, 지금도 되고 있는 문제는 명성교회 세습 사건입니다.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일이 교계에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계속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대형교회에서도 이른바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승계하는 세습의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명성교회의 일이 이렇게 크게 다루어 지는 이유는 명성교회와 김삼환 목사, 그리고 그 아들 김하나 목사 역시도 성도들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목사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김삼환 목사하면 떠오르는 그의 목회 철학은 이른바 머슴목회입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의 머슴으로, 성도들의 머슴으로 자청했습니다. 대형교회의 목회자하면 떠올리는 권위주의적이고 카리스마넘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은사나 기적을 말하지도 않았고 그저 머슴처럼 섬기고 일하는 목회자의 모습을 표방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부흥해도 40퍼센트 원칙을 유지하면서 교회 재정의 40퍼센트를 선교하고 구제하는 것을 유지했습니다. 국내외 1000여개의 어려운 교회를 섬기고, 수많은 선교사와 학교, 병원, 선교단체를 후원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교회를 후원하는 교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명성교회하면 떠올리는 특징은 한국의 새벽예배를 대표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가난한 유년시절 시골교회의 새벽종을 울리는 것을 맡으면서 새벽예배에 다니기 시작해서 평생 새벽예배의 영성을 강조하는 목회자였습니다. 평소에도 역 5000여명의 성도들이 새벽예배에 참석하며 3월과 10월 두차례 열리는 특별새벽예배에는 새벽예배에만 5만명 가까운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해서 새벽예배만 4부예배를 드리는 한국에서 가장 새벽예배를 많이 드리는 교회로 이름이 높습니다. 


또한 그 아들 김하나 목사도 유학생을 사이에서도 대형교회 목회자의 자녀를 전혀 티내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실력을 갖춘 평판이 좋은 목사였고 아버지와 아들 목사가 다 같이 자기들은 절대 세습을 안할 것이라고 여러번 공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 심지어 일반 사회단체나 뉴스까지 보도하면서 세습을 비판하고 성명서를 내고, 비난하는데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세습을 했습니다. 단지 욕심때문에, 탐심때문에라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일을, 자기 스스로의 공언을 부정하면서까지 행한 것입니다. 


속사정을 들어보면 일면 수긍이 가는 면도 있습니다. 사회의 반대와는 달리 명성교회의 공동의회는 70퍼센트가 넘는 찬성으로 아들 김하나 목사의 세습을 찬성했습니다. 왜 사회가, 신학생들이,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반대하면서도 명성교회와 두 목사는 세습을 감행했는가? 


소속된 목회자만 100여명, 교회 관계된 교회  안밖의 기관들, 교회내의 카페나 주차, 식당, 서점, 선교기관, 교회 밖의 학교나 병원등과 같은 관련기관에서의 유급 직원들만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들의 안정을 위해서 세습을 절대적으로 찬성한 것입니다. 

그들도 사회에서, 외부에서 외치는 비판의 소리를 어찌 듣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교회 안에 딸려있는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다른 외부의 리더십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자기 교회의 안정을 위해 사회로부터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비난을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용납되어 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받는 상처는 훨씬 더 깊은 것이고, 또한 그 교회는 더더욱  외부로부터 단절된, 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깨끗하지 못한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일이 나에게 나타난다면 난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의 선택에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달려있다면 난 과연 그런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지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 공관 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청년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관리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세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나이도 젊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유는 영생을 얻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무엇을 얻는데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꿓은 것을 보면 열정도 있고 성실함도 있는 사람입니다. 

운좋아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성실이 몸에 베고 목표가 분명하여 그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좋은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성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생은 내가 얻고자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엡 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그것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고 이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우리 인생이 구원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많이 들었지만 또한 너무나도 자주 잊어버리는 말씀입니다. 


그가 예수를 가리켜 무엇이라 말합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말은 무엇이냐면 내가 어떤 선한 일을 더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 나온 이유는 예수로부터 천국가기 위한 어떤 방법, 특별한 행위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절) 


이 구절만 놓고 놔서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데 예수님도 선한 분이 아닙니까?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선한 일을 통해 구원받을 거라 생각하느냐? 네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여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다가갈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거룩하라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들을 청년에게 묻습니다. 

(눅 18: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청년이 의기양양해서 말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한 이 계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다 빠지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계명만 묻습니다. 

다시 말해 네가 미쳐 모르는 그 것- 넌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구와 함께 사는가를 보십니다. 


청년이 주님을 찾은 이유는 선한 일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의 목적을 얻으면 예수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 부족함을 채우는 그저 부분일 뿐입니다. 

이게 우상숭배입니다. 

내 문제, 내 부족,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믿는 것- 그것이 채워지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 세상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따르라, 나와 함께 거하자는 것입니다. 

너 가진 것 뒤로 하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눅 18: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근심하여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를 채울지는 알았어도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릴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말합니다. 

(눅 18: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그냥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천국가기가 불가능하다? 여러분 이게 납득이 됩니까? 

구약의 아브라함,이삭, 야곱, 요셉, 다윗....수많은 부자들... 

록펠러, 스텐리 템...사회 각층의 유능한 크리스찬들.... 그들은 천국못가는가?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네가 복이 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은 말씀에 의지해서 떠나는 것이다. 


신앙은 말씀을 따라 내가 익숙한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떠나는 것이다. 

애굽에서 의지하고 있는 나일강을 비롯한 열가지 신을 떠나는 것이 열가지 재앙이고 사마리아 여인이 의지했던 다섯 남편을 떠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맛보는 것이다. 

떠나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것,  모든 것을 버려두고 산에 오르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것....그런데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것을 붙잡는 사람... 자기 능력, 자기 의, 자기 물질, 자기 것을 붙잡는 사람....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를 채울지는 알았어도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땅보다 자기 가축을 위해서 여기에 머물르기를 더 좋아하는 르우벤, 갓, 므낫세와 같은 사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하다는 것은 의지할 자기 것이 없는 사람, 주님의 말씀 앞에서 놓지 못할 것이 없는 사람들...그들이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눅 18:29-눅 18:30]

(눅 18: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눅 18: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받아들이기 힘든 구절...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삭을 받쳐야 하는가? 

주님을 위해서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려야 하는가? 

너무 한 것 아닌가? 

더군다나 30절의 말씀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말씀...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아내를 버리고 자녀를 버렸더니...여러배를 받았다는 것은 여러번 장가갈 수 있다는 소리인가? 


우리가 우리 가진 것에 집착하는 이유, 핑계, 명분...가족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물질에 집착하는 이유... 가족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가족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하고 매달렸더니 가정이 건강해지는가? 그들이 만족하는가? 감사하는가? 

오히려 물질로 인해 싸우고 깨지고, 버리고, 죽이고 사는 것이 세상.... 

탐심의 이유로 가족을 들먹이지 말라. 그것은 자기 기만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순종하면 너의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보호할 것이다. 안전할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행하면서 교회의 안정을 위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라고 변명하는 이들....

그것이 정말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을 지키는 것일까?


말씀을 위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가 의지하는 것을 다 주님 앞에 맡길 자세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내 딸린 것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버릴 것인가?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