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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전도서강해 '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6.03.04 전도서 5장 10-20절 나의 몫인 은혜 (2)
  2. 2016.03.04 전도서 5장 1-7절: 꿈, 말, 경외
  3. 2016.02.19 전도서 3장 16-22절: 선악의 심판자
  4. 2016.02.12 전도서 3장 1-15절 (모든 일의 때)
 

전도서 5장 10-20절 나의 몫인 은혜


부모와 함께 살지 않고 또한 자식이 많이 없는 시대, 또 결혼도 잘 하지 않는 시대. 그래서 유행하는 말이 반려 동물입니다.

반려 동물이라는 말은 최근에 생겨난 말이지요. '반려'라는 말은 서로의 배우자를 반려자라고 부르듯이 "일생을 함께 보내는 동물"이라는 말입니다. 원래는 애완동물이라고 불렀는데 애완이라는 말은 앞의 '애'자는 사랑하다는 말이지만 뒤의 '완'자가 희롱하다, 장난하다라는 말이어서 그 의미가 인간이 가지고 놀며 사랑한다는 의미기 있기 때문에 '반려'동물이라 이름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과 같이 지내면서 반려 동물에게만 특별하게 나타나는 질병이 생겼습니다. 애생동물일 때는 없었는데 인간과 같이 살다가 생겨난 병,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비만입니다. 야생에 두면 아무리 먹을 것이 많아도 배가 차면 그쳤는데 처음엔 인간이 계속  먹을 것을 주어도 자기 양껏만 먹다가 계속적으로 먹을 것이 주어지는 것에 익숙해지면 반려 동물에게 이른바 '식탐'이 생기는 것이지요. 야생에 있을 때는 많이 포식을 해도 운동량으로 풀 수 있었는데 인간과 함께 있다가 그 운동량도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려 동물에게 생긴 병이 '동물 비만'입니다. 


뱀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통해 인간을 유혹합니다. 사탄의 유혹을 방았더니 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합니다. 요한일서는 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도록 하는 이 세상의 유혹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면서 이는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요 이 세상으로 부터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일 2:16) 


정욕, 영어로 lust라는 말은 사랑과 구별되는 말입니다. 사랑은 성경적으로나 어원적으로도 살리는 것, 살아있는 것, 인간이 근원적인 것이지만 lust는 결국 인간을 죽이는 것,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식욕, 성욕, 탐욕....결국 필요이상으로 너무 강해서 살리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욕망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솔모몬도, 예수도, 인간의 가장 큰 욕망 (lust)대상을 돈, 물질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누가복음 16장 13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도 모잘라 돈을 섬긴다는 것이지요.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시면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우상을 섬기지 말라. 나무로, 돌로, 은으로, 금으로,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에 절을 하고 섬기느냐? 

그들이 무슨 살아있는 존재이냐? 그들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가? 

인격이 없고, 생명이 없고, 능력이 없는 것에 절을 하고 섬기는 인간에게 어처구니를 넘어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그러한 우상 중에 가장 큰 우상이 무엇입니까? 바로 돈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으로 절대로 만족함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갈증을 도저히 채울 수 없다. 

소득이 많아지면 쓸데도 많아지고 그 소득 때문에 근심하며 잠을 자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주는 유익을 솔로몬을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구경할 것....결국 구경하다 다 내버려 두고 죽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또 뭐라 말합니까? 

인류에게 가장 큰 폐단-영어로는 가장 무거운 악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

돈 때문에 가족 간의 관계도 깨지고,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돈 떄문에 자기 건강도 상하게 되는...

그리고 그 재물이 끝까지 자기에게 남아있을 것인가? 

"재난을 당하면 없어진다." 

자기가 죽을 때에 가져가지도 못할 것이고, 재난을 당해 자식에게 물려 주지도 못할 것이다. 


사도바울도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딤전 6:8-10]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아라." 


12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여기에서 솔로몬은 부자와 노동자 (일하는 자)를 구분하여 말합니다. 부자와 일하는 자가 어떻게 다를까? 

일하는 자도 결국 돈벌기 위해 일하는 것 아닌가? 일하는 자가 돈 벌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일하는 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는 자 입니다. 주어진 일을 자기 사명으로 아는 자 입니다. 


요즘 대학생이나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너 어떤 직장 가지고 싶냐? 

너 커서 뭐하고 싶냐? 물으면 

한다는 소리가 "돈 많이 벌고 싶어요" 

"돈 많이 버는 직장에 가고 싶어요" 얘기를 합니다. 

왜 아이들이 그런 소리를 하게 되었을까요? 

부모들이, 선생들이 무슨 일이라도 돈 많이 벌면 장땡이라는 사고 방식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일에 목적을 준 것이 아니라 돈에 목적으로 두게 합니다. 


그런데 '일'은 우리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소명으로, 사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맞는 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생의 즐거움을 찾고, 그 일을 통해서 필요한 것들을 누리며, 그 일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초점이 일에 있지 않고, 돈에 있습니다. 일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일을 그만 두고 싶어합니다. 돈때문에 참고, 돈 때문에 견디고 하지 일 자체에서 의미를,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18절, 19절을 봅시다. 

한글로 읽으면 강조되는 의미가 좀 약해집니다. 

17절부터 보면 돈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일평생에 기쁨 없이 어두운 데에서 먹으면서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을 것이지만 

18절 나는 깨달았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이 세상에서의 삶 동안, 그에게 주신 일을 통하여 만족함을 얻고 , 그 일을 통해서 얻은 것을 통하여 먹고 마시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혹은 바른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그것이 그에게 주신 그의 몫이다. 

19절- 그리고 또한 어떤 사람에게라도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그에게 꼭 맞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일을 주셨고, 그 일을 통해서, 일평생을 먹고 마시며 삶을 누리게 할 재물과 부요를 그의 몫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을 주셨다. 

그리고 그 일을 찾은 사람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자기의 만족을 찾을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우리의 필요보다 더 많은 것을 LUST, 욕망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통해서 일평생을 먹고 마시며 누릴 충분한 양을 얻도록 하셨다.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20절-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나니...

무슨 소리입니까? 일을 하다가 두려움을 느끼고, 자기 일에 회의를 느끼고 불안감을 느낄 때가 언제 입니까? 

노후를 생각하고, 병든 때를 생각하고, 자녀를 생각하고....자꾸 자기 앞의 살아갈 때를 생각하니까 지금 버는 것으로 안될 것 같고, 더 벌어야 할 것 같아서 다시끔 자기 자신에게 주신 일에서 벗어나 또다시 돈을 따라, 물질을 찾아 "자기 소명, 일"을 떠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자기 일을 찾은 사람, 돈 때문이 아니라 자기 천직을 찾은 사람은 그런 자기 '생명의 날' 자기의 뒷날, 노후의 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의 마음에 그의 천직을 사랑하고 즐거운 마음을 부어 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부유하지 않을 순 있어도 결코 부족하지 않게 하실 것이요, 남들보다 더 화려하고 비싼 삶을 살진 못해도 충분히 누리고, 기뻐하며, 즐겁게 살게 할 것이다. 앞날에 대해서 걱정하게 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 할 때에 시절에 따라 알맞은 열매를 맺도록 하실 것이요, 하나님이 보장할 것이다.


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생각해 봅시다. 

돈 때문에 일합니까? 돈 때문에 억지로 견디고 계십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천직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런 일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돈의 주위를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허무한 돈, 재난을 당하면 사라질 돈,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돈 때문에 일평생을 어둡게, 근심과 질병과 분노 속에서 살지 마시고 정말 자기에게 주신 자기의 일을 찾아, 그 일 안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자기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면서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Posted by 소리벼리

 전도서 5장 1-7절: 꿈, 말, 경외


전도서 5장에 들어서 솔로몬은 비로서 하나님께로 눈을 돌립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갈망했던 자, 예배를 통해 지혜를 얻은 자가 하나님께로 얻은 지혜로 세상을 것을 취하고, 탐하고, 누리다가, 그 안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고 허무와 고통을 느끼다가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눈을 돌립니다.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7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도 솔로몬의 전도서를 통해 왜 그가 그토록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앞 장 4장의 끝 부분에서 솔로몬은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낫다 (13절)"

고 하면서 훈계를 들을 줄 아는 가난한 지혜자와 몸과 마음 모두가 둔하여 져서 더 이상 어떤 경고와 훈계도 들을 수 없게 된 왕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가 들을 경고는 무엇입니까? 

허무한 세상을 붙잡지 말고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을 좀 두려워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 전도서는 타인에게 설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그 말씀의 대상은 솔로몬 자신입니다. 자신의 참회록이요 고백록입니다. 

그는 이방여인들과 혼인을 하며 그들에게 산당을 지어주고 여러 우상들을 들여오는 와중에서도 안식일이 돌아오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삶은 여인들과 우상들과, 세상의 풍요 가운데서 즐거움을 찾기에 취해있었지만 그래도 주일이 오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번제와 예물을 드리면서 자신에게 축복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을까요?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 지어다" (1A) 

예배하러 올 때에, 기도하러 올 때에 네 발을 삼가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데나 들락달락 하지 말고 좀 깨끗하게 하고 오라. 정결하게 준비하고 좀 오라. 

냄새 풍기고, 이런 저런 세상의 흔적을 지니고 오지 말고 정말 나를 좀 만나러 오라는 것입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 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느니라"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결국 솔로몬 자신에게 하는 말이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입니다. 


찬송가 278

"여러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주 은혜를 잊었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함께 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초신자 때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탕자 처럼 살아도 돌아오면, 예배당에 앉으면 반기십니다. 

그런데 3년되고 5년되고 십년되었는데도 휙 하니 예배 드리고 가서 여전히 세상에 빠져서 뒹굴다가 

은혜 없이 감격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시간되면 예배당 오고 또 돌아가고...

점점 구원의 기쁨은 사라지고 위선자가 됩니다. 

예배 드리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의인 행세하는 정말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오라는 것은 우리에겐 곧 휘장을 지나 하나님이 임재하신 지성소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뜰 앞만 왔다갔다 서성이다 가는 예배가 아니라 앝은 물 가에서 물장구 치다 가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은밀히, 친밀히, 깊은 물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다정한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기 위해 만났습니다. 옷도 잘 꾸미고 기분좋으라고 향수도 뿌립니다. 

멋있는 식당도 예약해놓고 맛난 음식도 시킵니다. 

겉보기에는 정말 다정한 연인같고 행복해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까 한쪽만 말합니다. 그것도 조근 조근 소근소근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화난 듯이 급하게 막 말하고 말 끝나니 상대방은 밥도 다 안먹었는데 일어나 나가 버립니다. 어느 누가 이런 데이트를 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에 취해서 예배드리러 온자들이 하는 기도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내가 말하고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인들의 기도는 내 뜻을 전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듣는 데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이야기 할 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하라 하십니까? 우리의 뜻을 구하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확신할 것은 확신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쁩니까? 하나님이 더 바쁘십니까? 그런데 기도하러 와서 순식간에 할 말 다 해보리고 그러면서 끝에는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성급히 일어나 나갑니다. 나가지 말고 좀 들으라 합니다. 좀 더 앉아 있으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라...이것은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만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에서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고 그 방법도 다르니 네 문제 다 이야기 했으면 이제 내 생각을 들으라 하는 것입니다. 

제일 속 터지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할 말 다 해 놓고 내 얘기 듣지 않는 사람 아닙니까? 자기 말은 다 진리고 남의 얘기는 쓰잘데기 없이 취급합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이렇습니다. 

난 창조주다. 난 전능자다. 네 얘기 다 했으면 이제 내 얘기도 들어주렴.... 그런데 듣지 않고 나갑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기도해도 내 기도 안 들어주신다. 하나님 없나보다...하고 다닙니다. 


지혜자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말을 적게 하고 깊게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중언부언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올 해 대표기도를 꼭 써서 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중언 부언 하지 않고 꼭 할 말만 적게 하기 위함입니다. 

때로 기도를 들어보면 이것이 설교인지 기도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지 성도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3절) 

꿈과 말!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은혜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말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하나님의 말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삶 자체가 말이였습니다. 임의로 말하고 임의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살고 순종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들에게 꿈은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세상은 꿈을 단지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희망이나 욕망이 상징으로 표현된 것이 꿈입니다. 

그런데 꿈에는 개인적인 욕망의 표현 너머의 세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태몽은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신비한 꿈의 영역입니다. 

성경은 계시의 통로로서의 꿈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찬양 가사로도 유명한 요엘서 2장 28절부터 말씀은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이 때 뿐만 아니지요. 천사 가브라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꿈으로 나타나서 예수님의 나심을 예언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려 할 때에 환상이 임하여 그를 마게도냐 지방으로 가도록 강권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받은 환상으로 계시록을 남기지요. 

어찌보면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요셉에게 주신 꿈으로 시작해서 사도 요한에게 주신 꿈으로 끝나는 꿈으로 가득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도 꿈을 통해 지혜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말도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난다고 경고합니다. 

꿈이 참 꿈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꿈은 내 걱정의 산물입니다. 욕망의 산물입니다. 

말이 참 말되게 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 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내 말은 곧 우매한 자의 걱정이요, 우매한 자의 소리일 뿐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이 어둡고 우리의 귀가 닫혀 있을 때에 꿈을 통해 계시하실 때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주시는 간접적인 통로입니다. 가장 직접적인 계시는 바로 말씀이요,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서원한 것을 갚으라. (4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순종을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 

자, 한나가 성전에 와서 아이가 없음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을 통해 응답의 소리를 듣습니다. 제가 보기엔 확실한 응답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1:17) 

허락하셨다도 아니고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다음 구절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여종이 덩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빛이 없더라." (삼상 1:18) 


서원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한나도 애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나이다.서원하고 갚지만 그 전의 더 깊은 서원의 완수는 하나님의 응답이 떨어졌을 때에 다시는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러 문제를 가지고 나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금식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런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면 이것을 응답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한나가 한 것처럼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고 평강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질 못합니다. 

말씀을 받았어도 여전히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하나님은 현실을 바꾸기 전에 말씀을 주십니다. 약속을 먼저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입니다. 

씨앗은 믿음으로 열매 맺습니다. 

말씀을 주시고 더불어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씨앗을 받고서 왜 꽃이 안보이지 합니다. 

씨앗 받고서 여전히 두리번거리면서 열매를 찾아 헤매면서 불평하고 근심합니다.


서원한 것을 갚으라는 것은 "난 분명히 약속을 지킬 터니이 너도 내 앞에서 네 순종함과 약속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전도서 5장은 예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삶은 예배하는 삶입니다. 

예배하러 나올 때는 준비된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삶으로, 태도로, 말로 준비해야 합니다. 

내 길을 삼가고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들으라 말씀하십니다. 


예배는 중심은 말하는 것이 아닌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이고 기도입니다. 

내 문제, 내 할 말을 했다면 그 분이 말씀하시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듣고 가야 합니다. 

꿈도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 완전해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 꿈과 말은 헛된 욕망입니다. 어리석은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것을 받았다면 믿고 확신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데에 계속 염려하면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주신다 하면 주십니다. 약속을 않 지키는 것은 나지 그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십니다. 

내가 넘어지고 못 믿기 때문에 기한 전에 열매맺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분을 믿고 순종하는 것 이것이 서원하고 갚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로 서원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약속하고 나온 자들입니다.  

준비되어 예배드리고, 그 분을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고 믿고 삽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전도서 3장 16-22절: 선악의 심판자 


아담이 죄 짓기 전, 에덴 동산에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도 악한 모습이 있었을까요? 좀 우스운 질문인가요? 

당연히 죄가 없었으니 악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럼 악이란 말 대신에 연약함이라는 말을 써 봅시다. 

아니면 부족함이라고 해 볼까요? 

아니면 허전함이라고 해 봅시다. 

에덴동산에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도 연약함이나 부족함, 허전함과 같은 것들이 있었을까요? 

죄가 없었으니, 악하지 않았을 것이라 쉽게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니 연약함이나 때로 부족함, 허전함과 같은 것들은 있지 않았을까요? 

연약하기 때문에 뱀의 유혹에 빠진 것이고, 에덴 동산에 거하였음에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무언가 허전함이 있었기에 선악과를 먹은 것 아니겠습니까? 뱀은 바로 이 아담의 연약함과 허전함의 약점을 파고 든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철학이나 신학에서도 오랫동안 이 연약함이나 허전함, 부족함등은 악의 결과물로서, 죄의 결과로서 받아들여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연약자 입니다. 그가 제한이 없는 신이면, 우리는 한계 투성이인 인간이고입니다. 선악과라는 것의 첫 의미는 우리는 날 때 부터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면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존재로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 우리 인간은 그렇게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전함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죄인은 아니었습니다. 악인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악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기준이요, 판단자요, 결정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선악이라는 것이 객관적은 어떤 것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일하면 선, 악한 일하면 악...이것은 꼭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그 선악의 기준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많은 나라에서 아동을 학대하면 부모라 할지라도 범죄로 여깁니다. 아동학대죄와 상해죄가 적용됩니다. 

그런데 단 백년전만 해도 이것을 범죄라고 여긴 나라는 거의 없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 아이들, 여성들은 노예 들과 마찬가지로 인권이라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당연히 살인이죠. 그런데 여전히 사람을 잡아 먹는 나라도 21세기인 지금도 버젓이 있습니다. 

신께 제사를 드리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부족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간음하면 죄라고 하는데 어느 나라는 여전히 몇 십명씩 아내를 두고 남편을 둔 나라들도 있습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기준이 필요하고, 그것을 판단할 판단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뱀이 아담을 유혹 할 때 무엇이라 유혹합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 (창 3장 5절)


이것을 아담은 선악과를 먹으면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뱀의 말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께 맡기지 말고 너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준에 복종하지 말고 너 자신이 왕이 되고, 판단자가 되고, 결정권자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뱀, 사탄의 유혹은 그 때 부터 지금까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면 자유할 것 같지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더니 정말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선악의 판단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선악의 결정권자자 되자 가장 먼저 하게 된 판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세기 3장 7절에 보니까 "그들이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옷을 입은 것입니다."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알게 된 것이고, 이제 부터는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서로 가리고, 숨고, 피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었을 때에 인간에게는 선악이 필요없었습니다. 똑같이 연약하고 혹 어떤 점에서는 부족한 것들이, 허전한 감정들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 안에 있었을 때는 그냥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가족입니다. 하나님과 똑 같이 될 순 없지만 그 분과 함께 놀고 그분과 함께 거닐며, 대화하고 사랑합니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자녀가 아버지를 보면서 자기의 연약함 때문에 괴로와서 난 왜 아빠가 되지 못할까? 염려하고 불면증에 걸리고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하는 자식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아버지가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언제나 든든하며,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대적하여 적이 되면 절망스럽지 않겠습니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자신이 판단자가 된 인간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정의, 법 등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세워놓은 정의의 구현하고자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할 때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 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결국 선악을 분별하는 재판 잘 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는 잘 알다시피 한 간난아이를 서로 자기 자식이라 주장하는 두 어미의 재판을 기가 막힌 지혜로서 판결하여 의로운 재판관으로 명성을 떨칩니다. 


그런데 재판이라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판사가 있으면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습니다. 

검사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변호사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재판은 두 사람이나 그룹들이 맞서서 서로의 잘 잘못을 따지기도 합니다. 

재판관은 검사나 변호사, 혹은 둘 사이의 주장을 잘 듣고 분별하여 누가 옳은지를 가리는 것, 이것이 세상의 재판입니다. 


그런데 그 판사의 판결은 무엇이냐면 유죄냐, 무죄냐로 결정됩니다. 

형량이 결정되기 전, 가장 중요한 판결은 무죄냐, 유죄냐를 가립니다. 

무죄를 받으면 검사가 아무리 죄를 지적해도 결국 다 사해 지는 것이요, 유죄가 되면 변호사가 아무리 변호를 해도 모조리 죄가 인정됩니다. 둘 사이의 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둘 사이에서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한 쪽이 이기면 한쪽은 억울한 것이요, 한 쪽이 기쁘면 한쪽은 분한 것입니다. 


가장 공의로운 재판관이 있어도 한쪽은 억울함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참으로 믿을 수 조차 없다면 그 재판은 그야말로 부조리 투성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하면서 결국은 돈 많은 자가 승리한다. 동물의 세계와 똑같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솔로몬의 통찰입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ㅡ이 세상에서 

보건데- 살펴보고 통찰하건데

재판하는 곳 그곳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다. 


"결국 의인과 악인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자세히 그 다음을 번역하면 악한자나 의로운 자,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가 온다. 


지상 최고의 판사인 솔로몬의 통찰은 자기도 참 정의롭게, 바르게 재판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 만이 재판하실 수 읶ㅆ고, 또 반드시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여러사람들을 재판하면서 깨달은 바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해도 인간 세상에서의 일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은 잘난 채 하다가 동물과 똑같이 흙으로 가는 것이지만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들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구절이 없다. 그건 신약에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솔로몬은 이런 세상의 이치를 보면서 분명히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결론입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나니 그것이 바로 그의 몫이다."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하나님의 때가 임할 때까지 세상은 풀지 못할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은 알게 해 주시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 인생에 이해하지 못할 일로 가득합니다. 부조리 투성이고 모순이 가득한 세상일지라도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은 나의 몫으로 주어진 내 일에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나눈 말씀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 더 나아가선 내 인생에 주어진 오늘이라는 선물을 통해 즐거웁게 살라는 것입니다. 내 몫은 누가 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살도록 허락하신 시간입니다. 그것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고, 억지로,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즐겁게 주님 주신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선 세상 최고의 지혜자였던 솔로몬의 내세관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때가 오면 그가 짐승같은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의 자녀 같은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데 죽은 이후에 세상 일이 궁금하다고 해서 이 세상에 와 볼 사람이 누가 있겠냐? 하면서 

짐승같은 삶을 살지 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지를 결정하여 우리에게 몫으로 주어진 삶에 충실하라는 것이지요. 

죽은 뒤에 이 땅에서의 삶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한 인생은 반드시 후회가 따르고 부조리와 불합리 투성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취한 삶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억울함도 없고 분함도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도 후회함이 없는 인생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전도서 3장 1-15절 (모든 일의 때) 


우리 모두가 때를 기다리며 삽니다. 

때를 기다린 다는 것은 소망을 품고 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런 기대하는 때가 없는 삶이라면, 어떠한 기대하는 바가 없다면 그 삶은 그야말로 비참할 따름입니다. 


임신한 부부는 출산의 때를 기다리고 출산이 되면 말하고 걸을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걷게 되면 이젠 학교갈 날을 기다리게 되고 그러다가 고 3이 되면 대학 입학의 때를 기다리게 되고, 

졸업을 앞둔 자는 취직의 때를 기다리게 되고, 처녀 총각들은 결혼의 때를 기다리게 되고

결혼한 자들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기대합니다. 

일하는 자는 매달 월급날을 기다리게 되고, 휴가를 기다리게 되고, 그러다가 이젠 퇴직 후에 누를 노후의 삶을 기대하며 저축하고 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노후에 점점 이 땅의 삶에 기대하는 것이 없어질 때....인생의 기대는 하나로 모아집니다. 

바로 인생의 죽음 뒤에 오는 하늘나라, 영원한 삶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런 인생이 싸이클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싸이클입니다. 예상할 수 있는 삶의 코스입니다.

시간이 되고 노력을 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때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정해져 있지 않은 때, 예상할 수 없는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쨍하고 해 뜰날"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복권을 사기도 하고 도박을 하기도 하는 지 모릅니다. 

정치가들은 국회위원 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장관이 되고 싶어하고, 대통령이 되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꿈꾸며 삽니다. 

그런데 그 성공의 열매는 좀처럼 예상할 수 없습니다. 

시간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비가 가져다 준 박넝쿨을 열어 흥부의 삶이 뒤바꾸었듯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박나세요"하며 이 운을 기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때를 알기 위해 점집을 찾는 사람도 생각 외로 많습니다.  

미심을 믿어서 점집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그 때를 알고 싶어하지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자,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자로 묘사합니다 .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 였을 때에 자기의 때를 알지 못하여서 나서다가 광야로 가서 40년 동안을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때, 십자가의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등장 하는 때를 정확히 알고 행동하셨습니다 .

그런데 그 예수님마져도 마지막 때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께서만이 아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아는 때가 있고 알지 못하는 때가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허락된 때만 아신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여러가지 때로 채워져 있지만 그 때는 우리에게 속해져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주권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11절 b) 


그리고 인생의 때를 주신 목적, 그 이유는 애쓰며 수고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것 자체가 '때를 위한 수고'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지혜는 그 때를 위한 수고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때가 오기까지 오는 모든 수고를 고통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때가 늦게 오면 그만큼 고달프고, 고통스럽고 짜증을 냅니다. 

모든 것이 수고 뒤의 '때'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수고는 때를 위한 인내와 고통의 연속입니다. 

오직 대학가기 위해서만 공부하면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만 일하면 성공의 때가 늦어질 수록 하루하루가 견디기 싫어집니다. 

만약 열매맺지 못하면 모든 고통과 수고는 헛수고가 됩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수고의 때와 열매의 때를 나누지 않습니다. 

모든 때가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정확한 때, 우리 모두가 가장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재라는 순간의 때"입니다.


언젠가 성도님 한 분이 앞에 나와 감사릴레이 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준 선물, 바로 현재입니다. 현재라는 말은 곧 선물이라는 말입니다라고 했듯이 솔로몬도 말하는 것이 고통스럽게 일해서 불확실한 때를 막연히 기다리지 말고 

"사는 동안, 일하는 동안, 수고하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깨달었다"(12절 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수고 자체에서 낙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왜 수많은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가장 많이 일해야 할 40대 가장들이 고통스러워 합니까? 

가장 많이 공부하고 가장 많이 일하는데 때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보이지 않고, 수고만 보이니까 삶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때에만 집착하면 현재가 고통스럽습니다. 

수고를 고통으로 이해하면 절망스럽지만 수고를 즐거움으로 생각하면 수고 자체가 낙입니다. 

수고를 영어 성경으로는 toil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 toil이라는 단어에서 toilet(화장실)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왜 수고하는가? 바로 우리 삶의 찌거기들을 배설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의 직장터에서 일과 중에 도착해서, 퇴근 전에 무조건 30분씩 매장 주위를 뛰게 하고, 무거운 짐을 나르게 한다면 직장터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아마 직장 그만 두는 사람들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건강을 위해서 비싼 돈 주어가면서 fitness club가서 런닝머신 돌로 역기 들고 하는 것은 불평이 없고 기뻐하지 않습니까? 

수고하는 것을 자기 몸과 마음의 찌거기를 배설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수고도 곧 즐거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변이 안나오는 것이 고통이지 잘 나오면 즐거움 아닙니까?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고 수고를 통해 먹고 마시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읽어주었던 시 구절 

"Carpe Diem"- 영어로 "Seize the Day"

현재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때를 더하거나 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도 계절을 바꿀 수 없습니다. 

밤과 낮을 바꿀 수가 없듯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14절) 


결국 우리가 그 때를 모르게 하고, 하나님이 그 때를 정하게 하신 것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현재라는 선물, 현재의 수고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누구냐? 그가 바로 시편 1편에서 말하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때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열매를 지닌 사람입니다. 

복되게 사는 사람이 바로 때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열매가 꼭 열려야 복된 사람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복되게 사는 것,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요, 복된 자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잠언과 전도서를 통해 내린 결론 -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윗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곧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현재를 즐거워하게 합니다. 

폭풍 같은 현재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평안을 줍니다. 

현재를 선물로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것, 그것의 해답이 말씀의 삶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가 바로 현재를 즐거워 할 수 있는 자요, 현재를 살아가면서 영생을 맛보는 자입니다. 

말씀은 현재를 영생되게 합니다. 

현재라는 순간과 영원을 이어 줄 수 있는 것, 시간과 공간의 제한 된 삶과 제한이 없는 영원한 영생의 삶을 연결시켜 주는 것,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며, 곧 말씀을 묵상하는 삶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