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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4장 6-11절  좁고 좁은 우리를...


요나는 사울이나 혹은 가룟 유다와 같은 그런 악인이 아닙니다. 사탄이 그를 지배해서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며 반대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사역에서 실패하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되는 것은 그의 마음과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회사건, 무엇을 연구하는 기관이건 중요한 것은 주인과 종, 혹은 교수와 제자가 마음이 맞는 것입니다. 그들의 각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이 서로 가지고 있는 마음이 다를 때에는 일이 제대로 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은 무엇입니까? 온 세상을 구원키 위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씩 사람을 세워가시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또한 그대로 실천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다름 아닌 온 세상을 구원코자 제자들을 뽑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인드, 하나님의 생각을 부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그의 구원의 대상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에서 벗어나자 가는 동의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마음대로 살던, 육신을 쫓고, 자기의 목적을 쫓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곳으로 가라. 

나의 처소를 떠나 그 분을 향해 떠나는 것입니다. 

기복신앙- 내 목적을 위해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앙- 그 분의 목적이 곧 가장 완전한 내 삶의 목적이요, 그 목적을 향해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이 뜻과 내 뜻이 부딪칩니다. 갈등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뜻과 그 분의 뜻이 부딫칠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비둘기 같은 온유함의 대명사였던 요나의 생각이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키자 요나는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그의 연약함을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분노하고, 반대길로 가고, 잠을 자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하나님은 질문하시고, 말을 거시고, 준비하시고 계획하십니다. 일방적이 아니라 항상 균형자가 됩니다. 때론 기다리고, 때론 따끔하게 질문하시고, 그리고 징계하시기도 하지만 징계를 넘어서는 물고기를 예비하시고, 또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준비하시고 계획하십니다. 박넝쿨은 요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이 어떤 은혜인가 알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대낮의 더위를 우리가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면 반드시 광야를 지나게 됩니다. 광야를 지날 때는 항상 냉방이 되어 있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날씨가 비교적 괜찮은 날이면 기사가 중간에 멈추어서 한 100M정도를 걸어보도록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한 100M쯤 먼저 가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이 할 수 없이 걸어서 거기까지 가는데 그 100M 거리 사이에도 푹 푹 쓰러지는 사람들이 반드시 발생한다고 성지순례 같다온 사람들이 전해줍니다. 중동 지방은 더운 지방 사람들인데 복장을 보면 항상 두건을 두르고 옷도 치렁치렁 하게 다니는데 여름에 짧은 티 짧은 바지만 있는 우리들은 그들이 이해되지 않지만 그렇게 입지 않으면 뜨거운 햇빛에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입는 것입니다. 그곳은 아무렇게나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박넝쿨은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상황과 여건을 이용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우리나라에서 박넝쿨 주어받자 그리 큰 은혜는 되지 못하지만 그 지방에서 그 시간에 박넝쿨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참 은혜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욘 4:6)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요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물론 더운데 박넝쿨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는 한마디도 감사하지 않고 그저 그 박넝쿨로 인해서만 기뻐합니다. 박넝쿨을 주신 하나님때문이 아니라 오직 박넝쿨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과 뜻이 통했다면 하나님 감사해요라고 박넝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을텐데 뜻이 통하지 않으니까 박넝쿨 아싸하고 좋아했지 하나님께는 한마디 감사의 표현이 없습니다. 


적어도 선지자면 기쁨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오직 박넝쿨 때문에만 기뻐합니다. 현대 대부분 교인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박넝쿨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단지 지금의 순간을 모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나오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넘쳐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기쁨을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작은 일이라도 기쁜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람과 상황으로 생긴 기쁨으로 기뻐하다가 곧 시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넝쿨이 우리에게 계속적인 기쁨을 줄 순 없기 떄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때에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드리십니까? 아니면 단지 그 축복이 좋아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어떤 것을 바라는가? 하나님 자신을 바라는가? 


아이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금방 야단맞아 놓고도 피자 사주고 과자 사주면 금방 웃고 좋아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10살, 20살이 되었어도 단지 혼난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과자 때문에, 피자 때문에만 금방 좋아하고 그런다면 얼마나 유치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교회 나온 지 10년, 20년이 되었어도 아버지의 그 마음과 사랑을 몰라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박넝쿨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박넝쿨만 보고 기뻐하면 박넝쿨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우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박넝쿨을 다시 걷어 가십니다. 왜 걷어 가십니까? 하나님은 우상을 제일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박넝쿨을 더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박넝쿨을 걷어가더라도 하나님의 의지와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축복받으면 우리 인간에게 드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열심히 기도하긴 했구나, 내가 한 행동이 인정받았구나,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칭찬하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가나안이 우리 신앙의 목적지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구약은 끝이 났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면 가나안에서 성경은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복에 취해서 하나님을 일어버리니까 애굽보다 더한 고통이 가족끼리 죽이고 민족끼리 전쟁하는 그런 아비규한의 역사가 다시금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런 복이냐 하나님이냐의 선택의 순간이 주어집니다. 범죄하는 백성들을 변호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네말대로 그들을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그런데 더 이상 나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에 눈이 가 있는 자라면 당연히 가나안을 택하지만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진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왜 이런 과정을 거치는가? 

우리의 신앙이 복에만 관심이 맞추어져 있을 때에 항상 넘어지는 것은 ‘나’의 문제, 요나의 문제 

나에게 영광을 돌리고 나를 위하고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 신앙, 

그 “나”를 깨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연단....연단 중에도 내가 깨지지 않는다면 아직도 먼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요나의 마음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요나 입장에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어떻겠냐? 

아니 쪼잔 하게 줬다가 빼앗냐? 하나님께 분노하고 대든다. 모든 일들을 나에게 맞추면 우리는 하나님께도 욕하고 대드는 신앙을 가진다. 


요나는 선지자였다. 선지자는 남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자이다. 그런데 자기 삶에 적용하지 못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신 것은 무엇이고 그리고 빼앗아 가신 것은 무엇인가? 왜 빼앗아 가셨는가? 

하나님이 요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분대며 이젠 하나님 위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고 떼를 쓸 때에 박넝쿨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 없인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주 없이 살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박넝쿨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스스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면 우리 자신의 많은 모습들이 하나님을 찾기보다 박넝쿨로 인해 기뻐하는 신앙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내린 은혜, 복일찌라도 우리가 그 뒤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기뻐하면 바로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그 은혜를 받는 나의 모습에 따라서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좋은 직장을 주셨는데 그 직장에 얽매여서 신앙생활 잘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좋은 학교 들어갔는데 학교 들어가서 이런 저런 일로 바빠서 신앙생활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우리가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기도할 때에 복받기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복을 담을 수 있는 믿음을 위해서, 복 받아도 더 열심히 하고 흔들리지 않을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좀 생활이 피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더 열심히 봉사하며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열심히 못하는 이유가 여유가 없어서, 살기 힘들어서라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날 잘 아는 사람이라면 좀 여유가 생기면 기도하기 보다는 놀러다니고 다른 사람들 만나면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10만원 있을 때는 쓸 것을 바라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살아가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100만원 수입이 생기니까 10만원 벌 때는 생각도 못한 것을 쇼핑하고 다니면서 써버리는 경험을 다 해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단순히 복을 사모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복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히 할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준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박넝쿨을 거두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우상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은 준 복을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주시는 것도 우리를 사랑해서고 거두어 가시는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7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벌레는 미천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찬양하며 우리를 낮출 때에는 벌레만도 못한 나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요나가 기대고 있던 복인 박넝쿨을 그런 미천한 벌레가 취해갑니다. 그럼 요나가 기대고 있는 복인 박넝쿨은 무엇입니까? 미천한 벌레가 취해 갈 수 있는 벌레보다 못한 허무한 것입니다. 있다가도 하루아침에 없어질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는 복의 실체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의지하고 붙잡는 모든 것이 마치 이 박넝쿨 과 같습니다. 하루 아침에 없어질 허무한 것이 세상의 복입니다.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위해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 가운데 사십년을 헤메었지만 그 땅에 들어가도 하나님을 놓치니까 행복이라고 믿었던 땅이 지옥과도 같은 음란한 땅이 됩니다.  


삼상 20장에 보면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바로 하루 전에 850명의 이방인 선지자와 겨루어 당당한 승리를 거둔 불세출의 장면을 연출한 엘리야가 오늘은 여왕의 협박에 도망하여 광야로 숨어버립니다.  

신앙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인데 그는 큰  일을 치룬 뒤에 그에게 닥쳐온 작은 문제로 인해 숨어버리고 맙니다.  

신앙인은 문제 때문에 광야로 숨어서도 안되고 일순간의 쾌락 때문에 좌지우지되어서도 안됩니다.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 인도, 간섭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모든 일에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도망하거나 다른 것에 집착하지 않도록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묻고 대답하며 기도하야 한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럴땐 어떻게 하지요? 이 일이 나에게 왜 일어났지요? 

-> 항상 모든 일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인생에 있어서 나에게 작은 즐거움을 주었던 박넝쿨이 사라졌을 때에도 

“나 이렇게 뜨거운데 박넝쿨이 사라졌어요.. 이제 어떻게 하지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요?”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께 물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 물음에 응답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깨닫지 못한 잘못을 생각나게 하시고 고치게 하시고 다시금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묻지 않는 것은 내가 힘들어도 어려워도 난 나를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박넝쿨이 사라지자 뜨거운 동풍이 불어오는데 뜨거운 동풍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벌하시기 위해 준비했다기 보다는 중동지역에서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현상이다. 그늘이 없으면 당연히 생기는 중동의 뜨거운 바람이다. 


박넝쿨이 있을 때에는 햇볕도 가리고 뜨거운 바람도 가리지만 은혜를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는 자연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는 자연상태는 무엇인가? 사탄이 지배하는 자연상태가 바로 지옥 아닌가? 롬 1장과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대로 내어버려두사 ”라고 말씀하신다. 그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결과는 괴로움이고 눈물이고 죽음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우리가 심판 당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 그대로가 우리에게는 고통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한 시도 살 수 없다. 

은혜 밖의 세계는 벌레가 있는 세계이고 동풍이 불어오는 세계이다. 


내가 만족스런 신앙생활이 아닐찌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 밖에서 드러난 요나의 마음은 어떠한가? 

“내가 고생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한다.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지요?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자기가 당한 고난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니느웨 백성이 저렇게 은혜를 받지요? 자신은 다 잘하는데도 고난을 당하고 니느웨 백성들은 죄인인데도 복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든 생각이 은혜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다. 

내가 당하는 고난은 다 욥처럼 우매히 당하는 고난이고 남이 받는 은혜는 다 이해 못할 은혜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핵심을 찌르는 마음이다. 

11절 

“너랑 상관없는 박넝쿨도 아끼거늘 니느웨 사람도 내 자녀들이란다. ”


사람의 좁은 마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열방을 향한 넓은 마음이 드러난다. 

그들이 죄를 많이 지었어도, 날 떠나고 우상을 숭배했어도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이라도 돌아와 내 안에 거하여 복을 받는 것이다. 재산을 다 가지고 나간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이 어서 들어와서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요나서는 결론 맺지 않고 끝난다. 

왜 요나서는 결론 맺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만을 남기고 끝이 나는가? 성경에서 끝이 불명확하게 끝이 나는 경우 그 끝맺음은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하나가 다 요나다. 우리는 다 요나같이 불순종하며 요나같이 성내고 요나같이 좁은 마음을 가지며 하나님과 수평을 달리는 과정을 지났거나 혹은 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 사람들이 회개한 요나가 되어서 복음을 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들고 전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고 계신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극단의 길을 달려갈 때가 많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물어오시길 바라신다. 해답을 구하기를 원하신다. 왜 묻지 못하고 극단의 길을 가는가? 

절대로 감정적으로 이끌리지 말라. 감정은 항상 내 중심적이고 욕망에 이끌린다. 나는 잘하니까 문제를 다른데서 찾으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냐? 네가 내 마음을 아냐? 

네 마음이 너무 좁은 것 아니냐? 


어릴 적 찬양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와 하늘 그 보다 높고, 바다 그 보다 깊고, 우주 그 보다 넓은 오 크신 사랑...


그런데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그 크신 하나님께서 요나와 같이, 아니 요나보다 훨씬 더 좁고 좁은 나와 함께 동역하기 위해서 씨름하시고, 함께 하시고, 기다리시고 끝까지 인내하신다. 

이스라엘을 향해 길을 가는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은 마지막 예루살렘을 향하면서 이제 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도대체 그 말을 듣지도 않고 무시하고 누가 더 큰지, 그 나라 가면 오른편 왼편 앉게 해 달라면서 자기들끼리 다툴때에도 주님을 그들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발을 씻기고, 식탁을 나누며 서로 사랑하라고,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죽어도 배신하지 않겠다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물고기를 잡아 먹이시고, 자기 자신 조차도 믿을 수 없는 그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사람은 믿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게하신다. 

우리는 주님이 믿을 수 있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실패하고, 배반하고, 원망하고, 넘어져도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끝까지 믿어주신다. 

좁고 좁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담기 위해서는 꺠어져야 한다 

그릇은 깨어지면 못쓰지만 성도는 깨어져야 쓰신다. 꺠어질때만 그 분의 크심을 담을 수 있다. 


Posted by 소리벼리

주의 마음, 종의 마음

<본문> 4 : 1 - 5

 

요나서의 내용은 차라리 3장에서 끝났으면 요나에게 있어서 더 좋았을 내용입니다. 그러면 회개한 요나가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아 순종함으로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회개한 내용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4장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같이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하며 성내면서 4장이 이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어려워도 인내하며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기뻐하며 끝날 수 있을 일들을 자기를 주장하고 고집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서 넘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봉사하고 헌신이었으면 거기까지는 좋은데 좋은 일 하다가 불평하고 판단하다가 넘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 요나의 기도 비교

요나서에는 요나의 기도가 2번 나오는데 하나는 물고기 뱃 속에서 기도한 내용이고 하나는 오늘 우리가 읽은 니느웨성에서 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요나의 신앙의 모습을 뚜렷이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요나서에서 기도는 요나의 신앙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단서입니다.

 

2장의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22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3)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6)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7)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주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9)

 

부흥의 기도는 항상 주가 강조되는 기도이다.

그러나 4장의 기도는 어떠한가?

[4:2-3]

(4:2)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4:3)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넘어진 자의 기도는 항상 가 강조된 기도이다.

 

기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려는 하나님과 나와의 대화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은 항상 나의 심령을 하나님의 심령으로 이끌어가신다.

 

요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회개하여 다시 내가 살만하게 되자 가 살아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한 때는 주님을 찾으면서 주를 찬양했지만 한순간 주인이 하나님에게서 나로 바뀌어버렸다. 우리들의 기도는 어떠한가? 내가 더 많이 나오는 기도를 드리는가? 주가 더 많이 높여지는 기도를 드리는가?

 

다윗은 항상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와서 주께 기도했지만 그가 마음을 열고 주님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령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심령으로 바꾸어 놓으신다. 이것이 기도이다. (나에게서 시작되었지만 항상 하나님으로 끝나는 기도)

 


2. 다시스와 초막

내가 주인된 행동의 대표적인 행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스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기 시작하자 요나는 다시스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다시스는 어떤 도시인가? 니느웨 못지 않은 죄악과 쾌락의 도시, 환락의 도시이다. 선지자도 하나님을 떠나니까 한순간 세상의 죄악의 길로 빠져 버리게 된다.

 

2절이 기도에서는 자신이 다시스로 간 행동과 그로 말미암아 경험케 되는 추락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고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회개한다. 그런데 다시 요나의 마음 속에 라는 자아가 등장하고 죄악의 생각이 지배하게 되자 자신이 다시스로 간 행동을, 이미 회개한 자신의 행동을 다시금 합리화하고 토를 달고 변명하기 시작한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2A)

 

3.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B)

->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아니다. 좀 비꼬는 뉘앙스이다. 진심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지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다.

 

이 놈 저 놈 다 사랑하신다면 선민이라는 구별이 뭔가요..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의 선택함이 무엇입니까?” 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저 이방 민족을 용서하고 복을 내리십니까?

 

->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선민의식, 자신의 기득권 때문에 하나님께 대응하는 것이다.

 

15탕자의 형, 큰아들의 모습이 이러했다. 그는 더 큰 탕자, 아버지의 은혜를 인정하지 못하는 더욱 더 은혜없고 율법적이고 바리새인적인 신앙인이다. 자신이 더 일했으니 동생이라 할지라도 필요없고 싫다는 것이다. 자기 재산이 아까와서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다.

 

난 메어달려 기도해도 안 이루어지는데 초신자나 다른 신자가 한 번 기도하니까 응답받아서 간증하는 것을 보며 큰 형의 마음, 요나의 마음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가? 그 때 나를 더욱 점검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요한이 바나바가 존경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갈렙이 존경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똑같이 일하고 오히려 먼저 일하고 인정받았지만 베드로가 일하도록 앞을 내어주고 여호수아가 일하도록 뒤에서 받쳐주고 바울이 일하도록 내어주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해여야 하겠다는 믿음을 보여준 자들이 이들이 아닌가?

 

신앙의 연륜이 깊고 쌓일수록 더욱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면 노하고 비꼬고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의 문제덩어리가 된다.

 

나의 기득권이 포기되도록 요구되어질 때 온전한 은혜가 채워지고 성령의 충만함이 드러난다.

 

4.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자신의 한계의 극치이다. 내 뜻을 죽어도 굴복하지 못하겠다. 죽어도 저 사람이 복받는거 못보겠다. 죽어도 하나님의 일에 동의할 수 없다.

얼마나 자아로 꽉 차있는 사람인가?

신앙 안에서 나를 죽여달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표현이다. 차라리 이런 저런 꼴 안보고 죽겠다는 표현이다. 감정이 한 번 이렇게 폭발하면 이성적인 모든 사고도 중지된다. 이것은 다분히 한국적인 표현이다.

죽겠네..차라리 죽여라...죽어도 안해..” 자신의 고집의 극한 표현이다.

 

2, 3절은 엄밀히 말해서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쌍방통행인데 이것은 그저 요나의 독백일 따름이다. 요나의 한계는 곧 나의 한계가 아닌가? 신앙생활 하다가 힘들일 있을 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나도 요나처럼

차라리 떠난다고, 죽겠다고, 안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선지자도 그랬는데 나도 그럴수 밖에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우리에게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요나는 선지자이고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였지만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죄인의 자아로 하나님께 대들고 있다.

 

5. (4: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는 말씀이었다. 감정에 복받친 요나에게 똑같이 감정으로 대응치 않으시고 화내지 않으시고 여전히 품으신다. 단지 요나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도록 질문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요나의 불손한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네 생각이 과연 맞냐? 네 신앙과 행동이 신앙의 논리와 원칙에 맞냐? 똥고집 부리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똥고집은 알면서도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오셔서 잘못을 지적하시기 전에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놀라우시기 때문이다.

 

너는 구별된 선지자로서 내 대변자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대변인은 글을 써준대로 읽는 사람이 아니다. 그 마음을 잘 알고 그 마음을 사람들에게 잘 납득시킬 수 있는 자가 대변인이다. 한마디로 마음이 통하는 자가 대변자이다.

선지자 - “나비” - 대변자

 

이러한 질문에 요나는 대답이 없다.

6. (4:5)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침묵하고 응답하지 않는다. 죄를 짓자 아담처럼 숨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죄를 지면 더 이상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으려 한다.

한계가 꺾여지지 않으면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5절 앞에 그러나만 붙이면 13절의 말씀과 똑같은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응답 하면서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성에서 나가서 초막을 짓는다. 초막은 또다른 다시스의 공간이다.

 

선지자의 일은 은혜의 공간에 들어와서 서서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성에서 나가서 성 동편에 앉는다. 앉는다는 것은 사명을 포기하는 행동이다. (일어나라의 반대)

앉아있는 선지자는 더 이상 선지자가 아니다.

요나의 행동은 하나님이 끝까지 어떠게 행하시는지 보다가 자신의 생각과 틀리면 하나님을 떠나겠다는 행동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가? 불신자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초신자도 하나님을 잘 떠나지 않는다.

많이 아는 자, 그래서 이젠 하나님의 뜻을 좀 안다고 하는 자들이 교회 안의 떠나는 자들이다.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역사가 다르게 나타나면 떠난다.

 

초막은 무엇인가?

이것은 철저히 자기만을 위한 공간이다. 선지자가 일어나 외치지 않으니까 이제 내 안일과 평안과 안위를 위해서 일하게 된다. 그래서 대궐이라도 지었으면 인간적으로나마 부러움을 살텐데 선지자가 하나님을 떠나서 짓게 되는 것은 고작 초막이다.

3절에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불손하지만 담대하게 대항했던 요나는 하나님께서 행동을 돌아보도록 질문하시자 침묵하고 죽지도 않고 이젠 자신을 위해서만 산다.

 

하나님이 조금만 나에게 섭섭하게 대하시면 사명, 직분도 포기하고 내 초막에 앉아버리는 모습이 요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혼자 토라져서 앉을 수 있는 곳이 초막일지 모르지만 그 곳에서는 적어도 나 한 몸쯤 편히 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127: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고 성경은 말한다. 초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헛된 노력이 되는 것이다.

 

혹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나의 사명과 업적을 버리고 초막을 짓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은 성 안에서 같이 은혜를 맛보며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자고 말하는데에 나는 혼자서 나가서 나를 위한 삶을 예비하고 혼자 동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그 모든 행동이 헛되다고 말한다. 성경의 교훈은 그러지 말라고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알면서도 고집 피우지 말고 은혜 안으로 들어와라.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을 감당하며 사명을 이루고 하나님이 마음을 품어서 탕자가 돌아올 때 분노하지 말고 기뻐하며 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복을 받아도 더욱 나를 인내하며 대변자로서 하나님이 뜻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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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3장 5-10절

회개가 곧 부흥입니다.  


  • 요나서를 바라보는 두 관점 

- 하나님께서 요나라는 선지자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은혜)  

- 요나의 체험이 주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공동체 차원에서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의 은혜 체험을 통해 주위를 변화시키는데 있다. 

이스라엘의 선택의 이유-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을 구원하는데에 있다. 나에게 적용을 하면 나에게 은혜 주시는 이유는 나를 통해 주위를 변화시키는데 있다. 


  •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 

-> 하나님께 연단 받아서 사명을 완수한다. 영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cf) 우리의 한계 : 모든 하나님의 다루심과 연단을 개인적 차원에서밖에 해석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난 하나님께 연단 받아서 이러이러한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에서 그친다. 

-> 사명의 완수와 공동체적인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내가 받은 은혜를 통해 주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그것을 볼 수 있으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앙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병행한다. 

하나님사랑이 개인적 차원에서의 신앙의 목표라면 이웃 사랑은 그것이 공동체적으로 어떻게 영향력을 발하며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무리 복을 받았어도 그것이 교회나 사회나 아무리 적어도 가정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드러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온전한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항상 나를 통하여 가정을, 교회를, 사회를, 열방을 구원하는 데에 뜻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가 읽은 본문은 어찌 보면 요나서 전체의 클라이맥스다. 요나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이방민족인 니느웨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는가하는 내용이 바로 본문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도 부흥하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창조 이후로부터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데 요나서를 통하여서 부흥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이 드러난다. 


1. 부흥을 외칠 자의 준비 – 비전, 소명, 

부흥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된다. 세례요한, 마틴 루터, 영국의 부흥(찰스 스펄전, 요한 웨슬리), 미국의 제2의 부흥(조나단 에드워드)..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2000여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아도 부흥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흥을 위해 먼저 은혜를 받은 자가 있었다.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선포 자, 외칠 자를 준비시킨다. 신실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사명이 주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부르심(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편에서는 소명, 비전)이라 할 수 있다. 


2. 준비된 자의 순종..

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비전은 받았어도 비전의 이루어짐이 없고 부르심에 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인간이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가 순종할 때에 부흥은 일어난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순종의 훈련에서 넘어져서 사명에 실패한다. 요나의 불순종이 결국 회개의 시간을 지연시켰다. 은혜 받은 자의 불순종이 공동체의 부흥을 지연시킬 수 있다. 


3. 듣는 자의 믿음과 회개 

-> 선포하는 자, 외치는 자가 외치는 말을 듣고 반응하여 회개 할 때에 부흥이 일어난다. 그래서 부흥은 곧 회개에서부터 시작된다. 부흥은 내가 잘되고 축복받고, 사람이 많아지고 이런 것이 아니다. 부흥은 내가 바뀌는 것이다. 

죄에서 돌이키고 주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 맘대로 살던 자가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흥하면 연상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숫자나 건물이나 경제적인 축복을 생각할 때가 많다. 

부흥은 회개이다. 죄인이 돌아오는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부흥이다. 


교회의 실패가 어디에서 오나, 회개 없이 건물 이쁘게 지어가지고,,, 성도들의 입맛에 맛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간 중심으로 기획하고 꾸미고 해서 성도들을 동원하지만 그것은 참된 부흥이 없다. 부흥이면 우리의 심령이 변하고 삶이 회복되며 치유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인데 교회가 성도들이 늘어도 끊임없이 분란이 생기고 변화됨이 없다면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부흥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부흥과 성장은 다르다. 부흥에 힘써야 하는데 성장에만 힘쓰면 교회가 아닌 기업이 된다. 부흥은 회개와 변화이다. 그러나 성장은 단지 이윤추구이다. 성장이다. 


이렇게 부흥의 관점에서 요나서를 보면 요나서 1:1~ 3:4까지는 니느웨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선지자 요나를 부르시고 준비시키시고 순종케 하시는 내용이고 3: 5절부터는 듣는 자의 믿음과 회개가 나타나는 부분...


부흥은 믿음에서 시작되는데 믿음은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외치는 자의 믿음과, 이것을 듣고 반응하는 듣는 자의 입장에서의 믿음, 이 두 가지가 맞아 떨어져야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믿음만을 가지고서도 부흥은 일어나지 않는다. “네 믿음이 널 구원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믿음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주님이 계셔도 역사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삭개오와 같은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백부장과 같은 믿음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  


@듣는 자 입장에서의 믿음..

니느웨 백성 입장에서 요나는 한 작은 나라의 이방인에 지나지 않다. 변방의 약소국사람으로 3일 길을 걸어왔을 요나를 생각해보면 그는 아마도 행색도 초라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외쳐도 니느웨 사람 입장에서는 흔히 넘겨버릴 수 있는 초라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나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서 니느웨 사람들은 왕에서부터 끝의 백성까지 철저히 회개한다. 

이것이 바로 듣는 자의 믿음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물론 목회자나 교역자, 그리고 영적인 선배로부터 올 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전혀 생각지 못한 변방의 사람, 자기가 무시하고 평가하지 않았던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촉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행동하면 바로 부흥을 경험하는 것이고 무시하고 불순종하면 그러그러하게 살다가 끝나는 것이다. 


4절에 요나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외친다. 

그런데 5절에 보면 그것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굵은 베 옷을 입었다고 증거한다. 

그들은 믿고, 믿은 바를 선포했고, 선포한데로 행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유대인의 적, 이방인이었다. 

그들이 요나라는 선지자가 외치자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이 복주신 다는 것을 믿은 것도 아니다. 

노아는 백년 동안이나 방주를 지으며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외쳤지만 사위들조차 비웃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열명의 믿는 자만 있어도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그 열명의 믿는 자가 없어서 불타 버렸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경외하는 것이다. 

그분의 심판을 바라보는 것이다. 

니느웨 백성 입장에서 볼 때 요나의 외침은 그저 한 이방인의 소리일 뿐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반응을 한다. 

한 사람 뿐 아니라 낮은 자에서부터 높은 자에게 까지, 6절에 보면 왕과 대신들까지 그 말씀에 반응한다. 

그것이 은혜다. 

몸은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데, 말씀을 들으며 내 영혼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죽은 것이다. 


@ 말하는자, 외치는 자의 믿음 - 요나의 믿음..

만약 요나가 순종하기까지의 연단의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니느웨에 부흥이 일어났겠는가? 외치는 자는 전하기 전에 먼저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해야 한다.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준비하면서 먼저 은혜없이 설교를 준비하면 은혜가 없다. 그룹의 리더가 먼저 전할려는 말씀에 은혜 없이, 개인의 부흥없이 말씀을 나누면 오히려 그룹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기 전에 먼저 체험과 삶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니느웨에 가서 선포했다. 

내가 스올의 골짜기에서 구원되었듯이 너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이 나타날 것이다. 


죽음 앞에서 찬양하고 서원하고 하나님을 체험한 요나,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을 체험한 그들의 능력은 바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냥 말씀을 전하지 않았고 말씀이 체험되었을 때에 그것을 믿었고 증거하여 변화시켰다. 대부분의 현대 교회 설교는 체험하지 않은 들은 말씀, 읽은 말씀, 전해진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설교의 홍수 속(tv, 라디오, 인터넷)에서도 변화가 더딘 것이 아닌가? 


우리가 체험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신념과 신앙,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 할 때에 “우리가 어이할꼬.”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베드로만, 요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쓰일 수 있다.



요나의 말씀을 듣고 니느웨 백성은 회개한다. 

회개라는 말은 ‘돌아오다’이다. 

내 죄를 자백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소극적) 내가 잘못가고 있는 길을 180˚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다.(적극적) 소극적인 회개만 할 때 변화가 없다. 매일 자백하고 또 회개하기 때문에 오히려 개인의 자존감만 깨진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회개의 모습, 회개하는 그들의 믿음을 살펴 보자. 

1) 금식 선포 

금식 - 1) 일상에서 떠나 (일상-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타락한 도시의 공통점) 

          -> 가던 길을 중단하는 것

       2) 목숨을 거는 최고의 결단..-> 금식은 내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죽는 것을 표하는 것이 금식이다. 

cf) 우리의 금식 태도 - 

이왕 금식하는 거 어차피 아침에 늦게 일어나니까 아침금식..

이왕 금식하는 거 저녁에 금식하면 다이어트도 되니까 저녁금식

->이중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금식하라. 그것이 온전한 금식... 밥을 안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이 중요..


2) 굵은 베옷을 입음..

베옷은 두 가지 경우에 입었다. 첫째, 사람이 죽었을 때 , 둘째, 참담히 회개할 때

회개의 깊이가 깊을 수록 굵은 베옷을 입었다. -> 세상적인 정욕을 끊는 의미

지금까지의 옷 - 세상적인 사치의 옷

베옷 - 세상의 가치관과 허영으로부터 단절...

금식 - 육신의 정욕을 제어.... 베옷 -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철저히 끊는 것.

-> 여기가지의 회개는 백성들 개개인이 한 것, 여기서 그쳤다면 몇몇 회개하는 자들만 부흥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 니느웨의 부흥은 각각 개인의 부흥을 국가적인 부흥으로 이룩한 부흥이었다.        

         - 국왕이 주도한 부흥(리더자) 


국왕이 모범 

1) 조복을 입음 - 왕복을 벗었다

  ->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같은 베옷을 입었다. 리더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할 때 공동체가 따라온다. 자기 있는 것을 누리려 하지 말라. 

위에서 포기하면 영적인 파급효과가 크다. 

2) 베옷을 입음 -> 나도 당신들과 똑같은 죄인이다. 

3) 재에 앉았다. 

재 위에 앉고 재를 뿌린 것은 인생의 참 모습을 깨닫는 것, 한 줌의 재 밖에는 안되는 초라한 인생. 나의 나됨을 고백... 한계인, 나의 죽음을 상징...

4) 모든 짐승과 사람이 다 먹지말라. 굵은 베옷을 입고 부르짖어라. 

짐승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에게 말한 것이다. 

동물도 먹게 하지 말라.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고 오직 회개와 믿음에 전심하라. 

형식적으로 금식하지 말고 일상을 다 제하고 오직 기도와 회개에 전심전력하라. 

일이 많을 때에는 금식하지 말라.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메어 달릴 때에 금식하라. 


다급하고 간절한 회개...

-> 니느웨의 놀라운 각성...

5)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부르짖음에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떠났다. 돌이켰다. 부르짖고 또 그짓을 하면 그건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떠나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다. 

부흥의 역사는 곧 회개, 뉘우침의 행위와 함께 한다. 이제껏 잘못했던 것을 고백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곧 부흥의 시작이다. 


구체적 죄의 고백과 단절..


악한 길 - 모든 죄를 통칭

강포 - 구체적으로 드러난 죄된 행위    

-> 떠날 때 역사가 일어난다. 


@돌이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바뀔 수 있는가? 하나님이 뜻이 변경될 수 있는가? 

있다. 그런데 그 분의 변화는 우리처럼 원칙없이, 우유부단하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런데 공의로운 분이시기키 무조건적으로 구원하지 않으신다. 죄에 대하여는 심판하신다. 

그런데 심판받을 자가 돌이키면 그 분도 돌이키신다. 

그 분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0절의 말씀은 구원의 메시지이다. 

우리가 온전히 회개하면 그 분은 돌이키신다는 것이다. 사망과 전쟁과 지진과 부조리와 모든 종말을 향해 가는 길에서 우리가 온전히 회개하면 그 분은 돌이키신다. 회개는 멸망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회개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회개는 늦은 때가 없다. 

회개는 소망의 시작이다. 

부흥은 교회가 커지고 성도가 느는 것에 있지 않다.

하나님을 떠난 심령이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남이 변하고 상황이 변하고 외적인 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고 내 안이 변하고 내 심령이 변하는 것이다.

회개가 곧 부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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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2장 5-3장 4절) 다시 주어진 사명 


문학적인 견지에서 요나서 -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도 물론 그렇지만....

어떻게 그당시 인물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을까? 

요즘도 드라마를 보면 선한 인물은 실수는 할 지라도 선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악한 인물은 항상 악한 생각만 한다. 

그런데 2천 5백여젼 전에 기록된 이 요나를 보면 그가 선한 자인지 악한 자인지 분별이 안된다. 

읽으면 읽을 수록 우리와 똑같은 자다. 

믿는다고 하지만 고집세고, 의로운 것 같지만 불순종한다. 


이 성경을 우리에게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요나와 같은 성정을 가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자기 의에 갇혀서 하나님과 맞서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나서를 읽으면서 과연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을까? 

사람이 들어갈 만한 물고기는 무엇일까?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한가? 

이런 것에만 관심이 가 있으면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만다 그 구절을 지금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의도를 알아야 한다. 

선생님이 나를 앉혀놓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은 하나도 안듣고 저 분이 입은 옷은 진품일까, 남대문 표일까? 

저분이 쓰는 사투리는 어느 고장 사투리일까? 이런 것에만 신경을 쓰면 그건 정말 어리석고 교만한 자이다. 


지난시간에 우리가 나눈 것 - 요나의 회개 

요나의 회개의 근거 - 2절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1장의 폭풍 - 그는 잠자고 있었다. 주위는 다 죽겠다고 하는데 영적으로 죽은 자는 홀로 태평히 잠을 잔다. 

우리가 이렇다. 하나님은 성도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돌아오도록 말씀하신다.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가족 중에 누가 아프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도 하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인, 정말 피부로 와닿는 고난이 없으면 그런 것에 대하여 귀를 닫고 마음을 닫고 영적인 잠에 든다. 조금만 쉼 쉴 구멍만 있어도 회개하지 않고 아직 괜찮다고 한다. 

1장의 요나 - 머리로는 아는데 회개가 나오질 않는다. 고집만 더 거세진다. 

2장의 요나 - 그 고난 가운데 쉼쉬기 조차 어려워지고 나서야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불러 아뢰었더니"라고 말한다. 

이럴땐 어쩌면 믿는 다는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하다가도 다시 생각하면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다. 


내가 받는 고난의 결과는 무엇인가?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7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하였다는 것은 내 마음이 고통스러웠다는 표현이 아니다! 

기름 부은 자에게 주신 은혜의 영, 믿는 자에게 주신 성령이 그 안에서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믿는 자가 불순종하면 내 영혼이 그 속에서 피곤한 것이다. 

왜? 영은 하나님 주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그 말씀에서 벗어나니 피곤하고 지치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피곤하고 지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고단해서 피곤하고 지치는 것이 아니다. 

영은 불순종하면 피곤하고 지친다. 영의 호흡은 기도요, 양식은 말씀이다. 

은혜로운 것은 믿는 자의 영혼이 피곤해지니까 그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본향을 향한다는 것이다. 


1장에서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 같던 요나가 자신에게 닥친 고난으로 말미암아, 또 영혼의 피곤함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한다. 


(욘 2: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8절은 좀 뜬금없는 구절이다. 지금 자기 죄를 회개하면서 주께 돌아오는데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은혜를 저버린다고 말한다. 이 표현에는 두 가지 마음이 다 스며져 있다. 

당시의 거짓 선지자를 비롯한 잘못된 신앙인이다. 물질적인 번영 앞에서 하나님을 떠난 세대를 가리킨다. 요나의 처음 마음이다.난 그래도 저 들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그런 물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표현이다. 


두 번째는 왜 회개 가운데 남을 이야기하는가? 결국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요나 그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는 것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자기의 의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말씀 마져도 자기가 판단해서 그것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뜻이라도 거절해 버리는 자기 우상에 빠진 모습이다. 이제 그런 교만함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께 돌아오겠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기도의 표현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회개 가운데서도 두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서의 인물 표현은 너무나 사실적이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회개함 가운데서도 잔머리를 쓰고 있다. 

그 결과를 후에 보게 된다. 


이제 3장으로 넘어간다. 


  • 3장 : 니느웨의 회개의 장, 부흥의 장 

그 근거는 2장 ->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드린 회개와 결단의 기도

한 사람의 회개가 한 민족의 회개로, 부흥으로 이어졌다! 


  • 요나서의 엔딩은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불순종으로 시작했다가 불평으로 끝난다. 

1장 : 불순종 -> 2장 : 요나의 회개, 부흥 -> 3장 : 공동체의 회개 부흥 -> 4장: 불평 

-> 우리 신앙의 굴곡, 삶의 모습..


* 개인적인 부흥 다음에는 공동체의 부흥을 기대하라. 그러나 공동체의 부흥 후에 누군가의 불평, 침체가 올 수 있음을 각성하고 근신하자. 

-> 선 줄 알면 넘어질 줄 조심하라. 


  • 2장과 3장의 공간: 물고기 뱃속에서 토해내자 바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의 지체가 있었다.  

(고독, 준비의 시간) -> 하나님이 훈련하시고 다시 찾으시는 기간


2:9 주께 제사를 드리고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학자들의 의견 -> 제사는 성전에서 드리므로 예루살렘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고향으로 귀향하여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2장 : 절박한 현실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회개와 부흥, 기쁨과 소망이 함께 했던 시간

2장과 3장의 사이 :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침묵과 고독의 시간 

  개인적인 뜨거운 체험 뒤에 현실이 바뀌고 내가 온전히 바뀐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차가운 현실로 날 보내어서 온전한 순종을 이루게 하신다. 

  연단 뒤에 오는 마지막 차가운 연단...

그 기간을 통해서 자신을 확실히 살피고 준비되어진다. (2번째 사명을 위한 준비의 시간,,

ex) 사도바울.. 다메섹에서 회심 사건 다음에 아라비아로 내려가서 3년간의 준비의 시간...다윗-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뒤 7년간의 준비의 기간...

-> 그 기간을 통하여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삶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받은 은혜가 몸에 입혀지게 하는 것이다. 


1. 광야의 시간을 지내는 요나에게 말씀을 들고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배반했던, 불순종했던, 실패했던, 절망했던) 나에게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

ex) 베드로... 3번 부인하고 절망 중에 다시 고기 잡으러 나갔을 때에 다시 찾아오셔서 물고기를 구우시고 따뜻한 불로 맞아주시며 네가 날 사랑하느냐 하신 예수님..


-> 다시 찾으신 하나님은 첫 번째의 일을 들추어내시지 않는다. -> 인격적인 하나님..

왜 그랬냐, 그것봐라. 하시지 않고 나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심판이 아니라 긍휼이고 평안..


2. 두 번째 재 소명에서 첫 번째 주셨던 말씀을 그대로 주신다. 

실패했다고 깎지 않으신다. 인간의 사회라면 훨씬 작은 임무를 주셨을 텐데 실패 뒤에 온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처음의 사명을 그대로 주신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점 :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불순종한 과거가 있기에 사명은 그대로 주시되 요나의 그릇된 행동을 지적해 주시고 하나님의 분명하고 구체적인 일을 행하게 하신다. 


1: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 

3: 내가 네게 명한 것을 (40일이 지나면 멸망한다는 것) 

  -> 다시 불순종하지 않도록, 급박한 일을 공개하신다. 


3. 순종하는 요나 -

1장 : 말씀 -> 그러나 (1:3) 

3장 : 말씀 -> 여호와의 말씀대로 (3:3)


*공통점 : 

(1)“일어나” :

동일한 행동 -> 문제는 불순종의 차원에서 일어나느냐 순종의 차원에서 일어나느냐..

(2) 목표를 향해서 가려고 함 

(다시스, 니느웨..) 

-> 어떤 사람은 순종의 행위에서 일어나 가고 어떤 사람은 불순종의 의미에서 일어나 간다. 


4. 순종하게 되었을 때에 기다린 것은 어려운 현실 

3장의 순종의 대상-> 하나님의 말씀   

순종이 곧 형통은 아니다. 순종하자 곧 만사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 : 지극히 큰 니느웨, 3일 길을 가서, 하룻길을 행하며 외침...

니느웨를 다 돌면 3일 길 


온전한 순종은 3일 길 -그러나 요나는 하룻길만 행함...-> 4장의 불평이 나온다. 

하나님의 일을 경험했지만 이내 불평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3일 길의 순종이었다. 


1장 : 큰 성읍,  2장 : 큰 물고기   3장 : 큰 성읍,  4장 : 큰 풀 

-> 요나를 힘들게 했던 것..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장벽 

그러나 그 장벽을 능히 이기시는 하나님...

반쪽 순종하면 반드시 화가 일어난다. 불평, 갈라짐, 또 다른 침체...


요나서는 4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성경이지만 신앙인생의 여러 굴곡들이 다 나와있다. 

오늘 읽은 3장의 짧은 4절의 내용에서도 긴 연단 뒤에 생략된 준비의 기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온전하지 못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요나의 모습이 다 나와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워나가신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구원이 온 땅에 충만케 일어나게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개인에게 부흥을 체험케 하시고 그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가신다. 

우리 모두는 요나와 같이, 그보다 나을 것이 없는 신앙인들이다. 우리도 요나와 같이 불순종하고 때로는 우리 맘 속에 늘 품고 있던 어둠의 장소-다시스-에 가서 쾌락을 꿈 꾸기도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거부하며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우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간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을 때만 순종하면서도 내 신앙이, 열심이 제일인줄 안다. 

회개의 순간에서조차 자기 합리화를 한다. 자기 변명을 한다. 그래도 저들보단 낫잖아요 하며 자기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품어주시면서도 고쳐나가신다. 어쩔땐 물고기 뱃속과 같은 그런 연단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죄악 됨과 연약함을 깨달아 회개케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참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신다. 그 보다 더 많이 우리를 기다리시고 또 참아주신다. 정말 오래동안 참아주셔서 우리가 온전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끌고 가신다. 온전치 못한 자들을 끌고 꾸역 꾸역 그 분의 일을 이어가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금 소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신다.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의 일을 거역치 못하게 하신다.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교회로 만들어 가신다. 

그러지만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지만 우리가 그 가운데서도, 다시 주신 기회 가운데서도, 뼈져린 회개와 결단 가운데서도 우리가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면 다시금 불평이 일어날 수 있다. 갈라지기도 하고 분열될 수 있다. 

예수님이 다시 찾아 오셔서 세우시고 성령으로 기름부은 제자들이 세운 교회라 할지라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순종하면서도 온전히 순종치 못한 사람들이 생기면서 점차 쇠퇴하고 갈라지고 분열되어 사도 요한이 서로 사랑하라는 성경을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요나와 같은 은혜를 우리는 받지 않았나. 소망없는 우리 인생에 참 의미와 목적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사람들은 입을 것, 먹을 것 같다가 염려하며 사는데 우리는 주의 일을 염려하며 사는 은혜를 누리지 않는가?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온전한 순종함이 없으면 곧 불평한다. 불평은 우리가 순종치 않는다는 증거다. 
우리를 다시금 찾아오신 예수를 기억하자. 배반하고 불순종한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계획을 알려주시는 주님께 온전한 순종함으로 제사를 드리자.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