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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요 1:42)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1. 만남 

아버지는 요한, 형제는 안드레 

가버나움으로 옮겨 아내와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형제인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께로 나옴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 잡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는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는 장면. 


이 장면이 누가복음 5장에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눅 5:1-11) 

1절: 무리는 해변가에서 말씀을 듣는데 어부들은 대신 그물을 씻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신다.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 삶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안드레를 통해 예수를 소개 받았지만 정작 예수를 따르지 않았다. 

자기의 직분은 고기 잡는 어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해변가에서 예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베드로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자기의 직분은 고기 잡는 어부이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우선순위는 항상 고기 잡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아내와 장모를 돌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오셔서 자기 배에 오르셨다. 

자기 인생에 들어오셔서 듣지도, 들리지도 않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저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먹고 살기 괜찮은 사람들만 듣는 말씀이라 여겼는지 모른다.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은 언제나 

"너의 삶을 주관하시고 너의 하루 하루를 책임지시는 주권자가 누구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전쟁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은 되었지만 정작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더 의지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였다. 


베드로는 광야에서의, 가나안에서의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리 천국의 귀한 말씀을 들려주어도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먼 얘기이고 뚱딴지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직접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하늘의 말씀을 들려주신 후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리고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다. 

하루 하루 걱정스레 살던 베드로에게, 이것 때문에 따르지 않던 진리의 말씀을, 결국 진리의 말씀이 그의 삶의 고통을 다 사라지게 하신 것이다. 


깊은 데- 그가 살았던 삶은 그야말로 얕은 삶이었다. 얕은 신앙이었다. 


그 앞에 그는 진정한 회개를 한다.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멀리했던 진리의 삶, 신앙의 삶이 결국 하루 하루를 이기게 하는 능력임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마도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제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2. 환경이냐, 예수냐 (마 14:22-33)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 예수는 그들을 건너편으로 가라 말씀하신다. 

그 사이에 있는 사건,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내가 뉘게로 가로리까? 이젠 말씀을 쫓는 자가 된다. 

큰 기적 이후에 그들은 예수 없이 험한 폭풍우를 만난다. 

밤새 폭풍우 속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그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말한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어떤 물인가? 

 죄인인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물이다. 사망의 물이다. 

 애굽과 광야 사이를 가로막은 물, 홍해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땅을 가로막은 물이다. 바로 세례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 가나안 사이를 가로막은 물, 요단강이다. 바로 말씀의 물, 은혜의 물, 성령의 물이다. 엘리사가 가죽옷을 헤치며 걸었던 그 물, 성령의 능력이다. 

 

 그 물을 지금 예수를 바라보고 건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마 14:30)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는 물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는 물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와 함께 배에 오른다. 

(마 14: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첫번째 베드로에 배에 오르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바람을 그치게 한다. 


신앙 생활은 결국 내 배에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 분을 내 배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3. 믿음과 상식 

(마 16: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신앙은 자란다. 

이제 내 삶의 주인, 환경을 넘어선 믿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에게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전능자, 그리고 살아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아닌 상식에 기초한 믿음이다. 자기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이다. 자기에 근거한 믿음은 감정만큼이나 요동치고 위험하다. 

 

베드로의 고백 후에 예수님은 비로서 고난과 죽음, 부활을 말씀하신다. 

베드로의 반응은 무엇인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예수께 항변했다? 

대적했다는 것이다. 예수를 대적하는 자! 그것은 사탄이다. 그것이 상식이든, 사랑이든, 예수의 길을 대적하는 자, 바로 사탄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마 16:23) 


이 후부터 베드로의 삶은 참 믿음이 무엇인가하는 여정이다. 상식과 신념에 근거한 믿음인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인가? 

변화산상에서 그는 "여기가 좋사오니....," 


그 절정에 마지막 만찬 사건이 있다. 

(마 26: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에 대해 주님의 대답은 싸늘하다. 

(마 26: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설명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덧붙여진다.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마 26:36)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너희가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다. 

무엇으로부터의 시험인가? 사탄으로부터의 유혹이요, 공격이다. 

사탄을 이기는 능력은 기도 외에는 없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검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길 힘이 없다. 


왜 상식에 근거한 신앙, 자기 확신, 신념에 근거한 신앙이 무너지는가? 

사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무너뜨려서 제 정신을 잃게 만든다. 요동치게 만든다. 결국 잘못된 선택, 잘못된 행동으로 후회하게 한다. 


4. 결국은 사랑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회개를 일으키는 것도, 무너진 나를 일으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다시금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배신자인 내가 다시금 주님께 염치없이 기도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랑이다. 

사랑엔 계산이 없다. 

거기엔 불사름만 있다. 타오름만 있다. 일어남만 있다. 


5. 최후 

쿼바디스의 명장면 

예루살렘에 임한 핍박을 뒤로하고 예루살렘을 피해 도망치는 베드로 

그 때 만난 예수님 

"쿼바디스 도미니?"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때 예수님의 말씀 

"네가 버린 십자가를 내가 지러 간다." 

"네가 버린 십자가를 내가 지러 간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지고 가겠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죽기까지 말씀을 버리지 않는 자가 된다. 

다시는 배신하지 않는 자가 된다. 



베드로는 다혈질에 속한 사람이다. 미국 레슬리 플린(Leslie B. Flynn) 목사는 베드로에 대해 ‘갈릴리 호수 같은 사람이다’고 했다. 갈릴리 호수는 잔잔하고 평온하다가도 순식간에 노도광풍이 몰아치는 알 수 없는 바다이다. 베드로는 성격이 갈릴리 호수 못지않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베드로를 처음 본 예수는 그에게 게바라 새 이름을 주신다. 요동치는 그에게 절대로 요동치지 않는 성품, 바로 사랑을 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베드로의 신앙을 연단하시고 그리고 다듬어 가셔서 결국 성숙케 하셨다. 


공회원들이 무서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너희가 죽였다”고 담대히 말하고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말에 “사람 앞에서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앞에서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나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담대하게 고백한다. 행4:18-21). 

  되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었던 그가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고 권면하는 자가 된다. (벧전5:5). 

  산중에서도 기도하다가 잠자다가 정신 못 차려서 예수님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 버렸던 그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권면한다. (벧전5:8). 

  늘 준비성 없이 즉흥적으로 행하다가 실패한 그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본받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되”라고 권면한다 (벧전3;15).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 그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실수가 많은 사람, 실수가 없기에 조심하는 사람. 

누군가를 짝사랑하는데 어떤이는 고백했다가 툇짜 맞을까봐 그저 그런 관계로 쭉,,,

어떤이는 툊짜 맞더라도 용감히 고백. 

베드로는 언제나 앞장섰던 자. 그래서 실수도 많았던 자.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나서기가 쉽지 않다. 점점 움츠려들고 조심하고 가만히 있어서 본전만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 본전을 유지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모험이 없는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먼저였다. 그래서 칭찬도 제일 많이, 꾸지럼도 제일 많이 받았다. 

요동치는 그의 성격을 과감없이 예수님께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처음부터, 아주 처음 부터 베드로라 부르셨다. 시작부터 예수님은 그를 다듬으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시몬은 게바, 즉 베드로, 반석이 되어 죽는다.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신앙, 결국 다듬어져 말씀을 이루는 신앙. 

그가 바로 베드로,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사도요한 - 사랑받기를 갈망한 제자에서 사랑하는 제자로 


(요 13: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  


형 야고보, 베드로와 안드레와는 같이 일하는 관계. 배를 가지고 있고 삯꾼을 거느리고 있었던 부유한 어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도 친분이 있을 만큼 사회적인 지위가 있었던 가문. 

아버지는 세베대. 어머니는 살로메. 

어머니는 살로메. 예수님의 어머니와 자매지간이거나 적어도 가까운 친척, 예수님과도 친척관계. 

세례요한, 예수님, 사도요한과 야고보가 모두 다윗의 가계에 속한 자. 

제자들 대다수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여기면서 따랐을 때에 살로메와 더불어 이 가족들은 예수님께 개인적인 청탁을 하기도 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막 10:35-45) 


불과 같은 성격의 소유자,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 막 3:17절 


가장 나이가 어렸으나 가장 사랑받기를 원했던 제자. 예수의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품에 안기어 있던 제자.  (오늘 본문, 요 13:23) 


베드로와는 언제나 경쟁관계 

21장 베드로에게 "네가 날 사랑하느냐?" 

물을 때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 21: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요 21: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요 21:2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그 역시 십자가 상에서 떠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의 곁을 지키고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이 제자에게 마리아를 부탁하셨다. 
  •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다>(요 19:26-27)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 보았다. 
    군병이 에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 뿐이었다.(요 19:38-42). 요한은 용감하였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하였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 요한복음 - 예수와 요한 사이의 비밀을 다 기록, 복음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건들...: 1장 - 예수님은 누구인가? 태초부터...2장- 가나의 혼인잔치,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 4장-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5장 - 38년된 병자... 6장 -오병이어 이후의 사건, 너희도 가려느냐? 

너무 가까운 자가 저지르기 쉬운 잘못. 

남을 인정하지 않는다. 포용성이 없다. 기득권을 버리지 못한다. 

  • (막 9:38)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막 9:39)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막 9: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입니다. 자기만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 사역을 한다면 자기를 따라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인정받고 열심히 하는 사람의 특징, 남이 하는 것은 못마땅하다. 자기를 따라하지 않으면 비난한다. 

교만하고 편협한 생각이다. 

  • 열정과 욕심은 있으나 훈련되지 않은 자. (깨닫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 야고보와 더불어 잠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한 어리고, 열정적이나, 이기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의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변화된 성숙된 인품의 사람이다. 


과연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 그리고 계시록이 같은 저자의 것인가? 늘 논란의 대상. 왜? 그 문체나 주제나 깊이가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3:16)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겼다. 요한은 책임감으로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도직의 징표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하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상기시켜 주었다. 요한은 그의 저술에서 오십 번 이상이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믿었으며 밤을 새워 고기를 잡은 후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제자였다(요 20:8/21:7). 요한은 하나님 계시의 환상을 포함한 영적 진리를 알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받았다. 


요한복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야망으로 가득차 있으며 화도 잘 내고 성급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요한 서신서에서 요한은 사랑의 화신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언자로 말한다. 계시록에서는 하늘과 땅의 비밀을 깨달은 자로 표현 


(계 22: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사랑할 수 있는 훈련 

  • 야고보는 첫번째 순교한 자 요한은 끝까지 교회를 섬긴 자 
  • 갈렙과 여호수아처럼...가장 하나님을 사랑한 자가 가장 먼저 어려운 길을 가장 늦게 험한 길을... 


포용하는 훈련 

  • 사도행전 3장 - 철저히 베드로를 섬기는 자. 앞세우는 자. 뒤에 물러나는 자. 
  •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수장으로서 언제나 공식적인 리더가 되었다면 요한은 철저히 아웃사이더로의 삶을 살았다. 요한공동체는 소외된 자들의 모임이었다. 


(요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 3: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복음에서 요한일서로의 신학의 전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 


(요일 4: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랑받는 제자에서 사랑하는 제자로 바뀐 삶. 

가장 높이 되고 싶었던 요한은 가장 낮은 자로서 섬기며 사랑하는 자로서 끝까지 살다가 교회를 지키고 거룩하게 죽었다. 


가장 많이 사랑받는 이름 

영어로는 John- 미국에서만 대략 600만명 - 15명 중 하나 

프랑스어로 쟝, 스페인어로 후안, 한국은 그냥 요한-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름 

 

Posted by 소리벼리

 

가룟인 유다 (마가복음 14:17-21) 

가룟 유다 - 갈릴리 출신이 아닌 유일한 제자. 

가룟: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제일 먼저 땅을 분배 받은 민족이 바로 유다지파. 

 

 

왜? 야곱의 아들 중 장자권이 유다에게 넘어옴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땅을 분배받음. 

그 분배 받은 땅 중 하나가 가룟지방이었을 것이다.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함이라는 뜻.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 

그러나 가룟 유다로 말미암아 그 이름은 배반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찬양하다가 타락한 자가 또 누가 있나? 

바로 루시퍼,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장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교만함이 들어가자 그는 하나님과 자기를 동일시하거나 오히려 높이다가 땅으로 떨어지는 자가 된다. 

        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타락한 자가 되기 쉬운가? 

        감정에 휩싸이기 쉽기 때문이다. 찬양의 대상이 바뀌게 되면 찬양은 타락의 도구가 될 수 있다. 

        

        80-90년대 예배- 찬양 예배가 주. 찬양의 밤, 경배와 찬양. 거의 모든 교회가 찬양을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예배당이 콘서트홀처럼 변해가고 신학교마다 찬양사역자를 배출하는 과가 생겨나고 수많은 찬양음반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나자 한 수간에 그 찬양의 예배들은 시들해져 버렸다. 많은 찬양사역자들이 찬양사역을 그만두거나 일반음악으로 넘어가게 되고 90년대 찬양문화를 이끌던 주찬양단이나 옹기장이의 리더들이 이런 저런 스캔들을 일으키며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왜 그럴까? 한 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인기스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그들이 가로챘기 때문이다. 찬양하는 자들이 스타가 되었고 말씀보다, 예배보다 찬양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가룟유다, 그는 어떤 자인가? 

주님은 그를 처음부터 배신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제자로 부르셨다. 

(막 3:13)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막 3: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 산에 오르사: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부르셨고 제자들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에 올라 주님을 따랐다. 
  • 그는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였고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였다. 그는 주님과 함께 했고 제자들과도 동거동락했다. 
  • 그리고 주님이 주신 권능을 함께 나누고 사용한 제자였다. 


(요 12: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한복음 12장 6, 13장 29절에 보면 그는 제자들 사이에서 돈 궤를 맡은 자, 즉 회계 담당이었다. 

돈을 취급하는 자,  세리 마태가 있음에도 유다가 제자들의 회계를 맡은 것을 보면 제자들 사이에서도 세리보다는 타 지역 사람이지만 유다를 더 신뢰했음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실재로 당시 이스라엘에서 북쪽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하는 땅으로 통했고 유다는 예루살렘 중심으로 모든 종교,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중산층 이상의 배운자들이 거하는 땅으로 통했다. 


다른 다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다도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적 해방을 줄 메시야, 경제적 부를 가져다가 줄 경제적 메시야로 기대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발전시키고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등으로 고백하며 성령으로 변화되었지만 유다는 변화되지 못한 제자였다. 

그는 끝까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요 6: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이 구절의 배경이 무엇인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께서 그들을 가리켜 "저들이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베부른 까닭이다."라고 한탄하시며 썩지 않을 양식, 즉 자기의 몸과 피로서 거듭날 것을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 중 많은 무리가 떠나갔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그 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에게 주님이 "너희도 가려느냐?"하고 물으니 제자들이 무엇이라 말하는가? "생명의 말씀이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하며 참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때에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은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그의 믿음이 처음 부터 잘못되었음을 알고 계셨다. 


  • 루시퍼가 교만함으로 인해 찬양하는 자에서 사탄으로 떨어졌다면 유다의 죄악은 탐심이었다. 

(요 12: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 12: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 12: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여인이 쏟은 향유를 보며 그는 저 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나 큰 돈인가?한다. 얼핏 보면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그 중심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한 마음이 아니라 탐심에 있었다. 

그는 돈궤를 맡았으나 그 돈궤에 손을 대고 훔쳐 갔다고 기록한다. 무엇이 훔쳐가는 것인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곳에 쓰는 것이 훔치는 것이다. 


(딤전 6: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눅 22:3)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눅 22:4)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눅 22:5)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탐심을 지닌, 돈을 사랑했던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그가 사탄은 아니었다. 그의 탐심을 통하여 사탄이 걸고 미혹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스승, 메시야를 은 30에 팔아넘긴다. 

은 30은 노예 한명의 값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노예의 값을 받고 팔아 넘긴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판 돈의 극히 일부를 숨겼다가 성령을 속인 죄로 죽임을 당한다. 큰 것이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미혹은 작은 탐심에서부터 나온다. 


  • 위선의 극치 

향유를 보고 가난한 자들을 언급하는 모습. 

그리고 예수를 팔아넘기면서 그 입에 입맞추는 모습.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이중적인 죄인의 단면을 보여 준다. 

겉모습이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신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의 이중적인 위선에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시고 기회를 주신다. 


  • 유다는 버림받은 신앙인인가? 처음부터 예수의 죽음을 위해 선택된 자인가? 

그렇지 않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의 말씀은 유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그 자리에 있던 열두 제자 모두를 향한 말씀이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했다. 

그런데 그는 세번의 주님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시는 말씀에 눈물로, 회개로, 다짐으로 화답했다. 


유다에게도 적어도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째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이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회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주님과 눈이, 손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고백대신, 회개 대신 그 자리를 뛰쳐 나갔다. 

둘 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병사들을 대동하고 주님의 입을 맞출 때이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말씀하신다. 

마지막,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의 마음에 후회가 들어왔다. 

(마 27: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 27: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그런데 그의 뉘우침은 단지 후회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절망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후회가 아니라 회개이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후회했지만 돌아오는 대신에 죽는 길을 택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사망의 길을 택한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유다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 안에 숨겨진 교만함과 탐심, 누구든지 말씀과 기도에 깨어있지 않으면 빠지게 되고 빠질 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우리의 이중적인 가면을 벗어야 한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이 연약함을 벗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가면은 위선을 낳고 한 번 위선에 빠지면 진실해지기 어렵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또한 많이 후회한다. 그런데 후회에서 멈추면 안된다. 반드시 돌이켜야 한다. 돌아서야 한다. 

(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님은 미혹에 빠져 있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거듭 거듭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아담아 어디있느냐 부르시고 네 동생 아우가 어디있냐고 가나안을 부르신다. 죄의 소욕이 네게 있으나 너는 그것을 다스려라고 말씀하신다. 

은혜는 이 안타까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은혜다.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역사할 수 없다. 

Posted by 소리벼리
 

다대오라고 하는 유다 

요한복음 14:22-24

(요 14:22)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요 14: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 14:2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1. 이름 

유다라는 이름의 기원 : 야곱의 네번째 아들. '

"찬양"이라는 뜻.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를 하나님께서 태를 여시어 라헬에게는 자녀를 일찍 허락하지 않으시고 레아에게는 자녀를 허락하셨다. 첫째 르우벤, 둘째 시므온, 셋째 레위를 낳을 때 레아는 자신이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함을 자녀를 통해 위로 받고 또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할까 기대한다. 즉 레아의 문제는 하나님께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사랑을 받느냐 못받느냐에 자기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넷째 유다를 낳고 무엇이라 고백하냐면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하며 그의 관심을 남편 야곱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린다. 이제는 남편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의 이름은 "찬양"이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범죄함으로 야곱의 장자권은 유다에게로 옮겨진다. 하나님의 축복권이 찬양하는 자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전쟁을 할 때도 유다지파는 맨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렸다. 그 이름은 영광의 이름이요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래서 유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흔한 이름이 되었다. 


흔한 이름이었지만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적어도 세사람의 유다가 있다. 

1) 예수님의 동생 유다다. 

(마 13: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2) 유다하면 가장 유명한 이름으로 기억되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이다. 

3) 우리가 나눌 유다이다. 


요한복음은 유다를 가리켜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소개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다대오라고 그의 별명을 소개한다. 

왜 유다라는 이름대신 가룟이 아닌 유다, 다대오라는 이름으로 불렀을까? 


그것은 신약성경이 씌여질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판 가룟유다로 말미암아 유다라는 이름이 치욕스런 이름, 부정한 이름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이름이 가룟 유다로 말미암아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럼 왜 유다는 다대오로 불렸을까? 

다대오라는 뜻은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의 교부가 쓴 문서 중에 두 명의 유다를 비교한 글이 남아있다. 

"또 하나의 유다는 가롯유다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제자이다. 또 가롯 유다가 불평을 하고 있었을 때에 이 사람은 찬양하고 있었다."

가롯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 위하여 값 비싼 옥합을 깨드렸을 때에그 기름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썼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불평을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은 그 돈에 있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곁에서 유다 다대오는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제자들이 떠들썩하면서 서로 자기가 수제자다. 자기가 높다 하며 논쟁하고 싸울 때에도 유다 다대오는 말없이 고요하게 한 구석에 있으며, 어느 편에도 감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었을때 조용히 한 옆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제자! 그렇기 때문에 유다는 제자들 사이에서도 적이 없고 사랑받는 제자였고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유다라는 말의 뜻은 "찬양"입니다. 그러나 가롯유다가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이름 값을 하지 못했고, 다대오 유다는 정말 이름 값을 했던 제자입니다. 문서는 "모든 제자들의 사랑과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던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언제나 조용히 자기의 할 일을 하던 제자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 인물 연구를 하면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요한이 [적극적인 사랑의 사도]라면, 이 유다는 [조용한 사랑의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유다는 떠들썩하지 않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면서 제자들을 화목하게 만들었고, 주님을 찬양하며 불평과 원망대신에 자기의 할 일을 꼬박꼬박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2. 예수님과의 대화 

요한복음 14장은 마가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는 중에 했던 대화입니다. 

13장에서 발을 씻기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섬겨라. 발을 씻겨라" 하는 말씀을 주시면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한 대상이 가룟 유다 뿐만 아니라 서로 섬기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모든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나를 팔리라는 말씀의 장은 베드로가 세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면서 14장에서 더 깊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희가 그 길을 아느니라"(14:4)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아닌 다른 세명의 제자가 반응합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도마입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를 다룰 때에 우리는 도마를 가리켜 질문하는 신앙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나사로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 "우리가 함께 죽으러 가자"하는 열정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번의 질문과 대화를 통해 참 믿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믿음의 제자가 됩니다. 


길을 모르겠다는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간단하고 단호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십자가의 죽음으로 길을 잃어버린 도마는 결국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다시금 참 길로 들어섭니다. 


이어서 빌립이 등장합니다.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다." 

예수님을 본 것이 곧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는 말씀에 빌립은 "아니요, 아버지를 보여 주세요!"합니다.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물질주의자,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바로 이들을 먹이려면 얼마가 필요합니다했던 그 제자는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말씀에 다시금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합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우리는 신앙생활이나 또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하는대로 역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똑같은 일에 있어서도 내가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 내가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꼐서 역사하시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출애굽 시키려는 방법에 있어서 모세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다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왕을 주세요 하지만 하나님은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들어닥칠 환란을 아십니다. 


프란시스라는 유명한 성자가 날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후로 자기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 주고, 무너진 교회를 세우는데 열심이 특출한 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문등병자들을 잘 돌보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잘려고 하는데 밖에서 한 문등병자가 잘 곳이 없다고 하며 문들 두드립니다. 그를 데리고 들어와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자신의 침대 밑에 자리를 내어주고 자라고 하는데 유난히 그 문등병자는 프란시스의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이야기 합니다.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얻어먹는 주제에 정말 염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문등병자들의 성자라 해도 침대까지 내어주는 것은 병에 걸릴 수 있는 위험이 그만큼 커지고 위험위험한 것이지요. 그래도 꽉 참고 그를 침대에서 재웁니다. 아침이 되니 언제 일어나서 나갔는지 그 문등병자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또 하루를 보내고 하나님께 또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내가 어제 너와 함께 머물지 않았느냐?"하나님은 프란시스의 기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우리가 나눈 다대오, 가룟이 아닌 유다가 묻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질문은 무엇입니까? 

난 이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압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만 보여주십니까?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보여 주십니까? 


여기에 유다의 마음이 다 담겨있습니다. 

도마와 빌립이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난 주님의 길을 모른다고 자기의 불확실한 믿음, 불완전한 믿음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반해 유다는 어떻습니까? 


저는 이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그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그들에게도 알려주십시오. 


유다의 관심이 타인을 향합니다. 안타까운 전도자의 마음, 선교사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왜 유다가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으로 부터 사랑스런 제자였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준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3절) 


네가 내 말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도 너를 사랑할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러면 네가 가는 곳 마다 너를 통해서 나를 보여 주는 것이다.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여 주었듯이 너를 통해서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하는 유다의 질문에 네가 나를 사랑함으로 그들에게 나를 보여 주어라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네가 날 사랑하느냐?하시면서 베드로에게 그럼 내 양을 치라 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보여 줍니까? 

주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주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 죽기 까지 사랑하는 것.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때까지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을 통해서 주님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리신 것처럼... 


3. 나가는 말 

다대오는 잘 드러나지 않은 제자입니다. 오히려 가룟 유다에 가려 그의 이름마져도 제대로 불러지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 이름값 못하고 찬양대신 불평함으로, 영광대신 치욕적인 열매를 맺었다면 다대오 유다는 조용한 가운데 자기 이름값을 다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신 보다는 타인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쪽 편을 들진 않았지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이고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들어서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명한 자를 들어서 유명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영향력이 작은 것을 불평하지 마십시오. 

  약한 것을 불평하지 마십시오. 

  무명한 것을 불평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베드로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루에 삼천명을 회개시킬 수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물위를 걸을 용기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우리 가운데 유다 다대오는 될수가 있습니다.
내가 비록 유명한 사람이 안 되어도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면 내 이름 값을 다하여 조용히 이름없이 모든 것을 긍정하고 이 삶을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사람은 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유다는 시리아로,아라비아로,페르시아로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중심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그 도시에서 그는 바돌로매라는 제자와 둘이서 동역하면서 A.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될 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그는 다시 해외 선교를 나갔다가, 시리아라는 곳에서 칼을 맞아 마지막 순교를 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