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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왕상 18:41-46) 


17장에 처음 등장하는 엘리야

아합왕 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바알과 앗세라의 숭배자들이 가득하던 때. 

성전에도, 나라에도, 곳곳에 바알과 앗세라의 기복신앙, 쾌락 신앙, 세속 신앙이 가득하던 때

풍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예배를 대신하던 때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이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이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이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분노하며 아합왕에게 나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제 내 말이 있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내 말이 떨어지면 

"너희의 복이 끝날 것이다. 이제 복에 겨워 오만방자하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이 복이 끊어질 것이다"고 우렁차게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선포한 것이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다. 자신의 믿음이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신념이다. 

신념은 때로 강한 용기로 나타나지만 능력이 없다. 보장이 없다. 

그 말을 하자 여호와의 말씀이 비로서 임한다. 

순서가 바뀌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서 전하는데, 엘리야는 선포하고 나서야 말씀이 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숨어라. 내가 널 먹이겠다." (왕상 17:3-4절) 


무엇인가? 이젠 내가 널 훈련시키겠다. 양육하겠다. 널 진짜 선지자로 만들겠다. 

마치 열성가득한 모세처럼, 호기 충만한 모세가 애굽 군사 하나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듯이 감히 아합왕 앞에 나가 충만히 선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숨기시고 훈련시키셨다. 


마치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머물면 머물게 하고

만나가 내리면 먹고 물이 나오면 마시고, 메추라기가 떨어지면 배불리 먹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은 그릿시냇가가 마를 때까지 엘리야에게 

고독의 훈련, 만나 (말씀의 훈련) 을 시키셨다. 

이 훈련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을까? 

나는 정말 무력하다. 나는 정말 할 수 있는게 없다. 세상은, 신앙은 신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없는 믿음은 단지 신념이다. 

무능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릿 시냇가가 마르니까 바알과 앗세라의 수괴, 이세벨 여왕의 고향, 그 중심 사르밧으로 엘리야를 보낸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동역자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한다. 

거기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는 우선수위의 훈련을 한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내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서 언제나 내 믿음, 내 생각, 내 환경, 내 감정을 우선했던 실패를 되돌아보고 이젠 실패하지 않도록 훈련시키신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늘 실패하는 훈련, 이기적인 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훈련

기복적인 신앙인이 매일 같이 위선 속에서 자기를 속이는 그런 훈련. 

먼저하고 나중에 하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니까 결국 하나님이 채우시고 보장하신다는 것을 경험케 하신다. 

풍요로울 때에 그 훈련을 시키시지 않으셨다. 

마지막 먹고 죽으려 할 만큼 기근이 극심할 때

없어도 정말 없을 때에 하나님의 것 먼저 할래? 결국 네것 하다가 죽을래하는 훈련을 시키셨다. 


그리고 나서 죽은 아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기도의 능력을 알게 하신다. 

죽은 한 영혼을 살리는 기도

기도는 결국 한 사람을 향한 애끓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간절한 기도는 사랑에서부터 나온다. 다급함에서부터 나온다. 

한 영혼을 위한 기도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 간절함에서부터 기도가 시작된다. 

바알과 앗세라를 향한 영적인 전투에 앞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영적인 죽음을 살리는 기도에 앞서, 연약함 가운데 죽은 한 영혼을 향한 기도를 시키신다. 


그리고 다시 아합왕에게 보낸다. 

18잘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제 순서가 바로 잡혔다

순서가 바로 잡히기 까지 "많은 날이 지났다"고 말씀이 증거한다. 

하나님은 순서가 바로 잡히기 까지 우리를 훈련시킨다. 

우리는 서둘고 급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서둘지 않으신다. 

차곡 차곡,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첫 번째 큰 비는 노아 때 왔었다.

그 큰 비는 죄악을 다 씻어 내렸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다 씻기 위해서는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비는 심판의 비가 아니다. 반대로 이 비는 은혜의 비다. 모든 기근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 쏟아지는 비다. 

우리의 냉랭한 신앙이 물러가고 눈물이, 은혜가, 평화가 찾아오는 비다. 

그야말로 큰 비다. 


(큰 비에 대한 묵상) 바알과 앗세라가 도저히 줄 수없는 은혜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해도, 가진 것이 많아도 비가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큰 비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의 복이다.  단순하지가 않다. 

또 이것이 세상 사람들을 다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엘리야는 이 은혜를 맛보면 아합과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꼐로 돌아올지 알았지만 그들은 비가 없어도, 또한 비가 와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 이 실망이 로뎀나무의 사건을 인도한다. 

이것은 믿는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은혜다.쉽게 정의할 수 없는 은혜가 큰 비다. 우리는 1년동안 이 큰비의 은혜를 묵상할 것이다. 


그런데 큰 비의 약속을 받은 엘리야가 바로 큰 비를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아합왕에게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싸그리 모아 갈멜산에 모이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백성에게 질문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언제까지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면서 여전히 바알을, 돈을, 쾌락을, 정욕을 쫓을 것인가 묻는다. 

백성들이 한 마디 말도 답변하지 못한다


여호수아 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가 오직 여호와를 따르겠습니다 말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도 해깔린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모여 기도하기 시작한다. 

제단 주위에서 뛰어 놀고, 큰 소리로 울부 짖다가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한다. 

미친 듯이 떠든다. 미친 것이다. 


거라사 지방의 군대귀신 들린자가 미친 듯이 떠돌아 다니며 소란을 피우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모습이다. 

미친 예배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미친 짓이다. 예배는 내가 미쳐서 날 뛰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서 춤추는 것이다. 

내 감정에 들떠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감격하는 것이다. 

성령은 내 가슴을 찢고, 목이 쉬도록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예배는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예배이다. 

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는 훈련이 담겨 있는 예배고, 순종이 담겨 있는 예배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는 고백이 담겨 있는 예배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한다. 

자기 감정의 예배, 축복만을 부르짖는 정욕의 예배, 쾌락을 위한 예배를 무너뜨리고 말씀의 예배,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다시 드린다. 


31절: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32절: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36절: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성령 충만은 순종이다. 그 분의 뜻대로 따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엘리야는 제단과 번제물에 물을 가득 붙고서 기도한다. 

한 죽은 아이를 살렸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회복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해서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왜 비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제단에 불을 내리시는가? 

회개가 없이는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회개없는 은혜는 오히려 타락이고 교만이고, 죄악을 낳기 때문이다. 


아합은 우리 안의 죄이다.  

바알과 앗세라는 우리 안의 돈을 사랑하는 탐심이고, 음란함과 쾌락이고, 화려함과 외모를 최고로 하는 우리 안의 이세벨이다. 


이것을 몰아내시지 않고선 비를 내릴 수가 없다. 

은혜를 맛볼 수가 없다. 큰 비는 우리 안의 하나님의 성전, 우리 안의 바알과 앗세라, 우리 안의 아합가 이세벨을 죽이지 않고서는 내리질 않는다. 


큰 비를 맞아야 하지 않는가? 

복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복이 되어 돌아가냐 하지 않는가? 


그러면 다시금 갈멜산에 올라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여야 한다. 

번제물에, 제단에 성령의 물을 뿌리고 그 성령이 내 죄를 불태우도록 해야 한다. 


내 감정에 들떠서 날 뛰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신 것과 당신은 나를 되돌이키시는 분임을 알게 하옵소서."  


단지 내가 원하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의 복,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복, 하나님 나라의 심령이 열리기 위해서 내 안의 바알과 앗세라. 내 안의 아합과 이세벨을 몰아내야 한다. 


불로 태워야 한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태워야 한다. 

내 안의 불평, 내 안의 판단, 내 안의 정죄, 내 안의 교만, 내 안의 탐욕, 내 안의 변명, 내 안의 핑계, 

내 안의 게으름, 내 안의 모든 죄를 태워야 한다. 


불을 내려달라 기도했던 엘리야가 이젠 물을 위해 기도한다. 

3년 6개월동안 이나 오지 않던 비를 위해 머리를 무릎에 쳐박고 기도한다. 

엘리야는 바알과 앗세라가 없는 것을 가졌다. 아합왕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을 가졌다. 

그것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 열쇠는 오직 믿음을 동반한 기도에서 나온다. 


첫번째 기도는 회개를 위한 기도였다. 불을 위한 기도는 회개의 기도이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 죄를 불태우게 된다. 자기 안의 모든 우상을 불태우게 된다. 하나님 외에 의지했던 세상의 물질과 힘과 권력을 던져버리게 하신다. 


두 번째 기도는 은혜를 향한 기도다. 이제 하나님으로 살겠다는 기도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겠다는 기도다.

회개를 하게 하신 하나님은 성결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비를 향한 기도는 성령 충만을 향한 기도요, 성결을 위한 기도다. 

회개의 기도가 비움을 위한 기도라면 은혜를 향한 기도는 채움을 위한 기도다. 

우리는 은혜로 채우지 않은면 넘어진다. 

성도는 은혜로 산다. 은혜가 없으면 죽는다.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시다.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왕상 18:42) 


-겸손한 기도, 간절한 기도

회개 후에 만족하지 않았다. 교만하지 않았다. 이제 이것으로 되었다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목말랐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물릴쳤을 때에 승리감에 도취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산꼭대기로 기도하러 올라간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불쌍한 죄인이 되어 엎드린다. 

하루에 삼천명을 회개하게 했던 베드로가 평소랑 똑같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에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보게 된다. 은혜는 또 기도할 때 온다. 또 무릎꿇을 때에 온다. 

예수님의 승천을 본 제자들이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성령이 임한다. 


그름조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그 증거품이 구름조각이다. 

7번의 기도는 그 증거를 향한 변함없는, 끊질긴 간절한 기도.... (1년동안 묵상해야 할 것들...)  

7번-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기도이자 순종이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법칙이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씻을 순종이다. 

7번은 끝까지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을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손바닥 만한 작은 구름을 통해 큰 비를 보았다. (18:44) 

아합에게 선포할 때 이미 큰 비의 소리를 들었다. (18:41) 

작은 것 안에 담긴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 작은 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축사... 

겨자씨 하나에 담긴 100배의 열매... 


(겔 34: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말랐던 강들이 물로 가득차게 되고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 온 나라 백성이 비에 젖게 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로뎀나무에서 (왕상 19:1-8절) 


엘리야의 시대 - 아합왕 때 

경제적, 정치적으로는 대 부흥기였지만 신앙적으로는 극심한 타락기 

바알과 앗세라가 하나님을 대신하던 시기 

성경엔 이러한 시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첫 타락 -아담...어디에서? 에덴 동산 (기쁨, 행복의 공간. 부족함이 없는 공간..) 그 곳에 임한 사탄의 유혹..너 그거 없잖아! 

가나안의 타락 - 어디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왜? 가나안 족속을 쫓지 않아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가축이 너무 많아서..

사울의 타락- 블레셋을 물리친 후..왜? 다윗의 인기가 자신보다 높아서..

다윗의 타락 - 전쟁의 휴무기에 성적인 타락과 인구조사의 타락 

솔로몬의 타락 - 지혜를 얻은 후에..

부자청년... 너무 부해서 


우리의 신앙 판단 기준- 상황이 좋으면 믿음생활도 좋은지 착각---상황이 신앙을 보장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 성공이 그 삶의 신앙을 보여주는 잣대가 절대 아니다! 

교회의 성도수가 그 교회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첫 번째 만날 때는 훈련받지 않고 자기 신념, 자기의 말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자기 믿음으로 만났습니다. 

두번째 만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큰 비를 내릴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합을 만납니다. 그러나 큰 비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모두 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사이의 엘리야의 신앙적 여정 

1. 그릿 시내가- 말씀의 훈련 

2. 사르밧 ㅡ 말씀의 적용 훈련, 우선순위의 훈련..

           -- 동역의 훈련 

           --중보의 훈련 


그 다음 말씀을 따라 아합왕에게 가서 큰 비의 소식을 전함. -이것은 중요한 부분이므로 다시 한 번 다룰 것임.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고 우리를 살게 하는 신인지 그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이른바 갈멜산 전투를 벌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 심판하게 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고 급기야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년동안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인,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리더. 온갖 기적이 일어났고 이방 신에 빠져 있던 그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가 왔습니다. 모든 기도가 응답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는 한 세력- 아합왕과 이세벨이 다시금 엘리야를 옥 죄어 옵니다.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릴 것이다. (19:2) 

80인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영적 선지자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않아 '이제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그 수많은 위협과 위기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외쳤던 믿음의 선지자가,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회개의 선지자, 능력의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 한 명의 위협에 도망하였을 뿐 아니라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삶의 작은 어려움이 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엘리야의 모습을 야고보서 기자는 그도 우리와 성정,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 성경에 등장하는 3대 영적 침체

민수기 11장 - 모세의 침체, 열왕기상 18장 엘리야의 침체... 

복음서의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말씀을 통해 본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은 무엇입니까? 

1. 형편을 보고 (모세, 엘리야, 예수) 

믿음 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그의 형편이 좋았을 때가 있었던가? 아합왕을 처음 만나던 시절부터 그는 그릿 시냇가로,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애 딸린 과부와 함께...그리고 지금도...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는 형편에 갇히게 되었는가? 


2.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합왕에게 맞섰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다. 피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주저 앉고 싶다. 이것은 이세벨이 강해서가 아니다. 엘리야가 약해진 것이다. 갑자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이젠 나를 위해 좀 살고 싶다. 나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3.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골방의 기도, 겟세마네의 기도...하나님 앞에 단독...예수님-> 제자들과 함께..) 

혼자 있고 싶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자기 속 동굴로 들어간다. 자기를 돕는 사환마저도 귀찮고 싫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4. 죽기를 원하여 (엘리야와 모세는 죽기를 간구-그러나 이것은 삶에 대한 역설적 소망, 예수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갈기를 간구->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죽고 싶다. 사는 것이 낙이 없다. 허락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의욕이 살아졌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까지 사라져버렸다. 


5.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빠진다.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난 불행해 보인다.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이끌어온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드러나 있는 영적 교만감 - 내가 열심이 특심하여.... 

모세) 내가 그들의 아버지입니까?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 뒤에 숨겨진 원인

1. 응답, 열매, 승리 뒤의 공허감. 

연극이 끝나고 빈 좌석을 보면서 맛보는 허전함. 주일 예배 뒤의 월요일 공포증.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갈멜산에서만 승리하면 아합왕이 무릎꿇고 이세벨은 떠나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엘리야의 기대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3. 육체적 탈진

갈멜산의 예배와 기도

850명을 직접 죽임. 

또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

그리고 아합왕을 향해 달려감.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때 공격받았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 

그 때의 비난과 공격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영적 산후 우울증이다. 

애를 낳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자기 몸을 조심하고, 죄악을 삼간다. 

모든 관심을 애를 향해 맞춘다. 그런데 정작 애가 나오면 자기 인생이 불쌍해 진다. 

막상 애를 낳으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많다. 

밤에 잠도 못자고 애를 떠날 수가 없고 애를 위해 자기를 보살펴주던 식구들은 자기보다는 애만 바라본다. 자존감이 상한다. 

이런 피곤함이 평생 갈 것만 같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목회자) 설교 이후에 성도들에 대한 기대...


  • 하나님의 다루심 

1. 책망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신다. 공감해 주신다. 

응답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먼저 나오는 것이 판단이고 비판이다.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염치도 없다. 


2. 어루만지심. 쉬어라. 천사를 보내어 돌보심. 

기다릴 뿐만 아니라 돌봐 주신다. 필요를 채워주신다. 쉬도록 시간을 주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어 만지시고,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신다. 

예수님, 배반해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와서 밥먹자! (요 21:12)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3. 로뎀에서 호렙산으로 인도... 

그의 보살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다. 

침체가 오면 먼저 일어나는 현상. 

기도 할 수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은 곧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오면 말씀과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산, 성령을 받은 곳,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수 있는 곳. 

피하기 위해 떠났던 로뎀나무가 이젠 호렙산 꼭대기가 된다. 


 

Posted by 소리벼리

갈멜산의 예배 (왕상 18:17-24)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까지 다 마친 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한 자리에 모아 들이고 말씀합니다. 

이제 가나안 땅의 주인은 너희다. 그런데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 사람들과는 혼인도 하지 말고 왕래도 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어 너희를 준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멸망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그 유명한 세겜언약을 선포합니다. 


(수 24: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수 24:16)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그런데 이것을 듣는 여호수아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맹세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 심정이 여호수아 24장 19절부터 나옵니다. 


(수 24:19)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수 24: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수 24: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수 24:22)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수 24:23)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수 24:24)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그런데 23절에 보니까 가나안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이방 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가져나온 신인지,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새로 얻은 신인지 불분명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백성이 이미 우상들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호수아가 끝나고 사사기 시대가 열리게 되자 이 세겜 언약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가나안땅에 들어간 가나안 제 1세대들이 죽자 

(삿 2:10)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구절이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 순종하며 그 분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긴장이 풀어졌을 때에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이제 말씀을 따라가 아니라 "자기 뜻, 자기 소견"이 앞서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래되는 사람이 드는 착각도 이것입니다. 

말씀도 오래 읽었고, 기도도 오래 한 사람이 이젠 나도 하나님의 뜻을 좀 안다 하면서 자기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인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내가 과거에 얼마나 기도를 하고 과거에 얼마나 성경을 읽고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교제하고 있는가? 지금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가? 신앙의 기준은 항상 현재입니다. 

자기 뜻을 주장하는 사람이 끝까지 자기 뜻대로 고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사사기서나 그 이후 열왕기, 역대서를 보면 처음에 자기가 왕이 되어 살던 사람은, 이제 사무엘 상 와서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기는 싫고 자기 자신이 왕되어  살아보았자 감당이 안되니까 이제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왕이 우상을 섬기면 따라 섬기고 왕이 하나님을 섬기면 따라  섬깁니다. 책임지지 않고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단독적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다고 떠난 사람이 결국 무당을 찾고, 절에 들어가고, 도박에 빠지거나 알콜 중독에 빠집니다. 무언가 기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데 하나님을 피하고 택하는 것은 우상숭배 아니면 쾌락, 중독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우상이 바로 바알과 앗세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차 하나님과 바알과 앗세라를 겸하여 섬기다가 이제 아합때가 되면서 아얘 하나님을 부인하고 바알과 앗세라를 섬깁니다. 앗세라 선지자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고,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며 하나님을 믿는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여 없앱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잠잠히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부귀 영화는 이때까지도 이어지고 오히려 아합왕때 절정에 이르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을 잊고 바알과 앗세라가 주는 쾌락과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라는 여호수아 24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복을 내리신 이후에 그들의 배신을 보시고 잠잠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망하기를, 멸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하나님과 함께 할 모세와 같은, 여호수아와 같은 동역자, 일꾼을 키우십니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엘리야입니다. 


그는 신앙의 뜨거움은 있지만 열정은 있지만 훈련되지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합왕한테 달려나가 이제 당신들의 영화는 이제 끝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적인 신념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그를 훈련시키시기 시작합니다. 

열정만 가득했던 엘리야를 그릿시냇가로 보내어서 그의 열정을 잠시 식히고 홀로됨 가운데 말씀과 기도의 수업을 시작하십니다.

열정있는 자가 홀로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리고 말로만 전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까마귀를 통해서 있을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세벨여왕의 고향인 사르밧으로 가서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거기서 우선순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자기 소견대로 아합왕에게 나갔던 엘리야에게 반드시 말씀이 임한 후에 행동하게 하고, 사르밧 과부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먼저, 나를 위해서는 그 다음이라는 말씀 먼저, 하나님 먼저의 훈련을 3년 동안 철저히 시키십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간절한 기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알게 하십니다. 


신앙생활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 나를 먹이신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기도가 곧 능력이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다 아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정말 없는 중에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훈련되지 않으면 자꾸만 기웃기웃 하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 같고, 저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심 같고 하면서 자꾸 주위를 살피게 되고, 눈치 보게 되고 비굴해집니다. 

그런데 광야 가운데 나를 책임지시는 것을 경험하고 훈련하면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눈치보며 기웃기웃 하지 않습니다. 

더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난의 때를 이겨나갑니다. 


말씀 먼저, 하나님 먼저....는 우리가 가장 실패하는 훈련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 것 먼저 챙깁니다. 

신앙 생활은 남는 시간, 남는 힘, 남는 물질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먼저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먼저 기도하고, 힘있을 때 먼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 먼저 드리고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훈련된 사람은 입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푸른 신앙생활을 유지 합니다. 

그것이 훈련 안되면 문제신앙인이 됩니다. 문제 터지면 후다닥, 문제 꺼지면 잠잠한 신자가 됩니다. 

그러면 그런 신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언제나 문제 안에서 살게 합니다. 문제가 떠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 기도만 하면 되냐?하는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기도하면 기도만 하게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무엇할지를 가르켜 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내뜻만 주구장창 부르짖다가 기도 다했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뢰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의 능력이요, 호흡이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마친 엘리야가 다시 아합왕께 나옵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보며 하는 첫 마디가 얼마나 기가 막힌 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지금 엘리야 때문에 고난이 왔다는 것입니다. 너만 없으면 우리가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합입니까? 엘리야입니까? 

이스라엘의 고통이 아합으로부터입니까? 엘리야로부터입니까? 

아합때문입니다. 아합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쾌락에 젖어 있으며 영적으로, 지금은 땅이, 온 나라가 기근에 휩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 들면 기도가 죽습니다. 예배가 소흘해집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인지, 그냥 인생 자체가 문제인지 논쟁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 때 그 때 다르기도 하고 두가지 이유가 다 맞기도 합니다 .

그런데 자기 믿음이 식어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탓을 하고 목사 탓을 하고 교회 탓을 합니다. 

내가 교회만 안 다녔어도 이런 꼴을 안다니는데 하면서 마치 교회가 자신에게 고통을 준 것처럼 말합니다. 

아합의 입술입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다녀서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처소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고난 받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탕자가 집나가서 고난을 당하니 길거리 신세가 됩니다. 돼지 먹이를 먹고 끼니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 하는 사람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잠시 방황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 아닙니까?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 앗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에 모아 누가 참 신인지 가리자고 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웃기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뭡니까? 그들도 정답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누가 복을 주는지 누가 참 하나님인지 지금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오늘날 섬길 자를 섬기라 물었을 때에는 모든 백성이 한 목소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묵묵부답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제사장으로 가득차 있었던 성전이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이 꽉 찰때까지 그 백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는 850명의 우상주의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다 없어지고 세상이 주는 풍요와 쾌락에 아 이것이 하나님이구나 하면서 점점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가나안 그 두려웠던 민족들을 하나 하나 정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절하고 섬기면서 그들의 노예로 다시금 빠져가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수 23:10)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그런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훈련 받은 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들 우상 주의자 1000명이 와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하나를 잘 훈련시켜서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1000명의 두 마음을 가진 성도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온전히 헌신된 한 명의 엘리야와 같은 성도가 됩시다.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그들의 신께 예배 합니다. 

26절: 뛰놀더라. 

28절: 피가 흐리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리라. 

29절: 미친 듯이 떠들며 


막 5:1-5 - 거라사 귀신 들린 자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소리지르며.....


엘리야: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의 예배를 드려라.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붇고 그 위에 불이 붙기를 기도하는 것? (번제물- 온전한 헌신, 완전히 받쳐진 마음, 나무- 엘림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불은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사마리아 예배: 산당예배,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데서 영향 받은 예배. 

그들이 볼 때에 이스라엘의 예배는 열정이 없고, 죽은 것처럼 여겨지는 예배. 


예배는 드리는 자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예배이다. 

우리의 감정이나 열정이 바탕이 되어서는 안된다. 


(왕상 18:37)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얼마나 간절했을까?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다시 고백하기를 소망했을까? 

그리고 39절에 

(왕상 18:39)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하는 고백을 듣고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저는 생각만 해도 막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납니다. 

물을 부은 제단과 번제물에 불이 붙은 것이 기적이 아니라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을 떠났던 자들이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천상 천하에 유일하신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믿는 하나님 여호와 이십니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 살아갈 땅과 양식과 비도 내리시는 분입니다. 

땅의 법칙이 우리를 복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칙이 내세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바알과 앗세라의 영향력, 풍요와 쾌락을 통해 우리에게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결국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중독되어 파괴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노예삼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벗 삼으시는 분입니다. 

항상 우리에게 선택을 물으시고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무너져 버린 신앙, 다시 한번 하나님께 돌아와서 깊은 안식, 기쁜 평강을 누리시는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뜻과 때 (왕상 18장 1-19절)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 방법 - 하나님의 뜻과 때.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 -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              

  • 그릿 시냇가 - 세상으로부터 격리하여 하나님 주시는 양식으로 살아가는 훈련, 광야의 훈련, 만나의 훈련
  • 사르밧의 훈련 - 
    • 말씀의 적용 훈련, 우선순위 훈련(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 동역의 훈련: 왜 동역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동역을 통해서 사역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신다. 동역하는 것 자체가 전도이다. 
    • 하나님을 주인삼는 훈련- 영접은 구호가 아니라 실재다. 사르밧 여인, 하나님을 섬겼지만 결코 주인삼지 못했다. 그 분을 주인삼으려니 자신의 죄가 드러난다. 
    • 중보의 훈련- 한 영혼을 위해 금기를 깬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초월이자 완성이다. 한 영혼을 위한 사랑이 결국 하나님 일의 시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만을 가지고 일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 뜻대로 사는대도 일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부딪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살아가는 훈련이 준비의 기간이라면 이 뜻을 "하나님의 때"를 통해서 성취된다. 


(왕상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숨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왕상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제 드디어 엘리야에게 다시 아합왕에게 가라 명하신다. 

(단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광야의 때를 바꾸어 이제 엘리야를 드러내게 하신다. 갈멜산의 계절이 왔다.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때는 측량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작용한다. 만물의 통치자가 만물의 때를 알아 바로 그 때에 실행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고, 숨어라 하면 숨고, 드러내라 하면 드러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드러나기를 좋아하지만 숨어지내는 것은 못견뎌 하는 사람이 있다. 

남이 함께 있고 남들이 날 인정해주고 하면 행복감을 느끼지만 남이 없이 홀로 되면 우울해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활발한 것 같지만 자기의 의미를 남들이 시선을 통해서 찾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기에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다. 오히려 남들에게 나서는 자리는 피하고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그 사람은 건강한 것 같지만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다. 홀로 있을 때만 편안한 사람은 "일어나 가서 제자를 삼아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보다 귀찮고 부담스럽고 어려운 명령이 없다. 

그런데 주님은 때로 우리가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드러나게 하신다. 

이 홀로 있을 때 드러날 때의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균형잡힌 사람이다. 숨어 기다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내공을 쌓고 준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내공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연구하고 훈련하여 얻는 것이 내공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숨어 있는 기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동안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 "온유"한 자가 된다. 온유란 말씀으로 길들여진 사람에게 붙이는 성경의 전문 용어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광야의 전문가가 되어 향후 40년동안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생활을 인도하는 인도자가 된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그 집의 감옥에서의 13년간을 집 안일을 돌보고, 감옥을 돌보는 총무로서의 훈련을 쌓았다. 그 훈련이 나라를 책임지는 총리가 되게 한다. 그 곳에서 요셉은 애굽의 언어와 문물을 배우고 떡맡은 관원과 술 맡은 관원등을 만나 정치를 배운다. 무엇보다도 요셉은 감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 받는다. 


[시 105: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아버지의 편애로 자기 밖에 모르던 요셉이 배려의 사람이 되고 검소한 자가 되고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된다. 


  • 엘리야의 또 다른 만남

오바댜 - (왕상 18:2-6)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 -

(왕상 18: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아합왕을 섬기기는 하지만 아합왕과 다른 길을 가는 자. 여호와를 따르는 자. 

(왕상 18: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 7절: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그동안 아합: 각 나라마다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기심을 얻은 엘리야는 아합의 손길에서 피할 수 있었다. 

오바댜에게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전하라....그러나 내가 그 말을 하면 내가 죽임을 당할 것이니이다. 

그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았음에도 이전의 엘리야나 사르밧 과부처럼 훈련 받지 아니한 자. - 몰래 주의 선지자들에게 물과 고기를 가져다 주는 선한 일을 하였지만 언제나 아합과 이세벨을 두려워하면 고통을 당하는 자. 


그러나 엘리야와 만난 오바댜는 죽음을 무릎쓰고 아합에게 엘리야를 말한다. 

(왕상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엘리야를 통해 아합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는 자가 된 것이다. 아합이라는 공포를 이긴 것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믿음


아합과 엘리야의 대면 :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인가? 

[왕상 18:17-18]

(왕상 18: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왕상 18: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아합: 현재의 현상- 엘리야의 말대로 기근이 왔으므로.... 세상의 사람들의 관심. 당장의 눈앞에 현실에 민감...

엘리야: 그 근원, 원인... 하나님과의 관계... 


무엇이 진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고 누가 우리에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신가???? 영적 전투를 선포 


자. 하나님의 사람에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은 말씀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 내는 것이다. 

말씀이 없는 신앙 생활은 우상숭배다. 황금 송아지 신앙이다. 그들의 고정관념대로, 경험대로, 전통대로 신앙생활을 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황금 송아지를 하나님인 줄 알고 섬겼다. 

황금 송아지는 권력과 힘이다. 물질과 성공이요, 쾌락과 방종의 신이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으로 훈련된 자는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때는 하나님의 전권적인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다. 때로 숨어 있어야 하고 피해 있어야 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런데 그 삶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일어나게 하시고 드러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시고 바알과 앗세라를 무너뜨리게 하시고, 큰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신다. 

그 때를 얻기까지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내공을 쌓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충성함으로 삶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게을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영성은 일상에서 훈련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