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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8편 주는 내 편 


따라해 봅시다. 주는 내 편이시다. 

여러분, 이러한 믿음이 있습니까? 

정말로 주님이 내 편이라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때때로 내가 넘어지고, 주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고, 하나님께 불순종 할 때에도 주님이 내편이라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까? 

믿음이 좋을 때는 괜찮습니다. 

내 일이 잘 될 때에는 걱정 없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되고, 사방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 같고,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을 때, 혹 주님이 내편이라는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으십니까? 

주님이 내 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때,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고 외면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절망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주 앞에서 내가 떳떳하지 못할 때 난 넘어집니다. 

시편 119편 말씀을 통해 언제나 내편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영성을 통해 나의 신앙을 되돌아 보도록 합시다. 


지금 다윗의 상황을 봅시다. 

5절: 내가 고통 중에 부르짖었더니...

10절: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 뭇 나라라는 것은 주위의 모든 나라라는 것입니다. 

11절: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12절: 그들이 벌떼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13절 : 그들이 나를 밀쳐 넘어 뜨리려 한다.... 


3절에 걸쳐서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의 어려움을 고백합니다. 모든 나라가 나를 에워쌌는데, 그냥 에워싼 정도가 아니라 에워싸고 에워쌌다. 아주 벌떼처럼 에워쌌다. 

이 정도면 얼마나 다윗의 상황이 안좋을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에워 싼 중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을 것이다. 

벌떼 처럼 적들이 나를 에워쌌어도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을 것이다. 


왜 그런 고난 중에 거하게 되었을까? 

18절)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무언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 때문에 지금 벌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일이 안될 때, 고난 받을 때, 시험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하는 생각....내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벌 받고 있구나...

그런 생각들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받아도 흔히 믿는 자들이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벌하시는 구나... 이런 생각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그런 고난의 압박에 눌려서 은혜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놓쳐 버리고 오직 심판의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 두려움에 떨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록 자신이 하나님께 바르지 못하여 경책을 당한다고 하면서도 모라고 하냐면 

내가 벌은 받아도 결코 나를 죽게 하진 않을꺼잖아요.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당신이 선한 분이라는 것,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포할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한솔이 혼낼 때...

무섭게 소리치며 혼내니까 애가 놀래서 근처에도 안올려고 함. 

그래서 안되겠어서... 찾아가서 아빠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런데 너 그렇게 하면 잘못되는 거니까 아빠가 혼내준거야.. 그런데 너 그렇게 해도 아빠는 너 사랑하는거 알지? 그러니까 아빠 피하지마.. 

한 두 번 하니까 혼날 땐 혼나더라도 이제 피하지 않습니다  

이제 혼내려고 하면... 아빤 그래도 날 사랑하지? 하면서 먼저 말합니다. 내가 혼내더라도 아이가 날 무서워피하면 속이 상합니다. 아빠의 사랑을 알아주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지금 다윗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앞에 떳떳하지 못하기에 자신의 잘못으로 겹겹이 우겨쌈을 당하는 처지에 빠졌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숨지 않습니다. 피하지 않습니다.  

아담을 기억하십니까? 

선악과를 먹자마자 그가 한 것은 가리고 숨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의 특징은 가리고 숨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이 날때, 잘못해서 혼이 나면서도 선생님을 욕합니다. "지는 얼마나 잘나서... 아이 성질 참 더럽네...."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보지 않고 오히려 혼내는 사람을 욕할 때가 많습니다. 이게 사람의 못된 본성입니다.  

잘못해서 훈계를 받으면서도 훈계 받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훈계를 잘 받는 자가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혼난다고 하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은 선하고 자비하십니다. 하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에 기댑니다. 

그래서 118편의 첫절과 끝절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다."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17, 18절을 거꾸로 읽으면 의미가 더 삽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다.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할 것이다."

이렇게 매달리면 하나님이, 어떻게 다윗을 미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고난을 통해서 다윗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의인들이 들어가는 하나님의 문에 들어가도록 문을 열어주십시오."


내가 비록 하나님께 실수하고 범죄해서 지금 매를 맞고 있지만 내가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입니다. 

그러고 이 고난을 통해서 난 완전히 죄에서 해방되어 의인의 문에 들어갈 겁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오면 난 자유함을 얻고 형통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선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의지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혼난다 여길 때에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가 구원하십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들, 어떤 높은 고관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월씬 낫습니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부모에게 혼이 날때에도 여전히 부모는 내 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혼날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 편입니다. 

 하나님을 피하면 두려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그의 자비하심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의 자비하심은 영원하십니다. 

 

(시 118:5)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시 118:6)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 넓은 곳에 세우셨다. -> set me free : 나를 갇힌 데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 
  • 여호와는 내 편이시다. (6절, 7절) : The Lord is with Me : 함께 하신다. 

그러나 피하는 자들은 사람을 의지한다. 여호와께 피하는 자들은 사람을 의지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남편- 남의 편, 아내: 나 자기편 안해....

가정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고 주신 것이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는 가정은 내 편이 되어주질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나를 에워싸고 날 밀쳐 넘어뜨리려 한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 에워쌈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구절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백성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온 이후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함께 찬양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에스라 3:10-11) "10.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왜 포로가 되었습니까? 자신들이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했기에 그들이 의지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그들은 포로로 잡혀 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봉헌하며 그들이 지금 하나님께 혼났다고 돌아오면서 다윗의 이 시로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성전의 기초를 다시 놓을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지난 삶 가운데 자신들이 경험하였던 지극히 선하고 인지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마틴루터가 가장 좋아하던 성경의 본문 (내 시편이다.) 

" 나는 시편들 전부를 사랑한다. 나는 성경 전체를 사랑한다. 그것은 나의 위안이자 내 생명이다. 하지만 이 시편은 내 마음에 가장 깊이 와 닿는다. 그래서 나는 이를 내 것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내 시편이며, 내가 택한 시편이다. 그것은 수많은 위험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었다. 그 어떤 황제나 왕들, 현인들, 또는 성도들도 그러한 위험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지 못했었다. 이것은 내 친구이다. 내게 있어 이것은 세상의 모든 영예와 권능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다...하지만 이 시편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누구도 이를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 그렇다. 하지만 그리스도 역시 모든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으나, 나는 그분을 나의 그리스도시라고 부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시편을 특별히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귀하게 여기신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 편입니다. 내가 혼날 때도, 사방이 날 대적 할 때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 나를 언제나 받아주시는 유일한 분, 그 분이 내편이면 두렵지 않습니다. 설사 그 분에게 혼날 때에라도 당신은 내 편입니다하고 달려들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 분은 자비하심과 선하심으로 날 받아 주십니다. 선한 아버지이십니다. 내 아버지이십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 시편을 내 시편으로 삼으십시오. 그래서 당신은 전적으로 내 편입니다. 내가 두렵지 않습니다. 하면서 어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두려움 없이 화평함과 형통함을 누리시는 우리 로고스 교회 식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시편 109편


창세기 3장 15절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옷을 지어 입는 것이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고서는 부끄러워 서로를 바라볼 수도,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이후, 사람이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도, 그리고 사람들 끼리 상대할 때에도 민낯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가려야 합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내 죄를 가려야 하고, 옷으로 피부를 가려야 하고, 천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고, 화장으로 민낯을 가립니다. 맨 모습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악의 결과입니다. 


20세기를 변화시킨 가장 위대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정신 분석학의 프로이트는 사람의 본질은 결국 본능, 이드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육이나 교양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포장하지만 깊은 곳에는 결국 식욕, 성욕, 탐욕같은 본능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리고 있는 것을 다 걷어내면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욕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내 안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 모습, 자기의 민낯, 자기의 본능을 우리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가릴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가리는데 익숙합니다. 


시편 109편은 시편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편입니다. 이른바 "저주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른 시편의 내용이나 표현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이것을 지었을리가 없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글이 왜 시편에, 성경에 올라와 있는지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과는 확연히 다른 반 복음적인 요서를 담고 있다고 경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인 기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즉 성가대와 함께 했던 회중노래로서 지어진 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함께 불러왔던 노래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새 사도도 세울 때에 이 본문을 인용합니다. 


(행 1: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 사실로 보면 유대인들과 기독교 공동체 대부분이 이미 이 시편의 내용을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하면 누구입니까? 성서상의 인물 중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어쩌면 인간들 중에서 가장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인물도 다윗의 칭송보다 더 많은 칭송을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를 핍박하는 사울을 끝까지 사랑했던 자로서 유명합니다. 자신을 배반한 자기의 친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두고 통곡하며 애도했던 사랑의 화신으로 유명합니다. 한 일개 졸병 시므온이 자기를 욕하는 것을 듣고, 신하들이 저를 죽이려고 할 때에도 그를 환대하며 하나님께 맡기었던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로서 유명합니다. 마치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다윗의 시를 보면 그의 인격에 의심을 품게 됩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저질의 저주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평범한 신앙인들이 듣기에도 너무나 유치한 말로서 주님께 고자질 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기분을 가지게 됩니다. (6절~15절) 

이 시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사울왕인지, 시므온인지, 아니면 어떤 무리들인지, 다윗은 이 시의 대상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지금 다윗이 이 누군가로부터 심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혹은 이 누군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 무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괴로움 중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내 하나님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 여기까지는 다윗이 지금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했나 보다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그 누군가가 지금 까닭없이 나를 공격한다는 소리입니다. 


그 이후의 기도는 이제 차마 다윗의 기도라고는 믿기 힘든 저질적인 내용이고 저주의 내용으로 가득찬 내용입니다. 입데 담기 모하지만 그래도 성경에 올라 있는 말씀이니까 제가 한 번 읽어 드리지요. 


[시 109:6-8]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그도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직분있는 사람이었다. 

9절부터는 어 막 나간다. 

9-15절 

자, 4절에서 다윗은 분명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다윗이 그를, 혹은 그들을 사랑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여기에 나온 다윗의 대적자가, 핍박자가 다윗에게 어떤 말로 핍박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어 나온 다윗의 말도 그에게 질성 싶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정말로 초등학생이 싸우면서 자기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듯한 유치한 모습마저 발견 합니다. 자기는 무조건 잘했고 상대방은 무조건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7절에 보면 “그의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8절 “ 그 년수를 단축시키시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고..

9절 가면 점점 가관이 아닙니다. 

“그 자녀는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는 유리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아예 신앙인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습니다. 4절에서 말한 나는 사랑하나 라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히려 다윗을 핍박한 자보다 더 나쁜 저주자가 다윗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어찌보면 욕설과 저주가 가득한 장면을 우리는 다름아닌 다윗의 시에서 보게 됩니다. 

그냥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며 계속 읽기가 거북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개인적인 내용을 하나님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앞에서 부르면 회중들이 따라 불렀다는 소리입니다. 따라 부르면서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아까 서두에서 우리는 우리의 민낯을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앞에 가리는 데에 익숙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가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북한 기도가 있을까요? 

물론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는지, 응답하셨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도 들으셨다는 것이고 다윗은 이런 기도 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향해서 공동체적으로 이런 기도를 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실꺼야.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이 비록 이러이러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같은 완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라도 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고상하게 기도한다고 해도, 화장을 이쁘게 했다고 해도 우리의 본질이 바뀌진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고상하게 기도하면서 저질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저질스럽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만지심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모습이고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이 저질스런 기도를 합창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합창하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습니다. 

어떨 때에는 정말로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기도도 너무 고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고상한 척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예수님 앞에서 위선자, 누룩이라는 혹독한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미워하는 데에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꼭 정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에는 두 사람의 서로 저주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그 미움을 사람들에게 푸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미워하게끔 하면서 자신은 의로운 양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그러한 미움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저주를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직접 저주하면 사단이 납니다. 부작용이 심합니다. 뒷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아뢰면 그 분이 우리를 만지십니다. 때로는 기도하는 그 대상을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만지시고 위로하신 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전 시편 109편을 보면 불편합니다. 

이 기도가 불편한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여전히 숨기고 꾸미는 외식이 남아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척 하는 위선이 남아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다윗은 인간관계에서 빈틈이 없던 자였습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도, 압살롬과의 관계에서도,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와의 관계에서도 다윗은 언제나 인격적인 승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감정을 가지고 자신이 필터링 하고 검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 가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민낯을 가져 가십시오. 

그리고 그 분께 아뢰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십시오. 

하나님은 어두운 이 땅에 내려와서 우리와 함꼐 하시듯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주일예배 설교

본문: 119:97-105

제목: 어떻게 말씀을 사랑하나?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지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해도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그 대상이 막막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이 막막합니다. 더군다나 아담 이후 우리의 본성은 여전히 죄악에 물들어 있어서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자기만을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해요. 하나님 교제해요.’하고 기도하고 찬양해도 어느덧 자기의 생각에 갇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지, 어떤 것이 내 생각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다가 하나님과 교제했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교제를 위해, 사랑의 관계를 위해 열어두신 통로가 똑같이 믿는 이웃, 형제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확증하라 하셨고 또한 말씀을 지킴으로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요일 4: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2:4-5]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해 놓고 말씀을 읽지도 않고, 또한 읽은 말씀을 지키지도 않는 사람은 성경에서 뭐라 합니까?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라고 말씀합니다결국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은 하지만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만 위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코자 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말씀을 읽고 지킴을 통해서 그 사랑의 표현하는 것이지요.

, 부부가, 친한 친구가 지금 난 너를 정말 사랑해 라고 말은 하는데 무슨 부탁을 하거나 약속을 해도 한 번도 안지킨다면 한 두번이야 그래 사정이 있었겠지.. 이해해야지 하면서도 번번히 말을 듣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고백을 누가 곶이 듣겠습니까? 그러니까 번번히 예배하러 와서 난 주님을 사랑합니다. 찬양하는 사람이 있었도 그것으로 사랑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을 지켜 행하는 자라야 날 사랑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성경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접하지 구태여 책을 통해서 수고하며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요. 긴 소설도 두 세시간 짜리 영화 한 편 보면 그 내용을 다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짜그마한 글씨로 뺵뺵히 씌여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읽어도 몇장 넘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읽어도 1년에 걸쳐 한 번 읽기도 쉽지가 않지요.

저도 유치원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대학 졸업할 때까지 수십 번 성경을 통독하려고 하다가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창세기랑 출애굽기는 너무 많이 읽었지만 그 다음을 넘기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부터 시작해서 복음서 읽다가 그만 둔 적도 많지요. 하두 끝을 못내서 차라리 뒷 부분부터 읽자 해서 말라기서와 계시록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끝을 못맺습니다. 신학교 가서야 비로소 이젠 신학생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1년에 한 독은 하자 하면서 읽었는데 그것도 잘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힘들 때 마다 도전을 준 말씀이 요한 일서 2 4-5절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어 볼까요?

[요일 2:4-5]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러니까 성경 읽기 힘들고 고될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아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그의 말씀을 읽지도 지키지도 않으면 내가 어찌 그리스도인인가 생각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들고 고되지만 말씀을 읽었습니다. 물론 어느정도 말씀을 읽는 것이 습관화되고 꾸준히 읽게 되니까 이젠 말씀 읽지 않으면 무언가 허전하고 불안해 지지요. 말씀을 읽는 것도 더 이상 고되거나 지루해지지 않고 읽을 때마다 은혜도 주시고 새롭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은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주에 성경 공부를 준비하다가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읽었습니다.

(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그러다가 시편 기자가 쓴 주의 법을 내가 어찌 그리 사랑하는가?하는 표현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내가 말씀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읽은 본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 97-주의 법, 98-주의 계명, 99-주의 증거, 100-주의 법도(104), 101-주의 말씀(103), 102-주의 규례등으로 그 용도나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었지만,, 말씀을 읽은 것은 하나의 의무이고, 숙제이고, 책임이었지 내게 정말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면서 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고, 때로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지만 그 말씀을 정말 사랑했는가 생각하니 그렇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뭐가 다른가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하나님 앞에서나 성도들 앞에서 바른 목사가 되고 싶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말씀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만큼은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할 때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대하는가 하면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뭐 빠뜨리는 것은 없을까? 이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하고 항상 말씀을 연구의 대상, 숨긴 것을 펼쳐놓아야 할 비밀로서만 보았지 그 말씀 자체를 내 사랑의 대상으로 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러면서 기도를 하니까 말씀이 곧 나다. 말씀이 내가 한 어떤 것이 아니라 말씀이 곧 나다.”하면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지요.

그러면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고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읊조리다.

- 오늘 본문에서 97절과 99. 두 절에서 반복되는읊조리다라는 단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읊조리다는 말의 뜻은 국어사전에서는뜻을 음미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시를 읊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 97절에서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어성경에서는읊조리다라는 말을 ‘meditate’라고 합니다. 이것은묵상하다, 깊이 생각하다. 뜻을 되새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읊조리다는 말은하나님의 말씀을 늘 깊이 생각하고 묵상한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그읊조림은 언제 해야 하는지도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97절에서종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가 어떻게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까? 시간적으로 그건 불가능하지요. 그럼 이 표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술을 통해서 깊이 새기고 귀에 들리게 소리 냄으로서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라. 교제하라는 의미이겠지요. 종일 묵상하는도다는 곧 항상 동행하고 교제한다는 의미입니다.

           • 주야로 말씀을 묵상할 때의 결과 -> ~보다 지혜롭게 됩니다.

           1. 누구보다 지혜롭게 됩니다.(98-100) 오늘 본문 98-100까지 보면 그 세 종류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1) 원수(98)보다 지혜롭습니다. (wiser: 현명함 - 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덕행이 높다)

사울이 다윗을 괴롭힐 때.

           2) 모든 스승(99)보다 지혜롭고 명철합니다. (insight: 통찰력-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

부활 후 예수님의 제자들

           3) 노인(100)보다 지혜롭습니다. (understanding ; 이해력, 납득, 분별, 해석이 뛰어남)

요셉

          

           2.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1) 악한 길로 가지 않습니다

( 119: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2)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됩니다.

( 119:104)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된다는 의미는 죄인의 길에서 떠나 의인의 길로 들어선다는 의미입니다.

           - 시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의인들의 길에 선다고 말씀합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관계가 바른 것이 의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한 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니까 곧 의이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가 곧 의인인 것입니다.

 

(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 이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여기기까지 시인이 얼마나 연단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라는 말씀은 입에 넣기에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의 배후에 담겨 있는, 이 시인이 주님의 말씀에 향미를 느끼기까지 겪었을 연단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 하나님 말씀을 우유처럼 부드러워 마시기 좋은 때도 있으나 고기처럼 질기기도 하며. 어떤 때는 방망이처럼. 어떨 때는 날카로운 칼처럼. 어떨 때는 불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으로 연단되지 않은 자에게 있어서 말씀은 단 것이 아니라 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말씀으로 연단된 자에게는 모든 말씀이 꿀처럼 달게 여겨지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인생길을 변함없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삶은 일종의 길입니다. 길에 대하여 시편 저자는 빛이 없으면 걷기 어려운 험준하거나 어두운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생의 길이 어둡다는 암시입니다. 말씀이 비취지 않는 인생길은 보이지 않는 미로와 같습니다. 마음먹은 길로 나오질 않습니다. 항상 뜻밖의 상황 때문에 놀라고 불안해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동행하는 자는 어둡지 않습니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밝은 빛을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갈 길을 밝히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로고스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나요?

그럼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항상, 꾸준히 말씀을 읽는다는 것이고, 그것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항상 울리도록 읊조린 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악한 길에서 떠나 내 발걸음을 선한 곳으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우리의 모든 부족함이 채워집니다. 악인이 두렵지 않고, 좋은 스승이 부럽지 않고, 솔로몬보다 지혜롭게 됩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아 본인이 간직하며 사용하다가 악한 길에도 빠졌지만 말씀과 동행하면 악한 길에 들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애해 보시길 바랍니다. 시인이 되어 내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소리가 울리도록 읊조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길을 밝히실 것입니다. 외롭지 않게 보호하실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시 63:1-시 63:1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묵상)

시편 63편은 유대 광야에서 다윗이 기도시입니다.

사울의 압제를 피해 달아나며, 물이 없고 황폐한 땅에서 다윗이 구한 것은 무언이었을까? 애굽의 압제를 피해 물도 없고 황폐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물을 달라고, 음식을 달라고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똑같은 환경 속에서 "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육체가 주를 앙모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자신이 배고프고 목마를 , 다윗은 자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다윗의 마음은 성소였고, 골방이었고, 은밀한 하나님과의 교제 장소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를 때에 주님은 너희가 떡을 얻기 위해 나에게 오는구나하시면서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자 수많은 무리들은 " 말씀은 어렵도다!"하시면서 주님을 떠납니다. 떠나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12제자에게 묻지요. "너희도 가려느냐?"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매 내가 뉘게로 가오리까?"

 

내가 하는 기도, 내가 바라는 주의 은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빵인지,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이고 은혜인지 다윗의 기도를 보며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를 골수의 기름진 먹음과 똑같이, 아니 더귀하게 여길 있는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음으로…" 수없이 불렀던 찬송의 시가 정말 주의 인자가 , 속의 문제해결, 삶의 생사여부보다 나을 있는지… 부끄러운 신앙 안에서의 나의 욕망을 드러내 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윗의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을 즐겁게 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수많은 기도의 내용이 떡과 물질과 자신의 인생을 위해 기도할 , "주의 인자가 인생보다 귀합니다."하는 다윗의 기도. "물이 없어도 인생이 황폐해도, 영혼은 오직, 육체는 오직 주만을 갈망합니다"하는 다윗의 고백. 하나님이 사랑할 밖에 없는 다윗이 기도는 삶과 기도를 부끄럽게 합니다.

 

나에게도 위선이 아닌 진심으로, 고백이 아닌 삶으로, 다윗의 믿음, 다윗의 진심, 다윗의 고백이 주어지기를 기도해 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