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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마지막과 아비삭 (열왕기상 1:1-4절) 


오늘은 그동안 함께 나누었던 다윗의 삶의 마지막의 삶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다윗의 마지막은 복잡하고 신앙의 신비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해석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습니다. 

사무엘하에서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지만 다윗의 삶은 열왕기상 첫부분까지 길게 늘여집니다. 


다윗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왕이요, 이스라엘 민족을 떠나 모든 신앙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신앙인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한 자요, 하나님과 즐거이 교제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시면서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합니다. 

다윗의 삶을 묵상하면서 저는 다윗은 축복 받은 후에도 타락하지 않은 영성, 가나안에 들어가도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은 신앙이라고 강조를 하면서 그의 삶의 발자취를 추적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평정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22장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시는 수많은 찬양의 가사로서 지금도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22장은 다 읽을 수 없지만 23장의 다윗의 마지막 말은 한번 같이 읽어 보고 싶습니다. 


[삼하 23:1-삼하 23:7]

(삼하 23: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삼하 23: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삼하 23: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삼하 23: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 23:5)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삼하 23:6)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삼하 23:7)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그는 삶으로 시편 1편에서 말하고 있는 의인의 삶을 보여 주었고, 반대로 그를 대적하는 악인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삶이 끝났으면 좋겠지만 사무엘하는, 그리고 다윗의 삶도 24장이라는 또 다른 사건을 드러내며 다윗의 마지막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24장에는 대개 사람들이 말할 때 밧세바를 범한 사건과 함께 다윗의 삶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죄로 여기는 "다윗의 인구조사사건"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왜 ‘인구조사’가 그렇게 큰 죄가 될까? 사실, 모세는 아무런 문제없이 인구 조사를 2번이나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모세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지시로 이루어 진 것이지만, 다윗은 것은 스스로 한 것으로 또한 그 마음의 동기는 ‘교만과 자기 과시’였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것, 자기의 업적을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출 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율법에 의하면 반드시 인구 조사를 할 때, 그 속전을 성소에 놓도록 지시합니다. 이는 그 백성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밝히는 행위것이었지만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하면서, 이 백성이 ‘내 백성’이라는 생각으로 인구 조사를 한 것입니다. 

고대에서 ‘인구조사’는 한마디로 왕권을 강화하고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을 압제하고, 공안 통치를 하는데 사용되는 매우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한 나라의 장수인 요압이 이를 모를리가 없었고, 다윗은 소위 말해서 ‘열방의 왕’ 처럼 되어가고 있는데 이는 여호와를 거스리는 행동이라고 보고, 반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인구조사를 감행해서 10개월이나 걸려 이 사업을 진행했으며 (8절), 이스라엘에 80만, 유다에 50만의 장정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다윗의 마지막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목회자의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유혹을 따끔하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움을 받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던 수많은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자기 인생의 업적으로 생각하고 무언가 자취를 남기려고 하다가 오히려 타락하고, 뼈아픈 징계와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죽었을 때에도 다윗은 사울을 추모하며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추모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죽어갈 때, 다윗은 백성들의 애도는 고사하고 집안은 다윗의 후계자를 두고 온통 싸움판이었고, 신하들, 그의 아들 중 암논과 압살롬 바로 밑의 아도니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다윗의 충신이었던 요압 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도 아비아달의 편에 서서 다윗을 배신합니다. 


다윗도 이렇게 엉망이 되는 상황에 한 몫 하게 되는데 인구조사와 더불어 영왕기상 2장에 보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데 하나 납득하지 못할 유언을 하게 되는데 

[왕상 2:8-9]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


자신을 저주했던 스므이를 죽이라고 하면서 증오심을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압살롬에게 쫓겨 가면서 다윗은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서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그를 용서했는데, 죽음 앞에서 옹졸한 뒷끝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최후는 그의 평생의 신앙이나 발자취에 비해 초라하고 비극적입니다. 

시므이에 대한 복수를 끝으로 그의 죽음의 기사가 열왕기상 2장에 단 한줄로 표현됩니다. 


(왕상 2:10)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어떤 백성들의 애도도, 식구들의 슬픔도 없이 그저 한 사람의 평범한 사람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럼 다윗의 삶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나고 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죄인임을 드러내보고 죽는 것일까? 


우리는 사무엘하 24장 가장 끝 부분에 나오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의 다윗의 제사와 오늘 우리가 읽은 아비삭을 통해서 다윗의 죽음으로 가려진 두가지 신비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1. 오르난의 타작마당 


인구조사를 마치자 마자 다윗은 자기의 범죄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삼하 24: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보내어 세가지 선택권을 줍니다. 

 ‘갓’은 누구인가? 바로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 다윗에게 유다 광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해 준 사람입니다. (삼상 22 : 1 - 5) 

13절에 보니까 "7년간의 기근"이나 "석달 동안의 도망"이나 "사흘 동안의 전염병"..


당신 같으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어떤 학자는 평소의 다윗이었으면 당연히 2번을 선택했을 것이라 말하고 하나님이 원하신 것도 그것이라 대답합니다. 

왜 그럴까요? 

1, 3번은 그 피해가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는 것이고, 2번은 다윗 혼자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년간의 기근은 물질적인 기근도 되지만 영적 기근도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없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그러한 기근보다 더 고통스러운 때는 없습니다. 그러나 도망의 때에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맛보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도망하면 다윗은 사울을 떠올리고, 가장 최근에는 압살롬의 죽음을 떠올리며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다윗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고 여호와의 손에 빠지길 원합니다."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의탁합니다 . 정확한 기간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한 때까지 전염병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 7만명이 죽게 됩니다.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다윗은 진심으로 뉘우치며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하면서 회개합니다. 


이 때 회개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드린 제사가 바로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서의 제사입니다. 

그는 자기의 값을 치루어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그 예배가 왜 중요한 의미를 같습니까?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를 잇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예배,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하 3:1)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다윗이 교만하여져서 죄를 짓고 심판을 받았으나 그 죄를 용서받은 곳은 바로 모리아산 위에서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과 죄성을 너무나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교제를 회복시켜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타락과 회복을 경험한 다윗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리아산 위에서 다윗은 진정으로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동시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셨다. 


그리고 모리아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던 그곳은 예수의 십자가가 달리신 골고다의 언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 독생자를 바치고 온전한 헌신을 드린 그 장소가 다윗에게는 죽음 앞에 모든 교만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린 성전이 되고 예수는 그곳에서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 아비삭 

(왕상 1: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고등학교 때에 쓴 시 - 행복 "공중전화 카드, 지하철표, 지갑에 만원" 

그 때에 행복은 친구....지갑에 만원 짜리 한 장 가지고 친구에게 전화해서 어디든 가면 가장 즐겁고 행복할 것이라...

그런데 지금, 공중전화가 아니라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고, 자동차를 운전하며, 크레딧 카드를 가지고 다녀도 젊었을 때에 꿈꾸던 행복을 느낄 수가 없다. 


이불- 나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나를 가리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의지처, 돈, 명예, 권력.....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런 것들을 가져도 행복이 없다. 

젊었을 때는 바깥을 덮으면 따뜻했는데, 내 외적인 조건들을 갖추면 행복했는데, 나이가 드니 안이 시리니까 바깥이 아무리 포장되어도 따뜻함을 느낄수 없다. 돈이 있어도 사고 싶은 것이 없고, 음식을 먹어도 맛난 것이 없다. 안이 공허하니까...


세상적인 해결책 - 어린 여자를 품어라. 

왕의 기력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세상적 방법... 

그런데 다윗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왕이 늙어가자 신하도 떠나고 왕도 떠나고, 사랑하던 밧세바도, 영적으로 의지하던 나단 선지자도  함께 거하지 않고 솔로몬을 왕세워 줄 것 만을 요구하는데.... 그 자리에 함께 거하던 자- 아비삭... 


아비삭의 의미는 세상의 힘을 잃은 다윗에게 진정한 사귐의 의미를 주는, 진정한 교제를 알게 하는 다윗의 인생에 다 떠나가도 단 하나 남은 진정한 사람과의 교제였다.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것- 아비삭에게도 아무런 이익이 없는 만남이다. 

왜? 아이를 낳아야 왕의 자리를 기대할 수 있기에... 

지금 다윗을 떠난 사람들 

아도니야- 왜? 다윗이 죽어야 자기가 왕이 되니까.....기다리다 기다리다 먼저 스스로 왕이라고 선포

요압과 아비나달- 새로운 왕을 위해 다윗을 떠남...


다윗의 측근 - 밧세바와 나단의 기대- 솔로몬을 왕으로 세워라....


다윗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그는 초라한 늙은이일 뿐이다. 그와 함께 하는 것은 오직 수넴 여인 아비삭....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 

왕이기 때문에 모여든 사람들.....

왕이 아니기 때문에 떠나는 사람들.... 

왕 앞에서 높은 자리 차지하려는 제자들,.... 왕이 아니기 때문에 배반하고 저주하는 제자들.... 


그 때에 함께 있었던 자 -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무덤에 안치할 때도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병사들이 지키고 있을 무덤에 갈 때도...

제자들이 다 떠난 자리를 주님을 바라보며 함께 있었던 자...

부활의 첫 증인... 


사람들이 다 떠난 자리를 홀로 지키고 있었던 아비삭- 진정한 다윗의 사람 


아바아달이 솔로몬에게 쫓겨날 때에 유일하게 원했던 것 - 아비삭 


솔로몬의 아가서-신랑과 신부의 사랑스런 연애의 글 

기독교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었던 책- 왜?

어떻게 성경에 이런 음탕한 표현들을 넣을 수 있을까? 


아가서의 주인공- 왕과 술람미 여인

술람미의 지명이 바로 수넴여인... 학자들은 이 술람미 여인이 바로 다윗의 마지막 사랑 아비삭이라 주장... 


솔로몬은 이 아가서를 이름 붙이기를 'Song of songs', 즉 노래 중의 노래, 최고의 노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왕과 술람미 여인이 누굴까? 하면서 많은 역사가들이나 성서 학자들은 다윗이 말년에 얻은 마지막 부인인 아비삭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수넴여인으로서 아비삭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표현되며 밧세바가 다윗을 찾아가 솔로몬이 왕이 되도록 하는 장면에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즉 다윗과 솔로몬의 왕위 계승의 현장을 가장 가까이 목격한 여인으로 열왕기상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술람미 여인은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왕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위까지 오른 솔로몬 자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잘 알다시피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얻은 자녀입니다. 그로 인해 첫번째 얻은 아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고, 또한 이전에 이미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계략에 의해 죽게 했습니다. 즉, 솔로몬의 탄생엔 이미 다윗의 욕정으로 말미암은 죄없는 두 명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거의 흠없는 삶을 살았던 다윗에게 어쩌면 솔로몬 이라는 자식은 자신의 죄악을 떠올리게 하는 아킬레스 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끝까지 지극히 사랑했고,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가장 지혜로운 왕이라는 아름다운 영예를 얻게 됩니다. 


마치 예루살렘에 거하는 많은 여인들 중에서 끼이지 못하고 햇빛에 그을린 피부를 가지며 포도원을 돌보는 술람미 여인의 모습은 왕실 내에서 다른 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죄악의 그림자 아래에서 열등의식을 가지며 자라왔던 솔로몬의 자화상이기도 한 듯 합니다. 


그런데도 왕은 술람미 여인을 사랑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솔로몬을 사랑하듯, 하나님께서 많은 다윗의 자녀 중에서 하필이면 죄악의 흔적이 가득한 솔로몬을 택하듯 그 분이 술람미 여인과 입맞추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허물많은 나에게 입맞추며 연합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말년은 그의 일생의 업적과 신앙의 내력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왕권이 흐려지는 그에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집안은 갈라지고 평생의 동료요 충신들은 흩어집니다. 십자가 앞에서 홀로 남으신 그리스도의 마지막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홀로된 다윗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비로서 아브라함과 예수의 다리를 잇는, 솔로몬의 성전의 터전이 되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홀로남은 그에게 아비삭과의 진정한 사랑의 여정을 나눕니다.

그는 모든 그의 업적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참 인간으로, 참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사무엘하 18장 사랑, 고통, 그리고 복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성경에 이보다 더한 슬픔을 표현한 구절이 있을까?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십자가 상의 가상칠언에 비견되는 슬픔의 표현이 바로 이 구절 

다윗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런 순간 


사울을 피해 도망하는 모습과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는 다윗-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국가적 애도)- 압살롬의 애도- 요압으로 말미암아 슬퍼할 시간도 주지 못함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 교통사고 사망률, 암 발생률....어디가 높을까? 

당연히 믿는자가 더 적을까? 아니 차이가 없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삶의 고통스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그 순간을 어떻게 견디고 극복하고 회복하는가의 문제다. 

하나님과 친밀히 예배한 자, 찬양하는 왕 다윗 역시 이러한 고통의 순간을 겪는다. 


그 원인과 과정과 극복의 순간을 통해서 우리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압살롬과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하 13장에서 시작되어 18장에서 끝맺는다. 물리적인 시간에서도 10년이 넘는 기간이다. 


1. 13장 - 암논과 다말의 사건 

배다른 형제였던 암논이 압살론의 누이동생이었던 다말을 짝사랑했다. 상대방도 역시 공주이고 어머니가 다르긴 하지만 형제인지라 함부로 하지 못하고 꾀를 내어 자신을 문병하러 오게 한 후에 그를 범한다. 그리고 범한 후에 헌신짝처럼 그녀를 냉대했다. 

다말이 재를 무릎쓰고 슬퍼허자 이 소식이 성안에 두루 퍼지게 된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마치 홉니와 비느하스를 꾸짖지 못하는 엘리 제사장 처럼 말이다. (다윗의 첫번째 잘못) 


2. 압살롬의 암논 살해 

2년이 지난 후 압사롬은 일을 꾸며 암논을 죽인다. 양털을 깎는 것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큰 축제의 기간이었는데 형제들을 초헝하여 술에 취하게 한 다음 무참히 그를 죽인 것이다. 그를 죽이고 다윗을 두려워 한 압살롬은 어머니의 고향인 그술 지방으로 도망하여 삼년을 보내게 된다. 그동안 다윗은 그리워하면서도 부르지 않는다. 꾸짖지도 않는다. 


3. 압살롬의 이스라엘 복귀 

다윗의 충신이었던 요압이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함을 알고 꾀를 내어 다윗으로 하여금 그를 예루살렘으로 불러오게 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오게는 하였어도 다윗은 그를 대면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는 용서했지만 형제를 죽인 그를 아버지로서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기독교는 용서와 회개의 종교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자를 하나님은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 

그런데 신앙인의 인간관계의 파탄은 회개하지 않고 용서만을 바라거나 회개하였어도 내가 용서하지 못했을 때에 일어난다. 


탕자의 비유) 나를 품꾼의 하나로 여기소서 (아버지께로 돌아온 탕자- 회개) 

회개한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자녀의 지위를 회복케 하신다. 

그런데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에서 진정한 회개도 없고, 따라서 진정한 용서도 없다. 

그저 어색한 조우와 얼굴을 외면하는 냉랭한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압살롬은 거꾸로 아버지를 쫓아내리라 마음먹는다. 

4년의 시간동안 치밀하게 백성들의 재판을 도맡아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쳤다(삼하 15:6)고 표현한다. 


헤브론으로 자리를 옮겨 스스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한다. 치밀한 압살롬의 반역에 천하의 다윗이 두려워 떨며 성전을 버리고 도망하기 시작한다. 골리앗을 물리쳤던 다윗이, 사울의 공격에도 꼼짝 않던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도망가는 그에게 자기의 친구요 모사가였던 아히도벨마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편에 가담했음을 듣는다. 고통의 순간은 이렇게 한꺼번에 덮친다. 


그때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 시편 55편이다. 

[시 55:4-8]

(시 55:4)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시 55:5)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시 55:6)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시 55:7)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시 55:8)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시 55:12- 14]

 12)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 기독교인의 의로움이란 관계가 바른 것이고 뚫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지금 다윗은 관계가 막혀 있다. 자식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를리 없다. 


이 긴 기간동안 다윗의 신앙은 어떠했을까?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압살롬의 사건을 보면서 평소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묻던 다윗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잘못을 해도 꾸짖지 못하고 돌아와도 용서하지 못하는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만이 드러날 뿐이다. 다윗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하나 있다. 


(삼하 16: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아히도벨의 배반이 그토록 다윗에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다윗은 그동안 아히도벨의 말을 하나님의 말처럼 의지했기 때문이다. 늘 하나님과 교제하고 묻고 기도하던 다윗이 어느 때부터인가 지혜로운 모사가 아히도벨의 말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압살롬에게 넘어갔으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광애 - 회복의 장소 

시편 55편의 다윗의 기도처럼 다윗은 멀리 광야로 피한다. 


사울을 피해 머물던 곳,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다윗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곳.... 

세상 사람들이 보면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한 곳이지만 신앙인들에게 광야는 회복의 장소요, 훈련의 장소이다. 


그곳에서 다윗은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교제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던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다. 

아버지 답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이젠 왕이 아닌 연약한 죄인으로 자신의 민낯을 보기 시작한다. 

성전에서 왕으로 살아가던 다윗이 이제 광야에서 비로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가 된다. 고통 속에서 다윗은 겸손을 찾는다. 


광야생활 동안 다윗은 시므이를 통해 자신을 바라본다. 도망하는 자신을 끝까지 쫓아오면서 저주하는 시므이를 자신을 보위하던 장수들이 죽이려고 하자 다윗이 막는다. 

(삼하 16: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삼하 16: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광야에 선 다윗은 모든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전 안에서 끊임없이 드렸을 헛된 예배 대신에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아픈 소리이지만 그것은 회개의 소리고, 참회의 소리고, 동시에 은혜의 소리요, 회복의 소리였다. 


[시 3:1-시 3:8]

(시 3:1)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시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시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시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도망치던 다윗이 기도 가운데 다시 그의 머리를 하나님께로 든다. 죽지 않고 일어나는 자신의 목숨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낀다.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다시 '주의 백성'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회복되자 돌아온 마음의 결과가 무엇인가? 

바로 진정한 용서이다. 진정한 아버지 모습의 회복이다. 

용기를 회복한 다윗이 전열을 정비하여 전쟁에 나서려 하자 군대 장관들은 "임금님은 우리들 만명과 다름이 없습니다"하면서 출정을 막고 전쟁에 임한다. 

떠나는 그들에게 다윗의 말이 무엇인가? 

(삼하 18: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나를 생각해서라도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는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반역자요 패역한 자식이지만 다윗은 그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가 살아돌아 올 수 있도록 장관들에게 부탁한다. 


오히려 군사들과 백성들은 그 소리의 진정성을 알지 못하고 배반자 압살롬을 처참하게 죽인다. 


전쟁의 승패는 다윗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는 압살롬에게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나를 용서해다오 말하고 싶었던 게다. 


  •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 길을 따라 됴단 광야로 내려갔던 여정은 거꾸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르셨던 여정과 겹친다. 그리고 똑같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이 배반하기 전 날 밤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전하셨다. 내가 선생되어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 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던 버림받은 예수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끝으로 십자가의 사명을 완수하셨다. 


고통의 순간은 어느 때에도 임한다. 그리고 대게 그 고통의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죄에 대하여 눈감고, 용서하지 못한채로 사람들을 대하며, 겉으로는 하나님께 예배하지만 사람들의 말을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습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 때 우리가 아파해야 할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막혀있는 관계이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막혀 있는가?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난 용서했는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예수님은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주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삶임을 가르쳐 주셨고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을 보이셨다. 

 

 다윗은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다. 위험할 때마다 나단을 통해, 시므이를 통해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 

 오늘 저의 소리가 그들의 소리처럼 여러분들의 막혀진 통로를 뚫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간구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사무엘하 11-12장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건을 뽑으라면? 

골리앗사건과 밧세바 사건 - 신앙의 적에 대한 사건들이면서 너무나 대조가 되는 사건이다. 


골리앗- 다윗이 어린 무명의 목동이었을 때에... 

          -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블레셋의 거인. 인생의 큰 장벽.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존재. 

          그런데 어린 다윗은 어쩌면 너무도 쉽고 어쩌면 너무도 황당하게 그 시험을 너끈히 통과한다. 

          왜? 그는 골리앗보다 하나님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너무도 순전하게 믿고 있었으며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이길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경우가 많다. 일상에 일이 닥치면 홍해를 건너게 하고 열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항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매일 같이 이백만 명을 굶기시지 않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삼일 마실 물이 없자 의심하게 만든다. 다윗은 말 그대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문제를 단순하게 볼 줄 알았다. 하나님은 골리앗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강하신 분이고, 골리앗이 지금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와 맞설 것이다! 

          

밧세바 - 누구도 그녀를 경계하지 않는다. 그는 이방인도 아니요, 강한 용사도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여인이요, 아름다운 자였다. 밧세바를 대할 당시 다윗의 모습도 골리앗을 만날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이제 왕이 되었다. 아버지에게서 조차 주목받지 못했던 그가 이젠 모든 민족의 주목을 받는 자가 되었다. 인생의 절정기에 만난 이스라엘의 힘없는 여인.... 누구도 다윗을 대적할 수 없다고 믿었던 그 순간.....다윗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마치 블레셋을 농락하던 삼손이 데릴라 앞에서  고통스럽게 자기의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시험은 전혀 뜻 밖의 곳에서 우리를 넘어뜨릴 때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던 골리앗과 밧세바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도 똑같이 힘들고 무서운 적에 무너지기 보다 이렇게 뜻밖의 상황, 뜻밖의 상대에게 무너질 때가 훨씬 더 많다. 


다윗- 왕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변질되지 않은 신앙..

그런데 오늘은 그 여정 중에 가장 큰 시험의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넘어지지 않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건은 그 만큼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 


이 사건은 사무엘하 11장과 12장을 통해 전개된다. 


11장의 시작은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영문성경의 번역은 좀 다르다.

"In the spring, at the time, when kings go off to war," 

봄이 왔다- 인생의 봄. 쨍 하고 해뜰 날....

왕권은 안정되고 인생의 따뜻한 날이 왔다. 그런데 그 때는 또한 왕들이 전쟁을 하러 떠나야 할 때다. 

이 땅에 살 동안 - 참된 안식은 그 날에 있다. 평안해도 곧 일어서야 한다. 영적인 전쟁터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1-6절까지 가장 많이 쓰인 동사- 보내다 (솨라흐" 

1절-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4절- 전령을 보내어 

5절- 사람을 보내 

6절-요압에게 기별하여 (보내어) 우리아를 내게로 보내라.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여태까지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던 이유- 하나님이 주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랐기 때문,.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없고 그 자리에 다시 자기가 앉았다. 보내는 자가 되었다. 보내면 보낼 수록 그는 점점 더 죄인이 되었다. 그의 범죄는 깊어져 갔다. 

세상의 힘, 권력-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게 한다. 주장하고, 시키고, 보내는 자가 되게 한다. 

그것을 누릴 때는 그것이 쉽고 즐겁고 통쾌하다. 그런데 그 자리가 길어지면 길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보내심을 받은 자, 소명 받은 자. 부르심에 응답한 자 

그런데 죄악의 빠진 인간- 보내는 자, 자기가 가야 할 곳에 다른 사람을 보내고, 자기가 들키기 싫은 곳에 다른 사람을 보내고, 자기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또 보내고, 그리고 사람을 죽이게 하기 위해 그 또 보내고...


그 자리에 있는 동안 그는 그것이 죄인줄 모르고 지었다. 죄가 무서운 것은 죄악을 짓는 동안 그것이 죄인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남편이 있는 여인을 범하고도 왕이라는 신분에가려 왕이 이정도도 못하냐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아를 불러 그 여인과 동침하게 해서 밧세바의 아이가 자기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감추려고 했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기 보다 왕으로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 했다. 

전쟁터에 부인과 잠자리를 하지 않는 충성스런 용사 우리아를 다시 가장 위험한 전쟁터에서 죽게 하는 살인죄를 저지르면서도 이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난 내손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야 하면서...자신의 죄를 회피했을 것이다. 


  • 12장의 첫 절은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여 끊임없이 사람들을 보내어 범죄하던 다윗에게 드디어 하나님은 자기의 주권을 드러내며 "보내는 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끊임없이 교제하던 다윗이 그 자리를 잃어버릴 때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친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단을 보내신다. 왜? 다윗이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나단은 짧고 단순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 준다. 양과 소를 많이 가진 부자 하나가 있고 작은 암양 한 마리를 자식처럼 키우면서 가난하게 사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부자에게  손님이 와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자기 것은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가난한 자의 자식 같은 한 마리 양을 빼앗아 잡았다는 이야기이다. 


다윗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그 사람을 죽일 것이라 말한다. 

그러자 나단이 이야기한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오늘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죄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나를 향한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홍해의 기적을 맛보고 삼일 만에 불평불만하는 자가 다름 아닌  나 자신임을. 

가나안의 약속을 받고서도 우리는 메뚜기 같아서 절대로 그 땅엔 못들어 간다고 우기는 것도 나라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주님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쳐 놓고서 욕하고 저주까지 하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나라는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나 자신을 앉혀 두고서 마치 내가 하나님인양 판단하고 시키고 보내고 하는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이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죄가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듯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야!"하고 우리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올 때에 그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히 4:12) 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내 안에 회개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도 이것이 내 이야기가 아닌 양 읽고 넘어가는 사람, 다윗도 이런 범죄를 저질렀구나 하면서 안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무리 예배드리고, 회개를 해도 소용이 없다.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다윗의 위대함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대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앞에 고백했다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깨달으면 은혜 받았다고 회개하고 감사하는데 누군가의 입술을 통해서 잘못을 들으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변명하고 화를 낸다. 스스로 깨닫는 것은 은혜라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지적당하는 것은 못견뎌 한다. 왜? 사람들 앞에서 수치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잠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잠언은 반복적으로 훈계를 잘 듣는 것이 지혜로운 자라고 강조한다. 


그가 인정하는 순간 나단의 말은 우리에게 은혜를 준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내가 내 죄를 진정 깨닫고 고백하는 순간 임한다. 


  • 사울과 다윗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셨다는 사무엘의 말을 듣고서 사울은 처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백성의 탓으로 돌리거나 당신이 오해했다고 말하다가 급기야 사무엘의 옷을 붙잡아 찢어지게 메달리면서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달라고, 나중에 버려질 지라도 지금 당장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해달라고 메달린다. 


[시 51:10-시 51:12]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런데 다윗이 범죄했을 때에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두어 지는 것이었다.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똑같이 실수하고 넘어 질 수 있다. 

인생의 봄에 나태해지고 죄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연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 우리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 안근태와 서지현 

지난 한 주 한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의 발단 

한국의 대표적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온누리 교회에서 세례자 대표로 나와 울며 간증했던 전 검사의 동영상을 보고 7년전 그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고통스럽게 세월을 보내던 한 여검사의 고발로 시작된 사건.. 


목사로서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 교회는 얼마나 당황스러운가? 

한 교회의 세례간증이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또 목회자로서 그 성도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이제 새로 신앙생활 하며 세례받은 성도를 세상의 지탄을 받고 교회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이유로 멀리하고 원망해야 하나, 아니면 어떻게 권면해야 하나! 

성도의 입장에서 예수믿고 은혜받은 것을 사람들 앞에 용기를 내어 간증했을 뿐인데 7년전의 술김에 한 일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수치를 주면 이 사람이 앞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여검사의 고통스러웠던 7년간의 세월이나 동영상을 보고 받았을 충격과 분노, 그리고 세상이 그 일을 알렸던 그 용기에는 똑같이 공감하며 함께 애통하며 위로하는 마음은 백번 가져야 되지만... 


몇번이고 간증을 들려보고 그 여검사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 사람은 자기가 공직에 있을 때 성실하고 꺠끗하게 일했으며 억울하게 사임하게 되었다고, 교만한 자신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그 고백이 너무나 공허하게 들렸다. 그는 그가 공직에 있을 때에 이미 세상에 알려진 죄에 대해서도 한번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피해자인 서검사의 이야기도 현대 교회를 향한 따금함이 느껴진다.

"수년동안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혹시나 조직에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망설이고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교회의 어두운 모습들이 "교회를 위하여"라는 말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진 않은지...


오늘의 설교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사건을 터뜨리게 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주인공을 그 검사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임을, 나 자신임을 깨닫게 하신다. 

스쳐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나에게, 내 말에 상처입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증언한다면... 우리는 그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올바르게, 진실하게 회개하여 왔는가? 

남의 입을 통해 펼쳐진 우리의 연약함에 분노하며 감추려 애쓰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추상적으로 내 교만함을 용서해주시고 내 연약함을 용서해 달라고 뭉뚱거리면서 알아서 용서해 달라고 마치 영수증을 청구하듯 그렇게 회개하지 않는가? 


세상의 모든 죄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기서부터 복음은 시작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세례요한의 외침,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은 지금도 뉴스를 통해,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사무엘하 9장 므비보셋- 사랑으로의 초대 


오늘은 다윗의 이야기 중에 등장하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합니다.

므비보셋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살핀 다음 다시 다윗으로 돌아가 므비보셋의 사건이 다윗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므비보셋의 본명은 므룻바알(역대상 9장 40절)이었던 것으로 역대상 9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므룻바알이라는 말의 뜻은 '바알과 대적하는 용사'라는 의미입니다. 

초창기의 사울과 그리고 인생 전반에 있어서 요나단이 용사였던 것처럼 므룻바알도 그런 용감한 전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는 다름아닌 바알, 마귀와 싸우는 영적인 용사로서의 소망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므비보셋의 인생은 성경에서 크게 세 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므비보셋이 다섯 살 때에 궁에 있던 그에게 끔찍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과 자신의 아버지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에게 크게 패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남아있는 사울의 신하들이나 므비보셋 입장에서는 당장 닥친 큰 두려움은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군이 들이닥쳐 이스라엘을 점령할 것과 또 하나의 두려움은 그동안 사울에게 쫓기어 도망치던 다윗이 이 때에 들이닥쳐 자신들을 몰아내려 할 것이라는 두가지 두려움이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궁에 남아있던 모든 신하와 하인들은 그 큰 두려움 속에서 살기위해 도망쳤습니다. 

므비보셋을 돌보던 유모는 므비보셋을 업고 급히 달려가다가 넘어져서 아이의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사무엘하 4장에 보면 양 발목이 다 부러져 피난터에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평생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어 로드발이라는 마을에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로드발이라는 마을의 의미는 "목장이 없는 황무지"라는 의미입니다.  

전사였던 므룻바알의 이름이 므비보셋 - "부끄러움"이라는 바꾸어진 것도 이 때일 것입니다.

그는 왕자에서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고아로, 그리고 불구자로 전락하여 세상에서 은둔하여 살아가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절뚝발이- 예전에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던 여부스족이 이스라엘을 비아냥 거리며 맹인과 절뚝발이로 표현했듯이- 는 홀로 설 수 없는 죄인의 실존적 상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이 후에 므비보셋의 삶이 어떠했을지 성경은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통해 그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그야말로 영적, 육적 불구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국 사울이 죽고 요나단이 죽은 이유도, 사울이 죽자 사울의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한 것도 다윗이기 때문에 다윗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적대감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탓할 수 밖에 없는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2. 므비보셋이 두 번째 등장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9장입니다. 

로드발에 은둔하여 살고 있는 므비보셋에게 어느날 다윗의 신하들이 찾아와서 왕이 당신을 찾는다고 전합니다.  

다윗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며 절망했을 것입니다. 이 때까지 숨어서, 은둔하면서 살았는데 드디어 나를 찾아냈구나 하면서 자포자기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워 떨면서 다윗의 궁으로 다윗의 신하들을 따라 나섭니다. 

 

다윗 앞에 고개를 떨고 서 있는 므비보셋의 장면에서 우리는 어쩌면 사형장 앞에서의 사형수 같은 한 인간의 초라함과 연약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절하고 있는 므비보셋을 향한 다윗의 첫 마디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은총을 베풀리라. 네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삼하 9:7) 


죽을 줄 알았던 므비보셋에게 다가온 첫 마디는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기드온에게, 이사야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장 두려운 상황 속에서 떨고 있을 때에, 가장 최악의 상황 앞에 놓여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들려준 가장 첫 마디는 "두려워말라.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우리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소망의 말 한마디는 "두려워 말라"라는 그 분의 음성입니다. 

늘 최악의 상황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던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다윗의 말, "이제 마음 푹 놓게, 염려하지 말게. 내가 자네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일세."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벌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랑 받으러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상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심지어 매일 같이 일하는 직장에서도, 심지어 평생을 같이 함께 살고 있는 가정에서도

혹시 저 사람이 날 미워하진 않을까? 날 버리지는 않을까? 

왜 세상은 좋아진다고 하는데 

우울증과 불면증은 더욱 극심해지고 먹는 약의 종류는 더욱 많아져만 갑니까? 

그 근본 중심은 두려움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그 궁극적 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도와줄께. 내가 책임질께.. 내 앞에서 편안해라! 

내 두려운 인생 가운데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성육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요, 진리요, 자유입니다. 


3. 세번째 므비보셋의 등장은 사무엘하 16장부터 19장까지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동안 므비보셋은 다윗으로부터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받고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사랑받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자랐던 므비보셋은 그러면 과거의 상처와 불안과 부끄러움에서부터 완전히 회복되었을까? 

그가 지녀왔던 다윗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는 피해의식은 다윗의 사랑으로 완전히 회복되었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다윗은 언젠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것이 나에게 잘 해 주는 이유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 하는 쇼일 뿐이고 하는 등 다윗의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았을까? 

그는 과연 다윗에게 진정 고마워하고 다윗의 호의를 기뻐했을까? 


세 번째 등장은 이러한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둡니다. 

세 번째 므비보셋의 등장은 다윗이 압사롬의 반역으로 몇몇 신하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탈출하는 장면에 등장합니다.  

[삼하 16:1-4]

(삼하 16: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삼하 16:2)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삼하 16:3)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삼하 16:4)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말은 므비보셋은 당신을 배신하고 이제 이 시기를 틈타 왕권을 탈환하려 합니다.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지를 시바에게 준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므비보셋의 등장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평정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과정 중에 나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다시금 귀환 할 때에 므비보셋의 내려와 왕을 맞습니다. 


[삼하 19:24-30]

(삼하 19: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삼하 19:25)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삼하 19: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삼하 19: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삼하 19:28)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삼하 19: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삼하 19:30)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구절은 굉장히 신중하게 묵상해야 할 구절입니다. 

다윗의 귀환 때에 "왜 나와 함께 가지아니하였느냐" 하는 추궁에 므비보셋은 나는 가려고 했는데 시바가 나를 속이고 나를 내버려두고 혼자 가면서 나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앞에서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도 나를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가 무슨 권리로 나의 억울함을 말하리오까?합니다. 


분명 시바와 므비보셋, 둘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당연히 시바가 므비보셋에게 누명을 씌운 것으로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주인과 왕에게 범죄하고 누명을 씌운 시바를 심판하고 예루살렘에 귀환하듯이 므비보셋을 복권시키는 것이 올바른 퍈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의 반응은 시바와 밭을 나누게 하면서 그 둘 사이를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므비보셋에게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하고 묻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너를 내 아들로서 대하는데 너는 왜 밤낮 네 과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신세타령을 하고 있느냐?하면서 여전히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어도, 과거의 상처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평생을 목회를 하는 것을 곁에서 바라보고, 또 지금 제 스스로가 목회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으로 사랑받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 속에서 하나님의 중심을 오해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나를 감시하다가 잘못하면 벌 주시는 분으로, 늘 나에게 부담 주는 분으로 하나님을, 교회를, 성도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 지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을 씻기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제자,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면서도 예수님을 배반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도 예수님도 한없는 사랑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그대로 상처를 노출하는 사람들을 향한 처방은 "그저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며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4. 다윗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다윗이 백성을 향하는 첫번째 원칙은 다름아닌 사랑이었습니다. 


(삼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그의 정의와 공의는 사랑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는 통치하고 관리하는 왕이 아니라 사랑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죽을 때도 그는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므비보셋의 의심나는 행동에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없습니다. 

그가 백성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말은 므비보셋을 향한 첫 마디와 같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세요. 내가 당신과 함께 있어주고 힘이 되어 줄께요." 


저는 성도들이 저와 함께 있을 때에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어딜 가든 성도들을 상대하는, 관계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런 화평케 하는 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인관관계는 점점 매말라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 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함들고, 얼굴을 보면서도 마음을 가립니다. 


주님은 "너는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제발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샬롬, 평안할 지어다. 내니 두려워 말라.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