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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 회귀 (사무엘하 6장)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부스족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탈환하므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된 다윗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5장 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브론에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그것을 어떻게 나누냐면 다윗이 삼십세에 왕위에 올라 40년을 다스렸다고 말하면서 헤브론에서 7년동안 유다를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삼심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가 되었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까지는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정해지기까지 다윗은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인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가나안 7족속 중의 하나였던 여부스 족속이 이삭과 야곱을 조롱하는 맹인과 절뚝박이를 조롱삼아 우상으로 만들어 이스라엘을 농락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조롱했던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여부스족속의 그러한 행태를 미워하며 그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 중심을 탈환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온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 중심부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서 통치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목자 삼은 다윗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목자로서 삼았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게 하는 것, 이것이 온전한 구원의 모델입니다. 


다윗의 삶은 왕이 되기 전의 여정과 왕이 된 후의 여정으로 구분합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울 때, 연약할 때, 힘이 들때, 하나님께 매달려서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받은 후에 타락합니다.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노아가 홍수가 그치자마자 포도주에 취해서 범죄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다시 바알과 앗세라에게 무너집니다. 

축복받은 삼손이 데릴라에게 취해 머리를 잘리게 됩니다. 

목숨을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이스라엘의 비밀을 바벨론에게 다 누설합니다. 

40년을 치리했던 엘리 제사장은 나이 많고 비둔하여져서 이스라엘의 타락을 눈감아 버립니다. 

수 많은 교회가, 목사가, 성도가 왕이 된 이후, 축복 받은 이후의 삶에서 무너집니다. 


다윗도 물론 앞으로 나누겠지만 왕이 되고 난 후에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유혹에 때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돌아옵니다. 철저히 회개 합니다.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왕이 되기 전과 후의 신앙이 바뀌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에 신앙의 적은 어려움이 아니라 부유함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신앙을 떠납니다. 

부유하여서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다윗은 부유함에도 늘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왕의 힘으로, 권력으로 이스라엘을 다시리지 않고 믿음으로,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자신을 다시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자는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물질 앞에서 비굴해지지도, 교만해지지도 않습니다. 


사무엘하 6장은 왕이 된 이후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 실로에서부터 나간 법궤는 지금 성전을 떠나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온성을 삼은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셔올 일을 생각합니다. 법궤는 길이가 1.2미터 너비와 높이가 60센티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궤였습니다. 조각목 위에 순금이 입혀져 있었으며 그 안에는 돌판과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 물건들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며 (골판),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고 (만나), 그들의 능력이 되심(지팡이)을 상징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그 중심부의 또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올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고 한 일- 산당, 흩어지는 예배, 자기 편의에 맞춘 예배. 사사기 후반부의 예화들, 자기집에 산당을 세워두고 제사장을 고용하여 자기만을 위한 예배를 드리게 한 것..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한 일- 벧엘과 단에 또 다른 예배 처소를 세운 일, 왜? 자기 편의를 위하여... 


주 5일 근무제로 바뀌니까 주일 예배 시간을 바꾸자. 금요일날 예배를 드리자. 새벽예배를 없애자. 

우리는 10시 반에 예배를 드리지만 거의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대예배 시간- 11시 

1900년도 초반 우리나라가 힘들었을 때ㅡ농경문화가 중심이던 시기에 11시라는 의미- 하루를 온전히 드리기 위한 가장 중심부의 시간. 자기 편의에 맞춘 것이 아니라 중심을, 전부를 헌신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수요예배- 일주일의 가장 가운데 시간- 예배 하자! 

금요철야- 한주일의 일을 끝내고 이젠 푹 쉬고 싶은 시간- 밤세워 기도하자, 부르짖자! 


자기 편의에 예배 시간을 맞춘 것이 아니라 중심을 드리고, 전부를 헌신한 예배였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 중심에 법궤를 모시고자 한 다윗의 믿음 - 

중심을 드리자!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자! 


[신 8:12-14a]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이 사건에서 해석의 논란이 되는 부분- 웃사의 죽음 

법궤를 되찾아오는 길에 그 짐수레를 끄는 황소들이 비틀거리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법궤가 짐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내민다. 


(삼하 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아비나답과 더불어 하나님의 법궤를 오랫동안 보관하던 자. 

그리고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궤를 붙잡다가 죽은 것 -어떠한 악한 의도도 없지 않습니까?

성경은 웃사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 않습니다. .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은 웃사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합의되는 공통된 의견은 그는 법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법궤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 10:8 출 25장 37장, 역대상 15:12-15) 


법궤는 절대로 사람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되고, 레위인들이 법궤에 부착된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서 운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첫 째 레위인이 아닌 수레에 태워 법궤를 운반하면서, 소들이 날뛰어 법궤가 요동하니까 손으로 법궤를 잡은 것입니다. 


왜 법궤를 반드시 레위인들의 어깨에 의해서 운반하게 했을까? 

[대상 15:12-15]

(대상 15:12)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대상 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대상 15:14)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대상 15:1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이것은 법궤를 물건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체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법궤는 반드시 구별된 레위인들이 자신을 성결케 한 후에 메게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로서, 영으로서, 인격체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 법궤를 대할 때 거룩하지 못한 제사장들은 죽어서 나왔습니다. 왜? 법궤는 하나님의 현존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웃사는 법궤를 수레에 실어 황소들이 끌게 했습니다. 황소들이 미쳐 날뛰어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자신의 손을 내밀어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자, 지금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법궤도, 레위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 살아가고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럼 이 말씀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의 현대적 적용은 우리에게 주제넘게 하나님을 관리하려 들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상자 안에 가두고, 수레에 실어나르면서 그것이 훼손될까봐 우리가 하나님을 지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서 어느덧 신앙생활이 오래되다 보면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보호하는 사람인양 교만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 보다 자기 수레에 담은 하나님이 깨지지 않게 내 손으로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교회에는 자기 손으로 하나님을 책임관리하려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자신은 하나님처럼 높아져 가고 하나님은 죽은 물건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한 자들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신앙을 "회칠한 무덤이요,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 23:27) 하셨습니다. 


(삼하 6: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은 지금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까? 웃사를 친 하나님께 분노한 것입니까? 웃사에게 분노한 것입니까? 

웃사에게 분노한 것입니다. 왜? 법궤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웃사로 말이암아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다윗의 뜨거움이 웃사로 말이암아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다윗은 웃사를 탓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반성합니다. 자기가 아직 부족하다고 근신합니다. 

[삼하 6:9-삼하 6:10]

(삼하 6: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그런데 법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이 축복받게 되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순종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 됨을 깨달아 다시 법궤를 모셔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삼하 6:13-삼하 6:14]

(삼하 6: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 6: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레위 사람들이 어깨에 법궤를 메고 여섯 걸음을 걸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겸손을 상징하는 베 옷을 입고 춤을 추며.... 


Dancing with God. 


춤은 홀로 추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추는 것입니다. 음악과 더불어 파트너와 더불어 춥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신실한 기독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나님과 춤추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을 따라 예배하며, 자기의 왕의 복장을 벗어 던지고, 겸손과 회개, 그리고 성결의 배옷을 입고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춤추었습니다. 기쁨과 환호의 순간임과 동시에 거룩하고 진지하며, 엄숙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은 겸손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겸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왕의 직함이 다윗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가장 중심에, 가장 뜨껍게 하나님의 법궤,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132편 


떠돌아 다니는 법궤- 왜? 쉴 곳을 찾을 수 없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지만 머물 곳이 없어서 베다니로 향했던 주님....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하자 하나님의 응답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라." (시 132편 13-14절) 


지난 주 시편 23편을 나누면서 그가 나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그는 우리의 쉴만한 물가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쉴만한 처소인가? 주님이 우리 안에 영원히 머무시기를 원하는가? 

내가 어려울 때에 우리는 늘 주님께 우리의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달라고 인도해 달라 기도하며 또 그렇게 응답받으며 사는데 우리는 주님이 거하시고자 할 때에 외면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만 원하지 않는가?

 

Posted by 소리벼리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왕 (사무엘하 5장 1-10절) 


여러분, 이스라엘의 수도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텔아비브입입니다. 

몇 주 전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 아니었어?"하고 말하곤 합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까지도 성지로 삼는 종교적 분쟁지역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성지를 인정하면서 공존하는 종교적 중립지역이었습니다. 

원래 다윗왕때 수도로 지정되어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면서 통일국가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은 솔로몬 왕 이후 왕국이 분열되고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남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면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가 인정되기까지 유랑민으로 살게 되면서 그 지역 전체가 이슬람권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그 후 이슬람의 성지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 때 강력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이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십자군입니다. 유럽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십자군을 보냈지만 결국 실패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성지 순례를 인정한다는 조건하에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의 소유가 됩니다. 그 후부터 끊임없이 이 예루살렘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는데 다시금 트럼프가 이 분쟁지역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고 발표하면서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된 후에 칠년 반 뒤에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 핵심이 되는 사건이 바로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베들레헴 언덕에서 양을 치다가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왕의 곁에서 악기를 연주하던 자에서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믿음으로 승리한 자 

군대장관에서 하루 아침에 도망자가 되어 광야를 전전하던 자 

광야에서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억울한 자들이 함께 모인 곳의 지도자가 되어 가장 연약한 자들의 리더

이제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움을 받은 자. 

유다의 왕이 될 때의 백성들의 고백 

(삼하 5:2)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 하나님께로 양들의 목자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선포된 자. 



-> 한 사람의 인생의 여정- 신앙의 여정 중에서 가장 복잡하면서 자세히 신앙의 단계와 여정을 표현하고 있는 자 - 

가장 위대한 돵이면서 특별한 기적이 없이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던 자. 우리의 인생과 너무도 닮아 있는 자

출애굽 사건- 광야-가나안 - 그 끝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타락하는 비극적인 앤딩이라면 

다윗의 여정- 택하심- 광야생활- 왕이 되 나가는 과정- 왕이 된 이후에 유혹에도 불구하고 넘어지지 않는 사건- 해피앤딩의 결말

다윗의 일대기- 왕이 되기 위한 과정- 왕이 되고 난 후의 통치의 과정- 그 중심에 하나님과의 한결같은 관계

그 변화의 중심이 되는 사건- 이제 광야에서 가나안의 입구- 여리고성에 해당하는 사건이 바로 예루살렘 정복 사건이다.  


원래 이 예루살렘 땅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분배하면서 유다지파에게 할당 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유다지파가 유독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은 쫓아내지 못합니다. 


(수 15:63)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삿 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왜 쫓아내지 못했을까? 

(삿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불신앙과 불순종... (너무 강해서,,,,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므로...) 


가나안 7민족 중에서 가장 안전하게 오랫동안 거주하였던 족속- 여부스 족속.. 노아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 (창 10:15-16...) 

그들의 터전 - 예루살렘, 그 이름의 뜻은 "평화의 도시" - 그들은 그 말 그대로 평화롭게 예루살렘 지역에 살면서 거하고 있었다. 


왜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하는가? 

헤브론은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북쪽을 다스리는데 어려움. 

남쪽을 남겨두고 북쪽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사정.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경계지역에 위치하면서 가장 안전한 천하의 요새. 


여호수아의 가나안 땅 분배이후 수백년 동안 건드리지 못한 여부스가 지배하는 예루살렘 땅을 정복하는 내용이 사무엘하 5장 6-9절의 짧은 절 안에 농축되어 있다.


이 절에서 이상한 부분이 읽혀지지 않습니까? 

6절: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 다윗의 군대를 조롱하는 말, 너의 군대 쯤이야...식은 죽 먹기지... 


그런데 7절에 그곳 시온성을 빼앗음. 예루살렘 성의 다른 말 - 시온성 


(삼하 5: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두 번째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 이것은 다윗의 군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여부스 족속을 가리키는 말. 

세 번째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도대체 누구냐? 


  • 해석상의 난제


유진 피터슨이 소개한 중세시대의 유대인 해석자들에 따르면 여부스 족속이 말한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은 유대인들의 신앙의 모체가 되었던 야곱(다리 저는 자) 이삭(눈이 어두어 아내와 아들로부터 속임을 당한 자)를 조롱하면서 이들을 모독하며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였던 여부스 족속의 유대인들의 신앙을 비하하는 우상이었다. 


이렇게 하면 이제 이 세 구절이 해석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6절의 내용은 우리가 섬기는 너희의 그 모자란 조상의 우스꽝스런 우상으로도 너희를 물리칠 수 있다. 

7절은 다윗의 입장에서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가서 그들이 우리를 조롱하면서 만들었던 그 우상을 제거하라. 

마지막 부분- 그들이 조롱하는 맹인과 다리 저는 그런 자들은 이스라엘의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역의 중점 -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38년 된 병자, 실로암 연못 사건, 맹인과 절뚝발이를 치유하시는 사건. 

왜? 그들의 중심에 있는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지 못하므로... 


적용- 우리 신앙을 비아냥 거리는 세상에 나도 모르게 영향받고 주눅 들어서 그들의 용어에 휩쓸려 버리는 신앙. 

철기로 무장하여 너무도 강해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라면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의 전쟁터... 

그들이 우리의 중심-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는 이상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다.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길이요,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길이다. 


이 여부스의 땅 예루살렘을 정복하니까 사무엘하 24장의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예배하매 그 곳이 솔로몬의 성전, 예루살렘 성전터가 되고 다윗이 정복한 여부스 족속이 열왕기상 9장에 보면 거꾸로 노예가 되어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 역군으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왕상 9:20-21)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중 남아 있는 모든 사람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여부스의 기에 눌려 조롱을 당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가나안을 정복하여 그것을 부리면서 살 것인가? 

광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 것인가? 

광야의 시대를 마치고 주님이 왕되신 왕의 시대를 살 것인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음 이 사건을 끝맺는 말씀 

(삼하 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히브리어 "할로크 브가돌" -다윗이 그 때부터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포용으로 전진하여 가니라


왕이 된 것이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된다. 

가나안이 타락의 시작이 아니라 더 큰 은혜의 시작이 되었다. 


어릴적 목동에서 부름받은 다윗은 왕으로 부름을 받을 때도 왕이 아닌 목자로서 부름을 받았다. 

왕은 사울이었으나 우리의 목자는 항상 당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의 목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목자로 여겼던 다윗은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인생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는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는 내 영혼을 다시금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그는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 인생이 험하고 어려워도 주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는 나를 상주시는 분이고 내 잔을 넘치게 하시는 분입니다. 

나는 주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 


기복신앙과 복의 신앙

기복 신앙은 복을 구하지만 나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말씀의 순종은 오직 복을 위함이지 내 성숙과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복의 신앙의 초점은 내가 복이 되는 것이다. 그 초점은 내가 변하는 것이고 내가 복이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삶을 복의 삶이 되게 하셨다. 

이새의 막내아들 목동 다윗은 이스라엘의 목동이 되었고 하나님을 목자 삼는 하나님의 양이 되었다. 

그 중심에 여부스 족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사건이 나온다. 

예루살렘은 트럼프가 수도 삼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여부스를 몰아내고 우리 안에 장남되고 절뚝발이 된 신앙을 걷어내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슬픔,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랑법 (사무엘하 1장 17-27절) 


사무엘상의 마지막은 사울과 요나단을 비롯한 사울의 모든 아들들과 사울의 참모들이 블레셋에 의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나고 사무엘하는 그 죽은 사울과 요나단을 슬퍼하는 다윗의 시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10년을 도망하며 광야에서 블레셋 땅 시글락으로 피신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울의 죽음으로 그 길고 지긋지긋한 망명생활이 끝이 난 것입니다. 


처음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을 읽었을 때에 그 슬픔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윗도 두 번씩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복수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기회였던 하길라 산에서 다윗의 참모장수였던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려고 할 때에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하며 인간적인 복수를 금하면서도 동시에 

"여호와꼐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쟁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 26:9-10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손을 대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손대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을 믿어주고 자신을 보호하며 끝까지 지켜주었던 요나단의 죽음을 그가 얼마나 슬퍼했을지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는 슬픔보다는 악인의 말로를 보는 것 같은 시원함이, 아니면 연민의 정 같은 것을 느낄 순 있어도 그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했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친히 슬픈 노래를 지어 자신이 불렀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사람들, 즉 전쟁의 가장 앞에서 찬양을 담당했던 찬양대에게 이 찬양을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민족이 슬픔에 참여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그 모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사울을 통해 이스라엘이 번영을 누리고 복을 받았으니 그의 죽음을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 요나단의 죽음과 똑같이, 아니 오히려 사울을 앞세워서 큰 용사, 이스라엘의 영광,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자라는 찬사를 보냅니다. 

어차피 죽은 자니까 이제 축복이라도 빌어주자는 소리일까? 

승자의 여유인가? 


그러나 그의 비가에는 사울을 정말로 사랑하고 충성했던 그의 진심이 묻어납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진심을 다해 애도하고 슬퍼하고 또한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울며 금식하며 슬퍼했습니다. (11-12절) 


다윗이 기회가 있는대도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울이 스스로 죽으려 칼위에 엎드려져서 죽으려고 했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아 지나가는 군사에게 자기를 죽여달라고 해서 아말렉 출신의 병사가 사울의 원대로 그를 죽이고 그의 왕관과 장신구를 다윗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에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였도다 하면서 그 병사의 죄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시기와 질투로 다윗을 곤경에 빠뜨리고 죄에 빠져 

무당을 찾아다니며 비참한 삶을 마감하지만 그는 사울이 자신에게 행한 것에 얽메이지 않고, 하나님꼐서 사울에게 행하신 은혜에 따라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그렇게 비참히 죽음을 당한 것 때문에 옷을 찢었고, 울며 금식하며 애통해했습니다. 


다윗의 이 슬픔을 바라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면서 슬퍼하시며 고통스럽게 우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요 11:33-36]

(요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 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이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눈물인데 왜 그러냐하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잔다라고 표현을 하셨고 또한 잠시 후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하셨고 그를 곧 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있는 나사로를 보고 우셨습니다. 

아니 곧 살리실 사람 앞에서 왜 우셨을까? 우리는 이 울음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 구약의 다른 말씀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1:2-6)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고 슬프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가 사랑하는 자녀, 그의 택하신 나라 이스라엘이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터지고 맞은 흔적으로 가득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가, 주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죄악의 세력, 사망의 세력 앞에 무너져 지금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상태를 두고 안타까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자매들과 동네 사람들이 죄의 결과인 한 친구의 사망을 두고 슬픔에 겨워 우는 모습을 보며 비통하여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가 범죄하여 부패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이 여기며 우신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용사요, 영광이요, 아름답던 사울과 자신의 친구 요나단의 죽음을 맞아 금식을 하며 울고 슬퍼하는 것이고, 이런 슬픔을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길 원했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바라보시며 흘리신 슬픔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던 아담이 선악과를 보며 하나님을 피해 바위에 숨은 것을 바라보시며 "아담아, 아담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구원의 첫 약속으로 이어졌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에 대한 응답이 출애굽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출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그리고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슬퍼하셨던 주님은 믿는 자들을 그 애통하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마태복음 5장, 팔복) 

그리스도인의 팔복 중 두가지가 이 슬픔에 관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슬퍼하는 자와 자리를 함께 한다는 의미 입니다. 

윤동주의 시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8번 반복 

저희가 영원히 슬픈 것이요


하고 마칩니다. 팔복의 모든 내용을 슬퍼하는 자로 결론지은 것이지요. 


영성이 있다. 신앙심이 깊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을 깊게 누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삶이 매말라 있으면 사람이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육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문등병이 무서운 병이듯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영적인 질병입니다.  


중세 시대 수도원에서 성경을 잘못 오해해서 예수님꼐서 우시는 장면은 있어도 웃는 장면은 안나와있다고 하면서 웃는 것을 죄악시 여기던, 신앙생활의 해가 된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희극이라고 할 수 있는 웃기는 내용의 서적들을 다 모아서 수도원 창고에 두고 거기서도 모잘라 책장마다 독을 발라 놓아 그것을 읽는 사람들이 죽게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움베르트 에코라는 학자이자 작가가 <장미의 이름>으로 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역사적인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리고 초대교회 사람들은 어떤 고난 중에서도 함꼐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웃고 울으며 함께 삶을 나누었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눈물은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빠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악을 대할 때 마다 울게 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혹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살지 못할 때에 울게 하십니다. 


다읫의 시편- 70%가 이른바 비가. 슬픔의 시입니다. 

다윗은 이 슬픔을 가리치고 함께 부르게 했습니다.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찾게 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최악은 슬픔에 빠져서 못 헤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슬픈 상황 속에서 그것을 외면하고 겉돌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상담학에서는 슬픔이나 고통을 부인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중독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일중독, 알콜 중독, 게임 중독, 도박 중독 등 모든 중독의 근원은 심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대안을 찾는데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슬픔이나 죽음, 고통을 대면하지 않고 자꾸 회피하고 피하다보면 그 결과 우울증이 생겨나 다른 방면으로 그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교회에서, 신앙 공동체에서 눈물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은 많은데 눈물을 흘리려는 자는 찾아 보기 힘듭니다. 슬픔에 맞딱드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합니다. 

예수님은 이 때를 미리 아셨는지 마태복음 11장에서 마지막 때를 경고합니다.  


[마 11:16-17] 

(마 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처형이야기---장인어른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장녀로서 장례식에 참가해서...장례식 치루고 어머니 위로하고, 형제들 챙기고 급하게 다시 스위스로 귀국..슬퍼할 겨를도 없이, 부모님, 형제들 앞에서 울 수도 없고...

많은 성도님들이나 지인들이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아버님 좋은 데 갔으니까 울지마, 기뻐해... 웃어..." 

천국갔어도 잠시 헤어져도 슬픈 때는 울게 놔두어야 하는데 맘대로 울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스웨덴 가서는 자녀들 앞에서, 남편 앞에서, 그리고 외국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학교에서도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일에 빠져서 살다가...무표정, 무감각...슬픔을 억눌러서 생긴 병...


다윗은 자기의 10년간의 고통의 이유엿던 사울의 죽음 앞에서 애통했습니다.

옷을 찢으며 슬퍼했읍니다. 

다윗은 실수도 많고, 어쩔때는 엄살도 많고, 어쩔땐 아이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는 슬플 때 참 슬퍼할 수 있고, 기쁠 떄 참 기뻐할 수 있는,  왕이라는 신분이 그의 찬양을 막지 못했고, 원수라는 이유로서 그의 슬픔을 억누르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 내 목회의 이유...

주님께 무조건 순종해서 교회당 크게 짓고, 성공해서 주님을 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 사람이 되고, 참 인격이 되고, 참 생명이 되도록 슬퍼할 때 슬퍼할 줄 알고, 기뻐할 때 기뻐할 수 있는 풍성한 삶이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표현법입니다. 

교회는 마음 껏 울고 웃을 수 있는 곳입니다. 숨기는 곳이 아니라 어떤 것을 표현해도 용납이 되는 곳입니다. 

저는 울 수 있을 때마다 울 것이고, 웃을 수 있을 때마다 마음 껏 웃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마음껏 웃고, 마음껏 울고,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회개하고, 마음껏 기도하는 우리 로고스교회, 로고스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시글락의 다윗 (삼상 27-30장) 


다윗은 성경에서 구약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 가장 자세하고 길게 소개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여정을 살펴보면 기나 긴 여정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뚜렷한 기적의 흔적도 없이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는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산 인물이요, 또 우리와 똑같은 실수와 잘못도 반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 27장부터 시작되는 시글락에서의 삶은 어쩌면 그의 인생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시기요, 신앙의 눈으로 보나, 도덕적인, 인간적인 면으로 보나 정말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시기입니다. 

홍해를 건너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 사흘 만에 물이 없어서 모세와 그들을 이끌어낸 하나님을 원망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끊임없이 범죄하는 장면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 인생을 살펴 보면 인생은 설명하기 힘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인간의 뇌를 이해하려는 과학이 발달해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세상이요, 또한 교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21장에서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이 골리앗의 땅 가드의 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했다가 당한 수모를 기억합니다. 

사울을 피해 아얘 이스라엘 땅을 떠났던 다윗은 자신의 민족의 원수이자 자신이 죽였던 골리앗의 땅 가드 땅으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신하들의 강한 반대의 소리를 듣고 수염에 침을 흘리며 미친척하고 도망쳤던 사건 (삼상 21장 13절)을 기억합니다. 

그 뒤로 그는 아둘람 굴을 거쳐 십광야, 마온 광야, 엔게디 광야, 바란 광야등 여러 광야를 떠돌아 다니며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면서 한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다윗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둘람 굴 속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그의 광야 생활의 실상을 그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합니다. 

도망 중에도 다윗은 자기에게 피신해오는 400여명의 환란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들과 함께 거하면서 공동체를 이루었고, 이들은 어려운 중에서도 남의 가축이나 재산에 손을 대지 않고 오히려 선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들 뿐만이 아닙니다. 

(삼상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한 나라의 장관이었던 그가 도피하자 그의 가족들 까지도 사울의 보복이 두려워 그의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 하면 다윗가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닙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왔을 때에 아버지는 다윗을 소개하지도 않았고, 골리앗을 상대하러 전쟁터에 갔을 때에 그의 형들은 그에게 화를 내며 그를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제들이 어려움을 피해 다윗에게로 몰려왔고,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당한 자들이 다 다윗에게로 몰려옵니다. 

그런데 유대민족을 가리키는 히브리(Hebrew)라는 의미가 원래 인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중동지방의 소외된 계층, 떠돌이, 추방당한 자, 환란 당한 자, 어중이 떠중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들 무리는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 

교회는 성도의 집합체이다. 그런데 그 성도들은 이른 바 사회적인 어중이 떠중이이다. 

광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는 우리가 보통 때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고 예배하는 곳이다. 


[막 2:15-17]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성전의 모든 나무 - 조각목, 솔로몬의 시대, 백향목으로 지은 성전에도 지성소의 언약궤는 반드시 조각목 - 비뚤어지고, 가시가 많은 사막의 흔한 나무...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리고 다윗의 무리도, 심지어 예수님 때도 함께 한 무리는 히브리 민족, 즉 사회적인 어중이 떠중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거룩한 무리로 여기시고 바꾸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곳이 교회이고 신앙생활이다. 


그렇게 어렵지만 모여서 함께 고난을 참아가며 광야생활을 하던 다윗의 무리가 다시 도피처로 삼은 땅이 또다시 골리앗의 땅, 블레셋의 가드 땅 아기스에게로 피하는 것입니다. 

21장의 수모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갈 수 없는 땅에 다윗은 무리를 이끌고 가서 다시 아기스 왕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 아기스왕에게 청하여 허락 받은 땅이 바로 사글락입니다. 

땅만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아기스를 위해 일했다. 아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블레셋의 적들을 물리치고 곧 이스라엘을 향한 전쟁에도 참여를 명받는다. (28장)  

일년 사 개월을 완전히 아기스의 신하가 되어 블레셋을 위해 살아간다. 

다행히 블렛셋의 신하들이 다윗을 극렬하게 반대하여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피하게 하신다. 


왜 어려움 중에서도 정말 소외된 사람들과 광야생활을 꾸려갔던 다윗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현실의 어려움 때문이다. 

그는 대의고, 명분이고 따질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당장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에게 의지하는 무리들을 구하기 위해 그는 앞 뒤 살펴볼 겨를 없이 눈에 보이는 가장 안전한 곳, 사울이 두려워하고 쫓아오지 못할 지역, 블레셋 골리앗의 땅, 사글락으로 피한 것이다. 


때때로 목회를 하면서, 혹은 목회하기 전에 어머니가 목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신앙생활 한다는 사람들이 때로 술집을 열기도 하고, 장사하면서 주일을 어기기도 하고, 세금을 떼어 먹기도 하고, 좋은 조건의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안믿는 집안 인줄 뻔히 알면서 배우자를 선택하고, 자녀를 결혼시키는 일들... 

바로 그들의 삶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정죄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다윗도 그랬다. 

다윗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니까 당연스레 애굽으로 피했고, 야곱은 아얘 그리고 이주했다. 룻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땅에 거주한다. 요셉과 마리아도 헤롯의 폭정을 피해 애굽으로 가서 예수님을 키웠다. 그것이 삶의 realty다. 

현실에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그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다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떤가를 살펴야 된다. 그래서 그런 현실의 어려움들이 닥쳤을 때에 또 다시 애굽으로 피할 것인가? 블레셋의 뒤로 숨어야 할 것인가?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27장의 선택의 결과는 30장에서 펼쳐진다. 

이스라엘을 향한 전쟁에 참여하라는 아기스의 명령에 다윗은 충성을 맹세하여 뒤를 따르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돌이켜서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시글락으로 돌아오자 아말렉 족속들이 그 마을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군사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모조리 잡아갔다. 


시글락의 선택은 재앙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윗에게 피했던 다윗의 사람들은 기력이 다 할 때까지 울다가 그 분노를 급기야 다윗에게 향하게 된다. 


(삼상 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사람들이 다윗에게 달려들어 돌려치려 하자 다윗이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꾀를 쫓던 다윗이 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제사장을 부르고, 하나님의 판단을 묻는 에봇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아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다윗이 이제 비로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삼상 30: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 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600명의 군대가 브솔시냇가까지 이른다. 이중 이백명은 더이상 육신이 탈진하여 따라오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게 된다. 

400명을 필두로 따락가긴 하는데 기력이 탈진한 이들이 아말렉을 따라잡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이 때 일어난다. 아말렉을 쫓는 중에 한 병사가 길에서 탈진해서 쓰러져 있던 애굽 소년 하나를 데리고 온다. 


지금 자기 동료 200명이 피곤하여 뒤에 남겨두고 쫓아가는 형편이요, 기력을 다해 아말렉을 쫓아야 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사흘을 굶고 쓰러져 있는 한 소년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가던 길을 멈추고 쓰러진 소년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에게 빵과 물을 주고 남은 음식을 먹이고 그를 살린다. 

상황 때문에 블레셋으로 망명했던 다윗이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아둘람 굴속에서 400명의 사람들을 떠 안았던 그 모습 그대로 굶주려 있는 한 영혼을 살리는 데에 길을 멈추어 선 것이다. 


그 소년이 누구인가? 바로 그들이 쫓고 있던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다. 어떤 성경에서는 바로 아말렉 왕의 종이라고도 해석을 한다. 

결국 한 사람을 살리었더니 그 한 사람을 통해 아말렉의 본거지를 찾게 된다. 


다윗은 한 사람의 아내와 자녀도 일어버리지 않고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에게서 수많은 전리품마저도 얻게 된다. 


(삼상 30:20)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그 절정은 이 다음에 있다. 되돌아 오다가 아까 200명을 남기고 왔던 브솔시내에 당도한다. 탈진해서 중도 탈락했던 사람들이 다윗의 무리를 보고 놀라서 아내와 자녀들을 보고 기뻐한다. 

그런데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기분나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가족들은 돌려주되 우리가 얻은 전리품은 하나도 나눠주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악한 자와 불량자"라고 표시했다. 


왜 그럴까? 

다윗은 그들 사이의 갈등에 참여해서 솔로몬의 판결을 한다. 


[삼상 30:23-25]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다윗의 입술을 통해 울려퍼지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법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한 큰 문제...고난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던 성도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마가복음:... 배반자의 복음 - 마가- 예수의 붙잡힘 앞에서 홑이불을 버려두고 도망간 자. 

                  바울과의 선교여행에서 중도에 도망간 자..... 

                  베드로의 수제자로서 베드로 전후서를 남긴 자. -----우리 모두가 예수의 배반자였다.

                  

자기들이 누구인가?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던 어중이 떠중이... 

아무 공로 없이 비참한 삶으로부터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의 삶으로 인도된 사람들....바로 사글락 사람들.. 

그들에게 암한 구원- 값없이 얻은 승리. 

이것이 은혜이고 은혜는 또한 값없이 나누어야 하는 것임을 보여 준 것이다. 


[시 133:1-3]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대상 12:1)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가장 어렵고 실패했을 때에 함꼐 했던 시글락의 사람들이 나중 또한 다윗 왕국의 중심축...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