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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바꾸시렵니까? (빌립보서 4장 4-7절) 


빌립보서 4장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는 바울의 결론적인 메시지 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세 가지 당부를 합니다. 

주 안에 서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세 당부의 공통적인 전제는 "주 안에" 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여러 서신서에서 끊임없이 "주 안에"있을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주 안에 있을 때의 삶과 주 밖에 있을 때의 삶으로 나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 밖에 있을 때에는 육체를 자랑하던 자였습니다. 

자기의 태생과 자기의 학문과 자기의 열심을 자랑하던 자였습니다. 

그러한 예수 밖의 삶은 "예수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의 삶으로 귀착됩니다. 예수의 길과 반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자의 모습을 "십자가와 부활"을 소망하는 삶으로 정의합니다. 

예수 밖의 있는 자를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여전히 예수 밖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예수 밖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지난 금요일 여호수아 1장의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는 이스라엘 12지파가 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일찍 부터 요단강 동편의 땅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니까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고 그 건너편 땅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에게 가축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농사지어 먹고 사는 땅인데 그들에게는 가축이 많으니 유목하기에 좋은 광야 땅에 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 생할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여정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광야요, 십자가요, 고난의 길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강을 건너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고난을 넘는 것이고, 영적으로는 나를 부인하고 주님이 주신 길을 걷는 세례를 말합니다. 


그런데 세 지파는 이 땅의 것들이 너무 많아 요단을 건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지시하신 땅보다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점점 멀어져 그들의 예배를 따로 만들고 결국 우상숭배의 길로 빠져 듭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밖의 사람들이 되어 버립니다. 


바울은 주 밖의 사람들을 "그들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19절) 


주 안에 서라는 것은 길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부활을 소망하는 길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걷는 길입니다. 

진실하게 예수 믿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걸으십니까? 

아니면 자기의 배를 채우는 길이라면 어떤 길이든 걸어가시겠습니까? 


주 안에 같은 마음을 품으라.

우리는 결코 한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형제끼리도, 부부 끼리도 살다보면 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물며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태생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각각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임을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믿는 공동체가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주를 본받는 것에 하나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주가 원하시는 일,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까? 


신앙생활은 결국 주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내 선택과 사고의 기준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어떤 것이 주님보시기에 기쁜 일일까?" 

이것이 기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 전체의 주제는 바로 이 기쁨 입니다. 이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가져야 기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쁨은 항상 조건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적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금방 시들합니다. 

그것 가지면 좋을지 알았는데 금방 실증이 납니다. 

아이들의 장난감, 이런 것들이 커져서 여자들은 핸드백..남자들은 시계 자동차, 심지어 결혼 대상자까지.....

바꾸면, 가지면 기쁠 것 같은데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조건적, 일시적인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롬 5:3-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소리는 환란을 즐거워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고난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환란 속에서도 기쁨을 일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란은 성도들에게 인내라는 열매를, 인내를 통해, 연단을 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뜻을 보면 인내를 통해 단련된 인격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인내로 단련된 인격은 어떻습니까? 

바뀌는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참을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 분이 주시는 것은 결국 나에게 선이요,  좋은 것이요, 기쁨임을 알고 참고 기다립니다. 이런 기다림이 굳어져 성품이 되고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다림에 실패합니다. 

말로는 너무 잘 아는데 그것이 자기 삶에 적용될 적에 늘 조급함 때문에 넘어집니다. 

자기들의 기도가 삶의 인품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파도 위를 걸었던 베드로의 믿음과도 같습니다. 

사방은 파도가 치고 태풍이 불어도 주님께 시선이 고정되면 걸을 수 있습니다. 

시선이 떼여서 주위를 보면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누리는 것. ....이것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염려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어느덧 이 기쁨이 사라집니다.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살 수가 있습니까? 염려 없이 사시는 분 있으십니까? 

염려로부터 자유하십니까?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의 염려는 영어로는 "anxiety"로 번역했습니다.  "anxiety"의 뜻 중에는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을 염려하는 것', '미래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왜 염려가 오면 우리 안에 기쁨이 사라집니까? 

염려가 오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내가 짊어져야 할 짐들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무시하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를 바라보면서 내가 짊어 질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가정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그 걱정 되는 모든 것들을 낱낱이, 소상히 기도의 제목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거나 초조해합니다. 조그마한 문제도 자꾸 묵상하고 생각하고 확대해석하면 어느새 문제가 눈덩이같이 커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 …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b)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문제와 염려의 자료를 기도제목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그대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정말 ‘문제화’시키지 말고, 오히려 ‘기도 제목화’시켜서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고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놓고도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하거나’, 아니면 ‘기도하거나’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 대신 염려합니다. 문제를 염려로 바꿉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 대신 기도합니다. 염려를 기도 제목으로 바꿉니다. 내가 염려하는지, 아니면 기도하는지를 보면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염려하는 것을 기도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실컷 염려하면서 한숨쉬듯 '주여......'하면 그게 기도인줄 압니다. 


아뢰라는 것은 상세히 고하라는 것입니다. 막연히 힘들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하나님 다 아시지요가 아니라 자기의 힘든 것, 자기의 걱정꺼리등을 낱낱히 고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보십시오. 바울은 기도하고 나면 문제가 즉시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ex) 김홍신 - 인생사용 설명서 

세상이 너무 어지럽고 복잡해서 늘 마음이 불안하고 머리가 아픕니다. -> 세상이 복잡해서 머리가 아픈가? 자네 마음이 복잡해서 머리가 아픈가? 


우리를 정작 힘들게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내 생각이 복잡해지고 내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것과 주님이 하실 일들을 분별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은 최선을 다 하되 주님이 하실 것은 그 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은 결국 나에게 유익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신다. 

내가 해야 하는 오직 하나는 내 시선을 주님 앞에 고정하고 파도 속에서 요동하지 않는 것. 주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는 것. 


‘지킨다’는 말은 본래 군대용어입니다. 마치 로마의 군대의 수비대가 성을 빽빽이 싸고 보초를 서며 지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평강이 위로부터 내려와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싸며 확실하게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더 이상 염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더 이상 불안과 두려움이 틈타지 못하도록, 그렇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평강은‘모든 지각에 뛰어난 것’이라고 바울은 표현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거나 고안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헤아림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이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평강은 영원하며 본질적이요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염려가 생긴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내 마음에 염려가 생겨났다는 것은 내가 주 안에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면 됩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꾸면 됩니다. 기도하면 우리가 다시 ‘주 안에’ 복귀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문제의 해결은 그 다음입니다. 아니 사실 주 안에 복귀하면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문제들로 인해서 우리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하기로 작정하십시오. 기도하되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또한 여러분의 기도와 간구에 감사를 동반하는 믿음을 보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주 안에 살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돌보신다는 말은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Posted by 소리벼리

빌립보서 4장 1-3절 (영광이요 면류관인 성도)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이후 자기의 사명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 이스라엘의 주변국가들을 돌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가 당시의 유대인으로서는 굉장히 많이 배우고, 엘리트 계층에 속한 자였지만 그가 아는 수준에서의 이방은 이스라엘의 주변의 나라밖에는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차 전도 여행을 끝내고 이차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그의 선교의 대상지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주변국, 1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거쳤던 나라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아는 "경험의 한계 안"에서의 '이방'나라 였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나라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차 사역을 앞두고 이제 드로아라는 지역에서 모든 것을 시작할 준비를 해 놓았는데 환상으로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하며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마게도냐로 가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준비는 지금 해 놓고 기다리는데 갑작스런 환상에 의해서 그의 진로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소리를 더 크고 확실하게 들려준 것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이 나타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다고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핑계입니다. 변명입니다. 모세라고 바울이라고 성령의 음성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크고 분명하게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불확실하게, 불분명하게, 자신의 생각과 혼동스럽게 불편한 마음으로, 공상처럼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음성의 확실함이 아니라 순종의 확실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가 속해 있는 지역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지금도 선교를 한다고 하면 자기들 보다 못하는 나라를 대게 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믿으면 이렇게 된다"하면서 축복을 이야기 하면서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 모습을 천하게 보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6.25를 겪고 있는 나라의 청년이 자기들을 도와주는 미국을 향해 "내가 저 나라를 구해야지" 하는 생각과 같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역에서도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은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바울을 지금의 유럽지방,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최종 목적지는 바로 로마입니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에 순종하지 못하였다면 복음이 로마를 향하는 것은 훨씬 지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지역에 가서 바울은 남성들 보다는 상대적인 약자였던 여성들이었던 루디아를 비롯한 여성들에게 먼저 복음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에서의 바울의 사역이 소개됩니다.  

 

 점치는 귀신들린 소녀를 고쳐주었다가 그 소녀의 주인으로부터 오히려 고소를 당해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좋은 일 하고도 욕먹고 매 맞고 감옥 갇혔던 바울,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기가 막힙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춥고 캄캄한 한 밤중에도 기도의 불을 밝히고 찬미의 온기를 지폈을 때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이 우울해 하지 않고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고 기도와 찬미의 기적을 만들어 갈 때,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잠깐 졸던 간수장이 감옥의 문이 지진으로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것으로 착각해서 책임감에 자살하려다가 바울을 통해 구원을 받은 곳이 바로 이곳 빌립보였고, 그 간수장 가족들이 변하여 열심히 봉사하게 되었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이방인들과 여성들, 그리고 간수장이었던 가족들이 주축이 된 교회....그 낯선 땅에서 바울은 자기의 경험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지금 그 낯설고 힘들었던 이방땅의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1)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지 시작하면서 사랑하고 사모한다 말하고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면 사랑하는 자들아 거듭부릅니다.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모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내 영광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존경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상입니다. 그 나라 갈 때에 주시는 아버지의 칭찬이요, 그동안 수고에 대한 아버지의 보상입니다. 

그런데 그 보상이 무엇인가? 바로 빌립보 교회의 성도라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 백성도 아닌 이방 땅의 낯선 교인들이 바울의 영광이요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그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자세를 보여 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에 모세는 그들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과 실망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애굽의 왕자였을 때에 그가 자기 동족인 히브리인들을 돕고자 했을 때에 그들은 오히려 모세를 비아냥 거리고 고자질 했습니다. 그를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홍해를 건넌 그들이 모세를 원망했을 때에 모세는 "왜 나에게 이러한 짐을 맡기십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사명을 받아 영혼을 구원코자 할 때에 영혼들은 우리에게 짐으로, 숙제로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가족 중에서 먼저 믿게 되었을 때에 나머지 가족들을 십자가라 부릅니다. 믿음의 짐처럼 여깁니다. 부담스런 숙제로서 생각합니다. 

기도 해도 좀처럼 변하지 않고, 실망이 쌓이게 되면 도망가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들의 현재를 보면 좀처럼 안심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대놓고 "성도들 믿지 말고 목회해라. 하나님 바라보아야지 사람 바라보면 상처 받는다."말을 하기도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목사님도 사람이니까 목사한테 기대하면 실망한다. 주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압니다. 왜 그런 말하는지 압니다. 틀린 말이 아닌 듯 합니다. 사람한테 기대하면 할수록 실망합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갑니다. 


그런데 영혼을 맡은 자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교만한 믿음, 오만한 믿음,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상처 안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영혼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면 결국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게 하기 까지 그들을 만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똑같은 주님과 같은 주님의 자녀요, 나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구원하신 주님의 생명이 담긴, 피가 담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크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완성을 넘어선 새 계명임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그들을 사랑을 넘어 사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문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 때문에 교회가 갈등하고, 분열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눈으로 볼때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실패하고, 때로 상처입고, 때로 실망해도, 여러분 신앙의 온전함은 나에게 맡긴 영혼, 나의 형제들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가장 큰 우리 인생의 면류관은 바로 영혼입니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니까 면류관 하면 물직적인 축복을, 상급을, 성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짓는 것이 면류관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한 영혼 한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면류관입니다. 


ex) 결혼: 내가 골라서 서약을 하고 사랑하는 것. -> 그 사랑이 얼마나 가나...

             현대 혼전 동거에 대한 찬성이 50%를 훨씬 윗돕니다. 그래야 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그 관계가 더 좋을까?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선택한 사랑도 지탱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신앙안에서는 맡겨진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내 연약함을 발견하고, 그 연약함을 온전키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주 안에 서라 (1절) 

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주 안에 서라고 다시금 권면합니다.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가장 깊은 사랑이 담긴 간절한 메시지 입니다. 그럼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주 밖에 선 자들이 있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실재로는 예수 밖에 선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마십시오.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꾸준하십시오.”(빌4:1, 메시지 성경)

적의 어떠한 공격을 받고 있더라도 결코 ‘신앙의 트랙’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가 트랙을 벗어나기를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상선수들이 자기 트랙에서 벗어나면 실격을 당하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트랙에서 벗어나면 실격을 당합니다. 사탄은 그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트랙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어디에 서 있는가’입니다. 어디에 서있으라고 합니까? ‘주 안에서’ 굳게 서있으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항상 주와 동행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 안에서 있지 않기 때문에 조그만 시험과 시련에도 쉽게 흔들리고 무너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 몇 마디 말에 쉽게 상처를 받는 것은 ‘주 안’에 서있지 않고 ‘내 자존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형편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열정이 쉽게 식어버리는 것도 ‘주 안’에 서있지 않고 ‘상황’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그렇고, 우리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안에 설 때에만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이 "주 안에서"라고 쓰는 이유.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주 안에 서기보다 세상의 가치관, 내 소견에 옳은대로, 내 감정이 요동치는대로 움직이는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 같은 마음을 품으라 (2절) 

빌립보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유도디아와 순두게 

  • 유오디아와 순두게- 그 당시의 가장 흔한 이름, 한국식으로 말하면 영이와 순이와 같은 이름..

-> 그들이 누구냐? 어떤 학자들은 빌립보 교인들 중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인물들, 어떤 학자는 그 중의 하나는 루디아(창립멤버)와 그 외의 멤버...


  •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일에 정말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열심이나 헌신에 있어서 어느 한쪽이 기울면 차라리 다툼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그렇게 똑같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두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갈등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한쪽도 양보하거나 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서로 고집하면 작은 문제가 결국 큰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나중에는 감정싸움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여기에서는 교회가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양보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 이들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 어떻게 한 마음을 품는가? 인간이 하나될 수 있는가?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내가 순두게를 권하노니....각각 주안에서 동의하라. ->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한마음의 비밀입니다. 

     

이미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 두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으라.’(빌2:2)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함께 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입니까? 그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만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이 마음을 품고 신앙생활 했다면 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겠습니까? 


  • 여러분, 언제나 이게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은 열심히 합니다. 교회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합니다. 그런데 낮아지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져야 하고, 언제나 자기주장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자기는 언제나 옳고 다른 사람은 언제나 틀립니다. 아무리 그런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만 그러면 교회에서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 더 생겨나면 그 때부터 교회가 삐거덕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 따라서 신앙의 열심보다도, 헌신적인 봉사보다도,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품는 신앙의 열심이 자기고집을 끝까지 세우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낮아지며 하는 봉사가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교회에 덕을 끼치는 일이 무엇인가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가 좀 손해를 본다고 체면이 손상된다고 그것 때문에 교회를 시끄럽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없어서 불협화음이 생겨나고 갈등과 다툼과 분쟁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유오디아 순두게 두 분에게 나는 간청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한 마음이 되십시오.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자들을 도와주십시오. 이 여자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느라고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올라있습니다.” (빌 4:2-)

  • 빌립보 교회 안에서 갈등하고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문제를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사실 교회에 유도디아와 순두게 같은 사람이 있으면 두 파로 갈라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계속되면 이들을 아얘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도와주라는 것이 그들을 편들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서로 갈등하는 데에는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홀로 있지 않도록 섬기라는 것입니다. 형제로서 마땅한 사랑을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마음지키기 


[빌 4:6-8]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기원전 12세기경 중국에서는 변방에서 성장한 주(周)나라가 은(殷)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웁니다. 새 왕조의 창립자인 무왕(武王)과 그 아들 성왕(成王)은 그 거대한 땅덩어리를 직접 통치하기 힘드니까 친족과 공신들에게 하나씩 떼어 나눠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기(杞)라는 나라는 현재 황하 중부 유역 하남성에 속한 아주 작은나라입니다. 더구나 이 나라는 주(周)왕조의 인척이나 건국공신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까마득한 시절에 정복된 망국의 유민들이 모여 살던 나라였기 때문에 설움과 천대가 이만 저만 아니었습니다. 항상 주나라 임금이 자기들을 어떻게 할까봐 사람들은 불안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 중에도 좀 유난히 걱정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걱정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버리면 몸을 의지할 데가 없어질텐데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걱정에 밥도 못 넘기고 잠도 못 잤습니다. 그걸 또 안타까이 여긴 사람이 있어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겠노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에 싸인 사람이 말했습니다. 

“올려다 보면 장엄하게 돌고 있는 저 하늘, 그리고 우리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이 땅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꺼져버릴지도 모른다.” 이것이 기(杞)나라 사람의 걱정이었습니다. 기우(杞憂)는 그리하여 <쓸데없는 근심>, <괜한 걱정>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격언 으로는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싸짊어지 듯하는 것을 주변에서 안쓰럽게 생각할 때 이르는 말입니다. 

고3 때 도서관에서 아이들끼리 모여 있으면서 했던 말들...

내가 대학 갈 수 있을까? 대학 가면 부모님이 학비는 내 주실 수 있을까? 

개척하신 교회는 잘 될까? 나라는 왜 이리 혼란 스러울까? 전쟁이 나진 않을까? 

공부할 때는 그렇게 가지 않던 시간이 아이들끼리 모여 이런 저런 걱정을 이야기 하다보면 두 세시시간씩 훌쩍 지나감. 

그렇게 이야기하다 헤어지면 걱정속에 휩싸여 또 공부가 되지 않아 혼자 또 끙끙 앓다 잠도 잘 오지 않음.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고 3 병"이라는 말이 공식적인 병의 질환으로 생겨났습니다. 대학을 가야 한다는 부담감, 비싼 등록금과 경제 불황으로 대학을 못 가면 사회에서 낙오된다는 불안감, 부모와 자기 자신의 기대에 대한 과중한 책임감...그런 것들이 어찌보면 아이들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부닺치게 되는 스트레스인데 이것이 몸과 마음의 질환으로 고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나라-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 그 중에 가장 높은 자살률,,,, 10대... 40대의 자살률을 넘겨 버렸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의 염려는 영어로는 "anxiety"로 번역했습니다.  "anxiety"의 뜻 중에는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을 염려하는 것', '미래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 빌립보 교인들의 상황은 염려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 외부적으로는 이제 로마로부터의 핍박이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복음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의 영적인 리더인 바울도 지금 감옥 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교회가 분열되어 어지럽게 만듭니다. 

도대체 편할 날이 없는 때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있는 울로 부터 편지가 날라왔는데 그 편지 속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낙천적이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인가? 상황을 무시하라는 것인가? 어떻게 염려하지 말고 살라는 것일까요? 

어떻게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까? 


이 구절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이 구절을 알고 있고 또한 암송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염려로부터 자유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자기가 보내는 편지마다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어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In Chrust, 라는 말입니다. 

"주 안에" 이것이 바울의 능력이었고, 확신이었고, 그리고 체험이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라는 찬송가(370장) 가사처럼, 주 안에 있으면 근심이 없습니다. 문제가 없어서 근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 있기 때문에 딴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뒤집어도 진실입니다.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없으면, 즉 주 밖에 있으면 그때부터 나에게 딴 근심이 생겨납니다.

‘염려’는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을 때에 생겨나는 증세입니다. 마치 감기에 걸리면 기침과 콧물이 나오듯이, 우리가 주 안에 온전히 있지 않을 때에 반드시 나타나는 증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염려’와 ‘기쁨’은 ‘어둠’과 ‘빛’같아서, 한 공간에 같이 머물 수 없습니다. 염려가 들어오면 기쁨은 사라지고, 기쁨이 들어오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염려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기쁨을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염려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언제나 염려하면서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염려를 기쁨으로 바꾸는 비결을 알고 계십니까? 바울은 그 비결을 단순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1.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라. 주 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빌4:6a) 

염려를 중단하라는 명령입니다. ‘염려하며 사는 것이 싫으냐? 그렇다면 염려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거나 초조해합니다. 조그마한 문제도 자꾸 묵상하고 생각하고 확대해석하면 어느새 문제가 눈덩이같이 커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니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십시오. 염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킵니다.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십시오. 그것이 염려를 기쁨으로 만드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2. 염려대신 기도하라. 

…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b)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문제와 염려의 자료를 기도제목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그대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정말 ‘문제화’시키지 말고, 오히려 ‘기도 제목화’시켜서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고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놓고도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하거나’, 아니면 ‘기도하거나’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 대신 염려합니다. 문제를 염려로 바꿉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 대신 기도합니다. 염려를 기도 제목으로 바꿉니다. 내가 염려하는지, 아니면 기도하는지를 보면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우리의 인생길에 염려해야 할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염려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 때에 기도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기도를 하더라도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즉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기도제목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큰 문제만 가지고 나오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일들도 주님께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다만’이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다만’은 ‘오직’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염려를 기쁨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염려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기도밖에 없습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3.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보십시오. 바울은 기도하고 나면 문제가 즉시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장에 병이 고쳐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제야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행복과 기쁨을 보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문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평강을 먼저 맛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정한 섭리에 따라서 언젠가 틀림없이 해결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허락해 주실 겁니다. 그때가 언제가 되든지,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평강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더 이상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지킨다’는 말은 본래 군대용어입니다. 마치 로마의 군대의 수비대가 성을 빽빽이 싸고 보초를 서며 지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평강이 위로부터 내려와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싸며 확실하게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더 이상 염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더 이상 불안과 두려움이 틈타지 못하도록, 그렇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평강은‘모든 지각에 뛰어난 것’이라고 바울은 표현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거나 고안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헤아림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이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평강은 영원하며 본질적이요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염려가 생긴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내 마음에 염려가 생겨났다는 것은 내가 주 안에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면 됩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꾸면 됩니다. 기도하면 우리가 다시 ‘주 안에’ 복귀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문제의 해결은 그 다음입니다. 아니 사실 주 안에 복귀하면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문제들로 인해서 우리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하기로 작정하십시오. 기도하되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또한 여러분의 기도와 간구에 감사를 동반하는 믿음을 보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주 안에 살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돌보신다는 말은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가나안을 들어가기 전에 12명의 정탐꾼,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하고 기쁨이 충만한 삶. 

각 지파 중에서 수령을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초짜배기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있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들을 보냈다는 것. 

그들 중 10명의 보고 

[민 13:32-33]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들의 보고: 그 땅, 그 곳의 백성-신장이 장대하고 거인들,,

                  그리고 자기 자신- 메뚜기...난 아무 것도 아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 

(민 14: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그들을 보았지만 이들이 본 것은 여호와... 그들은 보호자가 없지만 우리는 여호와가 함께 있다. 하나님이 우리 보호자시다. 


하나님의 행하심.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들이 취한 행동, 말한 내용대로 행하심.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스스로 메뚜기라고 한 자들은 그렇게 죽어갔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말대로 두려워하지 않고 가나안을 취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고 신앙의 법칙. 

우리가 취한대로, 선택한 대로....하나님께서 또한 일하신다. 


그래서 염려가 생길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고 끝으로, 결론적으로 

(빌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워라. 옳은 생각, 신앙적인 생각, 깨끗한 생각, 유익한 생각, 남을 세우는 생각을 해라. 

(빌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오늘 배운 바를 실천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 평강을 줄 것이다. 잠 잘 것이다. 잘 먹을 것이다. 


자녀교육에 관한 단상 

가장 교육에 관한 열성이 뛰어난 부모들. 

그런데 대부분의 생각 - 나처럼 살지 말아라. 나와는 다르게 살아라. 넌 나 처럼 되면 안된다. 

-> 그러니까 그렇게 전심전력으로 교육을 받게 하고 도와주려고 해도.... 자녀들 속에 들어가는 생각도 부모에게 감사하고 효도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대들면서 "난 엄마처럼 안 살꺼야... 난 결혼 안 할꺼야..." 


성경적인 교육관. 바울의 신앙, 예수님의 삶 

- 모범이 되라. 나처럼 살아라. 나랑 똑같이 하면 된다. 

-> 이것을 행할 수 있는 곳, 실천하고 훈련할 수 있는 곳 - 교회.... 


배운 것, 들은 것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진 다음에 이렇게 하니까 되더라. 그러니 너도 똑같이 해봐라....

 

 

Posted by 소리벼리
 

빌립보서 3장 17-21절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뿐 아니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추천하니 그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교만한 자세가 아닙니다. 당시는 이단이 성행하였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유혹도 아주 강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빌립보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나처럼 예수의 복음을 귀하게 여기며 확신 있게 살아가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강조했습니다. 신앙적인 초보단계를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가 되고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이 강해도 신앙을 굳게 지키고 인간적인 조건을 자랑하는 당시 풍조에 휘말리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당시 바울 같은 신앙의 본이 있었다는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본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대나 본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위인들이 본 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위인전을 많이 읽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위인들을 본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받는다”라는 말을 “본뜬다"는 말입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무명옷을 해 입고 살 때 무명천을 놓고 그 위에 본을 놓고 잘라내서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 본을 오늘은 모델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본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본을 멘토라고도 합니다. 본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현재의 본: 연예인, 만화 속 캐릭터... 더 이상 위인전을 보지 않는다. 초등학생때부터 공부에 바쁘다. 과학 서적, 영어 서적, 동화나 에니메이션은 많은데 보니까... 위인전이 없다. 본받을 모델이 없이 산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카톨릭: 성자를 꾸준히 만들어 그들의 삶을 나타낸다. 그들에게 기도하게도 한다. 기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런데 그들의 삶을 나타내게 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이다. 모델이 된다. 교회가 전적으로 그 일을 감당한다. 그들의 삶을 연구하고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그리고 알리고...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알리려고 하니 너무 겸손한 사람은 가리고 교만한 사람은 과장한다. ....


개신교는 우리가 본 받을 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리스도를 닮았느냐하면 오히려 거리만 더 멀어져버린 것이 아닌가? 


* 바울의 신앙의 본 

또 우리 주위에 신앙적인 모델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꾸만 흔들리는 시대에 일반 신앙인들이 그 모습을 본떠 살게 됩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대해서 확신과 열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본 받으라고 강조합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자신감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의 멋이 이 자신감입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자신감 있는 신앙인입니까. 그의 신앙고백의 글들을 보면 하나같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일을 마치고 믿음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이것이 자신감이고 확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복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살아가는 나를 본받으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부목사들인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보라고 했습니다.ㅣ


어떤 주당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나를 언제나 감동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늘 나를 행복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때로 나로 하여금 용기 있게도 하시고 나로 유쾌하게도 하십니다. 나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여기 주는 술주자(酒)입니다. 주당도 술에게 이런 확신을 가지고 고백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이 그렇게 자신감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앙인 여러분, 우리 신앙인의 최대의 자본은 자신감이고 확신입니다. 신앙인이 가장 멋이 있을 때가 언제냐 하면 이렇게 확신 있는 자신의 신앙을 만 천하에 들어내 놓을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만 천하에 그의 신앙을 아주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복음에 확신 있게 살아가는 나를 본받아 흔들림 없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라” 그 말입니다. 얼마나 자신 있는 태도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이런 신앙의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먼저 믿은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시대에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있고 기준이 될 수 있고 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힘이 세상을 섬기고 헌신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근래에 리더십에 대한 글들이 무수히 쏟아졌습니다. 

모든 이론을 폐하고 리더십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힘’일 것입니다. 

 

과거 농경시절의 영향력은 신체적인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그 힘은 지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영향력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감동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아마도 그가 지닌 인격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오늘날은 누가 힘이 있다 하더라도 감동받지 않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 하여 특별히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생각과 말, 행동이 조화를 이룬 신실한 인격이 구비될 때 주변에선 말없이 그를 따르고 존경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바울은 자주 이런 요구를 합니다.

 

바울서신에서 몇 군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전 4: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살전1: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참 놀라운 요구입니다.

오늘 성직자들 중 과연 몇이나 자기 양떼들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믿음, 나의 경건한 삶, 나의 헌신된 삶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1.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바울이 자신의 양떼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특징이 20-21절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집니다.

 

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시민권이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줄잡아 인구의 거의 절반이 노예였고, 나머지 가운데 절반은 자유인이었고 절반만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로마 시민권은 로마 군인으로서 21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 주어졌거나, 세금을 많이 내 로마제국에 충성한 사람이 돈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가 그 당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살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특별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특징들을 몇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삶의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충성을 바칩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그의 뜻을 첫 번째 관심사로 삼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것을 끝장내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엣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사모합니다.

이것들이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이 말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둘째,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집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왕을 뵙고 직접 간구하며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도할 권세’라고 말합니다.

히10: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경은 그런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몰렸을 때에도 주저함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빌4:21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2. 그리스도의 원수로 사는 삶

세상에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8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이 어떤 이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표현하는지 주목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는 자기가 선한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노력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부 십자가의 영광을 훼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로 사는 삶의 특징이 19절에 나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한마디로 ‘자기의 배를 신으로 삼는 삶’입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배 곧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인 배에 충성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본능과 탐욕과 정욕을 좇아 삽니다.

 

성경에는 그런 예들이 나옵니다.

가인의 이야기도 나오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세상과 세상의 삶입니다.

마음과 관심과 흥미와 생각이 전부 이 땅에 매여 있습니다.

 

며칠 전 세계적인 신약학자인 ‘크렉 불룸버그’ 미 덴버신학교 교수가 방한했습니다.

이분과의 인터뷰 기사가 국민일보에 나왔습니다.(2012년 6월16일)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현재 미국 기독교의 최대 이슈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미국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물질주의’이다. 물질적인 부요로부터 영적인 열정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유입되어 잘 살게 된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늘나라보다 이 세상이 더 살기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 안락한 집,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 승차감 좋은 차, 즐거움........

하늘나라가 좋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돈인데 그래서 온통 물질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미국교회만의 문제일까요?

어쩌면 이 문제는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요?


화란을 향해 날아가던 멧오리들이 수천 리를 날아오느라고 피곤하고 지쳐서 어느 집 지붕에 내려 앉아 잠시 쉬어가려고 하는데 마당을 내려다 보니까 자기들과 비슷한 집오리들이 자기들처럼 고생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면서 주인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살이 디룩디룩 쪄서 잘 사는 것을 보고 “나도 내려가서 저 오리들이 먹는 먹이를 먹고 편히 쉬다 가자” 하고 내려앉아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루만 쉬다 간다는 것이 이틀이 지나고 삼 일이 지나니까 더욱 날기가 싫어졌습니다. 한 일주일 지나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날 굳게 결심하고 지붕 위로 날아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살이 너무 쪄서 더 이상 날 수가 없었습니다. 비참하게도 집오리들과 함께 지내다가 어느 날 잡혀서 요리가 되어 먹히고 말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천국 시민권자로서 끊임없이 영혼의 날개, 믿음의 날개를 치면서 천국을 향해 올라가야 하는데, 많은 크리스찬들이 안개처럼 잠깐 있다 사라지는 세상 즐거움과 쾌락에 도취되어 그만 세상 사람들과 함께 영원한 멸망을 맞고 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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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