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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마가복음 강해 '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16.04.09 마가복음 8장 1-14절
  2. 2016.04.01 에바다 (마가복음 7:31-37)
  3. 2016.02.19 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4. 2016.02.11 마가복음 7장 31-37절(에바다)
 

마가복음 8:1-14절


1.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왜 비슷한 기사를 마태와 마가는 두 번씩 기록했을까?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같은 기적의 중복된 표현이라고도 하지만 분명 다른 사건이다. 

6장의 기록이 이스라엘 땅에서 이루어진 기록이라 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이후로 예수님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예수님을 외면하는 유대인들과 반대로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모하며 갈급해하는 이방인들의 기사를 계속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기들만 구원을 받는 다는 선민의식에 쌓인 유대인들의 교만과 잘못된 믿음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이 해가 저물 때 까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장면이라면 이들은 어떻습니까?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사흘을 함께 한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모리아산까지 나오는 기간,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부활할 때까지...죽은 지 사흘만에...) 내가 죽는 시간, 거듭나는 시간... 

그리고 이들 중에는 멀리서 온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훨씬 더 멀리서 와서 훨씬 더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이방인의 믿음이 오히려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입니다. 

북한, 중국, 아프리카, 동남아.... 멀리까지와서 ...


교회 생활 오래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항상 깨어 있지 않다면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 되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신앙은 항상 "지금, 여기"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들은 오병이어의 다섯개의 빵은 구약의 모세 오경을 가리키고 일곱개의 떡은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촛대, 즉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병이어에서 남은 바구니가 12광주리이고 여기에서 남은 바구니가 일곱 광주리가 남은 것도 유대인의 12지파와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함한 7교회를 말한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지만 유대인들의 태도는 점점 더 냉랭해집니다. 

3장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예수님을 외면하고 6장에서는 고향에서 배척당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돌아갑니다. 

가족에서부터 고향사람들, 그리고 이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에 비해 이방인들의 태도는 한결같이 예수님을 간절히 바랍니다. 사모합니다. 깊은 믿음으로 도우심을 구합니다. 

죽음을 무릎쓰고 살기 위해 주님에게 간구하고 달려듭니다. 


신앙 생활을 거듭할 수록 난 유대인처럼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점점 더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지는 않은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2. 제자들의 믿음 


또 하나 살펴 볼 것은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나아와 사람들을 걱정하며 마을에 가서 밥을 먹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간곡히 제자들에게 그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이미 6장에서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폭풍우가 쳐서 죽을 뻔했던 그들 앞에서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한차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보았고,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고, 작은 소년의 헌신이 얼마나 크게 역사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그 이후에 생명을 살리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말 못하는 자를 말하고 듣게 만드시는 예수님도 경험했습니다. 


이미 같은 일을 겪었을 제자들 중 어느 하나도 "그 때처럼 주님께서 축사해 주세요."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기적을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우연으로 보는 것입니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빌립처럼, 인간적인 계산하지 말고 믿음으로 응답하리라 한 제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이 보여 주어도 그들의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3. 바리새인들


표적을 보여 주세요!!!

메시야 되는 증거를 계속 대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오병이어를 못 보고 못 들었을까요? 

예수님의 기적을 하나도 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계속 계속 보기만을 원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식지 않도록,  잊어 먹지 않도록 또 보고 또 보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기는 하나도 안 변할 테니, 자기는 하나도 믿음이 안자라고 안변하고, 난 가만히 있을테니 계속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이 없어서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를 내리시고 물을 공급하시는데 자기들이 원하는 것 하나라도 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별 소리들을 다 합니다. 

오천명을 먹이시고 사천명을 먹이셔도 그들은 당장 자기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힐난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당신이 날 다 채울 수 있느냐? 하면서 자기의 탐욕과 정욕을 불태웁니다. 


이슬같이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

신앙에 지름길이 없다. 일확천금을 기대해선 안된다. 

올듯 안 올듯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가 가장 값진 것이다. 

소나기를 기대하면 더 큰 자극을 기대한다. 

더 큰 자극을 원하다 보면 말씀을 잃어버리고 현상만을 본다. 

이방인의 예배, 바알의 예배는 인간을 흥분시키는 예배였다. 

흥분되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격동되지 않으면 은혜 못받았다고 한다. 

은혜는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흥분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직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일상에 뿌리 내릴 때에 우리의 삶에 은혜가 가득하고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에바다 (마가복음 7:31-37)


1. 두로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1절) 

두로 지방을 간 것 만도 이방인의 땅, 더럽혀진 땅을 간 것으로 유대인들의 선긋기, 자기 기준, 자기 방어의 장벽을 무너뜨린 사건인데 예수님은 두로 지방 뿐만 아니라 시돈,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였다고 전한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히지도 않고 그 땅을 밟고 지나왔다는 것이다. 소개는 되어 있지 않지만 시돈에서도 데가볼리 지방에서도 예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죄악가운데서, 질병 가운데서 구원해내셨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도, 그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로 돌아왔다. 고향 땅, 그들이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2.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고향에 왔는데 사람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는 귀를 먹고 그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닫혀져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말해도 듣지를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마치 자폐아처럼 자기 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계와, 외부와 , 그리고 하나님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거하지만 자기 만의 신학, 자기 만의 신앙, 자기 만의 세계에 빠져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자기 의에 갇혀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의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앗수르에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이젠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계속되는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나? 

오직 유대인만 구원하신다. 

할례 받은 자만 구원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하신다...


자기는 지금 1000년 가까이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데도 불구하고 마음 속으로는 난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너희들은 심판받을 백성이다. 이 믿음이 놀랍도록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갈릴리 지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의 소문이 그치질 않고 더욱 퍼져 나가자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직접 찾아와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만,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 거룩한 자들만 상대할 줄 알았던 그가 죄인들과 어울리고, 장로들의 전통도 지키지 않고, 급기야 세리와 창기들, 더 나아가서 이방인들과도 어울리며 그들을 고쳐 주니까 많은 사람들은 떠나가거나 더 극단적인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닫혀진 이유는 그들이 붙들고자 하는 말씀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갈릴리 땅, 또한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천하의 구원자임을 이미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잘못된 신념으로 말씀을 들을 귀를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인의 땅이라고 불리던 갈릴리 사람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닐면서 비로서 조금씩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구나, 할례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 나라 밖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오히려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유대인들보다 예수를 더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자들이 있구나...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안목이 바뀝니다. 



그 사람들이 여전히 닫혀 있는, 귀가 닫혀서 입마져 닫아 버린 유대인을 데리고 옵니다. 

왜 그가 귀가 닫히고 입이 닫혔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 우리 마음이 열리기 원하시는데 사탄은 우리를 닫아 놓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합니다. 

집착하게 하고  전염되게 하고, 중독되게 하여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듣지 못하게 합니다. 

악한 마귀들은 사람들을 묶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묶고, 마음을 묶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좌절로 사람과의 관계를 닫아 버리고 다른 무엇엔가 집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유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에게로, 이웃에게, 그리고 무한한 미래의 세계로 열게 만듭니다. 여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역사하는 교회는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오늘 갈릴리 지역에서 만난 한 사람은 철저히 닫혀 있는 사람입니다. 귀가 닫혔다는 것은 남이 무엇을 말하는지 소통이 막혔다는 것이고 말을 못한다는 것은 자신 역시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두려운 것입니까? 

들어도 말못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듣지 못하면서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이 듣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귀가 닫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동시에 하나님과 대화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그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말을 못해서 기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까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합니다. 그것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을 못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아서, 혹은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들려오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철저히 닫혀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듣고 열린 사람이 되니까 시키지 않았는데 마을에 가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귀먹고 말못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 귀가 열리고 입술이 열리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나가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귀가 열려야 합니다. 

믿음을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말씀을 듣는데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33절) 

무리가 그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그를 무리에서 분리해서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무리도 중요합니다. 어떤 무리 속에 있느냐가 신앙의 좋은 시작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냐, 어떤 공동체에 있느냐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공동체에 있어도 신앙은 결국 나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무리가 날 구원해줄 수 없습니다. 내가 만나야 됩니다. 내 부모가 내 신앙에 유익을 줄 순 있어도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내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한 셜교에서 "하나님께선 아들만 있지 손자가 없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날 만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날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철저히 닫혀진 인생에 찾아오셔서 예수님은 그와 따로 시간을 갖습니다. 끊어졌던 교제를 회복하십니다. 


따로 떨어진 곳에서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4.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데시며... 

접촉하신다. 아가서 입맞춤- 하나님과의 연합. 

영이신 하나님이 육이신 인간을 만나는 것- 그것이 회심이고 중생입니다. 

그분이 날 만지십니다. 

혹자는 이것을 세례로 표현합니다. 

하늘의 물로 우리를 씻기시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5.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 

열리라. 

하늘을 향하여,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탄식하시다. -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시며 

                 - 깊은 숨을 들어쉬시며, 제자들에게 깊은 숨을 쉬시며 성령을 받으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35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보십시오. ‘에바다’ 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자 귀가 열렸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이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인생이 그의 앞에 열려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고, 이웃을 향해 입을 닫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고, 그리고 우리의 혀가 풀려서 기도가 줄줄 나오고, 불신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도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서서 ‘에바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어져서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지난 시간엔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부터 찾아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책망받는 장면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1. 예수살렘과 갈릴리, 그리고 두로와 시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출세를 하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제사장 등 당시 모든 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도 활동의 무대를 미천하고 소외된 시골 갈릴리로 삼았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헐벗고, 사회에서 밀려난 자들이 이곳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상하고 찢긴 상처를 안고서 살아가는 갈릴리 사람들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연약하고 상처입은 심령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곳 갈릴리에서 12제자 중에 11제자를 이 곳 갈릴리 출신으로 뽑으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살렘에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면서 지내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천하디 천한 상놈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도 씻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이야기하면서 비아냥 거리고 헐뜯습니다. 지금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이 누구인가, 말씀을 듣고 은혜를 간구하며 멀리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는데, 자기들이 가진 전통과 선입견으로 인해 자기들이 온 목적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앞에두고 헐뜯고 비난하고 그러다가 책망받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기도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내 기준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해 실컷 비판만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에 한이 맺혔는지, 집에서 받은 상처, 직장에서 받은 상처까지 다 풀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은혜 받으러 왔다가 오히려 더 기분 상해져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을 잃어버리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은혜 받으러 왔다가 책망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예수님께서 갑작스레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간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 땅이었고,  유대인들이 여행을 삼가는 곳이었습니다. 공생애를 걸쳐서 예수님의 주 무대는 갈리리 지방을 비롯한 이스라엘 지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나안 여인을 만나기 위해 두로와 시돈 땅, 갈릴리 보다도 더 멀고, 소외되고,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어둠의 땅,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들이 사는 땅, 우상이 가득한 땅, 귀신들이 역사하는 그런 땅에 지금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31절에 보면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인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감히 가지 않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 땅으로 가신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이 지역은 바알신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으며 또한 비옥한 골짜기와 부유한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예전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 곳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정도로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녀는 헬라인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는 것은 헬라 문명의 교육을 받은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지식적으로도 당시 시대를 지배하던 헬라의 교육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에비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 여인들이 보기에는 아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앞에 있어도 신분적으로는 오히려 그들을 멸시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적으로는 대단할 지 모르지만 이방인이 보기에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갈릴리 출신의 예수와 그의 제자들입니다. 식민지 국가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야말로 하층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오직 딸을 낫게 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조차 그렇게 비난 받던 예수를 수로보니게의 귀 부인이 나아와 무릎을 꿇고 간절히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간구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흔히 듣는 얘기가 무엇입니까? 

설교 듣다가 상처 받았다. 교회 갔다가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았다. 

그래서 시험에 들고 상처받고 교회를 나오질 않습니다. 이유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만 대부분의 이유는 자기 자존심에 상처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 지키러 교회 오는 것 아닙니다. 

자존심 세우려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 받고 은혜 받으러 오는 것입니다. 자존심 세우면서 용서받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그러면서 "내가 교회까지 나와서 이런 대접 받아야 하나?"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니까 어떤 대접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수모를 영생과 바꿀 수 있습니까? 

자존심은 집에서 세우고 교회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러 나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딸을 고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자세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다른, 나아가 제자들과도 다른 여인의 태도입니다. 

그녀는 귀부인인데도 불구하고 갈릴리 출신 예수님 발 아래 엎드립니다. 이성적인, 사회적인 기준을 본 것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은혜 주는 자가 누구인가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개라고 해도 전혀 요동치 않고 은혜를 구합니다. 


이 본문은 여인의 믿음,  즉 여인의 겸손함과 간절함에 초첨을 맞추어 설교 되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관점을 제자들에게 맞추면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마치 제자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십니다.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것은 예수님이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마가요한이 나중에 제자들의 말을 듣고 기록한 것이지요. 

두로와 시돈 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목적- 이 여인의 딸을 고치러...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숨어 있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 

억지로 이방 땅에까진 왔지만 그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것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차별을 받았지만 그들 역시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것. 


거룩해지는 일에 힘쓸 때에 짓게 되는 잘못 

- 금긋기, 구별하기, 난 다르다는 정체성... 

난 너희와 다르다. 너희는 더럽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볼 때 더러운 자들이었고 제자들이 두로와 시돈 땅의 이방인을 볼 때에 더러운 자들이었다. 


일본의 차별 속에서 고난을 당해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한국 땅에 들어온 동남아나 러시아 사람들을 얼마나 차별하고 착취하는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이것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인가? 혹시 제자들이 품고 있던 생각은 아닌가? 입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 앞에 엎드린 여인을 보며 속으로 품었던 정죄의 마음, 교만한 마음, 선긋는 마음, 구별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가? 

자기 자신들도 바리새인들의 차별을 받았으면서도 똑같이 이방 여인을 멸시하는 제자들의 마음.... 

이렇게 다른사람들과 구별하며 자신을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시는가?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은혜는 선긋지 않는 것이다. 품어 주는 것이다. 받아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을 사랑하고 도와줘라. 왜냐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죄있는 자가 돌로치라. 하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갈릴리를 넘어 사마리아, 두로와 시돈, 이방지역까지 다니시면서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믿음과 간절함을 보여 주신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에바다 (마가복음 7:31-37)


1. 두로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1절) 

두로 지방을 간 것 만도 이방인의 땅, 더럽혀진 땅을 간 것으로 유대인들의 선긋기, 자기 기준, 자기 방어의 장벽을 무너뜨린 사건인데 예수님은 두로 지방 뿐만 아니라 시돈,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였다고 전한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히지도 않고 그 땅을 밟고 지나왔다는 것이다. 소개는 되어 있지 않지만 시돈에서도 데가볼리 지방에서도 예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죄악가운데서, 질병 가운데서 구원해내셨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도, 그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로 돌아왔다. 고향 땅, 그들이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2.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고향에 왔는데 사람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는 귀를 먹고 그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닫혀져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말해도 듣지를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마치 자폐아처럼 자기 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계와, 외부와 , 그리고 하나님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거하지만 자기 만의 신학, 자기 만의 신앙, 자기 만의 세계에 빠져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자기 의에 갇혀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의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앗수르에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이젠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계속되는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나? 

오직 유대인만 구원하신다. 

할례 받은 자만 구원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하신다...


자기는 지금 1000년 가까이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데도 불구하고 마음 속으로는 난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너희들은 심판받을 백성이다. 이 믿음이 놀랍도록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갈릴리 지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의 소문이 그치질 않고 더욱 퍼져 나가자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직접 찾아와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만,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 거룩한 자들만 상대할 줄 알았던 그가 죄인들과 어울리고, 장로들의 전통도 지키지 않고, 급기야 세리와 창기들, 더 나아가서 이방인들과도 어울리며 그들을 고쳐 주니까 많은 사람들은 떠나가거나 더 극단적인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닫혀진 이유는 그들이 붙들고자 하는 말씀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갈릴리 땅, 또한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천하의 구원자임을 이미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잘못된 신념으로 말씀을 들을 귀를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인의 땅이라고 불리던 갈릴리 사람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닐면서 비로서 조금씩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구나, 할례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 나라 밖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오히려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유대인들보다 예수를 더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자들이 있구나...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안목이 바뀝니다. 


그 사람들이 여전히 닫혀 있는, 귀가 닫혀서 입마져 닫아 버린 유대인을 데리고 옵니다. 

왜 그가 귀가 닫히고 입이 닫혔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 우리 마음이 열리기 원하시는데 사탄은 우리를 닫아 놓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합니다. 

집착하게 하고  전염되게 하고, 중독되게 하여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듣지 못하게 합니다. 

악한 마귀들은 사람들을 묶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묶고, 마음을 묶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좌절로 사람과의 관계를 닫아 버리고 다른 무엇엔가 집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유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에게로, 이웃에게, 그리고 무한한 미래의 세계로 열게 만듭니다. 여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역사하는 교회는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오늘 갈릴리 지역에서 만난 한 사람은 철저히 닫혀 있는 사람입니다. 귀가 닫혔다는 것은 남이 무엇을 말하는지 소통이 막혔다는 것이고 말을 못한다는 것은 자신 역시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두려운 것입니까? 

들어도 말못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듣지 못하면서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이 듣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귀가 닫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동시에 하나님과 대화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그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말을 못해서 기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까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합니다. 그것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을 못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아서, 혹은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들려오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철저히 닫혀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듣고 열린 사람이 되니까 시키지 않았는데 마을에 가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귀먹고 말못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 귀가 열리고 입술이 열리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나가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귀가 열려야 합니다. 

믿음을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말씀을 듣는데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33절) 

무리가 그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그를 무리에서 분리해서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무리도 중요합니다. 어떤 무리 속에 있느냐가 신앙의 좋은 시작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냐, 어떤 공동체에 있느냐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공동체에 있어도 신앙은 결국 나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무리가 날 구원해줄 수 없습니다. 내가 만나야 됩니다. 내 부모가 내 신앙에 유익을 줄 순 있어도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내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한 셜교에서 "하나님께선 아들만 있지 손자가 없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날 만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날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철저히 닫혀진 인생에 찾아오셔서 예수님은 그와 따로 시간을 갖습니다. 끊어졌던 교제를 회복하십니다. 


따로 떨어진 곳에서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4.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데시며... 

접촉하신다. 아가서 입맞춤- 하나님과의 연합. 

영이신 하나님이 육이신 인간을 만나는 것- 그것이 회심이고 중생입니다. 

그분이 날 만지십니다. 

혹자는 이것을 세례로 표현합니다. 

하늘의 물로 우리를 씻기시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5.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 

열리라. 

하늘을 향하여,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탄식하시다. -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시며 

                 - 깊은 숨을 들어쉬시며, 제자들에게 깊은 숨을 쉬시며 성령을 받으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35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보십시오. ‘에바다’ 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자 귀가 열렸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이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인생이 그의 앞에 열려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고, 이웃을 향해 입을 닫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고, 그리고 우리의 혀가 풀려서 기도가 줄줄 나오고, 불신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도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서서 ‘에바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어져서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