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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겨울을 맞이하는 자세 (디모데후서 4장 9-22절) 


겨울을 맞이하는 동물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겨울이 되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나는 철새들과 같은 생물들입니다. 비교적 이동이 자유스러운 새와 물고기 등이 이런 유형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평생 돌아다녀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뜻한 곳만 살다보니 홀로 그 자리에서 겨울을 이기지 못합니다. 힘들면 떠나야 합니다. 


하나는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입니다. 개구리, 뱀 같은 파충류들은 주위에 따라 자기 체온을 변화시키는 변온 동물들인데 겨울이 되면 아얘 동면을 해 버립니다. 곰이나 다람쥐, 고슴도치나 두더지 등도 굴 속이나 땅 밑, 나무 안에 들어가 겨울잠을 잡니다. 어떤 동물들은 호흡양이 줄어들기도 하고 어떤 동물들은 아얘 호흡을 멈추는 동물들도 있다고 합니다. 물고기 중에도 겨울잠을 자는 물고기등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이 동면에 대해서 신비 중의 신비라고 말을 합니다. 어떻게 오랜 기간동안 그렇게 먹지도 않고, 숨도 안쉬고 잘 수 있을까? 또 어떻게 봄이 되면 알아서 깰까? 

이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인생의 겨울이 올 때에 들 먹고 들 쓰고, 자기를 절제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겨울을 대비하는 생물들이 있습니다. 털갈이를 해서 겨울 전에 두둑히 털을 쌓아 체온을 유지하고, 우리가 잘 아는 개미는 겨울 전에 식량을 많이 저장해 두어서 겨울을 나게 됩니다. 사람에게도 굉장히 교훈을 주는 그런 유형입니다. 


자기의 인생의 겨울을 잘 준비하는 것.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님을 만난 후 후회없이 삶을 살았던 바울이 어떻게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부분 4장 6절부터 보면 바울은 

[딤후 4:6-7]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말합니다. 이 글은 바울이 죽기 바로 전 겨울이 오기 전에 쓴 바울의 마지막 글입니다. 


이제 그는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에 문하생으로서 부족함 없이 살았던 그가 예수 믿고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요, 이제 죽는 순간도 감옥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배신과 염려와 때로는 조롱과 연민을 받고 있지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운신 재판관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자에게로다." 


1. 두려움없이 겨울을 맞이할 수 있는가? 

난 신앙생활 하면서 두려움없이 인생의 겨울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나님 주실 면류관만을 바라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말씀을 알아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형제들과 화해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도 못한채 그렇게 알게 모르게 죄만 쌓아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내 편리함과, 내 정욕과, 내 목적을 위해 십자가를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말 신앙인으로서 나는 두려움없이 인생의 겨울을 맞이 할 수 있는가? 


2.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시간에 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9절)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21절) 


왜 바울은 애타게 디모데를 찾고 있는가? 무엇을 그에게 남기고 싶은 것일까? 

단지 외로워서 그를 찾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자신의 신앙의 유산과 기록을 남겨두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까지도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마지막 겨울을 보낼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10절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자들의 기록입니다. 


데마는 함께 있고 싶었지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레스게와 디도는 자기의 사역을 위해서 각자의 사역지로 갔습니다. 


12절의 두기고도 동역자였지만 사역을 위해 지금 디모데를 대신해서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지금 두기고를 보낼테니 디모데 네가 오라는 것입니다. 


1) 용서 

그는 먼저 그를 대적한 자들을 용서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는 떠나기 전에 그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예수도 십자가 상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데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겨울 준비는 용서를 통해 준비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인생은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고 온전히 예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먼저 형제와의 관계를 풀라고 하십니다. 


2) 경각 

용서하지 못한 예외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알렉산더 입니다. 그에게 만큼은 주께서 그 행한대로 갚으실 것이라 말합니다. 

왜 그는 용서하지 못했습니까? 

그는 구리 세공업자입니다. 

당시 금, 은, 구리 세공업자의 주요 업무는 우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자기 사업에 방해가 되어 바울을 모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알렉산더가 그리스도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결국 그는 자기 사업, 우상숭배하는 일로 인해 바울에게 큰 해를 입히고 방해했습니다. 

디모데에게도 그를 주의하라고 하는 것은 그가 겉으로는 잘 해주는 듯하지만 결국 자기 정욕과 우상을 위해 복음을 방해하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에 그를 조심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화해 

바울이 자기 삶에 있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바나바와의 관계일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바울 되었을 때에 아무도 믿어주지 않던 그를 기독교 공동체에 소개시켜준 은인입니다. 

그런데 마가 문제로 인해서 그 사이가 갈라졌습니다. 

신앙이 깊어도 자신의 기질과 노선으로 인해서 부득이 함께 하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당시 바나바가 살아있었는지, 순교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을 맞이함에 있어서 바울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부담이 되었던 이 문제를 풀고 가고자 했습니다. 그가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하며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4) 육신을 위해 

겉옷을 가지고 오라. 로마의 감옥은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나이도 어느 덧 70이 훨씬 넘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천국을 사모했지만 마지막 까지 의사 누가를 옆에 두고 또한 겉옷을 챙기면 자기의 육신을 챙겼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그 육신 역시 성령이 거하시는 전임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5) 말씀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일반적인 주석- 바울이 읽던 성경 


그러나 그가 인생을 정리하면서 죽음에 임박하여 마가를 부르고 디모데에게 가져오라 한 책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까지 함께 있던 자 - 마가, 누가, 바울, 디모데...

디모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서를 기록한 저자들...

바울이 마가와 누가와 함께 있으며 생의 마지막에 하고자 했던 일...

성서의 기록...자신의 글들을 정리하는 일..


디모데 - 바울의 무덤 밑에 묻힘. 

Posted by 소리벼리

디모데후서 4장 9절 -11절 (세명의 그리스도인) 


1. 데마 

(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골 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나의 동역자 데마, 데마, 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고.... 퇴보하는 신앙 

그는 고난보다 안일을, 미래의 소망보다 현실을, 십자가 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택한 자였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디모데야 속히 오라, (왜냐하면...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기 때문이다...) 

마가도 꼭 데리고 오라 나에게 그가 꼭 필요하다. 


데마가 신앙을 버리고 떠난 것은 떠난 것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시험에 용기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닌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지 못하여 고향인 데살로니가로 다시 돌아갔다....


2. 마가 (마가, 마가요한, 요한) 

(막 14: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행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행 15:38-행 15:39]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된 계기 


(사도행전 12:12절)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 ,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옥에 갇힘. 천사가 베드로를 일깨워서 마가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인도. 


(행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골 4:10절에 보면 - 바나바의 사촌.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된 사건. - 바로 마가로 인해서... 

나중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 하면서 "그가 내게 유익하다"(딤후 4:11)고 하였다. 

베드로전서를 기록하면서 베드로는 마가를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까지 하였다. 


실패자에서 신앙의 수호자, 전달자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그의 집은 예수의 마지막 만찬의 장소, 부활 후 성령강림의 장소 - 마가 다락방 

그리고 초대교회의 정기적인 기도처소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나에게 꼭 필요하다....그가 나에게, 내가 그에게 할 것이 있다. 


3. 누가 - 처음과 끝이 같은 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 오직 누가만 남았다. 


모두들 떠나갔는데 누가만 있다. 


그의 직업은 의사...그런데 자기의 다 내려놓고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역자. 제 2차 전도여행부터 그와 함께 다님. 

가이사랴 감옥에서도,로마 감옥에서도 나이 많아 쇠약해진 바울을 곁에서 지켜주고 그의 건강을 보살펴 줌.

의사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했을까? 

사도바울의 편지도 대신 써 주고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된다. 


[눅 1:2-눅 1:3]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가장 문학적이고 정확하게 연대기적으로 서술 

사도행전도 기술 


신약성경의 두 축인 예수의 복음에서, 베드로를 거쳐 바울에 이르기까지의 초대교회의 역사를 가장 정확하고 생생하게 기록 


누가는 바울을 만난 후 한 평생 바울과 동행한 친구이자 동역자.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동행, 그 다음 행 20장에서 아시아로 다시 갔고, 예루살렘에도 동행. 가이사랴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 그리고 로마에 갇혔을 때... 


1. 데마와 같이 한 때 열심을 내었다가 타협하고, 낙망하여 후퇴하는 신앙을 가질 것인가? 

마가와 같이 연약하고 실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증인이 될 것인가? 

누가와 같이 신실한 주의 종이 될 것인가? 


바울의 잘못...

그는 실패를 모르는 자. 타협을 모르는 자. 

긍휼한 마음이 없다. 실패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윗이라면...예수님이라면....모세라면.... 데마를 두고, 마가를 두고 그렇게 이야기 할까? 


모두가 불완전하다. 교회도 역시 실패자와 낙망하는 자와 떠나는 자와 돌아오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의 결국은 주님만이 아신다. 우리는 그 때의 그를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실패에 대해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마음 놓고 실패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 

"목사님, 교회에서 사람들 때문에 실망하고 교회마다 갈등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문제 없는 교회, 갈등없는 교회를 좀 소개시켜 주십시오." 

"이 땅에 그런교회가 있다면 내게도 소개시켜 주세요. 저도 그런 교회에서 좀 신앙생활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형제님, 만약에 그런 교회를 발견하게 되면 나도 그렇고 형제도 그렇고 그 교회에 절대 발을 들여 놓아서는 안됩니다. 나와 형제가 발을 들이는 순간, 그 교회에 곧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갈등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은 교회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선교사로 평생 헌신했던 선교사의 선교 보고서. 

"한국에 가니까 맨날 예수하고 그리스도하고 싸움니다. 장로교가 싸우니까 하나는 예수교 장로교, 한쪽은 기독교 장로회...감리교도 성결교도 마찬가지... 그것같다 모자라니까 이제는 총회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성회, 하나님의 총회. 예수랑 하나님이랑 갈라지는 교단..." 


주 안에 우린 하나....

같은 교회를 다니던 다른 교회를 다니던...하늘나라에서 만날 사람들....


그런데 할 수만 있다면 넘어지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것.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 

예수와 함께 고난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신앙. 

주가 신실하듯 그의 신실함을 닮는 것. 

결국 내 목적이 아닌 예수 닮는 신앙 



Posted by 소리벼리

 

디모데후서 4장 1-8절  가장 중요한 유언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리고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임재 앞에서, 난 네게 명한다. 


그냥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장차 산자와 죽은 자는 무엇입니까? 

물론 예수님 재림 하실 때에 살아있는 자와 이미 죽은 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산자와 죽은 자라는 의미는 알곡과 쭉정이를 나타내듯이 참 구원 받을 자와 죽은 자, 즉 심판 받을 자를 가리킵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네게 명한다라는 말이니까 얼마나 엄숙하고 무거운 말씀입니까? 


그 명령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Preach the Word!" 

 바로 the Word, 대문자로 쓰여있는 그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작게는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라는 뜻도 있지만 크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믿지 않는 자, 연약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은 무엇이었습니까? 

[마 28:19-마 28: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 16:15-막 16:16]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 Go into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먼저는 무엇입니까? 믿는 자는 세상으로 다시 나가라, 그리고 좋은 소식, 구원의 소식, 너희들이 만족하고 누리고 행복해하는 그것은 참 된 만족, 참된 행복이 아니다. 영원한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그 안에서 영원한 충만함을 누리는 것임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거짓 자유, 거짓 행복에서 벗어나 참된 행복, 참된 자유를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안 믿으면 결국 심판을 당할 것이요,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be prepared in season and out of season:


이 말씀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영어로는 그 시기나 혹은 시기를 벗어나 있을 때에도 항상 준비되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항상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 시기를 벗어나 있을 때'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누구의 시기냐가 해석의 초점입니다. 

 

내가 복음을 증거하는 대상이 아직 때가 차지 않았을 때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혹은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내가 말씀을 전하고 싶던지 그렇지 않던지" 자기 감정에 얽메이지 아니하고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너무 기다립니다. 

아직 그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데 변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또 만날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증거하면 무슨 열매가 있을까 스스로 차단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받는 자가 믿음으로 응답할 때에 일어납니다. 


우리의 순종은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결국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성령의 역사는 받는 자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에 역사됩니다. 


사실 목사도 주일날 설교할 때, 정말 올라가기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아직 내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도 있고, 성도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단상에 올라갈 때는 그 모든 부담을 이기고, 걱정을 내려놓고 지극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담대하게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복음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교회가 크고, 프로그램이 좋고, 방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성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에 예수는 구원의 도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나니아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의 입술을 통해 그리스도의 도를 배우고 받아들이고 영접했습니다.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에도 천사가 나타나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한 말을 "베드로를 불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도 복음은 베드로가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바울을 만났어도 복음은 아나니아가 전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로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사람의 입술을 통해 영접한 예수가 모여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는 데에도, 영접한 데에도 성령의 역사가 임해 이들을 하나의 신앙으로 붙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냥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르치고, 때로는 훈계하며, 또 격려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차갑게 한 것이 아니라 great patient and careful instruction (위대한 인내와 세심한, 주의깊은 가르침으로 전하고 꾸짖고 가르치고 격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인내없이 가르치지 말고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 자체가 고난이요, 십자가입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주의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으로 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절입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건전한 교리를 참지 않으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자기들의 간지러운 귀가 듣기를 원하는 것을 말하는 수많은 스승들에게로 모여들 것이다." 


자기들의 간지러운 귀가 무엇입니까? 듣기를 좋아하는, 자기 만족을 주는, 칭찬만 하는, 꾸짖지 아니하는, 괜찮다고 하는, 그정도면 잘한다고 하는.....그런 스승에게로 모여들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진리에서 귀를 돌이켜 신화에게로 돌아설 것이다. 

신화가 무엇입니까? 

이러이러하니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 

내가 이렇게 했더니 그가 이렇게 배부르게 하셨다. 

 

 결국은 자기 의로 말미암는 자기 자랑의 신화, 자기 만족의 신화, 자기 칭찬의 신화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5절: 그러나, 너 디모데야, 모든 환경에 있어서 너의 머리를 유지하고, 모든 고난을 참으라. 오직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사역의 모든 임무를 다하라....

 

 다른 방법이나 꾀를 생각하지 않고... 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 꾀입니다. 잔머리 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이루려 하는 생각입니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네가 가진 진리를 계속 유지하고, 그로 말미암는 고난을 참으라. 네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라. 

 

 6절, 7절, 8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가이 가까왔도다.

 

 전제- DRINK OFFERING 

 전제는 DRINK OFFERING으로 포도주가 부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지기를 원하나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처럼 이는 "피의 순교"를 말합니다.

 

 그는 이미 입박한 순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순교를 앞둔 그에게는 미련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환경적으로 볼 때에 

 그가 개척한 교회들이 벌써부터 흔들리고 무너지고, 그가 세운 사람들이 세상으로 떠나고 자기를 비웃고, 환난 가운데 죽어가는 것이지만 그가 미련을 두지 않은 것은 자기의 업적을 바라보거나, 환경을 바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왔던 태도를 하나님 앞에 아끼지 않고 드렸기 때문입니다. 

 

주 앞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열매나 업적으로 그 자신의 삶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주 앞에 그 자신의 태도를 보고 미련을 남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관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것을 확신 가운데 바라보는 자는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자기 삶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받을 상급만을 바라보는 신앙, 

바울은 그러한 삶으로 엄숙하게 디모데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로고스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밤 여러분이 만일 하늘나라로 가게 되신다면 여러분, 어떤 미련을 남기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전해야 할 대상자가 만일 오늘 밤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많은 후회와 미련이 남겠습니까? 


주님은 세상으로 나가라. 복음, 하나님의 말씀,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미련 없이, 변명없이 전했던 바울은 비록 세상적으로는 고난 가운데 최후를 맞이하고 있어도 지금 하나님 앞에 미련없이  그 분을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한 행복한 삶으로, 거룩한 삶으로 디모데를, 그리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초대에 초대된 자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디모데후서 3장 13-17절  하나님의 말씀 - 확실한 우리의 터전

 

 디모데후서 3장은 말세의 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의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로부터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바울은 "무릇 그리소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 집약된 이 세상에서 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는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20)
 
 여러분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기우뚱 하십니까?
 정말 예수 잘 믿으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합니까?
 오히려 거꾸로 예수 잘 믿으면 어떤 핍박으로부터 건지시며 우리를 안전히 보호하시고 머리되게 하시고, 빛나게 하신다고 교회에서 배우고 자라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 믿으면 핍박받을 것이라고 들어오셨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그리고 그 분이 승천하시고 기독교가 313년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기독교는 참담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사회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예수 믿으면 의료보험도 못받고, social 혜택도 못받는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힘이 없었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이방 종교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박해 받는 것과 동일시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기독교가 로마를 점령하고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박해를 받았는데 거꾸로 예수 안 믿으면 불이익을 보게 된 세상이 온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강요가 되고 성직자들은 기득권이 되고 교회는 나날이 하늘 꼭대기같이 높아지며 종탑을 높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권력을 가지고 부유해지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십자가와 부활은 그저 상징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 온갖 혜택을 보면서 오히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원성의 대상, 부패의 대상,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사막으로 떠나 수도하는 사막 수도자들이 생겨났고, 수도원들이 생겨나면서 나름대로 정화 운동을 펼치려 하지만 그것 역시 시간이 흘러가면서 똑같은 타락의 싸이클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장 부유하고 교회 예술 문화가 세계를 주름잡던 중세를 일반 역사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가들 조차도 "중세의 암흑기"로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썩어 버린 기독교, 그것이 박해를 떠난, 고난을 떠난 기독교의 쓴 열매였습니다.
 
 이같은 역사의 순환은 지금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공직 사회에 들어가면 국회에도, 청화대에도, 왠만한 대기업에도 신우회가 있고, 함께 예배도 드리지만 박해를 견디는 순수한 예배가 아닌, 힘을 얻기 위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화려한 친목모임으로 전락해 버린 사례가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신앙의 첫 세대때는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까?
 제사 문제라든지, 양반 문화로 인해 기독교는 상놈의 종교요, 불효의 종교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박해와 탄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희 부모 때만 하더라도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쫓겨나고 구박받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박해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누구고 대놓고 박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보가 얼마나 이상한지 예수 믿지 말라고 할 때는 총칼을 들이대도 예수 놓지 않고 믿는데
 이젠 예수 속편히 믿으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이젠 편히 믿을 수 있는데도 바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지금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은 여전히 악한 질서가 큰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 딤후 3:13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악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세상은 여전히 그러한 자들을 핍박합니다.
 기독교인은 고리타분하며 재미도 없고, 융통성 없다고 한껏 뭐라하다가 그렇다가 그들의 말에 휩쓸리어 어울리면
 이번에는  날라리 신자다,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또 다시 비아냥 거립니다.
 
 신실해도 욕먹고 안신실해도 욕먹습니다.
 
 지금은 정체성 혼동의 시대입니다.
 이제는 내가 남자 여자로 태어났어도 잘못 태어나진 았았나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게끔 만듭니다.
 자신의 자아 실현을 위해 늙어서도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삶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뭐가 옳은지, 무엇이 진리인지, 자꾸만 헤깔리는 시대입니다.
 
 신랑감 일순위로 여겨지던 연예인이 하루 아침에 마약 상습을 투어자니 도박 중독자니, 성폭력자이니 하면서 등장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판단해야 할 지 모릅니다.
 
 이러한 시대에 제시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4절을 좀더 쉽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야. 너는 네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을 계속하고 그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고 확신해라. 왜냐하면 네가 바로 이러한 것을 나를 바라보고 배우지 아니했냐?
 
 그러니까 말씀을 확신하는데 그 말씀을 가르쳐준 나의 삶과 나의 행위...그야말로 10절에 말한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보고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빌립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 14:11b)
 
 우리는 자랄 때에 부모로 부터 "나를 닮으라.."하는 말보다 닮지 마라...이렇게 살지 마라는 말을 더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참 교육은 가르치는 자를 닮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의 삶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의 정당성은 무엇을 통해 얻느냐? 내가 그대로 산 것을 통해 보여지고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바울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삶을 통해 디모데에게 그대로 전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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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울은 자기 보다 더 좋은 스승을 디모데에게 소개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 자체가 너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요,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15절부터 말씀을 보면 성경을 하나의 인격체로 묘사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큰 도움을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 

성경은 지식을 담은 책이 아닙니다.
정보를 담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 입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현존이고 임재이고, 지금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그 분의 말입니다,

참고서
"교과서를 풀이해 놓은 책, 완전정복...이것만 몇번 보면 완전이 내가 정복할 수 있는 책."
성경은 내가 수천번을 읽고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스승에게 사사를 배워도 내가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책.

성경은 지금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
지금 나의 중심으로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그 분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시편 1편에서 다윗은 복있는 사람은...하면서 악인과 구별하면서 결국 복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고백합니다.
묵상은 공부가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씀을 듣듯, 학생이 스승의 말을 듣듯,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음미하고 내 삶에 들어오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주듯 그 안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는 것...
그 때에 성경은 나를 온전케 하고, 나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도록 나를 인도하고, 나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능력을 줄 뿐만 아니라 날마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가진 가장 확실한 스승, 그것은 결국 성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성경 자체를 자기의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결국 우상입니다. 황금 송아지입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아니한 예배는 그 자체로서 가인의 제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지성이면 감천,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을 받아주시겠지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말씀은 물론 좋은 목자에게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저 말씀 자체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말씀을 잘 듣고 배우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이 익숙해 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비로서 참 스승에게로 디모데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