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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 회귀 (사무엘하 6장)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부스족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탈환하므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된 다윗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5장 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브론에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그것을 어떻게 나누냐면 다윗이 삼십세에 왕위에 올라 40년을 다스렸다고 말하면서 헤브론에서 7년동안 유다를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삼심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가 되었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까지는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정해지기까지 다윗은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인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가나안 7족속 중의 하나였던 여부스 족속이 이삭과 야곱을 조롱하는 맹인과 절뚝박이를 조롱삼아 우상으로 만들어 이스라엘을 농락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조롱했던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여부스족속의 그러한 행태를 미워하며 그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 중심을 탈환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온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 중심부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서 통치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목자 삼은 다윗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목자로서 삼았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게 하는 것, 이것이 온전한 구원의 모델입니다. 


다윗의 삶은 왕이 되기 전의 여정과 왕이 된 후의 여정으로 구분합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울 때, 연약할 때, 힘이 들때, 하나님께 매달려서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받은 후에 타락합니다.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노아가 홍수가 그치자마자 포도주에 취해서 범죄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다시 바알과 앗세라에게 무너집니다. 

축복받은 삼손이 데릴라에게 취해 머리를 잘리게 됩니다. 

목숨을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이스라엘의 비밀을 바벨론에게 다 누설합니다. 

40년을 치리했던 엘리 제사장은 나이 많고 비둔하여져서 이스라엘의 타락을 눈감아 버립니다. 

수 많은 교회가, 목사가, 성도가 왕이 된 이후, 축복 받은 이후의 삶에서 무너집니다. 


다윗도 물론 앞으로 나누겠지만 왕이 되고 난 후에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유혹에 때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돌아옵니다. 철저히 회개 합니다.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왕이 되기 전과 후의 신앙이 바뀌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에 신앙의 적은 어려움이 아니라 부유함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신앙을 떠납니다. 

부유하여서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다윗은 부유함에도 늘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왕의 힘으로, 권력으로 이스라엘을 다시리지 않고 믿음으로,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자신을 다시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자는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물질 앞에서 비굴해지지도, 교만해지지도 않습니다. 


사무엘하 6장은 왕이 된 이후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 실로에서부터 나간 법궤는 지금 성전을 떠나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온성을 삼은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셔올 일을 생각합니다. 법궤는 길이가 1.2미터 너비와 높이가 60센티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궤였습니다. 조각목 위에 순금이 입혀져 있었으며 그 안에는 돌판과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 물건들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며 (골판),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고 (만나), 그들의 능력이 되심(지팡이)을 상징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그 중심부의 또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올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고 한 일- 산당, 흩어지는 예배, 자기 편의에 맞춘 예배. 사사기 후반부의 예화들, 자기집에 산당을 세워두고 제사장을 고용하여 자기만을 위한 예배를 드리게 한 것..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한 일- 벧엘과 단에 또 다른 예배 처소를 세운 일, 왜? 자기 편의를 위하여... 


주 5일 근무제로 바뀌니까 주일 예배 시간을 바꾸자. 금요일날 예배를 드리자. 새벽예배를 없애자. 

우리는 10시 반에 예배를 드리지만 거의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대예배 시간- 11시 

1900년도 초반 우리나라가 힘들었을 때ㅡ농경문화가 중심이던 시기에 11시라는 의미- 하루를 온전히 드리기 위한 가장 중심부의 시간. 자기 편의에 맞춘 것이 아니라 중심을, 전부를 헌신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수요예배- 일주일의 가장 가운데 시간- 예배 하자! 

금요철야- 한주일의 일을 끝내고 이젠 푹 쉬고 싶은 시간- 밤세워 기도하자, 부르짖자! 


자기 편의에 예배 시간을 맞춘 것이 아니라 중심을 드리고, 전부를 헌신한 예배였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 중심에 법궤를 모시고자 한 다윗의 믿음 - 

중심을 드리자!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자! 


[신 8:12-14a]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이 사건에서 해석의 논란이 되는 부분- 웃사의 죽음 

법궤를 되찾아오는 길에 그 짐수레를 끄는 황소들이 비틀거리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법궤가 짐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내민다. 


(삼하 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아비나답과 더불어 하나님의 법궤를 오랫동안 보관하던 자. 

그리고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궤를 붙잡다가 죽은 것 -어떠한 악한 의도도 없지 않습니까?

성경은 웃사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 않습니다. .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은 웃사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합의되는 공통된 의견은 그는 법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법궤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 10:8 출 25장 37장, 역대상 15:12-15) 


법궤는 절대로 사람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되고, 레위인들이 법궤에 부착된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서 운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첫 째 레위인이 아닌 수레에 태워 법궤를 운반하면서, 소들이 날뛰어 법궤가 요동하니까 손으로 법궤를 잡은 것입니다. 


왜 법궤를 반드시 레위인들의 어깨에 의해서 운반하게 했을까? 

[대상 15:12-15]

(대상 15:12)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대상 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대상 15:14)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대상 15:1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이것은 법궤를 물건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체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법궤는 반드시 구별된 레위인들이 자신을 성결케 한 후에 메게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로서, 영으로서, 인격체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 법궤를 대할 때 거룩하지 못한 제사장들은 죽어서 나왔습니다. 왜? 법궤는 하나님의 현존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웃사는 법궤를 수레에 실어 황소들이 끌게 했습니다. 황소들이 미쳐 날뛰어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자신의 손을 내밀어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자, 지금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법궤도, 레위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 살아가고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럼 이 말씀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의 현대적 적용은 우리에게 주제넘게 하나님을 관리하려 들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상자 안에 가두고, 수레에 실어나르면서 그것이 훼손될까봐 우리가 하나님을 지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서 어느덧 신앙생활이 오래되다 보면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보호하는 사람인양 교만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 보다 자기 수레에 담은 하나님이 깨지지 않게 내 손으로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교회에는 자기 손으로 하나님을 책임관리하려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자신은 하나님처럼 높아져 가고 하나님은 죽은 물건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한 자들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신앙을 "회칠한 무덤이요,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 23:27) 하셨습니다. 


(삼하 6: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은 지금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까? 웃사를 친 하나님께 분노한 것입니까? 웃사에게 분노한 것입니까? 

웃사에게 분노한 것입니다. 왜? 법궤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웃사로 말이암아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다윗의 뜨거움이 웃사로 말이암아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다윗은 웃사를 탓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반성합니다. 자기가 아직 부족하다고 근신합니다. 

[삼하 6:9-삼하 6:10]

(삼하 6: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그런데 법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이 축복받게 되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순종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 됨을 깨달아 다시 법궤를 모셔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삼하 6:13-삼하 6:14]

(삼하 6: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 6: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레위 사람들이 어깨에 법궤를 메고 여섯 걸음을 걸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겸손을 상징하는 베 옷을 입고 춤을 추며.... 


Dancing with God. 


춤은 홀로 추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추는 것입니다. 음악과 더불어 파트너와 더불어 춥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신실한 기독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나님과 춤추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을 따라 예배하며, 자기의 왕의 복장을 벗어 던지고, 겸손과 회개, 그리고 성결의 배옷을 입고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춤추었습니다. 기쁨과 환호의 순간임과 동시에 거룩하고 진지하며, 엄숙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은 겸손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겸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왕의 직함이 다윗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가장 중심에, 가장 뜨껍게 하나님의 법궤,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132편 


떠돌아 다니는 법궤- 왜? 쉴 곳을 찾을 수 없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지만 머물 곳이 없어서 베다니로 향했던 주님....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하자 하나님의 응답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라." (시 132편 13-14절) 


지난 주 시편 23편을 나누면서 그가 나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그는 우리의 쉴만한 물가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쉴만한 처소인가? 주님이 우리 안에 영원히 머무시기를 원하는가? 

내가 어려울 때에 우리는 늘 주님께 우리의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달라고 인도해 달라 기도하며 또 그렇게 응답받으며 사는데 우리는 주님이 거하시고자 할 때에 외면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만 원하지 않는가?

 

Posted by 소리벼리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왕 (사무엘하 5장 1-10절) 


여러분, 이스라엘의 수도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텔아비브입입니다. 

몇 주 전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 아니었어?"하고 말하곤 합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까지도 성지로 삼는 종교적 분쟁지역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성지를 인정하면서 공존하는 종교적 중립지역이었습니다. 

원래 다윗왕때 수도로 지정되어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면서 통일국가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은 솔로몬 왕 이후 왕국이 분열되고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남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면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가 인정되기까지 유랑민으로 살게 되면서 그 지역 전체가 이슬람권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그 후 이슬람의 성지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 때 강력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이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십자군입니다. 유럽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십자군을 보냈지만 결국 실패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성지 순례를 인정한다는 조건하에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의 소유가 됩니다. 그 후부터 끊임없이 이 예루살렘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는데 다시금 트럼프가 이 분쟁지역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고 발표하면서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된 후에 칠년 반 뒤에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 핵심이 되는 사건이 바로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베들레헴 언덕에서 양을 치다가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왕의 곁에서 악기를 연주하던 자에서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믿음으로 승리한 자 

군대장관에서 하루 아침에 도망자가 되어 광야를 전전하던 자 

광야에서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억울한 자들이 함께 모인 곳의 지도자가 되어 가장 연약한 자들의 리더

이제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움을 받은 자. 

유다의 왕이 될 때의 백성들의 고백 

(삼하 5:2)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 하나님께로 양들의 목자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선포된 자. 



-> 한 사람의 인생의 여정- 신앙의 여정 중에서 가장 복잡하면서 자세히 신앙의 단계와 여정을 표현하고 있는 자 - 

가장 위대한 돵이면서 특별한 기적이 없이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던 자. 우리의 인생과 너무도 닮아 있는 자

출애굽 사건- 광야-가나안 - 그 끝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타락하는 비극적인 앤딩이라면 

다윗의 여정- 택하심- 광야생활- 왕이 되 나가는 과정- 왕이 된 이후에 유혹에도 불구하고 넘어지지 않는 사건- 해피앤딩의 결말

다윗의 일대기- 왕이 되기 위한 과정- 왕이 되고 난 후의 통치의 과정- 그 중심에 하나님과의 한결같은 관계

그 변화의 중심이 되는 사건- 이제 광야에서 가나안의 입구- 여리고성에 해당하는 사건이 바로 예루살렘 정복 사건이다.  


원래 이 예루살렘 땅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분배하면서 유다지파에게 할당 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유다지파가 유독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은 쫓아내지 못합니다. 


(수 15:63)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삿 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왜 쫓아내지 못했을까? 

(삿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불신앙과 불순종... (너무 강해서,,,,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므로...) 


가나안 7민족 중에서 가장 안전하게 오랫동안 거주하였던 족속- 여부스 족속.. 노아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 (창 10:15-16...) 

그들의 터전 - 예루살렘, 그 이름의 뜻은 "평화의 도시" - 그들은 그 말 그대로 평화롭게 예루살렘 지역에 살면서 거하고 있었다. 


왜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하는가? 

헤브론은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북쪽을 다스리는데 어려움. 

남쪽을 남겨두고 북쪽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사정.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경계지역에 위치하면서 가장 안전한 천하의 요새. 


여호수아의 가나안 땅 분배이후 수백년 동안 건드리지 못한 여부스가 지배하는 예루살렘 땅을 정복하는 내용이 사무엘하 5장 6-9절의 짧은 절 안에 농축되어 있다.


이 절에서 이상한 부분이 읽혀지지 않습니까? 

6절: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 다윗의 군대를 조롱하는 말, 너의 군대 쯤이야...식은 죽 먹기지... 


그런데 7절에 그곳 시온성을 빼앗음. 예루살렘 성의 다른 말 - 시온성 


(삼하 5: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두 번째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 이것은 다윗의 군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여부스 족속을 가리키는 말. 

세 번째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도대체 누구냐? 


  • 해석상의 난제


유진 피터슨이 소개한 중세시대의 유대인 해석자들에 따르면 여부스 족속이 말한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은 유대인들의 신앙의 모체가 되었던 야곱(다리 저는 자) 이삭(눈이 어두어 아내와 아들로부터 속임을 당한 자)를 조롱하면서 이들을 모독하며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였던 여부스 족속의 유대인들의 신앙을 비하하는 우상이었다. 


이렇게 하면 이제 이 세 구절이 해석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6절의 내용은 우리가 섬기는 너희의 그 모자란 조상의 우스꽝스런 우상으로도 너희를 물리칠 수 있다. 

7절은 다윗의 입장에서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가서 그들이 우리를 조롱하면서 만들었던 그 우상을 제거하라. 

마지막 부분- 그들이 조롱하는 맹인과 다리 저는 그런 자들은 이스라엘의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역의 중점 -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38년 된 병자, 실로암 연못 사건, 맹인과 절뚝발이를 치유하시는 사건. 

왜? 그들의 중심에 있는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지 못하므로... 


적용- 우리 신앙을 비아냥 거리는 세상에 나도 모르게 영향받고 주눅 들어서 그들의 용어에 휩쓸려 버리는 신앙. 

철기로 무장하여 너무도 강해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라면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의 전쟁터... 

그들이 우리의 중심-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는 이상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다.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길이요,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길이다. 


이 여부스의 땅 예루살렘을 정복하니까 사무엘하 24장의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예배하매 그 곳이 솔로몬의 성전, 예루살렘 성전터가 되고 다윗이 정복한 여부스 족속이 열왕기상 9장에 보면 거꾸로 노예가 되어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 역군으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왕상 9:20-21)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중 남아 있는 모든 사람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여부스의 기에 눌려 조롱을 당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가나안을 정복하여 그것을 부리면서 살 것인가? 

광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 것인가? 

광야의 시대를 마치고 주님이 왕되신 왕의 시대를 살 것인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음 이 사건을 끝맺는 말씀 

(삼하 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히브리어 "할로크 브가돌" -다윗이 그 때부터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포용으로 전진하여 가니라


왕이 된 것이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된다. 

가나안이 타락의 시작이 아니라 더 큰 은혜의 시작이 되었다. 


어릴적 목동에서 부름받은 다윗은 왕으로 부름을 받을 때도 왕이 아닌 목자로서 부름을 받았다. 

왕은 사울이었으나 우리의 목자는 항상 당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의 목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목자로 여겼던 다윗은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인생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는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는 내 영혼을 다시금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그는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 인생이 험하고 어려워도 주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는 나를 상주시는 분이고 내 잔을 넘치게 하시는 분입니다. 

나는 주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 


기복신앙과 복의 신앙

기복 신앙은 복을 구하지만 나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말씀의 순종은 오직 복을 위함이지 내 성숙과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복의 신앙의 초점은 내가 복이 되는 것이다. 그 초점은 내가 변하는 것이고 내가 복이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삶을 복의 삶이 되게 하셨다. 

이새의 막내아들 목동 다윗은 이스라엘의 목동이 되었고 하나님을 목자 삼는 하나님의 양이 되었다. 

그 중심에 여부스 족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사건이 나온다. 

예루살렘은 트럼프가 수도 삼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여부스를 몰아내고 우리 안에 장남되고 절뚝발이 된 신앙을 걷어내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무릎꿇지 아니한 자 (롬 11:1-5)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역사에 있어서 그들의 반대편에 있었던 자들.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며, 때로는 그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게 하던 나라들.

공의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의 것을 취하고자 했던 나라.... 

 

애굽-바벨론-아말렉-가나안민족-블레셋-앗수르- 페르시아- 로마-알렉산더 제국....

의 공통점- 물질문명, 힘, 권력, 지식, 그 시대의 최고가 되고자 했던 나라...

신앙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돈과 성공이 최고다. 인간의 행복을 물질에서 찾는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는 마르크스, 레닌이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다 실패한 돌연변이나라. 

이미 역사적으로 실패가 판명된 인간 스스로 공의로울 수 없음을, 스스로 나눌 수 없는 존재임을 알려준 실패한 나라...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나날이 변함없이, 인간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아직도 건재한 신앙의 적.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냐 물으셨던 장소.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의 도시, 로마의 황제 캐샤르와 이스라엘에 파견된 분봉왕 빌립을 기리며 세웠던 바로 그 도시의 중심에서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난 저들과 반대로 낮은 자를 위하여, 가장 낮은 모습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외쳤던 바로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 


[딤후 2:20-21]

(딤후 2: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큰 집- 하나님의 나라 

금그릇 은그릇 - 세상이 추구하는 인간상, 목적...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금그릇 은그릇 뿐만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


세상- 금그릇은 귀하게 쓰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 천한 그릇.... 

하나님 나라- 주인에 쓰기에 합당한 그릇은 그릇의 종류에 관계 없이, 세상의 지위나, 학벌이나, 혈연이나, 어떤 배경에도 관계없이 깨끗한 그릇... 


교회는 금그릇 은그릇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만드는 곳이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 인간을 질그릇이라 한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서 은혜를 정의한다. 

우리는 자기가 금그릇이라 부르건, 은그릇이라 여기건 하나님 앞에서 깨지고 비틀어진 조각목이요, 질그릇이다. 


교회가 왜 불패하는가? 깨끗한 그릇 만드는데 애쓰는 것이 아니라 금그릇 만들려고 하기 때문...

더러운 금그릇은 버림받는 그릇-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 예수님을 버리고 뒤돌아 서는 부자 청년이다. 


그런데 깨끗한 그릇을 추구하는 삶의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다. 단절이다. 

하나님으로 가득 찰 때는 세상과 맞서고 승리할 때도 있지만 세상을 만나고 어울리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외로워진다. 

상처를 입는다. 실망하게 되고, 때론 절망하게 된다. 타협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다.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물리쳤던 엘리야가 그 고통 속에서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이제 죽어도 좋습니다. "라고 절규한다. 

모세도 그랬다. 

이제 죽어도 괜찮다고 제발 데려가 달라고 외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엘리야에게 사람을 세우라고 전한다. 돕는 자가 있다고 말한다. 

너와 같은 자, 너를 도울 자, 너와 함께 할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7천명의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세상에 무릎꿇지 않은 남은 자가 있다고 전한다. 


나 혼자라면 외로울 수도 있고 책임이 무거울 수도 있고, 그리고 자칫 교만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칠천명 중 하나라면 여유가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위로를 얻는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명, 돕는 자, 동역자, 함께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곳이 교회요, 특별히 로고스 교회이다. 

그들 하나 하나에게 임한 조각 구름같은 은혜가 모여 큰 비가 된다. 큰 은혜의 강물이 된다. 

이런 교회, 이런 새해, 이런 우리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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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 예배

에벤에셀의 하나님 (삼상 7:12) 


(삼상 7:12)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론 평원의 아벡에 포진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포진했던 장소이다.

이스라엘은 이 싸움에 패하여 4천여명이 전사하게 된다. 


블레셋군에게 대패를 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제사장이 있는 실로에 보관되어 있는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와서 전쟁을 다시 치루자고 해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온다.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이 진동할 정도로 환호하게 되고 블레셋 군인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전쟁터에 도착했다고 하면서 두려워 떨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도 떨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블레셋 군사들이 추스려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홉니와 비느하스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 3만명이 죽게되고 하나님의 궤마저 빼앗기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서 죽게 된다. 

성경은 엘리가 죽은 이유가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다."(삼상 5:18절)라고 증거한다. 


이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 제사장과 제사장의 두 아들은 죽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대패했으며 여호와의 궤는 빼앗긴 상황- 


사무엘상 4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브레셋과의 전쟁에서 대패,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 법궤를 빼았기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가 죽은 이야기, 그 충격으로 갑자기 애를 낳다가 죽은 엘리의 며느리, 그가 외친 말 ‘이가봇’, 말 그대로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난 상태입니다. 


반대로 블레셋군사들은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자기들의 신인 다곤 신전에 두었는데 이튿날 깨어보니 다곤 신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려저 얼굴을 땅에 떨어지고 머리와 두 손목이 잘려 나가 버리게 된다. 또한 그 지역에 독한 종기가 퍼져서 다른 지역, 가드로 옮기니까 그 다른 지역마저 환난이 더하여 독한 종기가 나게 된다. 옮기는 곳마다 환난이 오는 것이다. 그렇게 일곱달을 여기 저기 옮겨 다니다가 결국 블레셋 군사들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데 자기들의 죄를 사하게 되는 속건제로서 금과 송아지 같은 제물까지 더하여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게 된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성별하여 20년동안 거함 

-> 누가 여호와의 궤를 담당할 수 있는가? 거룩한 자. 아주 무명의 한 가정을 택하사 궤를 담당하게 함. 


이 때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고하여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저의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라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세상 즐거움과 향락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결국 그것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림)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하며 여호와께 회개하고 구원을 노래함. 

블레셋이 쳐 들어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뢰를 내려서 그들을 어지럽게 하여 전쟁에서 승리.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 실패했던 바로 그 장소가 승리의 장소가 됨. 


7:13절)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 왜 에벤에셀의 첫째 전쟁에서 실패하고 대패하고 제사장의 일가가 죽임을 당했는가? 

"나이가 많고 비대하여져서..." 

악한 제사장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의로운 자, 그러나 눈이 어두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두웠고, 자식들이 범죄해도 막지 못했다. 

어느 덧 모르게 굳어져서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못하고 몸이 비대해져서 영적인 것에 민감하지 못함. 

신앙생활은 삶이 어려워서 실패하지 않는다. 게을러서, 비대해서, 부유해서 실패한다. 

부유함의 의미: 애굽의 바로가 열가지 재앙중에 재앙이 조금만 지나가도 다시금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원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태도.... 부유함의 표현... 


2. 왜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보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단이 점령하지 못한다. 아무리 신천지가, 안산홍이가 기독교 흉내를 내어 본들 그들의 정체는 드러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다. 

 

3.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 작은 무명의 집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법궤를 보관하게 함. 

거할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법궤.

홉니와 비느하스-

다곤 신전- 

벧세메스- 

(베다니를 찾은 예수 그리스도) 


도저히 함께 거할 수 없는 그런 곳을 떠나 거처를 찾아 헤메는 법궤. 


4. 실패의 장소에서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돌이킴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축복의 장소가 됨" 

신앙은 부적이 아니다. 신앙은 철저한 관계다. 

초대교회 최대의 이단은 영지주의- 지식으로 믿으려 했던 자들... 지금의 추세....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