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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3편 (연합과 동거, 영생으로의 초대) 


(시 133:1)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감사와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계속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117편(2절) 다음으로 134편과 더불어 가장 짧은 시편인 133편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나눕니다. 


시편은 말 그대로 찬양이요 시이기 때문에 음미하면 할수록 그 의미를 새기기에 좋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아름다운 구절로 시작하지만 흘려 넘기시지 말고 그 말의 의미를 새기면 결코 흘려버릴 수 없는 명제입니다. 

Queer 문학- 에서 이 구절을 나타내면서 다윗이 동성연애를 옹호했고 요나단과의 관계를 보면 실재 동성연애자라고 하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형제 자매를 모두 합한 말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라기 보다는 동포, 가족의 공동체 개념이 큽니다. 

성경에, 더군다나 구약의 시대에 자매라는 표현은 쓰질 않았습니다. 그냥 형제라는 표현에 다 담겨 있는 말이지요. 영문성경으로도 형제라는 말을 "God's people",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형제 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정말 선하고 아름답습니까? 


가끔 형제자매를 만나 지난 회포를 풀며 사는 것은 즐거움일 수 있지만 동거한다는 것은, 함께 거하는 것, 즉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잠깐 만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쭉 함께 사는 것이지요. 

[요 8:31-32]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신앙 안에서 거한다는 것은 동행한다, 일회적이 아니라 죽 함께 거니는 것을 말합니다. 


  • <문제제기> 하나님의 사람들, 믿는 자들이 함께, 죽 동행하는 것, 함께 사는 것, 정말 선하고 아름답습니까? 


요즘은 부모가 자녀와 함께 사는 것도 힘겨워하는 세상입니다. 

처음엔 자녀들이 부모 모시며 사는 것을 원치 않는 듯 하더니 요즘은 부모들도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로 만나 살아도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져 가는 시대입니다. 

하물며 가족도 아닌 믿는 자들이, 혹은 혹은 동족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 

선하고 아름답기는 커녕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혼자 살면 살았지 죽기보다 힘든 것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흘겨 넘기지 말고 "이 말씀대로 살아야겠다" 생각하면서 나 자신의 삶을 적용해서 말씀을 읽으면 이 첫구절 부터가 어려운 구절입니다. 

우리의 본성, 더군다나 2018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아름다고 선하다고 하는 말은 너무 어려운 소리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 당시는 지금과 달랐나? 


133편의 제목을 보면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지었습니다. 

특별히 150편의 시편 중에서 120-134편은 따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성전에 올라가는 시>라는 것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세 가지 정도의 배경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처음에 다윗이 이 시를 지을 때에는 어떤 마음에서 이 시를 썼는가하면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함께 예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하나님께서 절기마다 적어도 일년에 세차례씩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드리길 원했지만 더 이상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이지 않고 산당 중심으로 흩어진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다윗 때에 완전한 통일왕국을 이루고 이제 시온성, 곧 다윗 성전에 하나님의 법궤를 들여와 온 이스라엘 민족이 모여 비로소 연합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광야 생활 이후로 이제 흩어졌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로 모여 예배드릴 때마다 이 찬양을 함께 부르며 하나로 연합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쁨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이 시편이 모아져서 문서로 기록되었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성전을 새롭게 지으면서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그들의 실패를 회개하고 하나님에 대한 민족적인 신앙을 잘 전수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들 사이에 서로 분열하고 우상숭배하여 흩어지고 식민지를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성전 중심으로 모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우면서 드렸던 찬양이 바로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3. 이후 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는 지금까지 일년에 많게는 세차례, 혹은 한 차례 각기 자기일에 충실하다가 유월절이라든지 이스라엘의 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 예루살렘 순례를 하며 드렸던 찬양이 바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왜 올라가냐고 하면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지역이 주변 지역 중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봉헌 된 이후에는 그 고지대에서도 열다섯 개의 층계를 올라 성전에 들어가야만 했기에.. (예전 제 모교인 서울 신학대학을 오르는 길...) 


그러니까 잃어버렸던 연합을 다시 찾게 된 기쁨, 흩어졌던 이산 가족들이 다시 상봉하고 하는 것처럼 기쁨과 감격으로 드렸던 노래가 바로 시편 133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흩어졌던 민족이 다시금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느꼈던 감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들의 면면을 보면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처럼 연합하기 힘든 민족도 없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은 야곱의 12자녀에서 시작된 민족이지만, 그 열두명은 자그만치 네 명의 여인에게서 태어난 각기 배 다른 형제들입니다. 요셉의 모습을 보면 알듯, 그 형제들간의 관계도 복잡하고 친하지 않은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에서 400년동안 종살이 하면서 그들의 혈통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더군다나 출애굽할 때에 그들은 허다한 잡족과 함께 같이 나왔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면서 그들은 가나안 민족들과 어울려 결혼도 하고 섞여 살았습니다. 

 다윗 왕국 이후에는 또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기며 사마리아 땅에는 완전히 이방 민족들로 채워지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방으로 쫓겨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한 복잡한 혈통과 역사가 있는 민족이 함께 연합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도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연합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연합하고 동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연합하여 동거함이라는 말은 "live together in unity"입니다. 

 서로 연합하여 같이 사는 것입니다. 연합이 없는 동거는 오히려 불행합니다. 

 형제들이 서로 연합하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서로 떼어 놓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롯을 떼어 놓고 이삭을 이스마엘에게서 떼어 놓고 야곱을 에서에게서 뗴어 놓고 요셉을 형들에게서 떼어 놓기도 합니다. 연합하지 못하고 동거하는 것은 오히려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서로 범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 2-3절은 연합하고 동거하기 위한 신앙적인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2절은 기름에 관한 내용이고 3절은 이슬에 관한 내용입니다. 또한 2절은 사람에 대한 내용이고 3절은 장소에 관한 내용입니다. 


(시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보배로운 기름은 곧 제사장에게 내린 구별됨의 표시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 오를 때에 반드시 이 기름부음을 통해 자신을 거룩히 하고 성전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시 133: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의 이슬이라는 것은 가나안 땅 저 북쪽에 가장 높은 산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 재료로 사용했던 백향목이 나는  가장 높은 산입니다. 꼭대기는 만년설이고, 여기서 녹은 물들이 요단강을 이루며 흘러내립니다. 곧 헐몬에서 시작된 생명의 젖줄에서 이슬이 생기고 이 이슬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의 생명체들이 살아갑니다.


이 기름과 이슬은 모두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은혜 입니다. 

분열되어 있는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가? 오직 성령의 역사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름은 또한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우리를 구별시켜서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또한 아픈 사람의 상처를 낫게 합니다.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 또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병자들을 치료케 할 때에, 
  • 교회의 장로들이 아픈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연합된 교회는 성도들의 상처를 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치료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기름은 향기를 냅니다.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고 함께 동거하며 나갈 때에 곧 세상에 향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요 13:34-35]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성도가 서로 사랑할 때에 예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연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기 포기 입니다." 덩어리는 섞어지기 힙듭니다. 

그러나 가루는 무엇을 넣어도 잘 섞입니다. 

이스라엘 예배의 방법중에 이 가루로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나를 온전히 부수고, 깨어져서 가루처럼 섞여지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재료는 조각목이 사용되었지만 이 조각목은 쪼개지고 가다듬어 금테를 입힌 다음에 성전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왜 분열될 수 밖에 없었는가? 

그들의 소유가 많아 분쟁하였다라고 말한다. 

지금도 소유가 많은 형제들은 동거할 수 없다. 소유로 인해 분열합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 자기들의 가축이 많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 기득권을 자랑하고 자기를 나타내려 하면 연합하고 동거할 수 없습니다. 


동거를 위해선 또한 인내하고 용납해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을 견디기 위해 인내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나에게 맞춰 하는 것은 곧 연합할 수 없게 만드는 생각이다. 

동거는 받아들일 때에 가능한 것이고 받아들이기 위해선 인내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연합하기 힘든 나라인지 설명했지요. 그들이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역사 안에서 였습니다. 


미국이 왜 강대국입니까? 

서로 다른 민족들, 서로 다른 정치를 하는 주들이 모여서 연합할 수 있기에 세계를 이끈 강대국이 된 것입니다. 

이 연합을 가능하게 한 것도 역시 정치보다는 신앙입니다. 


  • 형제자매, 공동체로 함께 산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일이다. 그런데 왜 성경은 아름답다 했는가? 그것은 공동체를 그리고 나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자들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마치 습지가 땅의 공해와 더러운 먼지를 흡수해 정화시켜주듯이,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의 공동체가 아름답다고 한 것이다. 

연합과 동거의 마지막 열매는 무엇인가? 

(시 133: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다름아닌 영생이다.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다. 

연합하여 동거를 이룬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천국이다. 

그것의 이 땅에서의 모델이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연합하고 동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신령한 기름부으심의 복을 이슬처럼 골고루 내려 주신다. 영생의 복을 성도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성도의 연합과 동거는 하나님의 주신 복이요 영생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 현대인을 가장 잘 표현 하는 말. 

주위에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외로울 때 만날 사람이 없다. 


예배, 흩어졌던 몸이 다시 만나는 시간. - 기다리는가! 습관적이진 않은가! 

여러분보다 내가 더 여러분을 기다린다고, 보고싶어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 매일 같이 이름을 불러, 얼굴을 그리며 기도하기 때문에... 

그런데 나보다 더 여러분을 보고 싶어하시는 분.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말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 중복하자. 그리고 사모함으로 교회에 나아오자.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다. 영생을 약속하셨다. 

 

Posted by 소리벼리

 

감사가 곧 행복입니다. (누가복음 17:11-19) 


11월 한 달은 한 해 동안의 우리 삶을 되돌아 보면서 추수하면서 감사하는 달로서 "감사"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등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병고침을 받고도 예수님께 다시 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단 한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차별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인으로 인해서 감격해 하셨습니다. 동시에 문등병을 고치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다른 아홉명에 대해서 섭섭해 하셨습니다. (17절 - 18절)

그러나 단순한 내용이지만 말씀 한절 한절을 들여다보며 묵상하면 더할 수 없는 신앙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펴 놓고 한절 한절 깊이 이 말씀을 음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눅 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Now on his way to Jerusalem, Jesus traveled along the border between Samaria and Galilee

  •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모든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과 같은 곳이고 우리가 궁극적을 가야할 하늘나라의 표상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마리아는 더럽혀진 땅이고 죄악의 땅이고, 유대인들이 상종치 않는 땅입니다.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수르에 의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을 때에 앗수르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하면서 혼인을 통한 식민화 정책에 의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피가 더럽혀진 사람들"로서 경멸과 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 갈릴리는 북쪽 끝의 도시이고 예루살렘은 남쪽의 도시이기에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이 사마리아 지방은 우회해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마리아 지방의 경계선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오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눅 17: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 그러한 사마리아 지역의 한 마을에 나병환자들이 살고 있었나 봅니다. 이들은 일단 문등병이 걸리면 추방되어 집단을 이루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가지 않는 그곳에서 함께 모여 산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의 병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문등병이라는 것은 아파도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병입니다. 죄를 지어도 무감각하고 이것이 죄인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손가락이 부러지고 상처가 나도 도무지 아픈 줄 모르는 병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문등병을 죄인의 상징처럼 중하게 여겨 저주받은 병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병보다 더 중한 고통은 일반일 누구와도 상종치 못하는, 어울리지 못하는 짖눌린 소외감에 있습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변두리에 사는 것이 바로 문등병자들의 삶이었습니다. 
  • 예수를 만나: 그렇게 소외되어 아무 낙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더군다나 누구나 회피하고 따로 고립되어 살 수밖에 없었던 문둥병자들에게 있어서 이 만남은 최고의 기회를 가져다 주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는 모든 문제와 병의 치료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것은 교회 오래 다녔다고 만나는 것이 아니고 성경공부했다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베데스다 은혜의 집에서도 오직 38년된 병자만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건 내가 그 분을 발견하고 그 분의 지나감을 놓치지 않는 자가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는데도 여전히 괴롭고, 두렵고, 힘들다면 다시 예수 만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다가 지금 이 시간 다시 힘들어 지셨다면 예수님 다시 만나셔야 합니다. 오늘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멀리서서: 멀리 서서)은 당시 문둥병자들의 생활 환경의 일면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적어도 50야드(백보)는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건강한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가 내 앞에서 지나가는데도 가까이 나가지 못하고 멀리서서 그분을 보는 것입니다. 죄인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가까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감히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지 못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멀리감치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 넘어 무리를 뚫고 지붕을 뚫고 나무에 올라가서 주님을 가까이 바라보다 주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처럼 비록 그렇게 멀리 서서 예수를 바라보더라도 예수가 그를 외면치 않으시고 주목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주 가까이 나아오지 않더라도 우리를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눅 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그들의 질병으로 인해, 죄로 인해, 사회적인 규범으로 인해 그들은 멀리서서 주님을 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는 먼 거리지만 그 거리를 채우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브르짖는 기도는 간절함의 표시입니다. 어떤 사람은 왜 꼭 큰 소리로 기도하여야 하냐, 하나님이 작은 소리는 못들으시냐 하면서 크게 기도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못 들으셔서 크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절하기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죽음의 길, 절망의 길, 소망없는 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주님을 붙잡으려는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르짖는 기도가 수없이 나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 3)”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특별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였습니다. 시편에는 그가 얼마나 자주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환란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 18: 6)”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30 : 2)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시 142: 1-2)”

또한 예수님 스스로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눅 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  5:12-16에는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갖다대시며 권위있는 치료의 말씀으로 고치신 사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는 그가 그 열 사람의 문둥병자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각자 그들이 온 마을이나 촌으로 가서 정결법 준수 여부를 감독하는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단순히 명령만 하셨습니다. 
  • 그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물러갔다는 것은 예수께 대한 신뢰를 표시하는 것이다.

가다가: 가는 도중. 자기도 모르게.... 말씀을 믿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얻은 깨달음.

처음부터 말씀 하실 때에 문등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다보니 문등병이 나았습니다. 순종할 때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 가득 물을 담아 손님들에게 갖다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들은 자기 주인도 아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항아리 가득 물을 채우고 이동합니다.요한복음 2장 9절에 보면 연회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좋은 포도주를 맛보고도 이것이 어디서 났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그 말씀에 순종했던 "종들은 알더라"하고 증언합니다. 순종하는 자들만이 주가 하신 일을 압니다. 경험합니다. 

 

14절에서 예수도 멀리 떨어진 채로 '나았다'는 선언도 없이 그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았다는 말 한마디나 어떤 다른 행위도 없이 그냥 제사장들에게 가서 확인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기 위한 명령입니다. 너희가 내말을 믿고 의지해서 제사장에게 나아갈 수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는 그 순종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앞 구절을 보면  

17:5: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17:6: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17: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니라. 

-> 믿음은 무엇이냐? 주께 받은 명령을 마땅히 다 행하는것. 주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 

믿음은 단지 믿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눅 17:15-16]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 고침을 받은 것은 열명인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주님 앞에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합니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18절)

어디있느냐?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누군가를 간절히 찾는 모습. 어디 있느냐? 다른 사람들은 어디가 있느냐?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  지금 온 자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은 자를 간절히 찾으시는 것입니다. 마땅히 올 사람들이 안왔다는 것입니다.


  • 대부분의 관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 예수님 만나서 응답받는 것. 그래서 응답받으면 할렐루야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응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는가?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우심을 받았는가? 그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풍성히 누리게 되었는가? 죄에서 멀어지고 주님과의 교제가 시작되었는가? 그들의 삶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는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 깊은 삶으로 돌아왔는가?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오직 내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지난 시간에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삶, 그 분이 누리신 그 사랑하는 삶,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누리시길 원하시는 그 행복으로 나오는 것. 

영광은 그냥 좋은 일 생겨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충만한 삶을 누리는 것, 그 행복한 삶으로 나아오는 것. 하나님과 교제하고 함께 하는 삶으로 나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문제해결하였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살아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영광이요 우상숭배입니다. 


  • 자, 지금 열명의 문등병자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 중 하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마리아인은 함께 다니지 않지요. 그런데 그들이 같이 있었다는 것은 문등병때문에 같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적인, 신앙적인 차이보다 훨씬 더 불행하고 가혹한 상황때문에 평상시 상종하지 않던 이스라엘 사람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이 치료를 받자 그들은 또다시 분리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분리가 예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가?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도 찾아가서 그들 구원하고 제자 삼지요. 즉 예수님 안에서는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명의 유대인 문등병자들은 고침을 받은 것 때문에 다시 사마리아인과 분리되어 사라졌습니다. 예수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고침받고 죄인의 길로 다시 들어간 것이지요. 

다시 말해 감사가 없는 생활이란 무엇인가? 은혜를 경험하고도 구원의 길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는 받아놓고도 멸망의 길로 다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감사가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9절) 

일어나 가라: 엎드렸던 것에서 일어나라! 회복하라. 가라: 이제 되었다. 완성되었다. 이루었다. 

주님은 엎드려 있는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여 주셨습니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 


* 감사하지 않는 자의 마음 

1. 이기적 본성

 아홉 문둥이들이 예수로부터 치유를 받고도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들은 이제 건강하게 된 이상 예수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 감사하는 자의 마음 

 이스라엘의 절기 :유월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초막절(수장절) 

 이 절기 만큼은 다같이 모여 기념하라. 기억하라. 하나님꼐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Thank-think (감사는 기억에서부터) 

 단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경험하는 것- 무교병을 먹고, 초막을 지으며.... 출애굽하던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어른이 옛 얘기 하면 그 얘기....몇 번째인가? 안 들으니까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니까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 

하나님의 역사-> 아무리 커도 기억하지 못하면 잃어버린다. 홍해를 건넌 후 3일 만에 불평 

오병이어 기적 바로 뒤에 폭풍우 속에서 주님을 보자 유령이다. 귀신이다... 잃어버린 제자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는 감사한다. 기억하지 못하면 현재는 언제나 불행하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는 감사하고 감사하는 자는 주꼐로 돌아오는 자이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는 구원을 완성시키는 자이고 그는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자이다. 그 영광을 누리는 자이다. 감사가 곧 행복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행복으로의 초대 (베드로전서 4장 7-11절) 


  •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쉴 수 있고 잘 수 있는 주일날 그래도 좋은 마음 먹고 은혜를 바라보며 예배드리러 나오는데, 찾는 은혜는 희박하고, 해야 할 의무와 계명들은 쏟아져 나옵니다. 처음엔 예수만 믿으라고 하더니 헌금도 내야 된다고 하고, 말씀도 읽어야 한다고 하고, 기도도 해야 한다고 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아예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합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힘든 계명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아니 상대방이 좋으면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할 것이고, 그저 그런 사람을 억지로 사랑할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런데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더니 급기야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내 몸과 뜻과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랑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사랑마져도 교회 안에서는 부담처럼 느껴집니다. 


  • [마 11:28-마 11:30]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얼마나 은혜로운 말입니까? 그래서 수고하고 지친 몸, 여러가지 짐으로 고단한 몸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피곤하고 지친 사람 모아 두고 갑자기 나의 멍에를 메라 합니다. 그래도 너희들이 세상에서 메는 짐보다 내가 주는 멍에가 쉽고 가볍다고 말합니다. 화가 납니다. 

나는 지금 짐도 무거운데 교회 왔더니 멍에도 얹어 줍니다. 

마치 공짜로 선물 준다고 동네 노인들 다 불러 놓고 보았더니 물건 팔아오라는 다단계 장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교회를 보기 시작하면 무슨 말을 들어도 곱게 보이질 않습니다. 은혜는 커녕 모든 것이 사기 같습니다. 

멍에를 메라는 것은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멍에만 얹어 주는 것이 아니라 소가 멍에를 메면 주인이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 내 인생을 주님이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선한 목자라는 것이고 그 분꼐 그 분의 겸손함과 온유함을 배우면 어떤 말씀이라도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짐,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한 짐, 병의 짐, 육신의 짐을 벗어 던지고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서로 봉사하라고 하며 이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해서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 마치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든 무엇이든 빼앗아 가서 만족하는 탐욕스러운 왕의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봉사하라고 하는가?


구원하셨으니 마땅히 그 은혜를 갚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현실적으로 성도들이 봉사하지 않으면 교회라는 공동체가 유지되기 힘드니까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봉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주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이라고 하니 봉사하면 주님이 영광받으시고 봉사 안하면 하나님은 영광 받지 않으시니 하나님은 봉사에 굶주린 분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 분이고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요 우주의 주재시요 수많은 천사들이 수종든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봉사가 없으면 불편하고 부족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교회라는 조직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것입니까? 헌금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운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야 하는 것이고 봉사는 교회유지를 위해서 어쩔수 없이 내야 하는 것입니까? 

말로는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면서 결국은 교인들의 봉사와 헌금으로 유지되는 집단입니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면 신학 따로 현실 따로, 신학은, 신앙은 교회라는 조직을 위한 변명꺼리 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계명은, 그리고 그 중에서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봉사라는 것은, 봉사하는 삶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가진 사랑을 함께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섬김이고 봉사입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하나님의 삶, 하나님이 감정,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요, 섬김이요, 봉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그 사랑의 삶, 돌봄의 삶, 봉사의 삶을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짐이 아니라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자 사랑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면 돌보고, 섬기고, 나누어야 하는데 사랑이 정욕이 되고 탐욕이 되니까 주기보다 받기만 원하고, 결국은 돈을, 우상을, 게임을, 사람보다, 가족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봉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고, 예배하고, 섬겨야지만 만족하시고 살아가시는 무의탁 노인같은 분이 아닙니다 .

그 분은 불쌍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사랑이 없어도, 헌신이 없어도 스스로 충만하시고 만족하시며 행복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 예배하도록, 헌신하도록, 봉사하도록 요구하시는가? 

하나님이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사랑을 알고 이 세상에 하나님 자녀답게, 하나님 닮은 삶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 읽은 본문은 베드로가 핍박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고 있는 편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30여년이 지난 AD 64년, 로마에 거대한 화재가 일어나 로마 전체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네로 황제가 이 도시를 자기 뜻대로 건설하기 위해서 일부러 화재를 내었다는 소문이 돌아 화재를 바라보면서 네로 황제가 수금을 타며 노래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흉흉했습니다. 이 민심을 달래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네로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는 기독교인들이 로마를 불타게 했다면서 이후 100여년간 극심한 핍박을 가하며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게 됩니다 .

이러한 때에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가 곳곳에서 핍박당하고 있는 그리스도 인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 (벧전 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위기의 순간에 먼저 한 것은 정신 차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기도해야 합니까? 정신차리기 위해서입니다. 파도와도 같은 고난이 다가오면 정신줄 놓치고 파도에 휩쌀리게 됩니다. 우왕좌왕 하다가 현재의 고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모든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 (벧전 4: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 고난의 때에 기도하면서 힘쓸 것은 역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 스스로도 죄에서 멀어지며 또한 우리 주위에 퍼져 있는 죄의 영향력으로부터도 가려지게 됩니다. 사랑의 반대는 죄입니다. 죄의 반대는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9절부터 11절까지 봉사하는 삶, 서로 섬기는 삶,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가장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가장 기본적인 삶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삶

기도의 삶이고 사랑의 삶이고, 그것은 결국 섬김, 봉사의 삶입니다. 


  •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Each of you should use whatever gift you have received to serve others, as faithful stewards of God's grace in its various forms. 

-> 여러분 각각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을 남을 위하여 사용하십시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가지 형태의 은사를 통해서 남을 섬기도록 여러분을 은혜의 청지기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봉사하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께로 남을 섬기리 위해 받은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의 번역인데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봉사하라고만 하면 마치 안해도 될 것을 해야하는 extra 짐으로 여겨지지요.  


달란트 비유 -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왜? 마땅히 사용하라고 주신 것을 사용하지 않고 묻어두었기 때문에 

왜?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주인되어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땋히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주셨다.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온 백성들에게 자원하라. 봉사하라. 

무엇으로? 출애굽할 때에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애굽사람들이 준 것으로....


어제 결혼식 가서 ,받은은혜 


unconditional love <-> conditional love 

sacrificial love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부부 

살아가면서 갈등이 늘 생긴다. 

그러면 화가 올라오고 싸우고 싶고 절대 용서할 수 없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감정이 지속되면 영적으로 영 불편하다. 

"이렇게 살아서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을까?" 나도 힘들고 애들도 힘들고 불행한 생각이 ....


행복하자. 행복하자. 그렇게 생각되면 용서하게 되고 용서를 빌게 되고 

안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스럽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아니마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것이 가정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아이들 양육하고, 학비 내고...가정 지출의 가장 큰 부분...

그런데 그것을 아깝게 생각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부모, 상식적인 부모라면 그럴 수 없다. 


내 사랑하는 가족이고 자녀이기에 마땅히 그 일을 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위해 고생하면서 그것을 행복이라 말한다. 

실재로는 그것 때문에 고생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고생을 행복이라고 표현한다. 


왜? 나를 위해 살고 나 자신 만을 위해 사는 것보다 그 가족, 식구들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맛을 주고 의미를 주고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조금 확장하면 저같은 목사는 교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고생하는 것이 사는 맛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너희들에게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선물을, 은사를, 달란트를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George Beverly Shea 의 간증 

1909년 캐나다 에서 감리교 목사의 여덟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경제 한파로 학업을 포기한 후 보험회사에서 세일즈 맨으로 일하던 중 NBC 라디오 프로에 나가  “가라 모세”를 불러 하루 아침에 일약 스타가 되었다. 방송출연 제의가 쏟아지고 돈과 인기가 굴러 들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에게 두려움이 몰려 들었다. 갑작스레 부와 인기가 찾아오니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가 하는 두려움과 언제 떠나갈 줄 모르는 그런 박수소리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아니라 대중들을 위한 찬양에 회의가 일었다. 


어느날 그는 자기 옷 주머니 속에 넣어둔 어머니의 손편지를 잃게 된다. 평소에 어머니가 좋아하던 싯구가 그이 마음을 때렸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그것과 바꿀 수 없다"... 



잠시나마 엄청나게 짓눌렸던 쉬아에게 짧은 글이 믿음과 확신으로 그의 마음에 다가왔다. “그래, 예수님만이 나의 행복이야!”라고 소리쳤다. 



그는 즉시 그 아름다운 가사에 곡조를 붙이기 시작했다. 바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시가 음악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쉬아는 자신이 쓴 찬송 곡조를 부르며 다짐했다. “긴 시간 동안 주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주님만이 행복임을 고백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바라던 삶이었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헌신이었다. 



며칠 후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을 때 쉬아는 확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주님만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방송국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일생을 통해 쉬아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결정이었다. 


 1절은 ‘세상의 부귀’보다 ‘예수님’을, 2절은 ‘세상의 명예’보다 ‘예수님’을 그리고 3절은 ‘세상의 행복’보다 ‘예수님’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찬송은 ‘세상 부귀’(1절)로 간단히 번역됐지만 영어가사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세상의 금과 은, 큰 재물, 많은 집들과 땅보다 예수님을 기뻐하겠다고 고백한다.  

1983년 74세 된 백발의 쉬아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 후에 굵은 베이스 음성으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불렀다. 수많은 회중의 끝없는 박수에 쉬아는 다시금 고백했다.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뜨거운 박수 갈채도 예수님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신앙과 감정 (잠언 4장 20-27절)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정이란 것은 항상 이중적으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감정에 얽메이지 말라. 감정대로 신앙생활 하지 마라. 감정에 의존하지 말고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등 감정을 위험한것, 혹은 부정적인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가장 핵심 본질은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 역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감정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은혜 받았다고 할 때에 그것은 감정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입니까? 


18세기 때에 미국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두 명의 목사님이 계십니다. 한 분은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고 또 한 명은 조지 휫필드 목사님입니다. 두 분은 한 시대를 이끈 리더였지만 굉장히 그들의 사역이라던가 특징이 굉장히 대조되는 목회자였습니다. 에드워드 목사님은 예일대학 출신으로서 나중에는 프린스톤 대학의 총장이 되기도 하는 전형적인 학자스타일의 목회자였습니다.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끼고 말투도 변화없이 읽어내려가는 스타일이었지만 하지만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는 그의 대표적인 설교처럼 그 내용이나 영향력은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했고 또한 변화시켰습니다. 이에 반해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호소하는 설교가가 바로 조지 휫필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연기자 수업을 받았던 사람으로 극적인 화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갔습니다. 사람들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 조지휫필드가 인도하는 집회에 모여들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이성과 과학의 시대라고 불릴만큼 이성이 강조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신학자들이나 일부 목회자들은 그러한 조지 휫필드의 설교를 위험하거나 혹은 이상한 집단으로 몰고가기도 했습니다. 이 두 명의 목회자들은 당시의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가임에도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호도가 극명히 갈리는 그런 설교가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나단 애드워드가 조지 휫필드 목사를 변호하면서 신앙생활에서 감정의 역할을 강조하면 쓴 책 이름이 [신앙감정론: religious affection]이란 책입니다. 그는 감정주의와 교리주의로 나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지성과 감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마음의 두모습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에드워드에 의하면 감정이 없는 신앙이란 불가능합니다. 참된 신앙은 본질적으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거룩한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에드워드의 이러한 강조는 마치 감정은 신앙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신앙과 감정을 분리시키고. 신앙을 지성적인 이해의 측면으로만 편협하게 고집해왔던 당시의 지성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경고가 되었습니다.  


그 책의 핵심 사항은 이렇다. 

1. 성경은 열정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신6: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마음이 뜨거워졌다(눅24:32). 

세종류의 사람이 있다. 스스로 불타오르는 사람, 주위에서 불타오르면 같이 불타오르는 사람, 아무리 해도 불타오르지 않는 사람이다. 

2. 열정은 삶의 힘이다. 

하나님을 열정을 다해 사랑하지 못하면 그분을 위해 큰 일을 하려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사실만으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절대 충분치 않다. 감정이 없는 교리에 관한 지식과 논쟁만 일삼는 수준의 신앙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수 없다. 

3. 열정은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자만이 세상과 죄를 버리고 주님께 나아갈수 있다. 마음이 감동되지 않으면 100원도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아깝지 않지만, 마음이 감동되면 1000만원도 아깝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열정을 자극해야 한다. 

4. 성경은 참된 영성을 ‘열정을 갖춘 영성’이라고 말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5. 신앙의 위인들은 열정을 갖춘 자들이다.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올때에 바지가 벗어지는줄도 모르고 춤추며 예배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솔로몬 성전을 회복하거나 모세의 성막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열정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6. 예수님은 열정을 갖춘 영성을 보여준 모델이시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땀이 피가 될 정도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심을 가지셨고, 또한 완고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무서운 분노를 터트리셨다. 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향해 우셨다. 

7. 예배는 우리의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찬양은 우리의 열정을 자극하는 수단이다. 예배, 기도, 설교는 무슨 역할을 하나? 열정을 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8. 열정 없는 메마른 마음을 가진 것은 죄이다. 

강팍한 마음이란 감정이 메말랐고, 하나님의 음성에도 움직이지 않는 무감각하고 무감동스럽고, 무엇에도 감동을 받지 못하는 돌같은 마음을 말한다. 열정이 내는 부작용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 부작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열정이 식어버린 것이다. 

 

감정은 믿음의 인생에 있어 경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정이 우리의 열정을 불러 일으킬 때에는 신앙생활의 자극제요 촉매제가 되고 생명력을 불러일으키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들, 미움, 시기, 우울감, 낙망함, 실망감같은 감정이 몰려오면 우리를 무너뜨린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감정에 치우지지 말라는 것은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신앙생활을 어렵게 할 때에 말씀으로 그것을 이기라는 소리이지요. 

은혜 있을 때는 감정이 우리를 이끌고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일로든지 내 감정이 상해있다면 더 이상 감정이 내 신앙을 이끌고 가지 못한다. 이때는 말씀으로 상한 감정을 회복해야 한다. 

내 심령이 상했을 때 우리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일은 그 상한 감정을 사람에게 풀려고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세상적인 수단으로 그 감정을 식히려 한다는 것이다. 은혜 있는 동안 감정이 내 신앙을 움직이는 열정이었기에 그 열정이 식으면서 신앙생활도 식는 경우가 많다. 예배에 소흘하게 되고, 기도하지 않으며 대신 사람들을 만나 수다떨고, 술마시며 다른 것에 집중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한다. 그러나 그 수단들이 내 상한 마음을 진정시키느냐? 그렇지 않고 오히려 내 상한 마음을 부채질 할 때가 많고 다른 부작용을 낳을 때가 많다. 우리가 마음이 상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시 51: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 상한 심령을 가지고 주께 예배드리라는 것이다. 은혜 받고 열정있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내 상한 심령, 상한 감정을 가지고 주께 찾아오는 자를 주께서는 멸시치 낳고 일으켜 주신다. 


(시 42: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상한 심령으로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셔서 일으켜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마음이 상해있을 때 하나님은 어떤 경로들을 통해서든 반드시 말씀해 주신다. 문제는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니면 내 상한 감정에 묻혀서 그 말씀을 외면하는가 하는 것이다. 

Ex) 가인(창 4장):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것은 받지 않으니까 그로 인해서 마음이 상했다. 그 상한 마음은 그 동생 아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했다. 그 상한 마음을 가지고 혼자 끙끙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 

[창 4:6-창 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인 위로로 오지는 않는다. 나 자신을 살피게 하고 때로는 지적하기도 하고 강권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내 잘못을 지적할 때 그것을 듣고 나 자신을 고치는 사람과 더 나아가 끝까지 반항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결과는 항상 죄악으로 끝난다. 이 말씀을 듣자 마자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벨을 쳐 죽이고 만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는데 그 말씀을 들은 가인은 아벨을 죽인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할 때도, 가룟유다가 예수를 배반할 때도,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때도 그들은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행한다. 그것이 인간의 상한 감정의 무서움이고 인간의 연약함과 아둔함이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내 마음이 상했을 때, 지혜있는 자는 하나님께 찾아오고 말씀에 귀 기울인다. 열정이 식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 마지막 힘을 내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 그 분이 하시는 말씀에 억지로 억지로라도 순종하며 따르는 것, 신앙의 힘, 성숙은 이 때 발휘 된다. 은혜 있을 때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면 한다. 그러나 내 감정이 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으로 그 감정을 이기는 것은 정말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행하는 모습이다. 


[잠언 4:20-27]

내 아들아 (하나님의 사랑표현) 내 말에 주의(집중-다른 것에 눈돌리지 말라)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호소와 권면)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영혼의 건강이 몸의 건강까지 보장-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마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터전입니다. 이 마음은 때로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기도 하고 때론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하는 광야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퍼지는 장소이기도 했다고 죄악이 일어나는 근거지가 되기도 합니다. . 

그런데 철학에서나 심리학에서는 이 마음이 주로 <지, 정, 의>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삶의 모습은 이 지, 정, 의 중에서 "감정-> 지식-> 의지"의 순서로 작동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냐면 하나님의 말씀, 즉, 지식을 먼저 주시고, 우리가 의지적으로 순종하면 감정이 따라오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때로 감정적으로 불가능한 말씀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이 따르질 않으니 그런 말씀을 외면하거나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성숙한 신앙인은 이런 말씀을 주시면 갈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순종하려고 애씁니다. 기도하게 합니다. 그것이 의지적인 순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적으로 순종하면 어느샌가 모르게 그 영혼이 불쌍해지고 이해가 가며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감정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 


나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무미건조하고 어렵고 부담스럽고, 습관적인 것이 아니라 재미가 넘치고 생명력있고, 열정있고, 적극적인 그런 것을 느끼고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고 하면서 책망받은 라오디게아 교회같은 교회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의 감정이 상해서 낙심되고, 견디기 힘들고, 어려워질 때에 주저앉지 말고 그 때에도 우리 영혼에 들리는 말씀으로 인해 상한 감정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힙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