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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이관대 (시편 8편 4-9절) 


한 대형 백화점에서 일하던 점원이 백화점의 물건을 슬쩍 하다가 걸려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자기를 쫓겨내는 백화점에 분노하며 쫓겨나는 날 엉뚱한 장난을 쳐 놓았습니다. 

백화점 안의 물건들의 가격표를 감쪽같이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아이들 장남감에 붙여 놓아야 할 가격표를 컴퓨터 코너에 가서  붙여 놓아 800백불 되는 컴퓨터가 30불, 40불되는 아이들 장남감 레고가 400백불에, 300불 되는 카메라는 8.99에 이런식으로 엉뚱한 가격표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다음날 백화점 문을 열었을 때, 이것을 알아채기까지 5시간이나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 다섯시간 동안 카운터의 점원들은 누구도 가격표를 의심하지 않고 계산을 했습니다. 자기는 그저 자기 일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알아차린 것은 고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싼 물건이 값싸게 되자 고객들은 장남감 가격이 되어버린 값비싼 물건들을 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장남감을 사기 위해 20불을 모아 레고를 사러 왔던 아이 하나가 그 레고 가격이 400불이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점원에게 말하게 되면서 백화점의 가격표가 이상하다는 것이 발견이 된 것입니다. 


가격표를 바꾸어 놓은 쫓겨난 점원의 범죄도 기가막힌 일이지만 그 가격을 의심하지 않고 5시간이나 판매했던 점원들, 잘못된 가격인 줄 알면서도 문건을 사간 몇 몇 고객들... 우리 주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린 이렇게 가격표가 뒤바뀐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인생의 가격표를 다 바꾸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전 탤런트 이순재씨가 인터뷰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순재 하면 모범적인 원로 배우이고, 배우라면 누구나가 존경하는 어른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출연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수없이 많은 드라마며 영화를 나왔지만 자기 출연료를 이야기하면 다들 놀랜다. 우리 때는 배우가 출연료를 높게 받지 못했고 처름부터 그렇게 받다 보니 지금도 적게 받는 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 어린 가수들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면서 자기도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출연료를 받는다. 그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도록 하는 사회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많이 버냐 적게 버냐로 평가해버린다."


단돈 몇백만원에 회사의 운명이 담긴 기술이 담긴 문서들을 해외로 팔아넘기는 사람들, 빚진 돈을 갚으라면서 사람의 장기마져도 판매하려는 사람들, 어제 뉴스를 보니까 한 40대 초반의 여인이 4살되는 딸과 함께 아파트에서 죽어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상태를 보니까 2달도 더 지나있었다고 합니다. 그 집의 우편함에는 빚 독촉장이 수북히 쌓여있었다고 합니다. 빚 때문에 40대 초반의 엄마가 딸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남편도 몇개월 전에 자살...왜? 빚때문에,,,,) 우리나라 자살율 1위....너무도 쉽게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우리 사회의 가격표는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가격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치대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대우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한 일- 바뀌어진 가격표를 다시 붙여주신 것

잃어버린 사람의 가치-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사람들이 돌로 치라 했을 때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아무도 만지지 않는 나병환자를 어루만지시고, 38년이나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죽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보며 눈물 흘리시며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 압권- 십자가 상의 강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효용성 면에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그런데 그에게 천국을 보장하신다. 


그 분은 우리가 그저 사람이기에 사랑하신다. 외모를 중시하지도, 성과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주님 앞에 나오는 자라면 대환영이고 주님께 나오는 자에게 천국을 허락하신다. 

천국뿐만 아니다. 


토요일날 나누었던 예레미야 3장

3장의 시작은 신명기 24장의 율법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율법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장을 받아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람이 다시 그 남편이 죽거나 헤어진다고 해서 전남편이 그 여자를 데려올 수가 없다. 그것은 땅을 더럽히는 가증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에 이렇게 쓰여있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네 남편이고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온다면 나는 너희를 축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말은 선포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이 영적, 육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구하는 모습이다. 

돌아만 오면 용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축복을 부어 줄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 약속은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확인하신다. 
세상에서 허랑방탕하여 돌아올 낯을 일어버린 탕자가 눈에 보이자 아버지는 뛰어 오셔서 그를 반기실 뿐만 아니라 옷을 갈아입히고, 반지를 끼워준다. 새신을 신게 한다. 용서가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회복시키신다. 


시편 8편에서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그리고 하나님 만드신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리고 나서 감탄하는 소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왜 만물보다 한없이 초라한 우리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고, 주의 손으로 만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비하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지녔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 개만도 못한 인간, 기생충같은 인간.... 

상종할 사람과 상종못할 사람을 나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못믿을 사람을 나눈다. 

친하고 싶은 사람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나눈다.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과 무익한 사람을 나눈다. 


그러면서 점점 혼자가 된다. 

누구와도 어울리기 싫어진다. 

사람 만나기가 무서워진다. 

우리 또한 남에게 어떻게 평가 받을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을 그렇게 평가하면서 결국 우리도 그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인간관계 자체를 두려워한다. 

앞으로는 더욱....더 더욱 그런 사회가 될 것이다. 


사탄이 이 땅에 들어와 저지를 범죄는 하나님 창조하신 동산의 모든 가격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다스렸던 만물을 섬기게끔 우리를 속였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 어떻게 속인 것일까? 

우리에게 영원을 생각하는 마음을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심어 준 것이다.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고, 이 세상은 죽으면 끝이라고....그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준 폭탄이다. 

그 의심은 인간의 모든 가치체계를 왜곡시켰다. 

인간의 삶의 방향을 잃게 하고 목적지도 바꾸어 버렸다. 


죽으면 끝이니까 옳고 그름의 기준도 항상 현재이다. 

지금 재미있으면 선하고 지금 재미없으면 악이다. 지금 재미있기 위해 아내와 남편을 배반하고 아이들을 버려도 상관이 없다. 

지금을 즐기기 위해서 남이 어떻게 되는 것은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위해 재산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즐기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한가? 현재를 즐기니까 건강해졌는가? 


현재는 즐기면 즐길수록 만족이 없고 고통스럽다. 자기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면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즐기면 즐길수록 나는 점점 황폐해져 간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나를, 사람을, 한 영혼의 가치를 그렇게 크게 생각해주는 분이 없다는 것. 


성경의 언어, 특별히 구약의 언어-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늘 심판, 죽음, 징계를 경고하신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신다. 

우리는 이 언어를 대하면서 때로 왜 하나님은 자기만 믿으라고 할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풀어주지 않으실까? 

왜 하나님은 우라를 옴짝 달짝 못하게 하실까? 불편해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셨는가? 

내 삶을 옴짝 달짝 못하게 하셨는가? 


다른 사람은 내가 모르지만 나 자신을 바라보면 그분은 날 너무 내버려 두셨다. 

난 수십번, 수 백번 탕자가 되어서 뛰쳐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책망치 않고 반겨주셨다.

책망한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이다. 

왜? 나갈 때마다 난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내 가치를 잃어버렸고,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언어는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겪어야 했던 탕자들의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겪었던 체험의 언어이다. 


  •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1) 하나님이 보시는 나의 가치를 재발견 하는 것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전율이 인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감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심을 믿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바냐 선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동시대 사람- 패역한 유다 사람들을 보시면서도 하나님께서 돌아올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

"너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인해 즐거이 부르시며 기뻐하신다" 

내가 누구이기에, 내가 무엇이관대 나로 인해 그렇게 기뻐하실까? 


2) 사람의 가치를 회복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

그리고 그 가치를 회복한 주의 자녀들이 힘써 만들어 가는 곳- 교회 

사람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곳 - 

세상은 사람을 외모로, 교육의 양으로, 직업으로, 성격으로, 연봉으로, 출신으로,,,할 수 있는 모든 기준을 가지고 나누고 평가하고, 평가절하하지만 

교회의 기준은 오직 하나 - 그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이므로, 하나님 안에 속한 자이므로....세상의 모든 가치를 초월해서 사람이기에 대우 받을 수 있는 곳이 되게 하는 곳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계명, 새 언약- 서로 사랑하라. 서로 발을 씻겨 주어라. 서로 용서하여라. 서로 섬겨라. 

그 한가지 목적은 잃어버린 가격표를 다시 붙여 주어라. 

 

Posted by 소리벼리

 

사랑, 부활의 완성 (요한복음 21장 1-14절) 


부활! 

부활은 단지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지 사흘 되는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나오는 장면, 그것도 놀라둔 장면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resurrection)이 아니고 단지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소생은 단지 부활의 표징,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살아나는 것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선포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가 다시 살아난 그 날, 그 새벽, 이 세상이 뒤집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던 세상, 죽음이 왕노릇 하던 세상, 죽음이 생명을 삼키던 세상에서 생명이 왕노릇하고 빛이 어둠을 이기고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이 도래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한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반응

1. 그런데 그 부활의 소식을 가장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가 부활했냐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에게 그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며 그들 자신의 영향력과 힘과 부가 심각하게 소멸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 (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2. 더 어처구니가 없는 부활에 대한 반응은 다름아닌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그 소식을 열한 사도와 다른 이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막 16: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이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를 만난 뒤 바로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역시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지금 예루살렘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를 비롯한 정치가들은 예수의 부활 소식을 가리기 위해 여러 조작질을 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자들은 함께 신앙생활 했던 여러 증인들이 부활 소식을 전하는 데도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그렇게 문을 꼭꼭 닫고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으려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다가오십니다. 


말씀으로-> 증언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은 “샬롬!”, 우리말로 하면 “안녕!”하는 인사의 말씀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가 하는 인사, 송구영신예배가 끝나고 하는 인사, 새배하러 가서 어른들께, 혹은 새배하는 자들에게 인사하는 말! 새해 (하나님의) 복 많이 받으세요!! 하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의 달력은 1월 1일을 새해로 하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한 교회력은 오랫동안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은 예수님으로 인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알리는 중요한 성경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날, 새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다시 고기 잡으러 가는 제자들...

아니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힘없이, 기쁨없이, 평안 없이 그저 고기 잡으러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일상의 어려움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하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삼일 만에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불평하듯이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일상에 남겨져서 힘없이 고기 잡으러 나온다.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기에게 남겨진, 자기 홀로 감당해야 할 세상을 본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시건 말건, 세상이 바뀌건 말건, 자기에게만 관심있는 자는 세상이 바뀌었는지, 전혀 상관이 없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보게 됩니다.  1) 가장 근본적인 이유야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사정이 있습니다.  2)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3) 가정사가 복잡해서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4) 기독교에 대한 불신,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5) 게을러서 들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신다는 겁니다.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뭐라고요.  “고기를 많이 잡았냐고요. 가정은 평안하냐. 직장생활은 한만 하냐. 사업은 잘 되냐. 너, 괜찮니? 아프진 않니? 살만하니?”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끝임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일해보았는데 열매가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시한 곳에 그물을 다시 던져보렴. 다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준 계명대로 순종해보렴…하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이시다.” 


육지에 올라서 하신 일은 더욱 제자들을, 그리고 읽는 우리들마저도 감동시킵니다. 

믿음 없는 그들을 혼내시거나, 설교를 하신다거나, 무엇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가져다 주시고 물고기를 가져다가 그들을 먹이십니다. 


왜 실수 했냐고?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왜 나를 배반했냐고? 왜 또 세상으로 갔느냐고 탓하시지 않고 네가 배고파서 그렇다. 네가 피곤해서 그렇다. 네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 십자가의 고통과 엘리엘레 라마 사박다니, 하는 영적인 고통과 심장이 파열되는 사랑의 고통을 뚫고 사망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동안 예수 없이 그들의 삶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얼마나 힘들었냐? 배고프지? 그 동안 고생했어…”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너무 너무 포근합니다. 너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우리는 탓하는데 익숙합니다. 난 힘든데 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넌 왜 네 생각만 하고 내 생각은 해 주지도 않니? 


그런데 주님은,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배고프지? 힘들지?"하는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장면, 시몬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아니 또 실패해도 내가 널 사랑한다. 네 사랑은 실패해도 난 널 끝까지 사랑한다....내가 널 사랑한다.....는 세번의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의 완성은 또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십자가보다 더 큰 고통  (마 27:46)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보면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동물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빚어 만드셨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를 지닌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고 증거합니다. 물론 그 형상이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동물들과 다른 점으로 이성적인 존재임을 들고 있지만 이것으로 설명이 되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되면서 인간과 비슷하거나 때로 높은 지능을 가진 동물들도 연구가 됩니다. (돌고래 - 80, 침팬지 120, 까마귀 40..) 


성경에서는 영이 없는 모든 생명체를 가리킬 때 짐승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도 영적인 활동을 전혀 못하면 성경은 짐승이라 표현합니다. 

불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있는데 흔히들 윤회라고 할 때에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 아수라- 인간도- 천신도의 서열이 있어서 전생의 업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데 동물과 인간 사이의 세계, 즉 동물같은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아수라"라고 표현합니다. 

흔히들 세상에서 개 만도 못한 인간...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 죽었다. 짐승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니 서로 탓하고, 변명하고,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는 짐승같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잠 12: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영의 양식은 말씀이요, 영의 호흡은 기도다! 기도와 말씀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 인간이지만 짐승이다. 그리고 그 짐승과 같은 자들이 받는 표가 666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짐승들과 같은 인간에게도, 아니 정말 짐승들에게도 하나님의 흔적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궃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동물들도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 만큼은 특별한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을 모르는 부모라 하더라도 자식만큼은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물론 안그런 예들도 간혹 있지만 그런 사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정말 이건 짐승보다 못하다고 충격을 받는 일들 입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농사짓던 땅을 팔고 집을 팔아 대학 보내는 집들이 많았습니다. 

간혹 자녀가 공부에 대한 욕심이 더 있어서 유학을 간다고 하면 가진 것 다 팔아도 모잘라 부모는 빚덩이에 않습니다. 

그래도 자녀를 위해서면 그것이 고통인줄 모르고 감당했습니다.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도 자녀를 위해서는 희생하는 마음으로 신기하게도 바뀌었습니다. 


옛날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그렇게 집팔고 땅팔아서 아들을 유학보내어 뒷바라지를 합니다. 뒷바라지 하느라 부모의 가세는 더욱 기울고 몸은 늙어 병들기도 합니다. 

아들은 그런 부모의 희생으로 오랜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해서 부잣집에 사위로 들어갑니다. 

부잣집 딸은 가난하고 늙고 병든 시부모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급기야 아들도 부모와 점점 멀어져 갑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 사람들은 분노하고 아들을 욕하기도 하고,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저게 사람이냐고 한 마디씩 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주위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들이라 부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막상 부모된 마음에서 보면 비록 그런 자녀를 위해 평생 일해 모은 집도 땅도 다 주고 나서도 자식에게 버림받는 인생이지만, 자신을 홀대하는 자녀가 서운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지들 잘살면 되지 하면서 누가 자식이라도 욕할까봐 우리끼리 사는게 편해...그러면서 살아오셨습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 안믿어도 부모이기에 품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짐승에게라도 남아있는 사랑의 흔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 마음은 부모의 마음보다 큽니다. 부모의 사랑보다 큰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것 입니다. 

하나님 명령 지키기 위해서 금욕하고, 스스로 불행한 것을 선택하는 그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고 하나님 주신 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자녀를 희생하고 다 주면 늙고 병들게 됩니다. 그 인생은 시들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자녀는 점점 강하고 유능해지며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부모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자녀를 보며 흐뭇해하며 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는 늙지도 쇠하지도 않는 창조주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살고자 하는 것- 성경은 그것이 죄요, 불행이요, 저주요, 결국 사망이라고 합니다. 

왜? 이 땅은 이미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고, 그 사탄이 인간을 종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맡는 현실을 실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고 싶어합니다. 아니 정성하지 않아도 부모를 떠나고 살고 싶은 것처럼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는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마음, 그러한 가능성이 곁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떠나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은 억지로 붙잡지 않습니다. 

내 분깃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떠나 살고자 하는 자를 붙잡지 않습니다. 

아담, 가인, 이스마엘- 하나님의 주권의 입장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바로가 악행을 행하고, 사울이 범죄하여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아담을 추방했다. 가인을 내어 쫓았다. 이스라엘을 내 보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넘기셨다고 기록하지만 삶의 현실에서 언제나 나가는 것은 인간입니다. 

추방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집을,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향해서도, 이스라엘 나라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은신처를 제공하시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탕자가 원한 것- 하나님이 가진 능력, 힘, 물질... 

그런데 하나님을 벗어나서 그것을 소유하면 더 행복할 줄 아는데 그 결과는 "허랑방탕" 

인간에게는 그것을 소유할 능력도, 그것을 누릴 능력도 없기 때문에....

자유가 선한 것이 되러면 나에게 계속적으로 유익해야 하는데 인간의 절제력이 없고, 무분별하고, 탐닉하고, 중독되는 존재, 종된 존재.. 


하나님을 떠난 인간- 결국 돼지의 식량을 먹으며 돼지와 함께 생활하는 짐승이 되어 버리는 것

탕자의 은혜- 깨달았다는 것, 아버지의 집을 기억했다는 것, 그리고 돌아왔다는 것, 자격이 없지만, 염치가 없지만,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돌아왔다는 것 - 돌아오는 자를 하나님은 이유없이 맞아 주신다. 회복시키신다. 잔치를 배푸신다. 


그런데 대부분 인간의 더 큰 문제, 깨닫지도 못하고, 돌아오지도 못한다. 자기들이 짐승처럼 산다는 것 조차 모른다. 그저 잘 먹고, 집있고, 차 있고, 돈 있으면 행복한 것 처럼 산다. 

영은 병들고, 관계는 깨어지고, 주위는 자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데 자기 자신에만 갇혀 있어서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롬 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예수의 성육신- 기다리던 아버지가 이젠 기다림을 벗어나 찾아오신 것... 

찾아와서 문등병자 (자기가 죄의 병에 들었지만 병을 느끼지도 못하는 자), 중풍병자 (말씀을 들어도 움직이지 못하는 자) 장님 (참 현실을 보지 못하는 자), 귀머거리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는 자) 찾아다니시면서 고치시는 것 


매인 자로부터 풀어주신 것, 우리를 붙잡고 있는 공중권세 잡은 자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것. 


우리를 풀어주기 위해서 감당하신 것 -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 형벌 - 인류의 역사상 가장 가혹하고 고통스런 형벌 


십자가 형은 죄수의 복숭아뼈 부분에 못을 박거나 또는 밧줄로 묶어서 고정시키고, 다시 두 팔을 벌리게 한 다음 두 손목을 묶고 거기에 못을 박아서 고정시킵니다. 이런 상태로 십자가를 세우면 죄수의 몸은 아래로 쳐집니다. 이때 두 팔이 벌려진 자세이기 때문에 횡격막을 압박하여 숨을 쉴 수 없게 됩니다. 죄수는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자신의 몸을 위로 올려야 합니다. 즉, 복숭아뼈에 박힌 못에 의지해서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하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이 과정이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게다가 그런 자세로 상체를 지탱하는 것은 고통과 함께 극심한 체력 소모로 이어집니다. 결국 죄수의 몸은 다시 아래로 쳐지고, 죽음의 고통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죄수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억지로 몸을 위로 끌어당기고, 그 과정은 극심한 고통을 낳고... 십자가 형벌은 이런 프로세스의 연속입니다. 숨을 쉬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스스로의 몸에 고통을 가하면서 몸을 일으키고, 힘이 빠지면 아래로 쳐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이죠.

죄수의 숨을 대번에 끊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고통을 2-3일간 겪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며 심지어 어떤 죄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일주일 가량을 살아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십자가 처형을 받는 죄수에게는 그의 목숨을 빨리 끊어주는 것이 매우 자비로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을 빨리 끊어주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리를 부러뜨리면 죄수는 더 이상 복숭아뼈에 박힌 못에 몸무게를 지탱해 자세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냥 몸이 아래로 축 쳐지면서 횡격막의 압박으로 질식해 죽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 이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 심한 채찍질... 

      -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비아돌로로사- 거리를 걸으시고 

      - 십자가에 달리심.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것 - 

탕자는 깨닫고 돌아오기라도 하는데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 그렇기에 돌아오지 못하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 가장 쉬운 방법, 그저 그 이름을 통해, 예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그 고통의 중심에서 뱉으신 한 마디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언제나 아버지라 불렀다. 

가상 칠언에 있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모세, 다윗, 선지자...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야훼, 여호와...나와 관계 맺으신, 나를 사랑하시는....


그런데 이 구절에서 만큼은 아버지나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 

왜? 

'하나님'은 공적이고 법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지금 예수께서 부르짖고 있는 탄식의 상대인 하나님은, 더 이상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법정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 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개인적 감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법적인 엄정한 관계가 우선하는 분위기임을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죄악의 심판관으로서의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내용. 


 '버렸다'로 번역되는 아람어 '사박크'는 히브리어로 '아자브'이다. '아자브'는 '내어버리다'는 뜻인데, 단순한 내어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유기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께 완전히 등을 돌리셨고, 예수께서는 영적 소외감과 고독감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은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것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화목, 그 거룩한 지성소에 쳐져 있던 휘장을 몸으로 찢으신 것. 

왜?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 앞으로, 그들을 데려오시기 위해...


그런데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님께 일어난 것 - 늘 교통하던, 대화하던, 지켜보시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져 버렸다. 

우리는 그 고통을 모른다. 

왜 우리는 늘 끊어져 있었고, 가끔 연결될 뿐이고, 또 끊어지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은 늘 붙어 있었다. 

그분이 기도하시면 아버지는 늘 들어주셨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기다리다 못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런데 십자가 상에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감당해야 했던 예수는 인간의 죄악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지는 고통을 경험하셔야 했다. 

영적인 존재가 오로지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이 없는 짐승이 되셨다. 


언제 깨어날 지 모르는 그 시간,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우리는 그 고통의 시간을 기도하면서 이기는데 

예수는 기도의 대상을 잃어버렸다. 끊어져 버렸다. 


[요 19:31-요 19:35]

(요 19: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요 19: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요 19: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왜 다리를 꺾으려 하는가? 십자가의 형틀에 있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려고?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일찍 치우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치워버리려고 행한 것 - 다리를  꺾은 것 - 그러나 예수는 이미 죽어 있었다. 

확인- 옆구리를 찌름 -물과 피


전 의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또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이 구절을 설명하고 있는 의학적 설명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방금 죽은 시체의 옆구리를 찌르면 피와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의학의 권위자들에 따르면 정상적인 심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드문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의학적으로 본문에서 피와 물이 나올 수 잇는 것은 심장이 파열되었을 때뿐이라고 합니다.  

그릇에 피를 담아두면 위아래 두 층으로 나눠지는데, 그것은 핏덩어리와 그 위의 액체인 혈청입니다. 곧 피와 물입니다. 

 

이 일에 대한 의학적으로 적절한 설명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심장은 병사가 옆구리를 찌르기 이전에 이미 파열되어 있었다는 것, 기르고 그 피가 심실이나 그 너머까지 넘쳐서 고여 있다가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핏덩어리와 혈청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은 심장의 파열이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심장은 파열되었을까?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육신의 가장 마지막 상태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 집중하셨던 것- 바로 사랑이라는 것 

심장이 파열될 정도로 십자가 상에서 주님을 죽음으로 인도했던 가장 결정적인 원인- 

바로 나를 위한 사랑. 심장이 말 그대로 터져버린 사랑. 

십자가의 형틀의 고통보다 더 컸던, 어떤 고통보다 더 컸던 것은 바로 나를 위한 사랑.  

내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그 사랑. 

 

Posted by 소리벼리

 

예수, 죽은 자를 살리다 (요한복음 11장 35-44절) 


예수의 삶에 있어서 변곡점, Turning Point가 되는 몇 사건들 

  • 세례를 받음- 공생애의 시작 
  •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힘으로 예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마 4:14, 17)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 예수의 사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오병이어 사건..) 
  •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베드로의 고백 사건-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사건.
  •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기록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 이 때부터 예루살렘이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기 시작, 요한복음의 이른바 일곱가지 기적 (Seven Sign) 중 가장 마지막 사건 


  • 베다니- 예루살렘 남쪽의 인근 마을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면 늘 들리던 마을, 베다니라는 의미는 "가난한 이의 집"이라는 의미로 가난한 자와 나병환자들의 거주촌, 서울로 치면 달동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살던 마을. 
  • 나사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 베다니에서 아내도 없이 두 누이와 함께 살던 가장. 
  • 성경은 특별히 나사로를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 또 예수님은 나사로를 가리켜 "친구"라고 불렀던 사람. 
  • 또 두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가난한 형편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대접했던 가정, 특히 마리아는 전에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방되고 구원을 얻은 여인,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여인- 주님과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   


1. 그런데 그가 병들었다. 그것도 아주 위급한 병, 죽을 병에 걸렸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이 때 사랑하시더니는 히브리어로 신적 사랑, 최고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병들었습니다. 

-> 주님이 우리를 최고로 사랑해도 우리는 병드는 존재, 병들수 밖에 없는 존재,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안에 있는 존재....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수 있다. 죽을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들으면 당연하게 여기는데 막상 그러한 일을 당하면 부정한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 

(행 14:22)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립니다. 당연히 빨리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요, 또 주님만 오시면 나으리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6절) 


이틀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달리 다른 일을 했더라면 기록되었을텐데 주님은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왜 이틀을 유하셨는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힌트가 되는 구절이 4절과 15절입니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오해하기 쉬운 해석- 병을 고치는 것 보다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지 오래된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믿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기 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멀쩡한 사람을 병나게 하고 죽게 하고 살려냄으로써 자기를 증명했다. 혹은 빨리 고칠 수 있었는데 예수님의 능력을 보이려고 이틀 동안 기다리셨다. 그 생각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백성을 희생시키는 자을 우리는 독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그는 나사로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틀을 그냥 기다리신 것이라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짓된 눈물이요, 가식일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단어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을 오해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무렇게나 희생당하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살리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요,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3. 이틀을 유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시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느 고로 실족하느니라" (9-10절) 

그러면서 곧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이제 깨우러 가자!" 합니다. 


  • 두 가지 종류의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자들 

1) 주 밖에서 죽은 사람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첫째 사망은 몸이 죽는 것이요 둘째 사망은 불과 유황으로 받는 영원한 영혼의 저주-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 둘째 사망이라 표현합니다. 


2) 주 안에서 죽은 자들 -> 잔다라고 표현 

-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 잔다. 

(마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 스데반이 죽었을 때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바울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가리켜 잔다고 표현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 

사데교회: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예수의 생명이 없는 이들은 모두 죽은 자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 

거급났으나 죽은 자들 - 자서는 안될 잠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잠자던 자 

깨어서 기도하라 했는데 잠을 자던 제자들 -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경험 한 것 - 배 밑창에서 잠을 잠 

삼손이 향락에 취해서 타락할 때마다 행한 것 - 들릴라의 허벅지를 베고 잠든 것 


다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시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느 고로 실족하느니라" (9-10절) 

그러면서 곧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이제 깨우러 가자!" 합니다. 


나사로가 잠들어있다. 왜? 빛이 없이 다녔기 때문에, 믿는 자가, 예수의 사랑하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던 자가 예수 없이, 성령 없이, 믿음 없이, 어둠에 다녔기 때문에 그는 잠들었다. 죽었다. 주님은 요나가 배밑에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신 것처럼, 나사로가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왜? 그것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실상, 내 민낯, 내 더러운 죄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둘기 처럼 순전한 선지자 요나가 잠을 통해 하나님가 평평히 맟서듯,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가장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 가정 안에 있는 죄의 민낯을 보게 하신다. 


4. 마리아와 마르다. 

두 가지 유형의 성도- 행동하는 신앙, 사색하는 신앙

영성가들은 이 둘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요 신앙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함께 가야하는,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신앙의 두 모습이라 여겼다. 즉 이 둘이 함께 할 때에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해하는 믿음이 아닌 살아가는 믿음이 된다는 것이다. 


나사로의 집- 주인은 나사로이지만 신기하게도 성경에는 나사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 반면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대화하는 장면은 여러군데서 나온다. 나사로를 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는 나사로인데 그것을 전하는 것도,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도, 그리고 돌문을 치우는 것도, 꽁꽁 싸여진 베를 풀어 놓는 것도 누이들을 통해서이다. 즉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두 누이에 대한 믿음의 단련이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두 누이다. 부모도 없이 살았는데 이제 가장 역할을 하던 오라버니마저 없다. 간절히 기다리던 예수님도 오지 않고, 이제 장례식마저 다 치루었다. 오라버니는 이미 장례를 치루고 무덤 속에 안치했다. 그 며칠 간의 시간은 두 자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자 마르다가 예수를 맞이합니다. 마르다는 행동이 먼저인 사람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서두르고, 서성대고, 먼저 행동합니다. 남자로 치면 베드로같은 신앙인입니다.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자 먼저 달려나가 예수님 앞에 섭섭함을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섭섭함을 표현합니까? 아얘 나오지 않음으로 그의 서운함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 자매와 대화하시면서 그들이 주님과 대면하게 합니다. 

어둠에서 잠자던 자들이 이제 빛된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신앙은 해결되지 않은 내 삶의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비추이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주님 앞에 나온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나리라" (23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제가 이것을 믿느냐?"  

하면서 잠자던 영혼을 깨웁니다. 

어둠 가운데, 절망에 빠져 있던 마르다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줄 내가 믿나이다." 베드로의 고백, 반석의 고백, 교회의 고백을 하게 합니다.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무작정 달려가서 위로하지 않습니다. 

(요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르다가 고백했더 바로 그 장소, 야곱이 거꾸러지고, 다윗이 회개하고, 베드로가 고백하고, 마르다가 고백했던 바로 그 장면처럼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아와서 비로서 마르다처럼 똑같이 "주님, 내가 섭섭합니다. 왜 일찍 안오셨습니까?" 하면서 그 발 앞에 무릎꿇은 마리아를 보고 함께 우십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 하다가 아무리 이해 안 가고, 납득할 수 없고, 때로는 성도에게, 목사에게, 주님꼐, 하나님께 서운한 것이 있을 때도 피하면 안됩니다. 그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 같이 눈물을 흘리십니다. 


5. 돌을 옮겨 놓으라! 

  • 마리아의 원망의 소리를 듣고 우신 주님은 무덤으로 갑니다. 무덤은 무엇입니까? 죄악된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를 삼키는 고통, 염려, 두려움, 부정적인 생각,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내 약점....
  • 지금 예수님이 그 곳에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성령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하는데 무덤 앞에 무엇이 있습니까? 큰 돌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행동파인 마르다가 정작 행동해야 하는 것에는 머뭇거리고 피하고 외면한다. 왜? 자기를 대면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우니까... 외적인 다른 일은 다 하는데 정작 자신의 마음 속 깊은 무덤 속은 열지 못하는 것이다. 
  • 내 아픈 속마음, 내가 여전히 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연약한 모습, 부정하고 싶은, 내가 홀로 만나고 싶지 않은, 하나님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내 굳는 마음, 타락한 마음, 몸에 배여 있는 죄악의 습관들....
  • 예수님은 내 마음 밖에 오셔서 이제 네 마음의 돌을 치워라하십니다. 하나님, 냄새가 나서 열 수가 없어요....썪은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주님과 대면하는 시간, 내 이름이 변하는 시간, 온전히 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날 살리는 시간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돌을 치우고, 예수님께 내 연약함을 모두 내어 드리고 주님 내 마음의 굴로 들어오세요. 내가 죽어있는 공간, 죽이고 싶은 나의 모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살려 주세요... 그러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임하고 생명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오직 여인들만이 예수가 계신 동굴로 새벽부터 일어나 갑니다.

그녀들에게 있는 한 가지 걱정은 무엇입니까? 누가 무덤을 가로 막은 돌을 치워줄까?

예수와 우리를 가로막은 돌을 치워줄까??

다른 제자들은 그 돌을 치우려고도 하지 않고 그 곳에 오려고도 하지 않는데 여인들은 어떻게 돌을 치울까 염려하면서도 아무런 대책이나 도움이 없이 그냥 예수 앞에 나옵니다. 무조건적으로 예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오니까 어떻습니까? 이미 돌이 치워져 있습니다. 예수와 우리 앞에 놓였던 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무작정 나오니까 어느 덧 돌이 굴려져 있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돌을 치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능으로 우리 모습 그대로 주님앞에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 다 아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께서 그 돌을 치워주십니다.

주님 앞에 가로막혀 있는 돌문을 주님께서 제거해 주십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그렇습니다.


6.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의 전부를 열면 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회개의 사건이요, 중생의 사건입니다. 중생은 한 번 일어나는 것이지만 회개는 우리가 주님을 잃어버릴 때마다, 잠에 빠질 때마다, 영적인 죽음에 빠질 때마다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영혼이 살아난 자는 이제 수족은 싸맨 수의를 벗어야 합니다. 수의는 죽은 자가 입는 옷입니다. 죄로 인한 옛 구습이요, 습관이요, 삶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새 영을 받은 자는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구원입니다. 신앙은 깨달음이 아니라 삶입니다. 


결론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을 사랑했던 나사로도 병들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도 역시 병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자들도 병들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도 끊임없이 병듭니다. 

병든 자는 서운함이 가득찹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교회가 원망스럽습니다. 만사가 귀찮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나오는 자는 빛이 비추입니다. 생명이 솟아납니다. 회복됩니다. 

예수께 나아오는 것- 놋뱀을 바라보는 것, 예수께 마음의 깊은 무덤을 여는 것

이것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듯, 우리는 주님께 나아와서 내 잠을 좀 깨워 달라고, 내 맘 깊은 악취나는 곳에도 빛을 비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오는 자는 살아납니다. "나사로야 나아오라" 외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산 인생을 삽시다. 살았으나 죽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산 사람 처럼 삽시다. 새 옷을 입읍시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