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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10.21 예배자 욥 (욥 23:10) (1)
  2. 2018.10.06 마가복음 11장 12-14절 (참 열매를 향한 교회) (4)

 

예배자 욥 (욥 23:10) 


(욥 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새벽예배를 쭉 하다보니까 성경을 전체적으로 강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7-8년을 설교하면서 강해하지 않은 성경- 계시록과 욥. 지금 계시록이 거의 끝나가는데 지나간 설교들을 보니까 욥에 대한 설교가 거의 없다. 

어렸을 때엔 피부병으로 한 참 고생을 해서 주위에서 욥과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왔던 욥이라는 인물이 어느덧 고난의 대명사로 피하고 싶은, 외면하고 싶은 성경으로 만들어 버렸는지 모른다.   

성경을 읽으면서 날마다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읽어왔기 때문에 웬지 욥기를 읽으면 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것 같은...그래서 욥기를 피해왔나보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욥기서의 특별함에 대해서 가끔 접하곤 한다. 

욥은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인물이지만 그가 내보이고 있는 신학이나 표현은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문학적이고 또한 가장 심오한 신학을 담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대척점에 서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주위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신앙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신앙이 때론 누군가에게 가장 아픔이 되고 가시가 되기도 하다.  . 


지금 계시록을 다루면서 새벽에 많은 은혜를 접하기도 하는데 계시록이 끝나면 욥기서를 깊이 읽으면서 성도들과 함꼐 은혜를 나누고픈 도전이 들었다. 

욥기를 대하면서 우리가 욥기를 깊이 있게 읽지 않고 내용만 이해하다가는 많은 구절을 오해할 수 있는 많은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 


우리가 읽었던 욥기 23:10절의 말씀은 욥기에서도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고 욥기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문장이기도 하다. 


많은 설교나 찬양의 가사로도 쓰이지만 욥기의 대략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자연스럽게 

"욥이 여러 고난 가운데 연단을 받아서 정금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리라는 미래의 소망, 현재의 고난을 이김으로 미래의 희망을 고백하는 것"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데 여러 성경의 해석을 보면서 이 구절이 잘못 읽히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이 구절의 여러 번역을 함께 읽어보자 


개역개정 -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공동번역 -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새번역 -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그런데 여기서 "단련"이라는 단어는 훈련이나 연단의 의미가 아니다,. 히브리어 "바한"은 "검사하다, 조사하다, 시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영어로는 test 혹은 examine의 의미이다. 훈련이나 연단은 미래를 기약하며 현재를 힘들게 하는 것이지만 test나 examine은 현재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은 

"내가 걸어온 길을 그가 아십니다. 그가 나를 시험해 보신다면, 혹은 주목하여 세심히 보신다면 내가 순금이라는 것을 아실것 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즉, 주님이 날 보신다면 내가 순금이라는 것을 잘 아실것이다는 표현이다.  

이 말씀은 욥의 친구였던 엘리바스가 욥에 대해서 정죄하고 공격할 때에 욥의 대답으로 나온 말이다.  

엘리바스와 세 친구는 "고난은 죄에 대한 징벌이다"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욥에게 이야기한다.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까닭없이 너를 치시겠느냐?
네가 말로는 의롭다고 하나 실상은 네가 악인의 길을 가고있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거야!
그 길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뜻을 돌이키시고 너를 환란에서 건지실거야!"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세 친구의 한 명이었던 발닷은 욥의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한 날에 죽은 것이라 말하면서 지금이라도 하나님꼐 죄를 자백하면 "너의 지금 모습은 형편없지만 나중에는 다시 창대할 것이라" 말한다. 


즉 이 말은 위로나 격려가 아니라 "너의 죄를 이실직고 하라"는 말이다.  


그러한 친구들의 추궁에 대한 대답이 이리가 읽은 23장의 말씀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뵈옵고 따져보면 
내가 얼마나 의인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텐데, (2-3절) 
전후좌우에도 아니계시니 답답하구나.(8-9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길이 주의 길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는데,
언약을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왜 나를 낙심케 하시는가???"


이런 말을 하니까 친구들은 더욱 화가 나서 네가 교만하다. 아직도 네 죄를 깨닫지 못하였다. 빨리 회개하라라고 다그친다.  

우리도 어떤 신앙인이 이렇게 고백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물며 욥같이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친구들과 같이 반응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있을까? 

그것도 축복받고 아무 걱정이 없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교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인생의 가장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의 의로움을 말하고 있다면 아마도 충격에 정신이 나갔거나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들도 똑같이 욥의 친구들처럼 그를 대할 것이다.  


그러면 욥은 왜 이러한 고백을 한 것일까? 그리고 욥만 이런 고백을 한 것일까? 

욥의 이 탄식, 하나님이 나를 바라 보신다면 내가 정금이라는 것을 아실텐데...라는 이 구절의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해 보자. 


욥기 1장에 보면 욥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가 나온다.  

1절에 보면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한다.  

5절에 보면 그는 자녀들이 잔치를 하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며 명수대로 번제를 드리면서 혹시라도 그들이 범죄할까 하나님께 항상 예배하는 자였다. 


이 때 사탄이 욥을 침소한다.  

9절에 보니까 "욥이 어찌 까닭없이 주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묻는다. 

사탄은 욥의 예배는 다 까닭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기 때문에 그가 예배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 자녀, 축복을 좋아하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지 하나님 당신 자체를 좋아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돈이 있으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지 돈 없으면 당신도 내침을 당할꺼라 말하는 것과 같다.  


사탄의 말대로 욥이 지닌 복이 다 사라져 버렸다. 하루 아침에 자녀들이 죽고 재산은 불타고 종들은 피를 흘린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 고백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욥 1:21) 

모든 축복이 거두어지고 난 후 욥은 범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예배한다.  


여기에 욥의 몸에까지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온 몸을 긁게 되자 아내가 무엇이라 말하고 떠나가냐면

"당신이 그래도 자가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 

무슨 소리인가? 

이지경인데도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겠느냐? 하나님을 찬송하겠느냐? 차라리 욕하고 죽어라하는 것이다.  

달리말하면 그 지경이 되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욥때문에 욥의 아내는 질려서 떠나간 것이다.  

욥의 예배에 기가 질린 것이다.  


그 후에 소문을 듣고 욥의 친구들이 멀리서부터 욥을 위로하러 온다.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도 처음에는 같이 재를 무릎쓰고 7일동안 욥에게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같이 머문다. 배려심이 있는 모습이다. 

달리 위로 할 수 없을 때에 그저 함께 머무는 것이다. 좋은 친구들이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욥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이 고난에는 까닭이 있지 않겠느냐? 왜 하나님이 무죄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겠느냐? 너의 죄를 기억해내서 하나님께 고백해라. 그러면 너에게 다시 복을 주실 것이다.  


그들이 욥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빨리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라. 너의 잘못을 찾으라.  

그런데 욥은 그 와중에도 예배하며 하나님께 묻는다.  

"내 예배를 다 열납하신 후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자기 예배가 의로왔다고 하니까 친구들은 말한다. 네가 의롭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결국 친구들은 무엇 때문에 욥을 정죄하는가?  

극심한 고난 중에도 욥이 여전히 이전과 같은 예배를 드리니까 화가 난 것이다.  

그런 고난이라면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데, 자기가 늘 해오던 대로 기도하고 예배하는 욥을 보고 화가 난 것이다.  


어떻게 욥은 그러한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자신을 의롭다고 여길 수 있을까? 친구들이 화날 만도 하지요?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의인을 없나니 하나도 없지요. 

왜, 어떻게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 할 수 있는가? 

그곳에 이 말씀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시편 26편 1-2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test me, try me, examine me..) 

-> 다윗의 시

여기서도 똑같이 단련이라고 해석한 구절-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다윗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완전하게 행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그는 온전히 예배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자들은 내가 의롭기 때문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깨끗이 하시고 온전케 하심을 믿기에 온전하다고 인정함을 얻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내 모든 죄가 사함받고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를 적시기 때문에 주 앞에서 내가 의로운 것이다. 주 안에서 내가 의로운 것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의 상황을 살피면서 욥의 회개를 원했지만 한 번도 예배의 처소를 떠난 적이 없는 욥은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불의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심을 믿었기에 고난 중에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신앙을 불순물이 없는 예배, 조건이 따르지 않는 예배, 고난 중에도 주를 예배하는 예배를 바로 정금으로 나타낸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온전함을 입는 것입니다. 

예배하기 전과 예배 드린 이후의 우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어야 합니다. 

예배 드리러 올 때는 상한 심령으로, 죄를 짊어지고, 연약함 가운데 올지라도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나갈 때에는 용서함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이제는 죄와 상관없이, 순전한 정금이 되어서 세상의 등불이 되어서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욥은 이 예배를 비밀을 알고 경험하고 누렸기에 하나님 앞에서 난 변화했음을 오늘도, 자녀들이 죽고, 아내가 떠나가고, 몸은 긁어서 피투성이가 되어도 자기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예배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와 세상 앞에서 의롭게 해 줍니다. 

예배는 단지 위로가 아닙니다. 

예배는 단지 격려가 아닙니다. 

예배는 단지 봉사가 아닙니다. 

예배는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고, 불완전한 우리가 온전케 되고, 불구자 였던 우리가 정상인이 되는 하나님의 수술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예배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앞에 우리의 모든 불의와 죄를 씻고 다시는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전의 옛사람은 벗어 버리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 자는 온전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예배자 욥은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하나님 앞에 대면합니다. 

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예배 드렸는데 내 예배를 받으신 여호와께서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욥의 고민이고 하나님을 향한 간구였습니다. 

이 질문에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38장부터 41장까지 하나님이 욥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하나님은 오히려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에 넌 어디 있었는가?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룬 경륜을 넌 다 이해하는가? 

이 모든 것을 넌 다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던지시는 계속되는 질문에 압도되는 욥은 자신의 질문을 포기해 버립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해 주실 때도 있지만 욥의 경우처럼 그 질문에는 대답치 않으시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실 때가 있습니다. 

"너의 질문을 버리고 나의 질문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고 내 질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질문이 하나님 앞에서 소용없음을, 무의미함을 알았기에 내 질문을 버리고 하나님의 질문을 품는 것입니다. 


(욥 42:2)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 42: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 42:4)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 42: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그렇게 친구들이 회개하라 할 때는 할 수 없었던 욥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뵙고 진정한 회개를 드린다. 

예배는 바로 내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질문을 가지고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결자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분은 주권자이고 전능자 입니다. 그분의 질문 앞에 우리가 설 때에 우리가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벗어나 그 분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됩시다.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됩시다. 

예배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과의 동행을 이루시는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마가복음 11장 12-14절 (참 열매를 향한 교회) 


마가복음 11장은 예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우리가 오늘 다룰 무화과 나무 사건과 성전 척결 사건이 나오고 마지막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성전에 대해서 "권위"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권위라는 것은 영어로 "authority" 결국 누가 이스라엘의, 누가 예루살렘 성전의 왕이냐를 두고 대제사장과 예수께서 대결하시는 장면이 마가복음 11장의 전체 그림입니다 .


첫 장면은 화려하게 시작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백성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면서 왕의 입성에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잠깐 돋안의 환영이었습니다. 


(막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왜 때가 저물어 베다니로 가십니까? 예루살렘에 머물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예루살렘의 주인이 왔는데 정작 실제로 머물 곳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3km쯤 떨어진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 촌과도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남매의 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가난한 마을 베다니에 적어도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왜? 예루살렘에, 그 성전에 도저히 예수께서 머무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밤을 유하신 후에 이튿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12절에 보니까 길을 나섰는데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가난한 집에서 한꺼번에 열세 명을 대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예수님은 한 끼라도 부담을 덜어주시려고 아침도 드시지 않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길을 나선 것일 겁니다. 그렇게 지나가시다가 오늘 우리가 다룰 "무화과 나무"를 보게  됩니다.  

 

당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아주 흔한 나무여서 어디를 가든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열매는 맛도 좋고 사람 몸에도 좋아 가난한 자들이 길에서 먹을 수 있는 식사대용이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유대 땅에 널려 있었고, 길 거리에 있는 무화과 열매는 누구든 따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시장하신 예수님도 무화과 열매로 식사를 대신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는 잎사귀 

그 열매 없는 나무를 보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건너 뛰어서 마가복음 11:20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는 잎만 시들해지고 줄기만 마른 것이 아니라 뿌리째. 아예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 완전히 말라버려 죽게 된 것입니다. 아니, 아무리 열매가 없어서 실망하셨다고는 하지만,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13절에 보니까 "아직 무화가의 때가 아니라"고 까지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기적은 남을 살리는데만 사용하셨습니다. 본인을 위해서는 어느 기적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고 주리실 때에 마귀가 떡을 가지고 와서 돌로 만들어 먹으라 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배고픔에 연연치 않으시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하시고 배고픔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배가 고파서 때가 아닌 무화과의 열매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니 곧 뿌리째 말라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표면적인 이 구절의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이상했던지 베드로가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니까 이 구절은 '어찌하여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까?'하고 묻는 구절로 나옵니다. 순식간에 무화나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 제철이 아닌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행위 또한 이상했기에 질문한 것일 것입니다. 

 

어떤 의도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단지 주님이 배고프신데 배를 채울 수가 없었기에 화가나서 아직 제철도 아닌 나무를 죽기까지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단순히 육적인 문제, 즉 육신의 배고픔의 문제 때문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배가 고파서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의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영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전은 화려해지고, 성전에서 매일같이 제사가 드려지고, 성전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지만, 허울 좋은 잎사귀 뿐이었던 것이다. 참 열매없는 형식만 남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모습이 바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지자 마자 관심을 가지고 돌아본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그 곳에 머물수가 없어서 날이 저물면 베다니로 피신하셨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금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도저히 주님이 머물 수 없게 되어 버린 성전. 왜?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화화 나무 사건을 사이로 두고 그 가운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성전 정화의 사건입니다. 그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 그 이면에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욕망에 눈 먼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사치들, 환전상들이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이 더럽혀지게 된 이유- 처음엔 좋은 의도였을 것입니다.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아니 이방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까지 그들은 예루살렘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제물, 양과 염소와 같은 가축, 성전세....그런데 성전세는 반드시 세겔로만 납부...각 지방마다 화폐의 기준이 달랐습니다. 

오는 길에 제물은 상하고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바꾸기 위해서, 예배의 편의를 위해서 성전에 환전상과 장사치를 허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같은 절기에 드나드는 사람들만 백만명 이상- 환전이나 매매를 통해 이루는 수입이 어마어마...-> 결국 이 수입을 놓고 제사장들과 세금을 걷는 관리들, 장사치들이 서로 뒤엉킨 이익집단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였다.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었다. 헤롯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화려하고 장엄하게 지어지고 있었고 그 곳에서는 수 많은 제사장과 서기관들,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도, 그 분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그들의 전통이나 고집하며 주님을 오히려 죽이는데 앞장을 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예로 들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고, 성전이라 하더라도 열매가 없다면 말라버릴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 경고대로 이스라엘은 황폐한 시기를 보내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불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같은 심판의 메시지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No! 

 

(마 7: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 구절은 교회가, 성도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심판의 때에 세상으로, 사탄으로 넘어갈 수 밖다는 심각한 경고를 합니다. 


[계 13:6-계 13:10]

(계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계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계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그 때에 사탄이 수많은 성도들을 미혹해서 이기게 되고 땅에 속한 자들을 지배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 때에 알곡과 쭉정이가 구별되듯 바르지 못한 교회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심지어 교회와 성도들 마져도 무엇이 잎사귀이고 무엇이 열매인지를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무성한 입사귀가 뜻하는 것과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과연 무엇인가가 우리 신앙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혼동이 일어나니까 신앙생활도 혼동스러운 것이요, 목적이 뒤틀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서 내 삶에 열매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가 이룬 성과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공부해서 그 만큼 성적이 나와야 열매가 있는 것이고,  일하는 자에게는 그 만큼 소득이 있어야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농사 짓는 자에게는 그 만큼의 소출이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신앙생활의 열매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앙 생활을 통해 거둔 내 소득, 내 성과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신앙생활해서 얼마나 부유하게 되었는가? 내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열매는 숫자와 업적과 함께 합니다. 교회의 열매를 얼마가 모이는지, 교회 재정은 얼마가 되는지 모든 것이 숫자와 이익으로서 집계가 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과 무화과 나무를 통해서 본 열매와 무성한 잎사귀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 삶의 열매는 무엇이고, 잎사귀는 무엇인가 분별할 수 있고, 또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바른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하고 잎사귀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무성한 잎사귀입니까?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지어가고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그 때의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도 훨씬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지게 되는데 그 목적은 성전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목적이 하나요, 로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기 보다는 로마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세상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다. 거기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오히려 넘쳐났습니다. 아이들과 여인들의 출입을 제한했고, 부정한 자들이나 병자들의 출입은 제한 되었습니다. 


또한 그곳은 수입이 넘쳐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받은 제물은 가난한 자들에게 되팔아져 또 부정한 소득을 거두었고 성전세를 환전하는 것도 그들의 마음대로 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잎사귀의 모습이 확실해 집니다. 

교회의 크기, 교회의 사람, 교회의 제정....이런 것들이 바로 잎사귀이지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교회의 열매를 교회 크기, 사람 수, 그 교회의 제정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은 잎사귀이지 열매가 아닙니다. 


말로는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결국 교회의 건강함의 판단 기준, 우리가 교회를 바라볼 때의 기준은 그 교회 성도수, 건물, 재정...들을 바라봅니다. 

성도들도 그렇고 목회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딜레마에 빠지고 그런 것에 만족이 없을 떄에 늘 불안하고, 낙심되며, 남들로부터도, 스스로도 고민하게 됩니다. 

80-90년대 -교회 성장 연구소

그 전제 - 바르게 믿으면 부흥한다. 그 부흥은 물론 숫적 부흥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숫자가 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전제를 반박하는 통계와 결과들이 더 이상 그 전제를 주장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면서 제안된 이론은 무엇입니까? 

어릴적부터 청소년때까지는 밥을 먹고, 운동을 하면 키가 자라고 몸무게가 자랍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아니 그 때는 더 자라면 비만이 됩니다. 오히려 살을 빼는데에 집중합니다. 

그때 부터 중요한 것은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균형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여기서 찾고자 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백성들에게서, 예루살렘 성전에게서 찾고자 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한 답은 성경을 좀 두루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열매의 첫번째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1)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겉모양인 잎사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직분을 받았는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판단하는 것입니이다.  성령의 열매는 외적으로 여는 열매가 아니라 성품의 열매요 삶의 열매입니다.  

 

2. 빛의 열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8-9)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다. 또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빛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 빛의 열매는 우리의 행실로 나타납니다.  즉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행실이 빛의 열매입니다. . 

 

3. 의의 열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9)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야고보 사도는 여기에 덧붙여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을 심는데, 그때 맺는 것이 의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의의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공동체를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불화를 주고,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킨다면 그 사람은 의의 열매가 없는 사람이다.  


4. 입술의 열매 (히 3:15)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5. 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8) 


아니, 하나의 열매도 맺기 어려운데 이런 다섯가지 열매를 어떻게 맺습니까? 죽어도 못합니다. 난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가? 

열매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무진장 애써야 되는가? 


(막 11: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제사장과 서기관들, 장사치들, 환전상들이 그렇게 성전 안에서 사리사욕을 탐하고 욕망에 눈이 멀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돈을 더 의지했고, 권력을 의지했고, 자리를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당장 이익 앞에서 말씀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고 자기 당장 앞의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삶의 끝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사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무화과 나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제대로 믿어야 한다.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믿음의 구체적인 행위가 기도이다.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해서 구하는 것을 다 받아야 한다. 

 

기도가 안된다? 왜 기도가 안되는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의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기 위해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빛의 삶을 살아야 하고,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찬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이 말씀- 목회자로서의 내 삶을 붙잡아주는 말씀이자 현실에서 나를 늘 갈등하게 만드는 말씀. 

그런데 우리가 나눈 성령의 열매, 의의 열매, 입술의 열매, 빛의 열매, 화개의 합당한 열매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통계를 낼 수도 없다. 

마치 영이신 하나님을 보이게 하기 위해 우상을 만드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열매들을 눈에 보이는 통계로, 숫자로, 건물로 보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자 타락이다. 


난 나와 우리 성도가 정말 무엇이 열매이고 잎사귀인지를 흔들림없이 새겨 놓기를 바란다. 거기에서 흔들리면 교회의 방향과 목적과 그 결과물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올 한해 우리교회에 좋은 일이 많았다. 정말 좋은 성도님들이 오셨고, 교회 재정도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다. 

지난 주간 그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난 내가, 우리 성도가 인내하고 참은 신앙의 열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 말씀을 주시면서 너 왜 잎사귀 보고 좋아하니? 하면서 꾸짖으셨다. 


좋은 일꾼이 오고, 교회가 넉넉해져도 내 삶에 앞에 말한 신앙의 합당한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일 뿐이다. 주님은 그런 나무를 심판대 위에 올려 놓는다고 말씀하셨다. 


그 열매는 오직 믿음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음주부터 우리는 각각의 그룹을 나누어서 삶의 열매를 이루기 위한 훈련을 할 것이다. 

그 훈련에 기대와 열심을 가지고 동참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당부하고 축복드린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