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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깎인 용사 (사사기 16장 22-31절) 


사사기 - 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실패했는가? 

왜 은혜의 땅에서 은혜롭게 살지 못하는가? 


지난 주 - 기드온: 소심하고 연약한 자를 큰 용사로 부르시는 하나님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숫자를 철저히 줄이고 빈항아리와 횃불 (자기 뜻, 자기 의를 버리고 오직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신) 을 가지고 미디안을 대적하게 함. 

큰 용사는 무엇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 골리앗이라는 외형을 보았더면 대적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오직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능멸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나서게 된다. 무모한 용기가 아니다. 그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울이 그에게 사울의 검과 갑옷을 주었을 때에 "익숙하지 않은 고로..." 그는 자신의 삶에서 익숙한 방법을 가지고 나왔다. 양들을 돌볼때 그들을 지키는 수단이었던 돌팔매의 명수 

   그것을 통해 담력을 키웠다. 사자도 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적인 믿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용되고 훈련된 믿음이 있엇다. 그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임상 경험이 있었다. 

                                                         

 기드온과 다윗과 정 반대의 편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용사 - 삼손 

 오히려 교회 바깥에서 많이 회자 되는 인물 - 

 머리 기른 남자를 보면 삼손...영화와 연극, 회화나 조각의 주요 주제.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 

 사사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예하여 다룬다. (13장- 16장) 

  

 그의 출생- 영웅의 서사 

천사가 그의 출생을 알림 - 셰레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경에 나와 있는 가장 큰 능력을 부여 받은 인물 - 솔로몬 (지혜), 삼손 (힘)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사건으로 유명 

삼손은 혼자서 블레셋을 상대 - 나귀으 턱뼈를 가지고 천명의 블레셋 군사를 죽임. 

삼국지의 조자룡, 관우보다 더한 역사상 유래없는 용사. 


그러나 그의 끝은 시작처럼 훌륭하지 않다. 

비참하고 비장하고 초라하다. 

이스라엘을 20년간 이끌었던 그의 죽음 앞에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옹족인 유다인들에 의해서 블레셋에게 넘겨졌다. 


사사기의 전형이다.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행복하지 않고 은혜는 경험했는데 기쁨이 사라졌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가 아니라 시작은 좋았는데 끝은 비참하다. 

왜 그랬을까? 


13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 또 짓는 죄, 다시 짓는 죄.... 회개 후에 또, 토한 것을 먹음...

왜? 자존감이 무너지고, 정체성이 사라지고 사탄의 참소의 빌미를 제공.. 한 번 습관들이면 벗어나기 힘들다. 


그 결과 -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다. (2절) -> 일을 해도 열매가 없다. 결과가 없다. 이것이 죄의 결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을 이야기한다. 

12절) 마노아가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14절)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마노나- 나로 염소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15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지 못함이니라 

-> 그럼 15절은 무엇을 위해 준비한 것인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자식 준다니까 신에게 바치는 우상제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17절) 

달리 말하면 그 말이 안 이루어지면 하찮게 여긴다는 소리? 그들의 복을 기원하는 우상에게 하는 소리 

이름을 왜 묻는가? 넌 어떤 존재이구나. 그 정체와 한계를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이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 내 본질,

그리고 피조물에게 지어주라 하시는 것 - 이름을 통해서 지배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 기묘자 (Beyond Understanding)-> 네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이름,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이 물으면 누가 보냈다 하리이까? 

스스로 있는 자가 보냈다 하라. 

아니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 마라. 난 나다. 난 이름으로 제어받지 않는다. 


그래서 삼손이 태어난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라는 의미 


그런데 삼손이 커서 제일 먼저 한 일 - 블레셋의 여인을 보고 결혼시켜 달라. 

삼손 - 여인들 이야기 

세명의 여인 - 첫 번째 아내, 블레셋 인

들릴라 

그리고 들릴라 만나기 전에 갸사의 기생(16절) . 

 

딤나 -  에돔의 후손이며 아멜렉의 본거지가 딤나이고 야곱의 아들 유다가 창녀로 둔갑한 다말과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곳. 여러가지 죄악의 본산지가 이 곳 딤나인데 하필이면 삼손은 그곳으로 내려가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

딤나에서 한 일 - 젊은 사자를 찢어 죽인 일 - 8절_) 그 사자의 주검을 본 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끌이 있는지라. 

9절)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않았다. 

-> 사자의 주검에서 나온 꿀- 부정한 것. 죽은 것은 부정한 것 그런데 그것을 먹고 부모에게도.... 


자, 삼손은 그 출중한 능력에도 실패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자신의 삶을 허비했고, 방탕하여 스스로 온갖 고난을 자처했습니다. 우리는 삼손이 저지른 실수를 통해 우리 신앙인이 저지르기 쉬운 전형적인 방식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신앙적인 실패들을 진단할 수 있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잘못된 신앙습관으로 인해 다가올 문제들도 피할 수 있습니다. 

 

1. 그는 자기 성질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라 감정의 사람. 

 그는 자기 성질을 다스리지 못했고 빈번히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를 내곤 했습니다. 그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기는 복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내를 꾀어 자신이 낸 수수께끼를 푼 블레셋 사람 30여명을 불같이 화를 내며 죽여 그들의 옷을 취하기도 했고 그렇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들판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15장 7절을 보면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11절에 보면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그러면서 또 다시 1000명을 죽여 버립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한 번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나 명령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감정대로 움직였고, 자기 맘에 안들면 다 쓸어버리는 자였습니다. 


2. 다른 그의 약점은 그는 정욕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당할 자가 없을 만큼 강한 자였지만 도덕적으로는 자기를 통제할 수 없는, 아니 주위의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는 육체의 정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이면서도 늘 여인들과의 추문이 뒤따르는 자. 여자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세상적인 욕망을 쫓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능력을 다 잃어버리고 결국은 눈이 빠져서 맷돌이나 돌리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가진 힘의 원천을 끊질기게 묻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강, 지혜, 능력, 사랑을 끊질기게 물어 못쓰게 해버리지요. 

어느 누구도 실패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는 우리의 삶의 습관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실수를 통해 회개하지 않고 고치지 않고 돌이키지 않을 때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점점 죄에 무딘 자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가 신앙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완전히 소진시키고서야 비로서 자신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해구나 후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는 “이건 내 삶 속에서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야. 난 그 부분엔 항상 넘어질 수 밖에 없어. 이건 내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부분이야. 이게 바로 내 모습이야”하고 포기하거나 합리화시킬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어두운 한 부분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내어놓기를 바라십니다. 삼손이 잘못한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지도 않고 단지 습관적으로 죄를 반복했던 그의 무감각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의 악순환을 끊을 능력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고 지금도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솔직하게 그 분에게 내어 놓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실수, 허물을 내어놓고 정면으로 부딪치고자 할 때에 우리에게 그것을 이길 능력을 주십니다. 


3. 세 번째 그의 실수는 그가 주위에 좋은 친구들을 두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특별한 임무를 위해 그를 선택하셨지만 그는 건전하지 못한 친구들과 어울렸고, 그의 친구들은 그를 잘못된 길로만 인도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면서 누구와 어울리는가? 그것은 우리의 전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선택입니다. 우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그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에 방해가 되는가?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를 살펴보아 신앙에 유익이 되는 사람을 즐겨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다양하게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인간관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인간관계의 중심, 내가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고, 만족을 얻으며, 즐거음과 행복을 느끼는가? 그 사람들이 내 신앙의 유익한 사람인가? 아니면 내 신앙을 소진시키는 사람인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잘못된 교제는 우리의 사고를 방해하고 삶을 망가뜨립니다. 


4.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삼손의 실수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는가? 영적인 일에 진지하고 하나님을 진지하게, 성실하게 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이면서도 항상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 일에 매달렸습니다. 자기 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은 욕망에 이끌리며 행동했습니다. “해서 기분 좋으면 했고, 기분 나쁘면 죽이거나 불을 지르는 것”이 삼손의 행동양식이었습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서 태어났지만 삼손은 늘 하나님의 계획엔 무관심했고, 자기 육신의 욕구대로만 살았으며 그 결과 그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상으로부터도 버림받은 무가치한 사람으로 되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린 20년 동안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지 못하다가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었던 것은 단 두 번 나오는데 한 번 죽기 전 자신이 묶여있던 집을 무너뜨릴 때를 제외하면 그가 목이 말라 부르짖었을 때입니다. 육신적인 목마름이라 할지라도 그가 부르짖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물을 내리셨고 그래서 그는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이름붙이기도 했지요. 인생의 대부분을 그는 충동적으로 성급하게 자기 능력대로 행동했지 결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 분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예비하시고, 도움을 주십니다. 삼손은 자신이 목마를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목마름이 지나자 또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이라는 것, 하나님을 진지하게 예배한다는 것은 날마다, 매 순간 마다 그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분의 인도하심과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손의 생이 마감했으면 그는 정말 비참한 삶으로 끝을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후였지만 그는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기도했습니다. 
(삿 16: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그렇게 마음먹자 하나님은 잃어버린 그의 힘을 회복케 하셨고 그가 영웅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도록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수많은 적들이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기 위해 세운 다곤 신전에서 삼손은 가운데의두 기둥 사이에서 그 기둥을 밀어내어 모든 이방신전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 3000명을 죽게 합니다. 애초에 삼손을 보내신 목적을 완성하고 죽게 합니다. 

대개의 경우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파했던 다른 일반적인 사사와는 달리 삼손은 영웅으로 태어납니다. 날 때부터 천사가 그의 탄생을 예비했고 그는 블레셋 사람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삼손과 같은 능력을 모두 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 세상에서 눈멀고 머리 잘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능력이 있음을 알고 교만하여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 합니다. 내 뜻, 내 정욕, 내 욕심, 내 성질대로만 살아가다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모두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엉망이 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이젠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날 사용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삼손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무릎꿇고 부르짖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택하신 어떤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누구에게나 창조의 목적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뜻의 중심을 발견할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고 발휘활 수 있습니다. 

큰 격려가 되는 부분은 실패의 연속을 살다 간 삼손이지만 하나님의 명예의 전당, 믿음의 선진들을 기록한 히브리서 11장에 그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야기 해 줍니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들어 쓰시고 그를 사용하여 선하고 위대한 일, 그가 맡기신 사명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삼손과 같은 능력,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이상 허비하지 말고 마지막 남은 여생. 하나님께 진지하게 우리의 삶의 목적과 사명을 물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너를 넘어지게 하고, 네게 장애가 되며, 내가 네 삶 가운데 역사하게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을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잘못된 성질, 정욕대로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내어놓고 주님을 찾을 때에 주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가치를 아시고 우리 안에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아십니다. 우리 혼자 사용하면 그것은 사라지고 결국 눈먼 삼손처럼 맷돌만 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이 그 분의 능력대로 일하게 하실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큰 용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 (사시기 6장 11-16절) 


홍해를 건너 요단강을 건너 드디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게 된다. 

사사기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분배하고 죽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여호수아- "모세가 죽은 후" 에 시작 

사사기 - "여호수아가 죽은 후"로 시작 


홍해를 건너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정복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까지 왔다. 

우리의 신앙 여정으로 표현을 하면 구원받아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면서 참 예배의 맛도 보고 순종하면서 평생의 기도의 응답도 받고, 신앙의 깊은 은혜도 체험했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나에게 가나안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기도의 신비도 알고, 나름 신앙 생활 하면서 복도 받고 은혜도 받고, 교회에서 직분도 받고, 리더도 되었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행복한다. 참 안식이 있는가?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뭐가 잘못된 것인가? 


사사기서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나안은 가졌는데 정작 하나님은 잃어버린, 축복은 얻었는데, 정작 영적인 평안은 잃어버린, 기도 응답 받았다고 나름 뿌듯하고 만족했던 내가 어느날 보니 교만해지고, 삶은 게을러지고, 온갖 세상의 향락에 빠져 도대체 안믿는 자와 다른 것이 없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수 더 뜨는 그런 영적 타락의 극치에 빠진 그리스도인의 철저한 실패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이른바 하나님을 통해 복을 얻고자 했던 자들이 복을 얻자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기복신앙의 결말을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사사기이다. 

사사기서의 결론은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사사기서 1장은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자신 만만하게 가나안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로 시작된다. 

그런데 사사기서 끝부분을 보면 한 레위인과 그 아내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끝이 난다. 한 레위인이 첩을 얻었다. 아내가 아니라 첩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첩이 바람을 펴서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도망하게 된다. 그런데 레위인이 그 첩을 데리러 친정 베들레헴으로 간다. - 큰 줄거리를 보면 마치 호세아서를 연상시킨다.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맞은 호세아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는 듯.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지역- 레위인(에브라임) - 첩 (베들레헴) 

여인- 행음 -그런데 행음한 여인이 친정으로 간다. 

남편은 그 여인을 데리러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도대체 누가 행음을 한 것일까? 그 레위인은 과연 누구를 위해 예배하는 자인가? 미가의 제사장 사건... 


베들레헴에서 그 여인들 되찾아 돌아가려 하는데 장인이 붙잡고 하루만 더 머물게 하다가 먹고 마시면서 3일을 더 유하게 되다가 이제 레위인의 직무를 위하여 길을 떠나다가 중간에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 머물러 숙박을 하다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그 첩이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레위인은 그 첩의 시체를 12 토막으로 쪼개어 이스라엘 지파에 이 사건을 알리고 이로인해 베냐민 지파를 몰살하게 되는 사건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 하게도 사무엘서에 보면 바로 이 베냐민 지파 사람 사울이 초대 왕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대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신앙의 흉내는 내는데 자기 생각대로 믿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 중에 이 사사기의 교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각 시대마다, 지파에 맞게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신다. 

악한 그들이라도 구원의 손길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시대에 부름받은 자가 바로 사사이다. 


이번주와 다음주에 걸쳐서 사사기서를 대표하는 두 명의 용사로 불리우던 사사, 그렇지만 너무나도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두 명의 사사, 기드온과 삼손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1. 기드온 

  • "또 짓는 죄" 

사사기 6장부터는 기드온이 등장합니다. 6장 1절이 어떻게 시작하냐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신앙생활 중에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죄. 우리의 자존감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갖게 만들어 관계를 깨뜨리고, 점점 마음이 완악해지게 하는 무서운 죄. 


하나님은 또 짓는 죄를 싫어하신다. 잘못된 습관.. 오늘 성경공부를 통해 나누게 될 잘못된 습관. 이스라엘의 잘못된 습관- 우상숭배... 그들의 잘못된 욕망의 결과, 불신앙과 불순종의 결과 -> 미디안 


  • 미디안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고나서 맞은 후처,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식이다. 그리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과는 먼 친척의 관계였습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갈 때에 미디안족속을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그들은 모세와 함께 가지 않았다.그들은 이스라엘 전체 민족에 비해서 작은 민족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 보다 훨씬 강한 민족인 가나안을 정복하고도 지금 하나님 앞에 반복적으로 “또” 범죄하니까 미디안에게도 꼼짝 못하는 약한 민족이 되는 것이다.   


  • 부르짖음에 또 응답하시는 하나님 

결국 미디안의 손길이 이스라엘 전 민족에게 미쳤을 때에 이스라엘 전체 민족이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삿 6:6-7]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성경은 두 절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백성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었음을 이야기한다. 반복해서 죄를 지어도 부르짖어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또 용서하신다. 부르짖는 자를 결단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사사기를 보면서 어찌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석게 또 죄 짓고, 또 죄짓고 그런가만 보지 그럴 때마다 그들이 부르짖는 것은 쉽게 넘겨 버린다.  

고난을 당할 때에 부르짖을 수 있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표시이고, 특권이고, 능력이다. 

문제는 고난이 왔는데도 부르짖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고, 고난이 왔는데도, 삶이 황폐해지고, 우울해지고, 영혼이 죽어가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목사로서 성도를 대하다 보면   저 분은 정말 기도해야 하는데 할 정도로 안타까운 처지의 성도들이 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열심히 믿는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엔 위급한데 정작 본인은 괜찮다고 한다. 사시기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훨씬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꼭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고, 사업이 망하고 시험이 떨어지고 해야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 영혼에 만족이 없고, 평안이 없고, 자꾸만 어두운 생각이 들어오고, 두려움과, 불안과, 절망과, 좌절감이 몰려올 적에 그러한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자녀답게 살게 해 달라고, 사명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 다시 정욕과, 탐욕과, 습관적인 죄가 나를 엄습할 적에 내 영혼이 강건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부르짖음의 응답 - 기드온 


  • 기드온 

기드온은 어떤 자였는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자 (11절) . 왜? 미디안 족속이 두려워서…. 

원래 밀은 타작마당과 같은 큰 장소에서 황소를 끌고 다니며 타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미디안 몰래 포도주틀과 같은 작은 기계로 조금씩만 타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어떤 자였는가? 므낫세 중에서 가장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약한 자. 

믿음도 별로, 집안도 별로, 그 집안 중에서도 더욱 연약한 자. 

그를 가리켜 무엇이라 부르셨는가? 너는 큰 용사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2절) 

이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자를 통해서,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이 정말로 함께 하신다면 강한 용사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함께 하는 것이 너의 힘이다. 


물고기 낚고 있는 베드로의 배에 올라 "내가 너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75세 된 자식 없는 노인 아브라함에게 "네가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나이 80된 목동 모세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라!" 

불구자 에훗을 통해,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 

어떻게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갈렙이, 여호수아가 그렇게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린 큰 용사다. 큰 용사는 다름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이다. 


  • 사사기 7장 미디안과의 전투 (9절- 18절) 

본문 9절은 "그 밤에"란 구절로 시작된다. 그 밤은 어떤 밤인가?  

기드온이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과 몇가지 사연을 거쳐서 미디안 족속과 아말렉 족속과 전쟁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모으니 3만 이천명 정도가 모인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보시고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들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여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사 7:2) 하면서 두려워하는 자를 돌려 보내니 2만 이천명이 돌아가고 만명이 남게된다. 지금 미디안 병사의 숫자는 자그만치 13만 5천명이다.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가나안에 취해서 힘으로,  돈으로, 빽으로, 하려 했던 세상의 방법을 제거하시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돌아가도자 하는 자, 신앙으로 이기지 못할 자를 돌려 보내니 만명이 남았는데 하나님께서 "백성이 아직도 많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서 개처럼 핥아서 마시는 자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또 다 돌아가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가가 무엇입니까? 고난을 주어서 허겁대고 물질에 넘어가고, 세상에 무릎꿇는 자들을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그만치 9천 700여명이 돌아갔다. 3만 2천명 중에서 3만 천 700명이 다 사라지고 300명만 남은 것이다.  

자꾸 줄이기만 하시는데 여러분 기드온의 심정을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그리고 미디안을 치라고 연약한 자 기드온을 불러놓고 자꾸 힘을 실어도 모자란데 하나님께서 너무 많다.. 줄여라. 더 줄여라... 하면서 내가 의지하고 있던 것들을 자꾸만 없애고 줄이고 하실 때 그런 상황을 내가 겪는다고 생각하면 난 과연 그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 밤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라는 말씀이다.  

- "그 밤은" 내가 의지하는 것을 모두 내려 놓는 시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시는 시간이다. 나의 입장에서는 어려움과 고난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제 의지할 것이 없냐? 이제 내가 너의 써포터, 돕는자, 심부름꾼이 아니라 너의 주인, 너를 다스리고, 너를 인도하는 구원자로 등장하는 시간이다. 


여러분! 예배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변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관점입니다. 인간적인, 세상적인 관점이 바뀌어서 영적인 관점, 믿음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 속에서 세상적인 관점, 세상적인 기준에 대해서 세뇌당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진 실력만큼 사는 것이 최상입니다. 가장 잘 되었을 때가 그렇습니다, 자기 그릇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나에게 맡겨진 것만을 하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의 인생, 찌질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 믿음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꿈꾸게 하시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게 하시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믿음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은 자기 인생의 크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기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미지근하던 인생이 열정을 품게 되고, 안된다고만 여겼던 것들을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도저히 상식밖의 일을 명하십니다.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라. (16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1) 나팔 :

  • 이스라엘의 전쟁은 항상 나팔을 분 자들이 가장 앞에 섭니다. 나팔은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사망권세를 멸하시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며 외치며 진격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기드온의 명령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기준과 잣대로 부정하게 적용했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듯 이들은 기드온의 말을 듣고 순종하며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그것이 곧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논쟁으로 시간 끌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에게 순종하며 나아갈 때 전쟁은 승리합니다. 


2) 빈항아리

항아리는 담는 것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항아리는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 영혼입니다. 깨지기 쉬운 연약한 우리 마음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빈항아리를 가져오라 명하십니다. 내 욕심, 내 판단, 내 기준 다 버리고 오직 순종하는 빈 마음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와서 그 빈항아리를 깨뜨리라 하십니다. 부스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숫자를 의지하고, 약을 의지하고, 환경만을 의지하는 가득찬 항아리를 비우고 가져와서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 "항아리가 뭘 뜻하죠?" 하고 묻는데, "넌 거기에 뭘 담고 싶니?" 라고 되물으신다. 항아리에 무엇을 마실까...의 물을 담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무엇을 먹을까...의 양식을 담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횃불을 담으라신다. 횃불은 성령입니다. 내 두려움과 내 욕심과 내 기준을 버리고 그 속에 성령의 기름, 성령의 충만, 활활 불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기도로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대로 너희도 그리하여....(사 7:17절) 


기드온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는 연약한 자였고 소심한 자였다. 미디안이 무서워 숨어서 자기 먹을 것을 타작하던 자였다. 

군대가서 화장실 가서 초코파이 먹던 모습처럼...


가나안에 들어가 오히려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하고 가나안의 노예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은 기드온을 택해서 큰 용사가 되게 하셨다. 

신앙인들이 실질적으로 의지하던 힘과 숫자와 물질을 철저히 버리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게 하셨다. 


2013년 이 설교를 첫 준비하면서 묵상햇던 글을 읽어 보았다. 

"자꾸 숫자에만 눈이 간다. 내가 이겨야 할 숫자. 내가 감당해야 할 숫자. 내가 살아야 할 숫자. 내가 써야만 하는 숫자. 내가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숫자...." 

자꾸만 숫자에만 눈이 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속 숫자를 없애신다. 계속 줄여나가신다. 숫자를 보면서 절망하고 숫자만을 위해 기도한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내겐 믿음이 없는 것일까? 헛된 믿음만 있는 것일까? 믿음이라 여겼던 고집만 있었던 것일까? 사라지는 숫자를 보면서 입술이 타고 믿음이 타고 마음이 탄다. 하나님, 내 눈에서 숫자를 지워주세요. 숫자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네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숫자를 지워 주세요.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게 하세요..." 


그땐 정말 한 주 한주를 버티는 것이 믿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졌다. 

숫자가 많아지니 숫자가 날 시험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적은 숫자를 가지고도 시험하시고 때로는 큰 숫자를 가지고도 시험하신다. 

내 믿음을 보기를 원하신다. 


큰 용사는 크던 작던 숫자가 아닌 하나님을 보는 자다. 

믿음으로 숫자를 극복하는 자다. 

적은 숫자에 민감한 자는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잊고 

큰 숫자에 민감한 자는 교만함 가운데 하나님을 잃어버린다.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불신앙이고 

교만함 가운데 잃어버리는 것이 불순종이다. 


예수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미 가나안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편안하신가? 기쁨이 충만하신가? 

그렇지 않다면 난 사사기서의 백성들처럼 사는 자들이다. 

가나안은 얻었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내 뜻대로 신앙생활 하는 자다. 

신앙 생활을 흉내는 내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사라져 버린 죽은 신앙인이다. 


큰 용사여,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자! 

 

 

Posted by 소리벼리

 

여호수아 7장, 아이성, 아간, 아골, 끝없는 싸움 

 

  • 출애굽기와 여호수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도 같은 구약의 복음을 나타내는 성경입니다. (기독교인의 복음의 핵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역사의 가장 중심-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 초대교회 공동체 - 어떻게 구약을 바라볼 것인가?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출애굽이니 가나안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주는가? 마르시온- 구약 폐기론자, 미완의 역사, 복음의 관점에서 구약을 재조명....구약의 말씀을 신약의 복음으로 재해석 
  • 특별히 출애굽기가 성도의 거듭남, 애굽으로부터, 죄로부터의 구원, 즉 중생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사건이라면 여호수아는 성도의 성화, 하나님과 연합하고 동거하는 가나안의 정복이라는 해석이 나타남. .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리고성 정복을 나누었습니다. 

성화의 여정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사탄이 아닌 나 자신입니다. 

성화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내 일부분과 그 분의 일부분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 내 왕으로서 주님을 모시고 실재 그러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매 순간, 내 삶의 전부를 주님과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재로는 내 삶의 중심으로, 내 왕으로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그리고 내가 필요한 것만 신앙생활을 통하여 얻으려 합니다. 성형수술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은 내 이름을 바꾸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내 잘못된 부분만 고치려 한다고 했습니다. 

내 필요를 채우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 분의 필요대로 쓰임받으려 사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것을 못하게 합니까? 내 자아입니다. 자존심입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담 이후로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을 대로 살았던 이 자아가 주님을 입으로는 영접했어도 내 마음, 내 중심, 내 삶 전부를 내어놓지를 않습니다


내 마음문울 굳게 닫고, 견고하게 자기의 울타리를 치어 놉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우리 영은 반응하고, 변화하게 되어 있는 것이 진리인데 여리고성처럼 견고하게 울타리를 쳐 놓은 심령 때문에 말씀의 은혜가 임하지 못합니다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말씀이 떨어져도 열매맺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주가 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양각 나팔 불고 소리를 내지 말고 성을 돌라는 것은 불평하지 말고 온전히 예배함으로, 찬양함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우리의 입"입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 훈련되어 있는 입은 우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훈련되지 못한 감정은 논리도 없고, 규칙도 없고, 죄의 통로이자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내 말이 내 생각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입은 불처럼 분노에 불붙이고, 낙담에 불붙이고,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은혜 없는 말, 훈련되지 못한 말은 우리를 점점 여리고 성에 갇히게 합니다

그 입을 찬양의 입술로 바꾸고, 예배를 통해 마음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의 전투 이후에 오늘 나눌 7장의 내용은 우리 자아의 싸움이 얼마나 끊질긴 것인가를 다룹니다. 

중생은 한 번의 사건이지만 성화는 끝없는 싸움입니다. 

여리고성의 전투에 이은 아이, 아간, 아골의 내용을 중심으로 끝없는 싸움이라는 제목으로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나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을 나누어 봅시다. 


1. 아이성 (황폐한 산) 

  •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7:1) 

- 여리고성 점령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왕으로 모시는 사건) 

- 그런데 아이성은 나를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해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1절에만 두번, 7장 전체를 통하여 "온전히 바친"이란 말이 6번이나 반복 

- 우리의 신앙이 주님을 중심에, 두지 못할 때 우리 삶은 다시 황폐한 산이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이게 된다. 


  • 정탐꾼의 보고 

- 백성이 다 올라가지 말고 2, 3천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3절) 

- 정탐꾼의 보고 후에 생략된 과정이 무엇인가? 여리고성을 칠 때는 먼저 정탐하게 한 후에 객관적 사실을 파악한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성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너무 쉬워 보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동행이다. 동행은 늘, 함께 하는 것이다. 함께 하지 못할 때에 실패한다. 아담과 하와가 떨어져 있을 때 뱀이 하와를 꼬셨다. 

- 그들의 피해는 삼십 육명이었다. 함께 했던 군사 3000명, 이스라엘 전체는 약 200만명이다. 그 중의 36명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작은 피해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행하지 못하자 그 피해를 보는 시선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아 된지라." (5절) 

- 36명의 사람 때문에 이백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낙망하고 낙심했다. 

-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만 작은 실패에도 내 마음 전체가, 공동체 전체가 절망의 늪으로 빠진다

- 작은 실패이지만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절망감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병- 낙심과 절망이다.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7절) 

- 누구의 한탄인가? 백성의 원망이 아니었다. 여호수아의 원망이다. 모세 앞에서 원망하던 백성들과 똑같은 원망을 한다. 몇명 때문에? 36명 때문에....

- 게다가 무엇이라 원망하는가? 그들이 멸망당한 것처럼 과장한다. 그리고 요단 저쪽. 광야땅을 가리키며 그 땅이 더 좋게 보이는 것이다. 여리고성을 정복한 그들이 36명의 죽음 때문에 광야가 차라리 좋았다고 원망한다.  또 다른 여리고성처럼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다.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9절) 

- 지금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던 자들이 그들의 이름의 상함을 두고 어찌하냐고 원망한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0절) 

- 7절의 어찌하여는 (Why me?)이다. 10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찌하여는 (what are you doing?)이다. 

- 인간의 한탄은 왜 나한테 이러십니까? 항상 나를 내세우는데 하나님은 너 도대체 무엇하고 있느냐?말씀하신다" 

요나에게 질문하는 선원들의 질문과도 같다. 어찌하여...네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느냐? 묻는 것이다. 

- 그러면서 그들의 실패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그들의 실패의 원인을 말씀해 주신다. 

- 원망도 좋다. 그런데 누구에게 원망하는가, 원망의 대상이 중요하다. 백성은 서로 서로를 향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여호수아를 원망한다. 그런 원망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 그런데 모세는, 여호수아는 철저히 하나님께 고한다. 그 문제의 해결자에게 고한다. 

- 하나님은 묻는 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무슨 경로를 통해서건 그 실마리를 주신다. 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이이기 때문이다. 


2. 아간 (곤란) 

  • 이스라엘이 범죄하여...(11절) 

-지금 범죄한 것은 아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간의 죄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온전히 내 앞에 거룩해야 하는데 (13절) 그 중의 하나가 범죄하여 전체가 거룩을 상실한 것이다. 

  • 제비뽑기 - 요나서에 나온 방법 (유다 지파- 세라 족속- 삽디의 가정 - 아간) 

                    -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는다. 끝까지 감춘다. 모두가 그 사람의 연약함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는데 정작 자신만 인정하지 않고 모른다. 우리는 끝까지 우리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주님이 주인되지 못해서이다. 

                    주님이 주인되시면 내 연약함을 인정케 하신다. "주님 나는 연약합니다. 오늘 하루를 힘겨워 합니다...." 그 찬양의 가사 처럼 우리 본 모습을 알게 됩니다. 

  •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22-23절) 

탐내어 가졌나이다. (21절) 결국 아간을 범죄하게 한것은 탐심이었다. 육체의 정욕, 안목의 자랑이었다. 

은은 속전으로 쓰였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요셉은 은 20에(창 37:28-30), 예수님은 은 30(마 26:14-15)에 팔리셨다.

은은 그 밑에 있다는 것은 탐심으로 인해 구속의 은혜보다 자기가 훔친 외투와 금덩이가 구속의 은혜 위에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주님이 온전히 주인되지 못하시면 항상 물질이, 정욕이 예수의 구원보다 위에 가 있는 것이다. 


3. 아골 골짜기 (근심) 

결국 여리고성 다음의 가장 쉬운 성으로 여겨졌던 아이성은 온전히 바쳐지지 않은 신앙으로 황폐한 산이 되었고, 탐심은 일시적 쾌락 뒤에 더 큰 곤란으로 다가왔고,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근심을 당하게 되었다. 


성도의 성화는 자아와의 싸움이다. 

그것은 끝없이 계속적으로, 날마다 십자가 앞에 서는 은혜없이는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다. 

무엇이 이 싸움에 실패하게 하는가? 

내 전부가 아닌, 온전치 못한 삶과 예배와 생각이 우리의 삶은 은혜가 아닌 황폐로 이끈다. 탐심이 하늘의 풍요가 아닌 곤란을 당하게 한다. 결국 주님으로 인해 충만치 못한 삶의 결과가 근심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한 번 은혜 받고 내 자아가 깨졌다고 해서 우리의 자아는 그냥 무너지지 않습니다. 끊질기게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도록 순간마다 우리를 걸고 넘어지며, 우리를 자꾸만 과거에 얽매이게 합니다. 


  • 아이성의 의미는 황폐한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산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소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을 받고, 열두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아이성의 패배는 첫째,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움직였기 때문에 일어난 패배였습니다. 

신앙인의 실패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내 마음대로 일을 벌이다가 일어납니다. 

여호수아는 다른 때와 달리 정탐꾼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바로 움직입니다. 저 곳은 쉬운 곳이니 군사 이삼천만 데리고 가면 된다는 말에 묻지 않고 가다가 혼비백산합니다. 


상황이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해야 할 우리의 신앙이 황폐해 질때에 실패가 임하고 고통이 임합니다 .


  • 아간은  곤란이라는 뜻입니다. 왜 곤란해졌습니까? 정욕과 탐심때문입니다. 

승리했던 신앙은 결국 탐심으로 인해 곤란해졌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하나님의 것을 자기가 가로채다가 아간은 심판을 당합니다. 

외투 한 벌과 금덩이로 구원의 은혜를 맞바꿉니다. 성령충만했던 초대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바라의 정욕과 탐심으로 말미암아 흩어지게 됩니다. 탐심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신앙인의 실패 두번째는 정욕입니다. 우리는 떡으로 사는 삶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 삶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시 떡으로 인해 말씀을 버리면 결국 우리의 삶이 곤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탐심은 무엇입니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탐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외면하지 않고 공급해 주십니다. 

탐심은 필요치 않은 것을 욕심내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탐심과 욕망에 진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36명으로 인해 마음이 녹아집니다. 

작은 손해가, 작은 고통이 자기를 지배합니다. 무너집니다. <-> 고통 속에서 희망을 보는 것 <-> 별 거 아닌 것에도 무너지는 것  

 

과거에 집착합니다. 애굽이 더 좋았더라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와 광야가 더 좋았더라고 불평합니다. 

탐심의 결과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고통은 언제나 가장 크고 과거는 언제나 살기 좋았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신앙은 현실을 이기라는데 불신앙은 현실이 항상 가장 최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골 골짜기 곤경과 고통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의 잘못을 가리워주시는 분 

그런데 때론 무서우리만큼 우리의 연약함을 찌르실 때가 있다. 

수로보니게 여인- 네가 사모하냐? 

사마리아 여인- 가서 남편을 데려오라... 숨기지 말고 오픈해라. 


왜? 아픈 데를 찌르실까? 고치시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환자가 의사한테 가면 진찰을 한다. 어디 아프세요? 

나 안아파요.... 그런 환자 없다. 왜? 고치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는 그런 사람 천지이다. 

요즘 기도 제목이 뭐세요? 

특별한 거 없어요.. 

그러면서 아프다고, 연약하다고 드러내면 오히려 이상하게 본다. 

주님은 난 병자들을 위해 왔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병자다. 하늘나라 갈 때까지 우리의 연약함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늘 내가 주인되어 살고, 물질에 한없이 약하고, 작은 실패에도 인생이 흔들리는 소심쟁이들이다. 

주님은 그런 우리들을 고치시기 원하신다. 이제 그렇게 살지 말고 내 안에서 함께 살자고 한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