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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화, 나의 성을 무너뜨림. (여호수아 6장 1-5절) 


여호수아, 출애굽기나 모세에 비해 잘 다루지 않는 책. 인물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신앙인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주는 성경. 여호수아 


성경의 첫 다섯권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모세오경 

신앙 생활의 기초 - 출애굽해서 가나안 앞까지...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출애굽해서 시내산까지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 

민수기는 시내산에서 모압광야, 즉 가데스바네아까지

신명기는 그곳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앞두고 주신 말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미완성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때 와서 비로서 가나안 땅 정복이 시작 

 여호수아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그 땅을 분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호수아의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 

호세아와 어원이 같으며 예수의 이름의 같은 어원이다. 


모세가 율법을 대표하고 예수가 율법을 넘어 은혜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듯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이야기 한다. 

교리적으로는 모세의 삶이 홍해를 건너는 삶으로 대표되는 세상으로부터의 구원, 중생, 거듭남의 사건을 표현한다면 여호수아는 출애굽에서 시작한 여정을 가나안으로 완성하는 완전한 영화,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는 성화의 과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모세오경에는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모세오경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적은 아말렉, 즉 세상, 세상의 가치관, 정욕과 탐심을 가리키지만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요 그 가장 중심에 선 사건이 여리고성 정복이다. 


성경에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단 한 번 나오는 일회적 사건이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반복적으로 나온다. 중생의 사건, 세례의 사건은 한 번이지만 성화의 사건, 성령 충만의 사건은 우리 삶에 있어서 거듭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이다. 

홍해를 건넌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믿음의 여정의 시작이다. 끝이 아니다. 그곳에서 멈추면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불평불만으로 정말로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처럼 신앙생활한다.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언제나 마음은 애굽에 가 있다. 끊임없이 애굽과 비교하면서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애굽이 더 좋았더라고....예수 안믿으면 내가 더 맘껏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 탄식한다. 그러나 그 탄식은 자신을 속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생각이다. 


  • 그러나 요단강을 건널 때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수 3:5-6]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요단강을 건널 때는 철저히 성결을 강조하고 그 성결은 법궤를 앞세워 거리를 지키고 걸어가게 하신다. 즉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지만 성화는, 성결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통하여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요단강은 성화의 강이다. 홍해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그저 바라보고 믿는 것이라면, 요단강은 법궤를 앞에 두고 건넌다.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건널 수 없는 강이다. 


순종함에 대해서, 가톨릭은 어떻게 보면 이 순종이 신앙의 목적이 된다. 순종에 따라 예수님을 닮는 정도가 결정된다. 이 순종을 위해 금욕하고, 훈련하고, 자선을 베풀고, 헌신한다. 


그런데 개신교, 특별히 웨슬레의 신학의 영향을 받는 감리교와 우리 성결교는 이 순종함 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를 둔다. 성결교의 헌법은 성결은 곧 성령세례라고 정의한다. 아무리 할려고 해도 내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 같고, 멈추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순간에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은혜를 부어 주실 때가 있다. 그 은혜가 임했을 때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순종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다. 


처음 중생을 경험했을 때처럼 뜨거운 회개와, 뜨거운 은혜가 또 다시 임할 때가 있다. 중생은 인생에 한 번 임하는 것이지만 이 성결의 은혜는 거듭 임할 수 있다. 홍해는 한번의 사건으로 성경에 기록되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여호수아를 거쳐 엘리야, 엘리사로, 나아만 장군으로, 세례요한을 거쳐 예수님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요단을 건너 이제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제 출애굽하여 세상의 노예,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광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배하는 삶을 통해 점점 더 성화의 길로,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서 안식하는 일만 남은 것 같은데 여기에도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성령 충만을 경험한 자에게 남은 또 다른 싸움

이제 소속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면 차라리 가나안 이주라고 해야 할 텐데..우리는 가나안 땅에 이주했다거나 정착했다라고 하지 않고 가나안정복이라고 말을 한다. 

왜 무슨 전쟁이 또 남아 있는 것일까? 

성화의 단계에서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가나안 땅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사건들이 있다. 요단강, 또 우리가 다음 시간에 나눌 여리고성, 아간의 죄...

바로 정복해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이다. 

애굽의, 세상의, 외적인, 사단의 세력에서 우리를 끊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라면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우리의 싸움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성, 여리고는 다름 아닌 꽉 막힌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께 굴복되지 않는 내 자아- 그것을 나타내는 것 - 여리고성 


 (민 13:28)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그 자아는 애굽보다 강하다. 

중생하여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가 자기를 정복하지 못하면 광야 인생으로 끝난다. 

이 땅에서의 평안이 없다. 안식이 없고 즐거움이 없다. 신앙생활은 늘 짐이고 부담이고 염려이다. 

그러나 나를 온전히 내어 드리고 그 분이 날 점령하시면 참 가나안의 은혜가 임한다. 

임마누엘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아가 너무 강하다. 

그 성은 너무 견고하다. 틈이 없다. 그리고 내 속의 공간은 너무 넓다. 수많은 나의 인격들이 그 곳에 거한다. 


(수 6:1)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계 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왜 문을 닫고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5장 1절의 내용이 그 근거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오면 변한다. 그가 오면 나를 지배한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성을 닫게 한 것이다. 


요나가 왜 니느웨로 가지 않는가? 그들이 변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죽어야 할 자들이 용서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떨어지면 변한다. 성경은 말씀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사례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제일 많이 듣는 소리 중의 하나는 사람은 참 안변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변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데 우리의 교회 현장은, 삶의 현장은 안변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가? 

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변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람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고 반응하는가? 

바로 말씀을 가로막는 장벽, 우리 안의 여리고성때문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수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내가 필요할 때에만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 아니다. 

내 부분을 그 분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의 한 부분만 소유코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은 그 분을 내 주인으로, 왕으로, 전부로 맞이하는 것이다. 

내 전부를 그 분 앞에 내어드리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한 부분만을 고치고 싶어한다. 

성형수술 하듯이 내가 맘에 안드는 곳을 주의 은혜로 고치고 채우고 싶어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지신 어떤 것, 그분의 힘, 능력, 지혜, 풍요, 평강, 하나님의 극히 일부분 중 자기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 만을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위에 자기를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내 존재의 터전, 그 근원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저항한다.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말씀과 죽어도 안변하려는 우리 인격의 격전지가 교회다. 그곳이 바로 여리고성이다! 


2-5절 :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린 작전 명령

6-7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내린 작전명령 

(수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 약속의 확인, 그 땅을 너에게 주었다. 내가 너에게로 들어갈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는 내 것이다. 


(수 6:3)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수 6: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수 6:5)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이것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예배의 모습이다. 

나팔- 은나팔은 백성들이 진격할 때 (민 10:6) 

         양각나팔은 주로 행사 의식때. 제사 때 

         

여리고성 점령- 내 삶을 예배하는 산 제사로 드려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케 하라 .

                        내 중심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사로 채워라

                        

(수 6:8)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ㅡ 찬양과 말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는 가장 중요한 예배


챤양은 우리의 감정을 노래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이다. 

출애굽의 사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현재를 사는 내 삶에 임하도록, 체험토록, 노래하는 것이요, 그 사건의 승리가 내 삶의 승리가 되도록 고백하는 것이다. 그 때의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신 임마누엘 하나님임을 확신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수 6:10)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한꺼번에 외치는 것과 한꺼번에 조용히 하는 것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 

외치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침묵은 길다. 인내해야 한다. 자신을 죽여야 한다. 

왜 침묵하라 하는가? 

그들은 불평하여 실패했기 때문이다. 

예배로 채워지지 않는 소리는 소음이고 불평이고 실패다. 

찬양이 우리 삶에 끝나면 남는 것이 바로 불평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소리는 절망의 탄식뿐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때 (침묵할 때) - 

여리고성 내의 사람들- 점점 더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롱하고 무시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 점점 초조하고 불안해 진다. 이 때 그 두려움을 가지고 소리치기 시작하면 그 불안함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여리고는 또다시 닫혀지고 은혜는 사라진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본다. 


다시는 여리고성을 짓지 말라 - 아합의 시대 때 여리고성을 지음.      

불순종할 때마다, 우상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을 멀리 할 때 마다 우리 안에는 또 다른 여리고성이 세워진다. 

다시는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같이 여리고성을 쌓는다. 바벨탑을 쌓는다. 


예수의 십자가를 앞에두고 마지막 예루살렘을 향하실 때에 

예수님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자들, 바로 예수의 제자들 


예수를 통하여 서로 높은 곳에 서겠다고 하는 예수를 통하여 자기를 이루겠다는 제자들 

그들을 위해 예수는 그들의 발을 씻기고 그들에게 살과 피의 예식을 치루시는데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향해 

자기의 가장 귀한 그릇을 깨뜨리고 

예수의 발을 씻기고 

예수를 위해 예식을 치루는 한 여인 

참 예배자, 말씀을 사모하는 자 

다 가고 아무도 없는 무덤가를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무덤을 지키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오직 그 그릇을 깨는 자

자기의 여리고를 깨고 

주님 발 앞에 업드리어 주께 예배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온전한 영화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마 26:1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엣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마 26:13)" 

하나님의 영화로 옷입혀진 자 


자기 그릇을 깨뜨리고 주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Posted by 소리벼리

 

정탐, 무엇을 바라보고 살 것인가? (민수기 13장 17-33절) 


우리가 잘 아는 12명의 가나안 정탐꾼 이야기 

출애굽 하여 어언 일년이 지나고 이제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가데스바네아에 진 치고 있을 때 

가나안 땅을 정탐


풍부한 해석과 신앙의 교훈을 남기는 장면 


1. 누가 정탐하고자 했는가? (정탐의 주체) 

  • 민수기 13장 1-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 


  • [신 1:19-신 1:25]

(신 1: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신 1:20)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신 1:2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신 1: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신 1:23)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신 1:24) 그들이 돌이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 곳을 정탐하고

(신 1:25) 그 땅의 열매를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왜 정탐케 하시나?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칠 때, 기드온이 미디안을 칠 때 (하나님의 사인을 바라보기 위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하기 위해...) 두려운 마음에 확신을 주기 위해... 정탐. 

  • 주체가 인간이라면 왜 정탐하고자 하는가?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 하나님이 말씀으로 응답하셨는데.... 확신이 없다. 여전히 두렵다. 그리고 여기가 좋다. 더 이상 힘들기 싫다. 핑계거리를 찾기 위해... 


신명기의 백성들이 처음에 정탐의 이유로 댄 것 -> 

20절: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에 이르렀다... 21절: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22절: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할수 있는가, 못하는가가 전제가 아니라 어떻게 차지할까가 정탐의 목적... 


2. 누구를 보내는가? 각 지파 중에서 리더된 자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아무나 보낸  것이 아니고 제비 뽑아 보낸 것이 아니라 각 지파의 머리들을 보냈다. 


3. 무엇을 정탐하는가? (정탐의 내용) 민 13:18-20 

정탐꾼들의 임무- 13장 18-20절 

1.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2.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의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3.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 증거로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40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온 다음 모세의 명한 임무에 따라 보고를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두 사람이 막대기를 매어 들을 정도로 큰 그 땅의 열매를 가져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임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그 땅 사람들은 강하고 많다. 성읍은 산지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다. 


비교적 모세가 명한대로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 그런데 잘 정탐을 끝내놓고 이제 갈렙이 가서 땅을 차지하자 하는데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발생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진영이 두 파로 나뉘게 된다. 


갈렙이 먼저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이다." (민 13: 30) 


그러나 다른 열명의 정탐꾼은 말합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땅을 치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민 13:31절) 이라고 반대합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하는대도 하나님 중심으로 믿음을 가지고 보고를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민 14장 8절)이라고 고백하는데

나머지는 하나님 없이, 믿음 없이 그 땅과 가나안 사람들을 바라보니까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니라 (민 13:33)이라고 자신을 비하하기까지 합니다. 

 

 4. 정탐의 기간 (40일) 

많은 성경 학자들은 정탐의 기간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거리도 그렇고 그들의 땅을 살피고 사람들을 살피고 열매를 가지고 오는 것은 2-3일만 있어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천히 해도 일주일이면 쉬엄쉬엄 하면서도 완수할 수 있는 임무입니다. 

거리도 개인적으로 가기에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40일을 머물면서 정탐을 했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 보고 금방 판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보고 경험한 것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서로 나누면서 백성에게 알릴 좋은 소식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마음을 정하고 12명의 마음을 정하는 기간이 40일이 걸린 것입니다. 

정탐하라- explore-연구하라. 탐구하라. 탐험하라. 마음을 정하라. 

그런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나옵니다. 두 파가 갈립니다. 


성경의 40이라는 숫자는 육신과 영이 갈리는 분리의 시간. 

처음으로 40일이란 기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입니다 . 

노아의 홍: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창 7:17) 

모세: 40일동안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세워 우상숭배. 

엘리야: 이세벨 여왕을 피해 로뎀나무 아래 피했다가 40일동안 광야를 지나 시내산으로 들어감 

에스겔: 40일동안 이스라엘 죄짐을 짐 

니느웨: 40일 후에 무너지리라 예언 

예수님: 40일 금식하시고 이어서 사탄의 시험을 당하십니다.  

            부활과 승천 사이 40일동안 머물며 사역함 


긍정적인 의미로 40일은 우선 육신적인 죽음의 시간입니다. 

홍수를 통해서 죄악을 죽이고 금식을 통해서 내 정욕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시간입니다. 

피곤을 물리치고 다시 힘을 내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니느웨라는 큰 죄악의 성읍을 무너뜨리는 시간입니다. 

내 안의 죄악, 내 안의 불신앙, 내 안의 부정적인 생각, 내 안의 불평, 원망, 모든 어두운 것들을 몰아내는 시간이 40일이라는 기간입니다. 


또한 40일은 고난과 훈련의 기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알리는 준비의 기간입니다.  과거의 죄된 세상, 죄된 마음은 물과 함께, 성령과 함께 죽이고 새 창조의 세계로, 부활의 세계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40일은 하늘의 영원한 문들이 열리며 하늘의 영광을 때를 예비하는 기간입니다.              

40일은 죄와 싸워 승리해야 하는 기간이고 육신을 이기고 정욕을 이기고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가는 기간입니다.  

40일은 나를 낮추시며 시험하셔서 내 마음이 어떠한지를,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달아보는 기간입니다. 

자기 삶, 자기 마음의 실체를 시험할 수 있는 기간이다. 


  • 40일의 기간동안 산에 있는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백성들은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 불렀습니다


  • 40일의 기간동안 죄악 속에 있던 백성들은 물과 함께 심판 당했습니다. 

그러나 배에 타고 있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새 세상을 꿈꾸며 인내했습니다. 


  • 40일의 기간동안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바라보며 감격했습니다. 하나님이 저 강한 자들도 능히 자기들에게 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명은 40일의 기간 동안 똑같은 땅을 보며 절망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애굽을 생각했습니다. 악평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을 시험했고 백성들을 울게 만들었습니다. 


40일이라는 기간을  통하여 누군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고 누군가는 세상으로 돌이킵니다. 40일은 육신의 한계 앞에서 내가 영적으로 살 것인가, 여전히 육신의 노예, 세상의 노예가 되어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간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고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후에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인 40일이 임합니다. 

똑같이 은혜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꾸 과거로 회기합니다. 

자기가 맛보고 경험한 은혜를 거부하고 악평하며 다시 과거의 자기로, 변하지 않는 자기로, 소망이 없는 과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사람들은 은혜 뒤에 오는 영적인 고통의 40일을 통하여 성숙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사망을 이기고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또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쉽게 말하면 내 마음으로 어떻게 보느냐가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바라본 그 땅은 이미 우리에게 맡겨진 땅이요 예정된 땅이요 구별된 땅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낼때 당부한 것이 무엇입니까? 

13장 20절에 보면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장 9절에 여호수아와 갈렙도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눈에 보이는 것, 마음에 느껴지는 감정때문에 요동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워하는 것은 곧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배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같은 사물을 믿음의 시각으로 보느냐, 불신앙의 신앙으로 보느냐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똑같은 사물도 어디서 바라보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똑같은 자연도 어느 시각에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정탐꾼들의 처음 보고에 의해 밝혀진 객관적인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 땅은 과실이 잘 열리는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라는 것이고, 그렇지만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크고 강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잃어버리고 불신앙의 눈으로, 두려움의 눈으로, 자꾸만 바라보니까 

13장 32절에 사람들은 이 객관적인 사실을 어떻게 바꾸어 버립니까?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들어가면 죽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와서 보고할 때는 그들 입으로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였는데도 이제 믿음없이, 두려움을 가지고 말하다 보니까 이제 좋은 점은 하나도 안 보이고 땅조차도 사람을 죽이는 나쁜 땅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지니까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했다고 합니다. 

비관적인 생각이 지배하니까 밤에 잠도 못자고 괴로워 합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원망의 타겟은 애굽에서 그들을 구출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였는가?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민 14:3)


과장에 과장을 더하여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극단적으로 생각하면서 다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말미암아 홀해를 건너서 온 민족이 이제 하나님을 떠나서 어떻게 다시 홍해를 건너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극단적인 표현에 분노하게 됩니다. 

14장 11절에서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22절에 보면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노하십니다. 

열번이나 나를 시험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항상 내가 그들과 함께 했음에도 열번씩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공개적으로, 집단적으로 원망했음을 서운해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 오병이어의 기적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때의 너희는 예수님이 들어가있는가, 없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질문은 너희 삶에 내가 중심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네 삶의 한 복판에 내 자리가 있는가? 너의 삶의 중심에 주님의 자리가 있는가?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우리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오리까?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반응...(불신앙) 


  • 관점이라는 의미의 영어 “Perspective”라는 단어는 Person과 spective의 합성어입니다. 그것은 개인이 바라보는 시각, 같은 사물을 보고도 달리 감지하는 개인마다의 차이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똑같은 물컵의 물을 보고 어떤 이는 “이것밖에 안남았다”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관점은 바로 이 차이를 가리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라 (explorer)”하라는 임무를 띠고 12명의 뽑힌 자들이 가나안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열 명의 사람들은 그 땅을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보며, 두 명의 사람들은 그 땅을 바라보며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디다. 


신앙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의 관점은 “차이”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달리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가지는 능력입니다. 그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주의 역사가 되고 우리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이 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에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함으로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에바다”는 눈이 열리는 역사입니다.       


개인마다 다른 차이의 눈에서 믿음의 눈으로 눈이 열리는 것.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 사람을 보는 것. 삶을 보는 것. 그럼 우리 삶은 에바다...열린다.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닫혀진 삶을 사는가? 각자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5. 모세의 선택 

가장 큰 반전... 

모세는 누구의 말을 들었는가? 왜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고 열명의 말대로 가데스바데아 땅에서 멈춰 섰는가? 


목회를 하면 많이들 하는 소리...

참 신자는 10퍼센트...그들을 바라보고 목회를 해라. 그들만 있으면 된다. 

어떤 이는 새벽기도 하는 성도가 참 신자... 

제자와 무리... 많은 교회들이 10:1, 혹은 10:2의 비율로 무리와 제자가 갈린다. 


직분에 상관없다. 세상에서 배운 정도도 상관없다. 12명의 정탐꾼은 모두 각 지파의 리더들..,,


모세의 목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함께 하게 하는 것... 


설사 그곳이 가나안 땅이 아니더라도, 축복의 땅이 아니더라도, 모든 백성들이 낙오없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것. 


(출 33: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출 33: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아닌 줄 알면서 그들을 인도하기 이해서 40년을 함께 고통 속에서 거하는 것. 이것이 모세의 리더십... 


왜 많은 교회들이 분열되고 깨어지고....하면서 내세우는 말..

그들이 틀렸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갈라섰다.

아니 성도가 틀리더라도 목사는 성도를 버려서는 안된다. 끝까지 함께 하고 책임져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참고로 시작해서 끝까지 견디느니라로 마친다. 


사랑의 처음과 끝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를 살리기 위해 함께 고통스런 40년의 기간을 또 함께걷는 것이다.


성도가 목사를 잘 만나야 되듯 목사도 성도를 잘 만나야 된다. 


난 목사로서 사무엘처럼 말씀이 희귀하였으나 성전의 불이 꺼지지 아니하였던 것 처럼 내 책임을 알고 최선을 다할 것이고, 여러분의 눈이 열릴 수 있도록 기도하고 가르칠 것이지만 내 더욱 힘든 사명은 믿음이 연약한 성도를 함께 기다려주고 고난에 동참하며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목사는 성도를 위해 존재하고 제자는 무리를 위해 존재한다. 제자 스스로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 삼으신 목적은 "내 양을 먹이게 하시고 치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눈이 띄여지기 원한다. 에바다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 

40일의 기간을 통하여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기 원한다. 


하나님이 주인된 가나안의 백성이 되길 원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내 눈은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내 영혼은 방황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내 눈은 주님이 바라보는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내 육신은 피곤합니다.

주여 보리를 원하나이다.

 

내 눈은 주님이 바라보는 눈으로 내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내 마음은 어둡습니다.

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지 못하는 나는 언제나 보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사람들을 찾아 헤매며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보이는 것은 없고

온통 눈 감은 내 모습만이 날 당황스럽게 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가 만드신 세상, 주가 만드신 영혼, 주가 사랑한 내 모습을

그 진짜의 모습을, 그 원래의 모습을 보기를 원하나이다.

 

에바다, 내 눈을 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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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신뢰, 원치 않는 것을 따름 (요 21:18-19) 


지난 주 설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 그 이름의 의미, 물에서부터 건저낸 자. 그의 인생의 대 사건- 홍해를 건넘과 출애굽

구원받은 자의 삶. - 포기의 삶(애굽의 왕자로서의 삶. 애굽의 영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광된 삶. 

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께 대한 원망, 불신, 의심의 삶. 자기 의의 삶, 자기 열심의 삶

좋은 뜻을 가졌지만 그 방법은 자기 방법, 자기 열심. 

네 신을 벗어라. 불타는 떨기나무... 마르고 가시많은 나무- 모세의 모습. 앙상한 가지, 가시 투성이, 소진된 삶. 

이제 내가 너를 쓰리라. 나를 의지하라. 나의 방법대로 살아라... 네 권리를 나에게 맡기라. 

 

"네 신을 벗어라"의 신약적인 표현.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 진정한 사명을 주시는 장면. 

오늘 나눌 말씀입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시냐면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목되는 말씀은 19절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의문을 자아내게 합니다. 


하나는 이 말씀은 주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따르라 하면 따르겠는데 이제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려고 하는데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늘로 따라 올라가라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가서도 나의 삶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로 따라 오라는 소리가 아닌 이상 이 땅에서 주님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이전에 따르던 모습과 어떻게 다르게 따르라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제자 삼으실 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 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하루 하루 가족을 위해, 자신을 위해 고단한 어부의 사는 삶을 사는 베드로에게 예수꼐서는 이제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 뒤로 3년 동안 베드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주를 따랐습니다. 

그는 제자 중의 제자.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렇게 3년동안 예수님을 죽으나 사나 따라 다녔는데 하늘나라로 승천하시면서 또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럼 그 동안 따른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1장 18장 19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우리가 보아야 할 구절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요 13:36-38)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면서 이제 잠시 너희와 함께 있을 테지만 조금 지나면 너희를 떠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떠난다는 소리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 올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나를 따라온다고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따라 오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날 위해 죽는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목숨을 위해서 날 배반할 것이다. 

-> 이 때까지의 베드로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주를 따르고, 앞장섰지만 그 열심은 누구의 열심입니까? 자기의 열심입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입니까? 자기의 의를 위한 열심입니다. 창찬받고,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한 열심입니다. 

그는 자기가 인정받고 높아지는 한에서 열심을 냈지만 정작 자기를 인정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자기 한계 안에서의 신앙입니다. 자기 배를 위한 신앙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신앙을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닌 신앙"이라 말씀합니다. 

"스스로 띠 띠다"는 말은 "스스로 옷입다"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리스도가 주인된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옷입고 포장하고 드러내기 위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베드로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말이겠습니까? 

왜? 그는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을 제외하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주님이 하라는 대로 살았습니다.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스스로 옷입고 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말에 항변하고 거절했던 베드로가 이 말에는 감히 항변하지 못합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 자기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 위로 걸어 주님께 가고자 했던 열심이 주변을 바라보다 빠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고백했던 베드로가 십자가 지시는 주님을 만류하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하시면서 책망받는 자가 됩니다. 

주님을 붖잡으려는 마고의 귀를 베려다가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하면서 힘으로 해결하려는 베드로의 태도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는 말이 하루 밤 사이에 돌변합니다. 


  •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 21: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반대로 늙어서는 어떻습니까? 

남이 옷 입히고 남이 인도하는 데로 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가리키는 남은 누구입니까? 


물론 나 중심적인 삶에서 이제 신앙이 성숙되면 타인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되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고, 보살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그러나 이 때으이 남은 결국 주님이 승천하시면 오실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내 열심, 내 행위대로 주님을 따랐지만 이제 성령이 오시면 성령으로 옷입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 이끌려 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성령이 오시기 전, 제자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데로 해석하고 싶은데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몇번씩이나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데도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헤롯왕까지도 삼일 후 부활하신 다는 말을 기억하는데 제자들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원하는 데로 신앙생활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너 성령이 오시면 비로소 주님이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인도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비로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인류의 구원을 맡기셨는데 그러면서 그들이 승리하도록 허락한 두가지는 단 두가지 입니다. 

1. 서로사랑해라. 한 마음으로 화합하라. 

2. 그리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 외에 내가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주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 머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령이 임하자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자기 재산을 헌납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유물 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이 일어나면 교회에 모이고 거기서 밥먹고 예배하고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모이는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흩으사 믿는 자들이 하나 둘 씩 흩어져 전 세계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흩어지는 곳마다 또 다시 교회가 세워지고 또 다른 제자들이 생겨나고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모이는 부흥이 아니라 흩어지는 부흥으로 펼쳐졌습니다. 


자기 의, 자기 행위, 자기 열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는 결국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무한 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결국은 자기가 제한한 세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난 여기까지만 믿어야지. 자기가 기도의 시간, 예배의 참여 다 제한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의지하는 자는 자신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가운데 자기 인생을 내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면서 하시는 것 

이름을 바꾼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울을 바울로

베드로를 시몬으로 바꾸신다. 

무슨 소리인가? 

이젠 네 이름으로 살지 말고 내가 인도하는 삶으로 살아라. 

내가 준 사명 안에서 살아라. 


기도는 무엇인가? 

내 욕망의 표출로서 요구하고 청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그 분의 음성을 들으려고 내 마음을 여는 것이다. 

두 팔을 벌려 성령이 내게 옷입히고 그 분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기도다. 

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기 까지 싸우면서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컸 부르짖고 울었다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께 부르짖듯이 그 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분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보고 성경을 쓰고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이 들렸으면 흔들리지 않고 그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단, 내가 깨달은 말씀이 정말로 성령께서 주신 말씀인지 성경과 교회의 전통 안에서 그것을 점검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하고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성령은 질서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근본적인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 

난 예수를 사랑하는가? 

난 예수를 신뢰하는가?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해도 난 그 분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린아이의 믿음- 자기의 옷을 입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장년의 믿음 - 그리스도로 옷입고 원치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는 맡겨진 길을 가는 것

청지기는 맡은 것을 감당하는 것. 

십자가는 자원하는 것이 아니다. 

맡긴 것을 감당하는 것이다. 

십자가 지기를 자원하라? 

사람많은 큰 교회도 늘 봉사자가 부족하다고 한탄...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인정받고 싶은 일, 자기가 호고 싶은 일... 

그런데 십자가는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네 팔을 벌리리니...(이제 내 한계에서 벗어나 비로서 주님께 내 맘을 여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음성 듣고 문을 열면...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살 것이라는 말씀의 완성이다. 


반대로 어린아이의 믿음은 팔장을 끼는 것이다. 

두 팔을 잠그고 오직 "나, 나, 나"만 생각하고 나만 나타내고 밖으로의 음성에 문을 닫는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제 정말 나를 따르겠니?"하고 말씀하신다. 

모세에게 네 신을 벗으라 했던 주님은 오늘 "정말 나를 따르겠니?"하고 물으신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