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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 (출애굽기 3장 1-5절) 


모세의 삶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삶의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하는지에 대한 신앙인의 삶의 모델을 보여 줍니다. 그는 120년간의 삶을 살았는데 그 삶은 40년씩 3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 40년간은 이스라엘민족으로 태어났으나 죽음을 피해 물가에 던지어져 바로의 공주의 아들, 즉 애굽의 왕자로서 애굽의 선진 학문과 동시에 유모가 된 친모로부터 이스라엘의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살았던 시기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 시기를 가리켜 “I am Something”의 시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때는 자시의 자존감이 강해지는 시기입니다. 내가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는 기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그 민족이 가장 어려운 중에서도 자신들을 압제하는 애굽의 왕자가 되어서 특별함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삶의 목표를 굳게 세우고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포기한 것 

1)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 - 권력과 명예 -> 이생의 자랑 

2) 죄악의 낙 - 육신의 정욕 

3) 애굽의 모든 보화 - 재물 -> 안목의 정욕 


신앙인의 모습 - 죄악의 근본이 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포기하고 사는 자... 

그리고 나서의 삶 - 광야 가운데서 자기 소유의 양은 한 마리도 없이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삶... 40년 동안 - 40년이란 기간은 육신의 한계점.... 육신으로 이룰 수 있는 한계의 기간 -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금식하며 보낸 기간, 예수께서 금식하신 기간,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


그는 자기가 포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단의 땅 광야에서 살고 있었다. 

->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신앙행위...


그는 좋은 환경 속에서도 세상이 즐거움에 빠져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가 배운 학문과 교양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사용하리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뜻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꿈도 주시고 신자에게 좋은 뜻도 주시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뜻, 내 방법이 아니라, 그 방법, 과정도 하나님의 길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뜻을 세웠는데 그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좌절감, 실망감, 상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세히 보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 자신을 의지하는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의 자리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의 리더로서 그들을 위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을 가졌지만 그 이루는 방법은 철저히 애굽적, 즉 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인 자신이 이스랴엘 편을 들면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를 지지할 테고 또 애굽 병사들도 어느 정도 자기가 가진 힘과 권세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을 테이지만 그 결과는 애굽 병사 한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애굽의 병사들은 두려워져서 미디안 광야로 피해 40년간을 양을 치는 목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 기간을 가리켜 "I am Nothing"의 기간이라 표현합니다. 즉 내가 이 정도 밖에 안되는구나하면서 자기의 한계를 극명하게 깨닫게 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이 시기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모세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원망감, 반항감으로 가득찬 시기일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선한 뜻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 자기의 뜻을 꺾으신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이거나 아니면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내면적으로 채워져 있는 불만과 불안의 시기입니다. 성경이 인간 중심적인 책이면 이 시기의 모세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다룰테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를 다루고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 책이기에 이러한 시기에 대해 잘 다루지 않습니다. 요셉이 팔려가서 당했을 고난, 야곱이 라반에게 도주해서 일어났을 불안감의 시기.... 그저 한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룹니다. 


이 모세의 불만과 반항심이 표출된 사건- 

하나님의 끈질긴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을 향해 떠나고자 하는 모세에게 발생한 사건 


[출 4:24-출 4:26]

(출 4: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출 4: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출 4: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난해한 구절 - 왜 부르시고 그를 죽이시려 하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 

[창 17:7-10]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들이 출생 후 8일만에 할례를 행하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이다. -> 모세: 신앙생활 중에도 온전히 말씀을 행하지 않았다. 다 포기했다고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십보라가 모세가 죽을 위기를 당하자 곧바로 할례를 행하는가? 

그들은 하나님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자식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미디안이니까... 아무도 안보니까... 이제 이렇게 살아가 그냥 죽을 것이니까... 

현실의 삶 속에서 마땅히 해야할 성도의 의무를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알면서 불순종하는 불신앙의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의 표시이자 모세의 쓴 뿌리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 수도 있다. 내가 애굽의 그렇게 좋은 환경, 높은 학식을 배웠는데 그것을 다 잊어버리게 하다니.. 그러면서 자신이 꿈꾸었던 비전도 잃어버리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신앙생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가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자 마자 하나님은 그의 신앙적인 불순종을 꾸짖으시고 십보라는 단번에 그 불순종이 할례를 뜻하는지를 알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다. 


I am nothing의 기간동안 모세는 철저히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거짓을 드러나게 하신다. 요나에게 찾아와 니느웨로 가라 했을 적에 드러나는 요나의 거짓 의, 반항심, 고집.... 


  • 하나님이 그런 중에 이제 모세를 통해 원래 꿈꾸워왔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시겠다고 부르는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다. 애굽에서의 40년, 광야에서의 40년 끝무렵에 만난 호렙산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은 5절의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과 모세가 보았던 불붙은 떨기나무이다. 

이 사건은 무디 목사님의 표현을 빌자면 비로서 I am Nothing 에서 I am Real Christian, I am God's person이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네 신을 벗으라! 

(출 3:5)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신을 벗으라는 소리는 룻기서 말씀에 보면 바로 권리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다. 


[룻 4:7-8]

(룻 4:7)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룻 4:8)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


배경 설명 - 룻을 얻기 위해서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에게 찾아가 룻의 권리를 양도받는 장면..


신을 벗으라 ->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라고 표현하는 이스라엘의 전통 

하나님이 네 신을 벗으라-> 네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적지도자들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장면

1) 모세-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신 말씀

2) 여호수아 - 여리고성 가까이 갔을 때에 군대장관이 말씀하신 장면


왜 하나님은 광야가운데서 40년 동안이나 연단 가운데 삶의 아무 의욕도 없고 희망도 잃어버린 모세를 찾아가 네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무엇을 더 포기하라는 것인가? 그 단서가 바로 불타는 떨기나무이다. 


1절에 보면 모세는 장인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아마도 양떼를 먹이기 위해서 좋은 목초지가 있는 땅으로 이동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호렙산에 이른 듯 하다. 호렙산은 그 뜻이 건조한 땅이라는 의미이다. 습기가 없어서 생명체가 잘 살지 못하는 땅, 한 번 불 붙으면 모든 것이 다 타버리는 땅.. (이것은 무슨 나무든지 불만 붙으면 활활 탈 수 밖에 없는 물리적의미의 건조한 땅이기도 하지만 목적도 없이 의욕도 없이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모세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건조한 땅, I am Nothing의 땅 호렙산은 동시에 바로 하나님의 산 이었다. 희망 없는 곳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땅이었다. 그곳에서 떨기나무가 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떨기나무 가운데서부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건조한 땅에서 불이 붙었다면 그 나무가 금새 타서 없어져야 하는데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모세에게 이런 기적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을까? 

40년전 애굽의 백성을 죽이고 의기양양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싸우는 틈에 끼어든 모세-> 

내가 너의 편이다. 내가 널 도와줄께.. 내가 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줄께…내가 애굽의 왕자지만 난 이스라엘 편이다. ? 자기 뜻, 자기 방법, 자기 의를 통해서 일하던 모세-> 동족에게도 버림받고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광야로 도망쳐버리는 모세. 


이제 네 방법, 네 뜻, 네 열정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일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메시지. 

내가 널 불타오르는 지도자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네가 아무리 불타올라도 네 육신이 쇠하지 않고 네 영혼이 다치지 않고 오직 내 능력으로 널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네 육신의 털끝도 상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니 네 권리를 나에게 주어서 나로 널 통해 일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내 능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날 불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능력이라고 하면 실수한다.

엘리야-> 400여명의 이방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이사벨 여왕이 쫓아온 다는 말에 “주님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하며 낙심하는 선지자. 왜 자기 능력대로 일했다고 생각하나. => 로뎀나무 아래로 인도해서 그를 안식시키고 물과 음식을 공급해 주시지만 그 사역이 거기서 끝난다. 내가 내 능력대로 일한다고 생각할 때 내 사역이 끝이 날 수도 있다. 


하나님 주신 능력으로 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불타오르게 주를 위해 일할지라도 내 육신은 털끝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라. 

일하는 자는 주가 버리지 않는다. 건강도 주시고 믿음도 주시고 열매도 주실 것이다. 

사탄은 여전히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너 너무 무리했잖아. 이제 쉬어야지. 너 그렇게 기도하다가 이제 다친다. 못일어난다. 육신이니까 쉬어야지.  


여러분 일터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타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지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이제 네 능력, 네 방법, 네 열정으로 일하지 말고 그 모든 권리를, 그 모든 짐을 나에게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맡기십시오. 그 분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아말렉교회 훌 교회 (출애굽기 17장 9-18절) 


오늘의 본문 출애굽기 17장- 아멜렉과의 전투 

아멜렉 과의 전투를 성경은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담고 표현합니다.  

(출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출 17: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호와 닛시) 


그리고 이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서 아말렉  족속과 싸우시고 또한 싸우기를 명하십니다. 

  • [삼상 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라고 정확하게 시점을 짚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 하자마자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했던 아말렉 족속에 대한 진노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 시점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출애굽 하자 마자- 거듭나자 마자, 구원 받자 마자 

출 17장 아말렉과의 전쟁에 앞선 사건- 르비딤에서 반석을 치라 - 반석을 치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

그 구원의 은혜를 맛보자 마자 들어닥친 적 - 아말렉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사울왕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상 15:8-9]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삼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왜 버림받았나? 아말렉을 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마우리 예배를 드려도 아말렉을 진멸시키지 못하면 실패다! 


  • 이 사건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과 아말렉과의 싸움이 게속되다가 이 전쟁은 바벨론 포로시기의 에스더 왕비때에 모르드게와 하만을 통해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바벨론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던 때. 이스라엘 사울왕의 후손이었던 모르드개와 아말렉왕 아각의 후손이었던 하만이 등장합니다. 왕의 모든 대신들이 하만에게 꿇어 절 하지만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자  하만은 모르드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죽이려 합니다. .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일어났던 왕후 에스더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과 모르드개는 생명을 얻게 되고, 하만과 아말렉 족속은 몰락하게 됩니다. 


이것이 출애굽시대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 이어졌던 이스라엘과 아멜렉과의 긴 악연입니다. 


아말렉은 끊질기게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하고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철저히 아말렉을 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도대체 아말렉이 무엇이기에 그럴까요? 

[창 36:9]세일산에 거한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대략이 이러하고

(창 36:10)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창 36:11)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

(창 36:12)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이 족보에서 보면 아멜렉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가 첩 딤나를 통해 낳은 자녀입니다. 즉 에서의 후예요, 에돔 족속의 조상입니다. 

에서는 잘 알다시피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육신의 자녀, 정욕의 자녀를 가리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정욕의 팥죽 한 그릇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성경은 끊임없이 증거합니다. 


  • [빌 3:17-20]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후에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40일을 광야가운데서 시험당하시는 예수께 사탄의 첫 번째 시험 -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예수님의 말씀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즉 떡의 시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시험 - 아멜렉의 시험이다. 


[약 4:1-약 4:3]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약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다시 출애굽기로 돌아가서 특별히 출애굽기 10장에서부터의 내용은 이 육체적 욕망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무력화시키는 지가 잘 나옵니다.  14장에 가면 홍해를 건너는 위대한 사건이 나옵니다. 15장에 가면 모세와 미리암,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님이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15장의 끝에 가면 마라의 쓴 물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 사흘만에 물이 떨어지자 금방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며 물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나무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육신적으로 목마를 적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평이 아니라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가? 

우리가 연약할 적에 우리는 불평을 택하느냐, 하나님께 부르짖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느냐? 환경을 바라보고 불평하고 절망할 것인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똑같이 힘듭니다. 

우리 모두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할 때에 불평하고 넘어지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가 다 힘들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 분께서 살 길을 주십니다. 

치료하는 여호와가 우리의 연약함을 치료하십니다. 

마라가 변하여 엘림이라는 큰 나무가 되게 하십니다. 


16장에 들어가면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합니다.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물이 해결되니까 이젠 양식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물만 먹으면 살 것 같았는데 이젠 물이 해결되니까 양식을 달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욕심이 그렇습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이젠 걱정이 없고 여한이 없다고 하다가도 한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것에 욕심을 부립니다. 


백성은 또 원망하고 모세는 또 기도합니다. 

어쩌면 출애굽기의 반복되는 주제어같기도 합니다. 

"똑같은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 백성은 불평하고 모세는 부르짖었더라."

여러분, 여러분은 문제가 생겼을 때에 원망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부르짖는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만나를 내리십니다. 만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입니다. 

말씀이 이스라엘을 먹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육신과 말씀의 싸움, 현실과 믿음의 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아말렉과의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 신앙생활은 우리의 정욕과 탐욕을 없애는 전쟁입니다. 

왜 기독교가 타락했는가? 

신앙생활, 경건생활을 통해 정욕을 없애는 훈련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욕을 내세우고 정욕을 채우는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기 위해 아말렉, 육체적 정욕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주님을 사용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가지려고만 하고, 빼앗으려고만 하고, 즐기려고만 하는 생활은 다름아닌 아말렉이 되는 과정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내려놓는 자가 되어야 하고, 십자가를 지고 낮은 곳을 향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맞는 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육신이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성령을 통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리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요 예배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내 이름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정에서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이냐? 

바로 내 정욕과 탐욕, 내 쾌락, 내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 사명을 이루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그 정욕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내 삶을 통치하게 하는 것은 기도 밖엔 없습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나는 하나님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싸운 것은 여호수아이지만 모세이 팔이 내려가면 밀리고 후퇴하다가 모세가 두 손을 들고 기도할 때마다 진격하고 승리했습니다. 신앙인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장에서 여호수아처럼 열성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성공의 열쇠는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정말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산꼭대기는 어디 입니까? 

하나님과 대면하는 내 은밀한 공간, 기도의 처소입니다. 

여러분이 삶 속에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족이,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삶에서 온전한 열매를 맺히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가정의 모세가 되어서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집니다.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불평하면 넘어지지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기도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노동입니다. 육체적으로도 노동이고 정신적으로도 노동입니다. 급한데 앉아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훈련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도 손을 들고 기도하니까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목사가 피곤해지면 성도들이 고생합니다 .

가정에서 기도의 사람이 피곤해지면 식구들이 고생합니다. 


그 때 모세의 손을 붙잡아 준 것이 아론과 훌이었습니다. 

아론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세의 형이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실 때에 함께 가게 하신 믿음의 동역자였습니다 .


교회에도, 가정에도 이런 동역자가 있으면 피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론은 동역자이고 형이라고 쳐도 은 누구입니까? 


[대상 2:18-20]헤스론의 아들 갈렙이 그 아내 아수바와 여리옷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 낳은 아들은 예셀과 소밥과 아르돈이며 아수바가 죽은 후에 갈렙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 들었더니 에브랏이 그로 말미암아 훌을 낳았고 훌은 우리를 낳았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더라

이 족보를 보면 홀을 중심으로 두 명의 눈에 띄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홀의 아버지는 갈렙이요, 홀의 손자는 광야에서 성막짓는 책임자였던 브살렐입니다. 

 

세 명의 공통점은 이들이 성령에 충만한 자요 섬기는 일에 특출난 자였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여호수아보다 연장자요 여호수아와 똑같은 공로자였지만 여호수아가 모세 이후의 지도자가 되자 철저히 궂은 일을 도맡아 어려운 일에 자원하는 돕는 자가 됩니다. 

브살렐은 하나님이 주신 영으로 광야에서 성막 짓는 책임자가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이 명한 대로 성막을 짓습니다. 

홀과 그 가족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잘 섬기는 가족들이었습니다.  


이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아까 초두에 아말렉은 누구의 자손이라고 했습니까? 맞습니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아들입니다. 그 본문을 다시 보면 엘리바스의 아들 중에 

[창 36:9]세일산에 거한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대략이 이러하고

(창 36:10)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창 36:11)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

(창 36:12)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대상 1:36)엘리바스의 아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비와 가담과 그나스와 딤나와 아말렉이요

(민 32:12) 다만 그나스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하시고


여러 학자들은 갈렙이 바로 에서의 후손이었지만 그는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 기도하면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장자지파가 되는 유다지파에 소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할 적에 유다지파보다도 먼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가장 먼저 땅을 차지하는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잃어버린 에서의 장자권을, 그 뒤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시기하고 괴롭히면서 믿음에서 넘어뜨리고자 하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또 다른 에서의 후손이었던 갈렙의 아들 훌은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가 함께 기도하고 중보함으로서 육신을 이기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 에서가 잃어버린 장자권을 회복하고 유다 지파 중에서도 가장 먼저된 자가 된 것입니다. 

 

  •  교회와 성도는 어떻게 승리합니까? 

물론 매일 매일의 삶을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겠지만 그 성패가 기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이미 승리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가 함께 한 것입니다. 

아무리 규모가 크고 재정이 풍부해도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아말렉이 되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가 목회하면서 물려주신 가장 큰 유산은 매일 같이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제 목회의 가장 큰 사명 역시 성도들의 이름을 빼어 놓지 않고 그들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가 목사로서 다른 교회보다 더 잘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것. 성도를 위해 빼놓지 빼놓지 않고 기도하는 목사로 훈련받은 자고 소망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고아와 같이 내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돌봄을 받는 것,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는 그 중보를 통해 삶의 터전에서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니까 알아달라고 생색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능력을 인정하건 안하건 제가 받은 목회적 소명은 성도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기도가 성도들 각자의 가정에서 여러분들이 드리는 기도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로 부름 받은 저는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기도를 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의 영적인 가장으로 부름받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서 산 꼭대기에 올라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그 기도를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제가 기도를 쉬지 않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영적인 리더는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많아지고 구제 문제니 행정적 문제들이 많아지니 사도들이 기도하지 못합니다.  사도들이 기도하지 못하니까 더욱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합심해서 세운 것이 일곱집사입니다. 사도들이 행정처리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다른 일 하느라 기도못하니까 기도하도록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우리 로고스 교회 14주년 - 나이로 치면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것 -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청년의 믿음으로 


요한일서에서 보면 청년의 믿음은 악한 자를 이기는 믿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믿음 

그런데 동시에 청년이 가장 약한 것 - 세상,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무엇으로 그것을 이기는가? 기도로.. 오직 기도로... 


정욕으로 신앙을 무너뜨리는 에서의 후손 아말렉이 될 것인가? 

기도함으로 그 장자권을 되찾은 갈렙과 같은, 훌 같은 사람이 될 것인가? 

 

Posted by 소리벼리

 

꿈, 비전, 그리고 삶 (창세기 37장 18-20절) 


  • 요셉- 특이한 인물. 

아브라함 (복)- 이삭 (네 몸에서 태어난 자: 엘리에셀도 아니고 이스마엘도 아닌...)- 야곱 (장자권- 바로 그 자리를 놓고 쟁탈)


예수님의 족보- 장자의 족보?

두 번째의 의미- 아론이 아닌 모세, 사울이 아닌 다윗, 요한이 아닌 예수, 바라바가 아닌 바울...

요셉? 열 두 아들 중 열 한 째 - 라헬이 낳은 자녀로 가장 사랑받는 자. 

                                          - 다윗- 막내아들... 예수의 계보의 중심. 

                                          - 솔로몬: 막내까지는 아니여도 다윗의 아들 중에 서열에 끼지 못하던 자. 그러나 가장 사랑받던 자. 


첫째가 아닌 연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것, 가장 늦게 온 자가 먼저 삯을 받는 것 - 하나님의 구원 계획, 신앙의 신비. 


  • 형통의 의미 (39장) 

- 요셉의 삶에 있어서 39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 

- 형통의 의미 (2절, 3절, 23절) : 그의 외적은 환경: 노예로 팔려오고,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는 자가 되고, 끝에는 감옥에 갇히는 자가 되고....

   : 형통은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함을 누리는 것, 결코 절망하지 않는 것

   : 형통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늘 함께 따라오는 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 일이 잘 풀려 걱정 근심 없는 것 Vs 요셉: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늘 함께 함으로 그 환경 안에서 최선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 

   

  • 아담과 예수 사이에서 

-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4절),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 에덴 동산을 지으시고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 청지기의 삶. 

-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7절) -> 뱀의 유혹 

[창 39:8-9]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  보디발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 짓는 것이다. (뱀: 아무 것도 먹지 말라 하더냐? 너 못하는 것 있지 아니하냐?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림) - 요셉: 말씀 안에서 자유한 자의 삶의 모델. 

-그런데 이 여인이 얼마나 끈질깁니까? 10절에 보면 여인이 날마나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 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사탄은 끊질기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유혹을 피하는 방법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지요. 나중에서는 어떻게 그 여인을 피합니까? 

 15절)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 (죄를 짓자 옷을 지어 입는 아담의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지금 죄를 지은 것은 보디발의 아내인데 보디발의 아내가 지금 보디발에게 요셉을 거짓 증거 하는데 

 17절에 보면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아담과 하와의 변명 _ 죄의 특성, 죄의 전가. 하나님 당신 때문에)   

 그런데 요셉은 그런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 증거에 맞서지 않고 묵묵히 그의 죄의 전가를 자신이 감당하여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요셉이 아담의 원죄를 극복하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자기 가족, 형들에 의해서 은 20에 팔리는 장면은 무고히 자기 제자, 가룟유다에 의해 은 30에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 꿈의 사람

- 꿈 (dream) - 몽상, 욕망, 막연한 기대

- 비전 (Vision) -  약속, 언약, 청사진, 사명. 


75세된 아브라함 -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너는 복이 될 지라 (I will show you) 

- 이것은 비전인가 꿈인가? 


요셉에게 주신 것-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 - 곡식단이 절하는 것,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을 한 것 - 보여주신 것이다. 그 의미도 모르고 그냥 보여준 것을 본 것이다. 비전이다. 

이 비전을 이루어 가는 것이 믿음이다.  

여러분이 어느날 기도하는데 이런 응답을 받았다고 해 보자. 이런 강한 생각이 마음 속에 막 들어왔다고 해 보자. 

어떨텐가? 과연 여러분 같으면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수 있는가? 

'별 생각이 다 드네.... 내가 또 헛된 생각하다가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보다'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과 말씀을 무시해 버리지 않을까? 

목소리가 분명하면 순종할 수 있다고 변명하는가? 

내게 분명히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처럼 직접 눈으로 보이게끔 역사하시면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 합리화다. 자기 변명이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들 때에 그는 그것이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들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소리를 정확히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모세에게는,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다 크고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그들 또한 작고 미세한, 자기 생각과 정확히 분별히 되지 않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순종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강하게 경험한 자들이 있다면 출애굽하여 광야 가운데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일 것이다. 

 그들은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을 굴복시키신, 홍해를 가르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함께하신, 하늘에서 만나와 매추라기를 내리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초현실적인, 초 자연적인 하나님을 모두 경험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이 좋았는가?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애굽이 더 좋았더라고 말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도 우리는 절대로 저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삶을 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믿음이 생기겠는가? 

 

 비전에 따라 사는 삶 VS .현실에 따라 사는 사람

  • 이스라엘 백성 - 늘 현실(현실이 힘들면 애굽이 더 좋았다. 광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여기에서 살 것이다.) 
  • 네비케이토 선교단체의 창시자 도슨 트로트맨 : 그 사람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꿈의 사람인지 현실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오늘 살 것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아니면 어떤 기도도 못하는 사람. 
  • 바울: 내가 푯대를 향하여.. 약속을 향하여, 목적을 향하여... 비전은 내 인생의 청사진, 약속,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어떤 것이 있다는 것. 
  • 너 뭐가 되고 싶니? 돈 많이 벌고 싶어요...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교육이, 신앙이 목적을 가리쳐주려 하지 않고 수단에 집중해 있다. 그러니 돈이 있어도 공허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 비전이 없다는 것은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없이 만들지 않았다.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목적이 있는 삶이다. 


요셉의 꿈-

  • 17세 때 - 그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 의미도 알지 못했다. (말씀을 보는 것이다. 경건의 시작이다. 비전의 삶의 시작이다. 의미를 모르지만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보는 믿음이다) 
  • 떡맡은 자, 술 맡은 자 - (감옥 속에서) - 꿈을 해석한다. 의미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 해석이 나와는 상관없다.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말씀을 알아가는 단계 - 해석하는 단계) 
  •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해결책을 알려주는 단계 - 자기의 해야 할 일을 아는 단계 - 그 의미와 자기가 만나는 단계, 말씀이 나의 삶에 적용되는 단계. (적용의 단계) 


처음 꿈을 꿀 때의 요셉 - 17세였지만 철부지 - 이꿈을 형들에게 들려주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자. 그가 하는 일은 형들의 부정한 행위를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자. 혼자 채색옷을 입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 

- 그가 고난을 통해 성숙해간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우리를 삶의 극단에 빠지게 해서 꿈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악한 영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 영들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요셉을 꿈을 꾸는 자에서 꿈을 이루는 자로 만들어 가신다. 

형통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 


 꿈이 있는가? 인생의 청사진이 있는가? 당신의 삶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오늘 하루 오늘 하루, 날마다 오늘만을 바라보면서 돌고 있지 않은가? 

 오늘이 힘들면 교회를 바뀌볼까, 신앙버리고 다른 일을 해 볼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헤메이지 않는가! 

 

 교회 나오면서도 왜 자기가 교회 나오는지, 예배의 목적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 신앙의 첫째 목적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닮는 것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제 신앙의 목적도 예수를 닮는 것이고, 제 목회의 목적도 예수 닮는 성도를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위탁하신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치라, 사랑해라. 발을 씻겨 주어라. 섬겨라. 낮아져라. 십자가를 지라. 나를 따르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복음을 증거하라. 세례를 주어라....

 오늘 나에게 주시는 예수의 명령을 내 삶 가운데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에 의인 열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진정한 크리스찬 열명만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통해 12명의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고 그 열 두 명의 제자들은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씨앗이 되었다. 

 

 교회의 미래는 자기를 위해 예수를 희생시키는 무리를 만들 것인가, 예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자가 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꿈을 꾸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꿈을 꾸고 인생을 헛되이 살지 말자. 

 사탄은 지금도 꿈 꾸는 자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

 그러나 하나님은 꿈꾸는 자를 죽이지 않으신다. 꿈을 꾸면 절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분의 꿈을 이루어 가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 (창세기 32장 22-32절) 


야곱은 히브리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양면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같은 인물들을 좋아하고 또는 신앙의 모델로서 삼고자 하지만 야곱을 뽑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야곱이라는 의미는 "사기꾼"이요, 이름 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사기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기반이 형성되었고, 신약의 열두 사도의 모형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실질적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시조는 야곱입니다. 야곱을 통해, 그의 열두 아들을 통해,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을 바꾸어 이스라엘 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요, 새사람, 새나라가 되게 하신 모든 신앙인의 믿음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의미: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을 기억하며 "나도 하나님과 기도하여 이겨야지.."하며 부르짖기도 합니다. 

과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우리도 야곱처럼만 하면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는 소리인지 우리는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창 12:1-2)의 말씀은 야곱의 자손들이 모세를 통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아브라함 이전에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나라, 왕국을 세우려고 했던 바벨탑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새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도대체 어떤 나라냐 하는 질문은 바벨탑을 통해 세우고자 했던 나라와 비교해서 살펴 볼 때에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창 11:1-4]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두 사건의 공통점은 사람을 통해서 나라와 민족을 건설하는데에 있습니다. 

  • 그런데 바벨탑 사건은 사람이 주어가 되어서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즉,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왕국을 짓자는 것이지요. 일의 시작과 끝이 모두 "나" 혹은 "우리"가 주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하나였던 세계에서 흩어지는 나라가 됩니다. 바벨이라는 의미 자체가 "뿔뿔히 흩어짐"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 나라를 짓자는 목적은 흩어짐으로 끝이 납니다. 
  •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 바벨탑의 건축은 분명한 비교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벽돌로 돌을 대신했다.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이 아닌 건축물은 돌과 진흙으로 지었는데 바벨탑은 벽돌과 역청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벽돌과 역청은 인간의 기술로 세우는 나라입니다. 돌과 진흙으로 만든 건축물은 무엇입니까? 교회요, 성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반석과도 같은 고백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요, 진흙같은 우리를 토기장이 하나님께서 빚으신 것이 성도입니다. 흙으로 만든 우리에게 물로, 성령으로, 은혜로 빚으신 것이 성도요, 교회입니다. 어두웠던 우리눈을 침과 진흙으로 보게 하신 자가 성도요 교회입니다. 
  • 그런데 그런 돌과 진흙으로 세워진 성도를 교회를, 벽돌과 역청이라는 물질로, 기술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그 기슬과 물질로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했던 것이 바벨탑입니다.  
  • 이스라엘은 그러한 바벨탑에 대신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로, 기술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씨름을 통해서 만들어 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택해야 했는가? 

가장 연약하고 가능성 없는 자(기술도 없고 물질도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복의 나라, 복의 백성이 세워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벨탑... 세상적인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

목적은 똑같다. 땅과 자손을 건설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 모여 힘을 합하지만 그 근원된 욕망은 다름아닌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과 자손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완전한 번영의 축복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은 32장의 내용은 유명한 바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라고는 하지만 그 천사는 바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시기 위해서 나타난 하나님이 현현이었습니다. 왜 야곱에게 나타났습니까? 그를 이스라엘로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 씨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만들어 집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와 씨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듬어 가시는 과정이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는 그것이 힘겨운 씨름인 것입니다. 하나 하나 굴복할 때마다 끙끙거리고 힘들어하고 비틀거리는 것이 우리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씨름하는 시간은 내가 하나님께 굴복해 나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꾸어 주시는 시간입니다. 마치 조련사가 말을 훈련시키느라 힘겨워하고 말도 지치지만 그런 힘겨운 조련 끝에 주인의 말을 잘 따르는 명마가 탄생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조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 첫째는 바로 그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 약탈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에게 이기기 위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태어났습니다. 그의 삶은 날 때부터 씨름하는 자입니다. 겨루는 자입니다. 그는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언제나 겨루어서 쟁취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목표를 달성합니다. 그는 팥죽 한그릇에 형의 장자권을 쟁취합니다. 팥죽 한 그릇이라는 것은 결국 하루의 갈급함을 이용해 형의 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삼일 목마른 갈증 떄문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불평원망하며 범죄하는 민족이 되듯이 야곱은 형의 한끼 배고픔을 이용해 장자권을 사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장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장사를 통해 얻습니다. 그것도 형의 약점을 이용한 합당치 못한 장사입니다. 그는 아버지 에서도 속이고 라반도 속임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복적은 바른 것이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그의 방밥은 철저히 악인의 꾀에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자식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모든 인간적인 꾀로 얻고자 했던 아브라함처럼,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지만 철저히 인간적인 꾀에 의지했습니다. 그는 사기꾼이요, 악인입니다. 그래서 그런 꾀에 의지하는 자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과의 씨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 둘째로 그는 홀로 남았기 때문에 씨름했습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삶의 극단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상황, 위기의 때입니다. 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까? 머리를 굴렸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굴려서 재산도 모으고 가정도 이루었지만 정작 살만해지니까 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살자니 라반이 두렵고 집에 가자니 에서가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하는데 꾀를 부리니 그곳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그는 재산을 5등분해가지고 한 차례식 한 차례식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왜 나누어 보냅니까? 여차 하면 도망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선물도 한 꺼번에 받는 것보다 여러 차례 나누어 받으면 똑같이 받아도 기쁨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위하고 형 에서도 생각해서 그는 머리 굴림의 극치로 이렇게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에서는 주인이고 야곱은 종이라 하라” 결국 재산도 이루고 명성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사람앞에 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와 아내까지도, 가족들까지도 이용해서 다 건너 보냅니다. 무슨 소립니까? 대개 도망가더라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데 야곱은 아내와 자녀까지 건너보내는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혼자 남을 때까지 끝까지 꾀에 의지합니다. 머리를 굴립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받고 싶은데 그것의 방법은 철저히 바벨탑의 방법, 벽돌과 역청에 의지합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홀로만 남게 됩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 할 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같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고 쓰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되니까 이제 하나님꽈 씨름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야곱의 선택

  • 그는 홀로 남게 되자 비로서 하나님의 방법을 구합니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남은 것 없이 다 망했을 때에도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홀로 남게 되자 비로서 전적으로, 자기 꾀를 버리고, 자기 생각 버리고 하나님 이제 나를 만지소서, 나를 고치소서, 하나님 앞에 무릎꿇습니다. 
  •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천사를 높지 않습니다. 다리에 쥐가 나고 관절은 비틀리고 어긋나는데도 그는 놓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잠잠하면 포기합니다. 자기의 상황이 더 안좋아지면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다른 방법도 없으면서 하나님께 매달리기조차 못합니다. 쉽게 포기하면서 그래서 자기는 할 만큼 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합니다. 할만큼 한다는 것은 될 때 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요, 그 분의 말씀이 임할 때까지 젼혀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성령이 올 때까지 기도하라는 그 말씀에도 불구하고 500명중 380명이 열흘을 채우지 못하고 흩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자기의 믿음은 할 만큼 하면서 하나님도 참 너무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가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게 응답하지 않으면, 말씀을 주지 않으면, 내 마음에 평안을 주지 않으면 난 일어서지 않겠습니다. 다리에 쥐가 나고, 엉덩이가 쑤시고 아파도 난 절대로 안 일어납니다...
  •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매달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 모습을 그대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난 사기꾼입니다. 난 엉터리입니다. 난 죄인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문제해결하러 나왔는데,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기려고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내 진정한 회개, 내 진정한 모습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씨름에서 진적 없는 야곱이 하나님 앞에 비로서 무릎꿇고 회개합니다. 
  •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가장 더러운 자로 나를 보고 그렇게 때문에 오직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름의 응답은 내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죄인됨을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해결,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 첫째 이름을 바꿉니다. 사기꾼을 하나님과 싸워 이기었다라고 하는 승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존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신비의 원리가 여기서 나오지 않습니까? 항상 이기려고 살았던 야곱이 알고 보니 다 지고 있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형을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형을 두려워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그것을 빼앗길까봐 염려하는 자였고 라반을 이겼다고 했지만 도망하여 피해다니는 그야말로 패자 중의 패배자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기려면 항상 지는 것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승리자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니까 하나님께서 날 이기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 둘째 하나님의 응답은 돈이 더 많아 진 것도, 건강이 더해 진 것도 아니라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더 연약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환도뼈- 자신이 이기심, 고집, 세상적인 힘이 되는 근원, 자기가 세상에서 의지하는 보루-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젊은 부자 청년에게는 돈, 
  • 세 번째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비로소 어두운 밤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지껏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꾀를 의지해 살던 악인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니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고 본질이 바뀌니까 환경도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러 올 줄 알았던 형 에서가 자신을 반기러 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야곱을 통해서 제사장 민족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며 그 가정,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지금도 날마다 하나님을 이겨가면서 하나님은 이기는데 정작 이기지만 매일 지는 것과 같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 엉터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사기꾼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줄 알면서도 괜찮다고 스스로 속이며 살진 않는가?  

여러분들도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씨름하다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프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바벨탑과 다른 존재다. 다른 나라다. 벽돌과 역청이 아닌 반석과 진흙으로 빚어진 교회요 성도다. 

그 나라는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내 환도뼈를 꺾으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 내 고집을 꺾을 때 하나님은 비로서 우리에게 네가 이겼다고 우리를 앉아주신다. 네가 이긴거다 하면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