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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음의 근거 (욥 1:8-11)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쓴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토 까뮈는 인간 삶의 실재를 "부조리"라는 말로 정의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일상의 일을 해석하면서 무언가 원리와 규칙을 발견하기 원하고 합리적으로 이해되고 설명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서구 사회에서도 이 "이성과 합리성"은 가확의 발달과 더불어 근대를 이끌고 왔던 시대 정신입니다. 

그런데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현실 속에서 조명하려 했던 이른바 실존주의자들에게 인간은, 삶은 여전히 설명하기 힘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의 결정체라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생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성경을 통해, 신앙을 통해 끊임없이 해석하려 합니다. 그 의미를 발견하려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고 그럴 때마다 성경은 어떠한 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세계라 하더라도 언제나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우리 인생을, 사람을 담고 있기에 까뮈가 말한대로 성경의 이야기도 어찌보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ex)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큰 능력을 부여 받았던 자 (육체적 능력 - 삼손, 지혜- 솔로몬-> 가장 유혹에 약했던 자에게 가장 큰 능력을 주시고 오히려 가장 경건한 자에게는 고난을 주시는 분... (성경 속의 부조리) 야곱을 에서보다 더 사랑하셨던,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던....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던....)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하지만 잘 설명할 수 없는...


그리고 그 중심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 히브리 밖의 하나님 민족

욥은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성서로서의 욥기는 구약 성경 중 가장 오래된 기록된 문서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그 중심에 히브리 민족, 즉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구속사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곳곳에 이스라엘 외부에 있었던 믿는 자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보여 주면서 히브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숨기듯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던 멜기세덱, 모세를 받아 주었던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 (그는 이방의 제사장인가?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지혜를 알려 주는 하나님의 대언자로 표현), 바벨론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해방 시켰던 고레스왕, 그리고 예수님의 나심을 알고 찾아온 동방 박사.... 

그리고 동방의 의인이라 불렀던 우스 땅의 욥 - 그리고 그의 친구들... -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깊이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곳 하나님의 계시 -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 그 이상의 세계를 우리는 볼 수 없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보여 주시는 것 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 고통에 관한 책? 

흔히들 욥기 하면 욥의 고난의 떠올립니다. 욥은 고통의 문제를 가장 잘 다룬 성경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친밀한 몇 구절 외에 둅기를 잘 읽으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욥기를 읽으면 괜히 나도 고난에 처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욥의 주위에는 욥의 친구들이 모여 욥의 고난을 가지고 여러가지 이론들을 대고 토론합니다. 


구약의 신앙인들이 믿었던 하나님 - 선한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벌을 주시는 하나님 - 인과응보의 하나님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욥의 당한 고난의 소문을 듣고 욥의 세 친구들 -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욥을 방문합니다. 

그들은 악인이 아니라 모두 신앙인이고 욥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그를 위로하러 왔으며 욥의 처지를 보고 자기의 겉옷을 찢고 자기 머리에 재를 뿌리며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칠일 동안 그와 함께 앉아 그와 함께 합니다. 


그들의 처음 행동을 보면 그들은 긍휼을 아는 자요, 고난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요,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친구들입니다. 


7일후에 욥이 먼저 입을 열어 자신의 현재가 너무 고통스러워 자기의 난 것을 저주하고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하고 한탄하자 엘리바스와 친구들도 입을 엽니다.  


3장 부터 시작해서 37장에까지 친구들과의 긴 토론이지만 친구들의 이야기하는 욥의 고난의 원인은 다름아닌 욥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요 죄인에게는 징벌을, 의인에게는 상을 배푸시는 분인데 욥이 고난을 받은 것도 너의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욥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흔히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오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없나?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성경을 알고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그러니까 나도 어차피 죄인 이니까 어떤 징벌도 달게 받을 만하다 하면서 그 고난이나 형벌을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난 억울하다. 난 죄 지은 것이 없다하면 어리석은 신앙인이요, 아직 자기의 참 모습을 깨닫지 못한 자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욥을 가리켜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거룩한 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의 교리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의를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나은 상대적인 의라고 생각하거나 의례적인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욥의 친구들처럼 욥을 어리석게 볼 수도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신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순종하고 충성하는 자들에게 상을 내리시고 범죄하는 자들을 벌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당하는 고난은 결국 무언가 욥과 하나님 사이에 고백되지 않은 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욥의 신실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욥의 완고한 태도를 버리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줄 것이다. 이것이 친구들의 논리입니다. 


이 말을 들으며 때론 욥도 동요되고, 그로 인해 모순된 말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순전한 믿음에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욥이 고난 중에 원했던 것은 세가지 입니다. 

1) 그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거역함 없이 차라리 죽기를 원했습니다. 

[욥 6:8-10]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 반역하기 전에 차라리 죽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죽어도 하나님, 기쁘게 죽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지지도 않습니다. 사탄에게 고난을 허용하였음에도 그의 목숨은 건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2) 그러니까 이제 욥이 원한 것은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해줄 중재자 (판결자)를 원합니다. 

[욥 9:32-33]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 16:20-21]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재자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는 성령님이 중재자이십니다. 


3) 그 사이에 중보자가 없자 욥이 원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설명을 듣고자 원한 것이었습니다. 

[욥 13:2-3]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욥 31:35)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이러한 요구에 친구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미천한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설명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욥의 친구들의 반응은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과 변론하리요 하는 겸손함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어떠한 고난을 받든지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요, 하나님이 불합리하다고 여겨져도 따지지 말고 믿으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신앙주의요, 권위주위입니다. 유교문화의 권위주위와 합쳐져서 신앙생활 하는데도 질문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신앙 역시 욥 보다는 친구들의 신앙에 가깝지 않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친구들의 믿음을 책망하십니다. 

(욥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하나님은 교리가 아니다. 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씨름하는 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을 때, 단념하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분개하고 부르짖는 것이 오히려 신앙적인 것이다. 

진리의 하나님은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치리

- 욥의 친구들로 하여금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려라. 그리고 욥은 그들의 번제를 받고 그들을 위해 나에게 기도하라. 

10절)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을 주신지라. 

-> 하나님께가 아닌 욥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친구들로 인해 상처 입은, 상처 입힌 자가 상처입은 자에게 잘못을 빌라는 것입니다. 그럼 상처입은 자의 기도를 통해서 상처입힌 자를 용서하시고, 상처입은 자는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3. 고난의 이유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대답하시지만 그 대답이 욥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되는가?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단지 욥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섭리들을 보여 주시면서 너의 제한적인 지식으로 이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느냐? 내가 하는 것을 네가 다 알 수가 있느냐하고 오히려 질문을 던져 주신다. 


오히려 고난의 이유는 욥에게 가려져 있는 하늘에서의 대화- 사탄과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논쟁이 되는 부분- 하나님이 사탄과 deal하시는 분이신가? 사탄의 계략에 놀아나시는가? 


사탄의 질문 - 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체로 사랑할 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대가가 있고,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는 공격 


순전한 믿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씩 잃을 때에 우리의 믿음이 파괴되는가? 

욥은 순전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준다. 


아담과 하와 -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는 시험 

욥- 가장 비참한 처지에서도 그 믿음이 유지 될 수 있는가? 


사탄의 공격 - 상급들을 제거하면 믿음이 무너질 것이다. -> 이것은 조건적 믿음, 환경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의 시험에 오른 욥 


금처럼 정제된 가장 순전한 믿음은 극한 역설의 상황이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침묵되는 상황에서 펼쳐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절정 - 하나님께 버림받는 상황(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서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것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욥의 친구들의 유혹 

[욥 35:6-7]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욥 35: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러나 욥의 믿음은 욥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지켰다. 욥이 승리하자 사탄이 패배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정확히 답변해주지 않았지만(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그릇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그가 묻자 그의 곁에 나타나셔서 그 분이 여전히 그의 곁에 계심을, 가의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알려 주신다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욥은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심을 거두고 하나님을 친밀히 경험한다. 


직선으로 향하는 공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수없이 많은 회전을 통해서 흔들리며 가는 공) 

하나님의 역사 - 역사에 도도히 흐르는 사랑과 공의 

그런데 구체적인 일상에서 경험되는 하나님 


이해되지 않는, 공식적이지 않은.... 

너무 손쉽게 우리는 교리를 만들어 의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강요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삶을 용납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욥의 친구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하기 보다는 포기하거나 외면하거나 그저 받아들이면서 자기 신앙에 만족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변론하시길 원하십닏. 우리의 물음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경험과 교리에 갇혀 하나님과의 현재적 관계를 놓쳐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론은 밝은데 현재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무감각합니다. 


관계는 공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교리를 넘어섭니다. 사기꾼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42장 1-6절 - 이론적인 하나님이 친히 만져지고 교제하시는 관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사람이 무엇이관대 (시편 8편 4-9절) 


한 대형 백화점에서 일하던 점원이 백화점의 물건을 슬쩍 하다가 걸려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자기를 쫓겨내는 백화점에 분노하며 쫓겨나는 날 엉뚱한 장난을 쳐 놓았습니다. 

백화점 안의 물건들의 가격표를 감쪽같이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아이들 장남감에 붙여 놓아야 할 가격표를 컴퓨터 코너에 가서  붙여 놓아 800백불 되는 컴퓨터가 30불, 40불되는 아이들 장남감 레고가 400백불에, 300불 되는 카메라는 8.99에 이런식으로 엉뚱한 가격표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다음날 백화점 문을 열었을 때, 이것을 알아채기까지 5시간이나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 다섯시간 동안 카운터의 점원들은 누구도 가격표를 의심하지 않고 계산을 했습니다. 자기는 그저 자기 일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알아차린 것은 고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싼 물건이 값싸게 되자 고객들은 장남감 가격이 되어버린 값비싼 물건들을 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장남감을 사기 위해 20불을 모아 레고를 사러 왔던 아이 하나가 그 레고 가격이 400불이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점원에게 말하게 되면서 백화점의 가격표가 이상하다는 것이 발견이 된 것입니다. 


가격표를 바꾸어 놓은 쫓겨난 점원의 범죄도 기가막힌 일이지만 그 가격을 의심하지 않고 5시간이나 판매했던 점원들, 잘못된 가격인 줄 알면서도 문건을 사간 몇 몇 고객들... 우리 주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린 이렇게 가격표가 뒤바뀐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인생의 가격표를 다 바꾸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전 탤런트 이순재씨가 인터뷰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순재 하면 모범적인 원로 배우이고, 배우라면 누구나가 존경하는 어른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출연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수없이 많은 드라마며 영화를 나왔지만 자기 출연료를 이야기하면 다들 놀랜다. 우리 때는 배우가 출연료를 높게 받지 못했고 처름부터 그렇게 받다 보니 지금도 적게 받는 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 어린 가수들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면서 자기도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출연료를 받는다. 그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도록 하는 사회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많이 버냐 적게 버냐로 평가해버린다."


단돈 몇백만원에 회사의 운명이 담긴 기술이 담긴 문서들을 해외로 팔아넘기는 사람들, 빚진 돈을 갚으라면서 사람의 장기마져도 판매하려는 사람들, 어제 뉴스를 보니까 한 40대 초반의 여인이 4살되는 딸과 함께 아파트에서 죽어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상태를 보니까 2달도 더 지나있었다고 합니다. 그 집의 우편함에는 빚 독촉장이 수북히 쌓여있었다고 합니다. 빚 때문에 40대 초반의 엄마가 딸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남편도 몇개월 전에 자살...왜? 빚때문에,,,,) 우리나라 자살율 1위....너무도 쉽게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우리 사회의 가격표는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가격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치대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대우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한 일- 바뀌어진 가격표를 다시 붙여주신 것

잃어버린 사람의 가치-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사람들이 돌로 치라 했을 때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아무도 만지지 않는 나병환자를 어루만지시고, 38년이나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죽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보며 눈물 흘리시며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 압권- 십자가 상의 강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효용성 면에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그런데 그에게 천국을 보장하신다. 


그 분은 우리가 그저 사람이기에 사랑하신다. 외모를 중시하지도, 성과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주님 앞에 나오는 자라면 대환영이고 주님께 나오는 자에게 천국을 허락하신다. 

천국뿐만 아니다. 


토요일날 나누었던 예레미야 3장

3장의 시작은 신명기 24장의 율법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율법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장을 받아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람이 다시 그 남편이 죽거나 헤어진다고 해서 전남편이 그 여자를 데려올 수가 없다. 그것은 땅을 더럽히는 가증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에 이렇게 쓰여있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네 남편이고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온다면 나는 너희를 축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말은 선포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이 영적, 육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구하는 모습이다. 

돌아만 오면 용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축복을 부어 줄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 약속은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확인하신다. 
세상에서 허랑방탕하여 돌아올 낯을 일어버린 탕자가 눈에 보이자 아버지는 뛰어 오셔서 그를 반기실 뿐만 아니라 옷을 갈아입히고, 반지를 끼워준다. 새신을 신게 한다. 용서가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회복시키신다. 


시편 8편에서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그리고 하나님 만드신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리고 나서 감탄하는 소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왜 만물보다 한없이 초라한 우리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고, 주의 손으로 만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비하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지녔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 개만도 못한 인간, 기생충같은 인간.... 

상종할 사람과 상종못할 사람을 나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못믿을 사람을 나눈다. 

친하고 싶은 사람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나눈다.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과 무익한 사람을 나눈다. 


그러면서 점점 혼자가 된다. 

누구와도 어울리기 싫어진다. 

사람 만나기가 무서워진다. 

우리 또한 남에게 어떻게 평가 받을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을 그렇게 평가하면서 결국 우리도 그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인간관계 자체를 두려워한다. 

앞으로는 더욱....더 더욱 그런 사회가 될 것이다. 


사탄이 이 땅에 들어와 저지를 범죄는 하나님 창조하신 동산의 모든 가격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다스렸던 만물을 섬기게끔 우리를 속였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 어떻게 속인 것일까? 

우리에게 영원을 생각하는 마음을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심어 준 것이다.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고, 이 세상은 죽으면 끝이라고....그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준 폭탄이다. 

그 의심은 인간의 모든 가치체계를 왜곡시켰다. 

인간의 삶의 방향을 잃게 하고 목적지도 바꾸어 버렸다. 


죽으면 끝이니까 옳고 그름의 기준도 항상 현재이다. 

지금 재미있으면 선하고 지금 재미없으면 악이다. 지금 재미있기 위해 아내와 남편을 배반하고 아이들을 버려도 상관이 없다. 

지금을 즐기기 위해서 남이 어떻게 되는 것은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위해 재산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즐기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한가? 현재를 즐기니까 건강해졌는가? 


현재는 즐기면 즐길수록 만족이 없고 고통스럽다. 자기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면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즐기면 즐길수록 나는 점점 황폐해져 간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나를, 사람을, 한 영혼의 가치를 그렇게 크게 생각해주는 분이 없다는 것. 


성경의 언어, 특별히 구약의 언어-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늘 심판, 죽음, 징계를 경고하신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신다. 

우리는 이 언어를 대하면서 때로 왜 하나님은 자기만 믿으라고 할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풀어주지 않으실까? 

왜 하나님은 우라를 옴짝 달짝 못하게 하실까? 불편해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셨는가? 

내 삶을 옴짝 달짝 못하게 하셨는가? 


다른 사람은 내가 모르지만 나 자신을 바라보면 그분은 날 너무 내버려 두셨다. 

난 수십번, 수 백번 탕자가 되어서 뛰쳐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책망치 않고 반겨주셨다.

책망한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이다. 

왜? 나갈 때마다 난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내 가치를 잃어버렸고,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언어는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겪어야 했던 탕자들의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겪었던 체험의 언어이다. 


  •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1) 하나님이 보시는 나의 가치를 재발견 하는 것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전율이 인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감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심을 믿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바냐 선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동시대 사람- 패역한 유다 사람들을 보시면서도 하나님께서 돌아올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

"너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인해 즐거이 부르시며 기뻐하신다" 

내가 누구이기에, 내가 무엇이관대 나로 인해 그렇게 기뻐하실까? 


2) 사람의 가치를 회복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

그리고 그 가치를 회복한 주의 자녀들이 힘써 만들어 가는 곳- 교회 

사람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곳 - 

세상은 사람을 외모로, 교육의 양으로, 직업으로, 성격으로, 연봉으로, 출신으로,,,할 수 있는 모든 기준을 가지고 나누고 평가하고, 평가절하하지만 

교회의 기준은 오직 하나 - 그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이므로, 하나님 안에 속한 자이므로....세상의 모든 가치를 초월해서 사람이기에 대우 받을 수 있는 곳이 되게 하는 곳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계명, 새 언약- 서로 사랑하라. 서로 발을 씻겨 주어라. 서로 용서하여라. 서로 섬겨라. 

그 한가지 목적은 잃어버린 가격표를 다시 붙여 주어라. 

 

Posted by 소리벼리

 

사랑, 부활의 완성 (요한복음 21장 1-14절) 


부활! 

부활은 단지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지 사흘 되는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나오는 장면, 그것도 놀라둔 장면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resurrection)이 아니고 단지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소생은 단지 부활의 표징,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살아나는 것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선포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가 다시 살아난 그 날, 그 새벽, 이 세상이 뒤집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던 세상, 죽음이 왕노릇 하던 세상, 죽음이 생명을 삼키던 세상에서 생명이 왕노릇하고 빛이 어둠을 이기고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이 도래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한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반응

1. 그런데 그 부활의 소식을 가장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가 부활했냐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에게 그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며 그들 자신의 영향력과 힘과 부가 심각하게 소멸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 (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2. 더 어처구니가 없는 부활에 대한 반응은 다름아닌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그 소식을 열한 사도와 다른 이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막 16: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이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를 만난 뒤 바로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역시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지금 예루살렘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를 비롯한 정치가들은 예수의 부활 소식을 가리기 위해 여러 조작질을 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자들은 함께 신앙생활 했던 여러 증인들이 부활 소식을 전하는 데도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그렇게 문을 꼭꼭 닫고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으려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다가오십니다. 


말씀으로-> 증언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은 “샬롬!”, 우리말로 하면 “안녕!”하는 인사의 말씀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가 하는 인사, 송구영신예배가 끝나고 하는 인사, 새배하러 가서 어른들께, 혹은 새배하는 자들에게 인사하는 말! 새해 (하나님의) 복 많이 받으세요!! 하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의 달력은 1월 1일을 새해로 하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한 교회력은 오랫동안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은 예수님으로 인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알리는 중요한 성경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날, 새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다시 고기 잡으러 가는 제자들...

아니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힘없이, 기쁨없이, 평안 없이 그저 고기 잡으러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일상의 어려움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하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삼일 만에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불평하듯이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일상에 남겨져서 힘없이 고기 잡으러 나온다.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기에게 남겨진, 자기 홀로 감당해야 할 세상을 본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시건 말건, 세상이 바뀌건 말건, 자기에게만 관심있는 자는 세상이 바뀌었는지, 전혀 상관이 없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보게 됩니다.  1) 가장 근본적인 이유야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사정이 있습니다.  2)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3) 가정사가 복잡해서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4) 기독교에 대한 불신,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5) 게을러서 들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신다는 겁니다.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뭐라고요.  “고기를 많이 잡았냐고요. 가정은 평안하냐. 직장생활은 한만 하냐. 사업은 잘 되냐. 너, 괜찮니? 아프진 않니? 살만하니?”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끝임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일해보았는데 열매가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시한 곳에 그물을 다시 던져보렴. 다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준 계명대로 순종해보렴…하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이시다.” 


육지에 올라서 하신 일은 더욱 제자들을, 그리고 읽는 우리들마저도 감동시킵니다. 

믿음 없는 그들을 혼내시거나, 설교를 하신다거나, 무엇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가져다 주시고 물고기를 가져다가 그들을 먹이십니다. 


왜 실수 했냐고?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왜 나를 배반했냐고? 왜 또 세상으로 갔느냐고 탓하시지 않고 네가 배고파서 그렇다. 네가 피곤해서 그렇다. 네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 십자가의 고통과 엘리엘레 라마 사박다니, 하는 영적인 고통과 심장이 파열되는 사랑의 고통을 뚫고 사망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동안 예수 없이 그들의 삶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얼마나 힘들었냐? 배고프지? 그 동안 고생했어…”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너무 너무 포근합니다. 너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우리는 탓하는데 익숙합니다. 난 힘든데 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넌 왜 네 생각만 하고 내 생각은 해 주지도 않니? 


그런데 주님은,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배고프지? 힘들지?"하는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장면, 시몬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아니 또 실패해도 내가 널 사랑한다. 네 사랑은 실패해도 난 널 끝까지 사랑한다....내가 널 사랑한다.....는 세번의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의 완성은 또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