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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반전 (사무엘하 7장) 


  • 다윗의 영성 - 축복 받은 이후에도 변질 되지 않는 신앙, 넘어지지 않는 신앙, 타락하지 않은 믿음


1) 여부스 족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라! 

-> 내 삶의 중심을 하나님이 왕되시게 하라!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 절뚝발이 신앙, 맹인 신앙...신앙의 불균형과 불완전함

                                  -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심을 받았지만 실재적으로 왕 역할을 하지 못함.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예배하지만 실재로는 내가 주인 되는 삶. 왜? 중심을 여부스족이 다스리고 있기 떄문에 ... 


2) 법궤를 중앙에...

앗사의 죽음 - 하나님의 말씀대로 법궤를 운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법대로 법궤를 운반. 

레위인들이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어깨 위에 짊어지고 옮기도록...(나의 멍에를 지고 내게 배우라!)  

함께 걸어가며 춤을 추는 다윗

cf) 웃사나 홉니와 비느하스- 법궤를 신령한 사물, 부적 취급...

수레에 실어 나르거나... 전쟁에 패하니까 가져가면 이길까.... 


법궤- 하나님의 현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앞에 성결하지 못하면 두려워 떪. 

춤- 함께 거니는 것. 


왜 그리스도인이 타락하는가? 하나님의 현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을까? 

어떻게 죄를 가리울 수 있을까? 

어떻게 불순종할 수 있을까? 


믿음의 실패- 하나님의 현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었음에도 타락하지 않았던 이유-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의 현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나는 항상 하나님의 현존성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가? 

내가 기도할 때만, 예배할 때만, 찬양할 때만....의식하지 않는가? 


우리를 성결하게 하고, 믿음 안에 거하게 하고, 항상 믿음의 시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함께 거하기 위해... 

임마누엘 하나님-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 7장의 시작 - 

(삼하 7: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

- 샬롬- 평강의 상태 -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복의 상태 

골리앗도 죽고, 사울도 죽고, 블레셋도 무찔르고....왕으로- 궁에서- 평안이 살 때...

the king was settled in his place and Lord had given him rest from all his enemies around him 


그의 자리에 안착되자- 어떻게? 그 중심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현존하심 가운데 그가 확고하게 거했을 때에임하는 것- 샬롬- 평안. 


1. 첫번째 반전 - 다윗 

이 때에 많은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함정 - 영적 게으름. 향략의 유혹, 쉬고 싶은 안도감... 이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이 임했을 때에 다윗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 - 

하나님의 집을 짓자! 

예루살렘을 봉헌한 그가, 성전의 중심에 언약궤를 가지고 온 그가... 그의 때가 평안했을 때에 또 생각한 것 - 하나님의 집을 짓자. 

(삼하 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늘 하나님 중심. 하나님을 신앙의 하나님이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듯 (왜? 연예인들이 성공해서 가장 먼저 하는 것- 부모님 집 사드리는 것..) 하나님을 구체적인 인격적인 존재로서 관계하고 있다. 

그에게 하나님은 멀리 있는 신이 아니다. 기도의 대상, 예배의 대상만이 아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에게 사랑을 주고, 그의 사랑을 기뻐하시는 실재다. 목자요 부모요 친구다. 


2. 두 번째 반전 - 나단.. 

다윗은 그의 결심을 나단을 불러 이야기 한다. 

이 말을 들은 나단은 얼마나 기뻤을까? 


대부분의 목회자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고자 하여 도움을 구하며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생애 대부분을 보낸다. 

"나를 위해, 병을 위해, 자녀를 위해, 직장을 위해,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그런 수많은 기도 부탁 가운데 그 결과를 가지고 와서 상담하는 자는 거의 없다. 예수님께도 10명의 문등병자가 고침을 받았지만 1명의 문등병자 외에는 찾아온 자가 없었다. 그냥 잘잘못을 떠나 세상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다. 하나님은 그것을 탓하지 않는다. 그 분은 주는데에 전문가이다. 복의 근원이요 원천이다. 그에게는 고갈됨이 없다. 그는 공급자이다. 


나단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때 함께 청하고 그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도움을 받을 때에 함께 기뻐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누군가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싶다고 찾아오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더 무엇을 가지고 오든지 무조건 긍정해준다. 설사 교회에, 성전에 필요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무엇을 가지고 오면 기쁨으로 받는다. 


그런데 그 나라 왕인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며 자신을 찾아왔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거할, 자신이 제사할 보금자리요 일터를 새롭게 꾸미는 일이었다.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삼하 7: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나단은 다윗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단에게 찾아가셨다. 다윗이 아닌 나단에게 먼저 찾아가셨다. 

 나단에게 하신 말씀이 5절에서부터 16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은 해석의 신중함이 요구되는 본문이다. 

 대부분의 설교가들이, 특별히 한국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니 다윗을 더욱 축복하셔서 그의 왕권을 더욱 확고히 하고 영원하게 하셨다"는 축복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대부분 그 결론으로 성전건축합시다. 감사헌금 드립시다로 끝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겠다고? 도대체 누가 너에게 나에게 집이 필요하고 내가 집을 원한다고 하더냐?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 너를 통해 하나님의 왕국을 세워가는 중이다. 집을 세우는 것은 나이지 네가 아니다. 이 왕궁의 왕은 나이지 네가 아니다. 너의 목동 시절부터 나는 너와 함께 일하며, 구원과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내 왕국을 건설해 왔다. 사람들로 하여금 네가 하는 일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네가 생각하는 그 집은 적당한 때, 네가 아니라 네 아들 때에 가서 그 일을 할 것이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5절부터 16절까지의 문장을 살펴보면 I will do, I do, I want..23번의 "I"를 내세워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다. 


이 말씀은 나단에게도, 다윗에게도 큰 시험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나단은 자신의 좋은 환경을 포기하고, 그 보다 더 힘든 일은 왕 앞에 서서 "안됩니다"라고 이야기 해야 한다.  왕의 선의를 거절해야 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또 한번 제어 당해야 했다. 

웃사가 법궤에 손을 대며 죽자 분노했던 다윗은 이번에도 자신의 선의를 거절당하여 분노할 만 했다. 


그런데 나단은 이 말씀을 듣자 바로 다음날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전한다. 


ex) 백만 달러 헌금을 거절한 목사님 예화


3. 세번째 반전 

나단의 전함을 들은 다윗은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분노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이 말은 다윗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은 것"이다.

자칫 교만할 수 있을 때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가서 앉았다. 

당시 한 나라의 왕은 신으로 받들여졌다. 애굽이 그랬고 블레셋이 그랬고 후에 로마가 그랬듯이 한 나라의 왕은 신과 동일시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다윗도 그것에 취해 자칫하면 하나님과 동등되고자 하거나 하나님보다 높아질 수 있었다. 하나님의 집을 봉헌하면서 자신이 이젠 성공했다고 출세했다고 이젠 내가 당신을 돕겠다고 허무맹랑한 생각을,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단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다윗은 다시 하나님 앞에 앉았다. 

삭개오가 한껏 주님을 보러 올라갔다가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 다시 나무 아래로 내려 오듯이 자기 위치를 찾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누구임을, 한낮 목동이던 자신을 여기까지 높이신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이며, 내 집이 무엇이기에, 하나님 여기까지 나를 이르게 하셨나이까..."엎드렸다. 

그러고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이스라엘에 대해 더 큰 계획이 있음을, 자신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 너무도 많은 존재임을 고백하게 된다. 

Sovereign Lord, Is it for your servant, a mere human! 

왕이시여, 이것이 정작 주의 종, 미천한 인간에게 행하실 일이옵니까? 


다윗이 자칫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할 때 하나님은 웃사를 통해, 나단을 통해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에, 계획에 어긋날 때에는 그를 붙잡으셨다. 

우리는 선한 의도가 매도 당할 때 시험에 든다. 분노하고 실망하고, 뛰쳐 나가버린다. 


거기엔 교만함이 있고, 내가 주도하고 싶은, 내 의를 나타내고 싶고, 주장하고 싶고, 높이고 싶은 은밀한 죄가 스며들어 있다. 

다윗에게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니다. 

우리가 자칫 교만해질 때, 내가 하나님 보다 앞서려고 할 때, 내 선한 의도가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때, 주님은 똑같이 우리를 제어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현존을 놓치는 우리는 언제나 우리 생각에 앞어 멈춤이 없이 질주한다. 


ex)사랑의 교회 성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이젠 사회의 골치덩이가 되었다. 교계의 골치덩이가 되었다. 


사무엘상의 다윗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하는 신앙의 여정이라면 사무엘하의 다윗의 여정은 가나안 정복 이후의 성도의 삶을 보여준다. 

축복의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다. 부모 덕에 공부하여 성공한 자식이 성공한 후에 부모를 엎신여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듯 하나님 앞에 우리 의를 앞세우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봉양하듯, 우쭐해지다가 넘어진다.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다윗을 제어하신다. 왜 그토록 친밀히 교제했던 다윗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나단을 통해 말씀하시나? 


나단을 위한 훈련도 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자기 생각에 빠지면 하나님의 음성을 잃어버린다. 더군다나 그 생각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멋지고 좋은 것이라 여겨지면 하나님보다 앞서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그 귀를 열게 하셨다. 또한 네가 아무리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더라도 넌 제사장의 말에 순종해야 하는 영적인 질서를 세우신 것이다. 한 나라에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그의 교회에선 그는 한 사람의 성도일 뿐이다. 그것은 왕과 제사장에게  똑같이 주시는 영적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이 말씀 들을 때가 아닌데, 우리는 아직도 갈길이 먼데....

그런데 큰 비의 은혜를 약속하신 주님은 먼저 은혜 받은 후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들을 말씀하신다. 

가나안 이후의 우리의 삶에 넘어지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씀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법궤 회귀 (사무엘하 6장)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부스족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탈환하므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된 다윗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5장 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브론에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그것을 어떻게 나누냐면 다윗이 삼십세에 왕위에 올라 40년을 다스렸다고 말하면서 헤브론에서 7년동안 유다를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삼심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가 되었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까지는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정해지기까지 다윗은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인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가나안 7족속 중의 하나였던 여부스 족속이 이삭과 야곱을 조롱하는 맹인과 절뚝박이를 조롱삼아 우상으로 만들어 이스라엘을 농락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조롱했던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여부스족속의 그러한 행태를 미워하며 그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 중심을 탈환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온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 중심부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서 통치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목자 삼은 다윗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목자로서 삼았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게 하는 것, 이것이 온전한 구원의 모델입니다. 


다윗의 삶은 왕이 되기 전의 여정과 왕이 된 후의 여정으로 구분합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울 때, 연약할 때, 힘이 들때, 하나님께 매달려서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받은 후에 타락합니다.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노아가 홍수가 그치자마자 포도주에 취해서 범죄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다시 바알과 앗세라에게 무너집니다. 

축복받은 삼손이 데릴라에게 취해 머리를 잘리게 됩니다. 

목숨을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이스라엘의 비밀을 바벨론에게 다 누설합니다. 

40년을 치리했던 엘리 제사장은 나이 많고 비둔하여져서 이스라엘의 타락을 눈감아 버립니다. 

수 많은 교회가, 목사가, 성도가 왕이 된 이후, 축복 받은 이후의 삶에서 무너집니다. 


다윗도 물론 앞으로 나누겠지만 왕이 되고 난 후에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유혹에 때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돌아옵니다. 철저히 회개 합니다.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왕이 되기 전과 후의 신앙이 바뀌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에 신앙의 적은 어려움이 아니라 부유함입니다. 부유하기 때문에 신앙을 떠납니다. 

부유하여서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다윗은 부유함에도 늘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왕의 힘으로, 권력으로 이스라엘을 다시리지 않고 믿음으로,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자신을 다시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자는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물질 앞에서 비굴해지지도, 교만해지지도 않습니다. 


사무엘하 6장은 왕이 된 이후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 실로에서부터 나간 법궤는 지금 성전을 떠나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온성을 삼은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셔올 일을 생각합니다. 법궤는 길이가 1.2미터 너비와 높이가 60센티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궤였습니다. 조각목 위에 순금이 입혀져 있었으며 그 안에는 돌판과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 물건들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며 (골판),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고 (만나), 그들의 능력이 되심(지팡이)을 상징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그 중심부의 또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올 생각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고 한 일- 산당, 흩어지는 예배, 자기 편의에 맞춘 예배. 사사기 후반부의 예화들, 자기집에 산당을 세워두고 제사장을 고용하여 자기만을 위한 예배를 드리게 한 것..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한 일- 벧엘과 단에 또 다른 예배 처소를 세운 일, 왜? 자기 편의를 위하여... 


주 5일 근무제로 바뀌니까 주일 예배 시간을 바꾸자. 금요일날 예배를 드리자. 새벽예배를 없애자. 

우리는 10시 반에 예배를 드리지만 거의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대예배 시간- 11시 

1900년도 초반 우리나라가 힘들었을 때ㅡ농경문화가 중심이던 시기에 11시라는 의미- 하루를 온전히 드리기 위한 가장 중심부의 시간. 자기 편의에 맞춘 것이 아니라 중심을, 전부를 헌신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수요예배- 일주일의 가장 가운데 시간- 예배 하자! 

금요철야- 한주일의 일을 끝내고 이젠 푹 쉬고 싶은 시간- 밤세워 기도하자, 부르짖자! 


자기 편의에 예배 시간을 맞춘 것이 아니라 중심을 드리고, 전부를 헌신한 예배였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 중심에 법궤를 모시고자 한 다윗의 믿음 - 

중심을 드리자!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자! 


[신 8:12-14a]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이 사건에서 해석의 논란이 되는 부분- 웃사의 죽음 

법궤를 되찾아오는 길에 그 짐수레를 끄는 황소들이 비틀거리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법궤가 짐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내민다. 


(삼하 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아비나답과 더불어 하나님의 법궤를 오랫동안 보관하던 자. 

그리고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궤를 붙잡다가 죽은 것 -어떠한 악한 의도도 없지 않습니까?

성경은 웃사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 않습니다. .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은 웃사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합의되는 공통된 의견은 그는 법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법궤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 10:8 출 25장 37장, 역대상 15:12-15) 


법궤는 절대로 사람의 손으로 만져서는 안되고, 레위인들이 법궤에 부착된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서 운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첫 째 레위인이 아닌 수레에 태워 법궤를 운반하면서, 소들이 날뛰어 법궤가 요동하니까 손으로 법궤를 잡은 것입니다. 


왜 법궤를 반드시 레위인들의 어깨에 의해서 운반하게 했을까? 

[대상 15:12-15]

(대상 15:12)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대상 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대상 15:14)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대상 15:1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이것은 법궤를 물건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체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법궤는 반드시 구별된 레위인들이 자신을 성결케 한 후에 메게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로서, 영으로서, 인격체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 법궤를 대할 때 거룩하지 못한 제사장들은 죽어서 나왔습니다. 왜? 법궤는 하나님의 현존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웃사는 법궤를 수레에 실어 황소들이 끌게 했습니다. 황소들이 미쳐 날뛰어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자신의 손을 내밀어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자, 지금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법궤도, 레위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 살아가고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럼 이 말씀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의 현대적 적용은 우리에게 주제넘게 하나님을 관리하려 들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상자 안에 가두고, 수레에 실어나르면서 그것이 훼손될까봐 우리가 하나님을 지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서 어느덧 신앙생활이 오래되다 보면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보호하는 사람인양 교만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을 성결하게 하기 보다 자기 수레에 담은 하나님이 깨지지 않게 내 손으로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교회에는 자기 손으로 하나님을 책임관리하려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자신은 하나님처럼 높아져 가고 하나님은 죽은 물건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한 자들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신앙을 "회칠한 무덤이요,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 23:27) 하셨습니다. 


(삼하 6: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은 지금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까? 웃사를 친 하나님께 분노한 것입니까? 웃사에게 분노한 것입니까? 

웃사에게 분노한 것입니다. 왜? 법궤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웃사로 말이암아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다윗의 뜨거움이 웃사로 말이암아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다윗은 웃사를 탓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반성합니다. 자기가 아직 부족하다고 근신합니다. 

[삼하 6:9-삼하 6:10]

(삼하 6: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그런데 법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이 축복받게 되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순종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 됨을 깨달아 다시 법궤를 모셔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삼하 6:13-삼하 6:14]

(삼하 6: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 6: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레위 사람들이 어깨에 법궤를 메고 여섯 걸음을 걸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겸손을 상징하는 베 옷을 입고 춤을 추며.... 


Dancing with God. 


춤은 홀로 추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추는 것입니다. 음악과 더불어 파트너와 더불어 춥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신실한 기독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나님과 춤추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다윗은 말씀을 따라 예배하며, 자기의 왕의 복장을 벗어 던지고, 겸손과 회개, 그리고 성결의 배옷을 입고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춤추었습니다. 기쁨과 환호의 순간임과 동시에 거룩하고 진지하며, 엄숙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은 겸손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겸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왕의 직함이 다윗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가장 중심에, 가장 뜨껍게 하나님의 법궤,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132편 


떠돌아 다니는 법궤- 왜? 쉴 곳을 찾을 수 없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지만 머물 곳이 없어서 베다니로 향했던 주님....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하자 하나님의 응답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라." (시 132편 13-14절) 


지난 주 시편 23편을 나누면서 그가 나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그는 우리의 쉴만한 물가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쉴만한 처소인가? 주님이 우리 안에 영원히 머무시기를 원하는가? 

내가 어려울 때에 우리는 늘 주님께 우리의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달라고 인도해 달라 기도하며 또 그렇게 응답받으며 사는데 우리는 주님이 거하시고자 할 때에 외면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만 원하지 않는가?

 

Posted by 소리벼리
 

부활, 새로운 해의 소망 


단지 똑같은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오늘을 가리켜 새해라 부른다. 

새해가 밝았으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새해엔 소원 성취하라고

새해엔 건강하고 다 잘 될 것이라 다들 덕담이다. 

왜 어젠 그런 소리 못하고 오늘엔 이렇게들 소란들인가!

그래 새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가, 새로운 시간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일게다. 


그 때도 그랬을 것이다. 

단지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음에도 

하늘엔 잔치가 열렸다. 

사탄이 패배하고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 그 날, 

제자들은 숨기에 바쁘고 

거짓 종교인들과 로마의 관리들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안도했던 날, 

하늘엔 새해가 시작되었다. 


부활의 날, 그리스도가 사망에서 살아나신 날, 

십자가를 저주에서 승리의 상징으로 변화시킨 날, 

그 날 후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이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해가 돋았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래, 우리의 새해는 바로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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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옛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다!


지난 것을 환송하자!

그냥 보내지 말고 기억하고, 묵상하고, 그리고 이별하자. 


삭개오와 더불어 주님을 보고자 나무 위로 올라갔던 갈망을 기억하고

주님이 다가오셔 내게 말 걸어오심을 기억하고

그 분을 만나기 위해 다시금 땅으로 내려온 것을 기억하자. 

그 분이 내 집에 오셔서 함께 유하셨던 그 날을, 그 순간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하되 이젠 이별하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날을 맞자. 

더 이상 지난 것에 얽매이지 말고

이제 또 다른 하루

또 다른 태양

또 다른 그 분의 은혜를 바라보자. 


시대의 타락함에 맞서 아합왕에 섰던 엘리야의 의기(義氣)를 배우고

열심만 있던 엘리야를 그릿시냇가라는 골방에서 말씀을 먹이고 

사르밧이라는 용광로에서 훈련시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자.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사랑의 기도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며 드렸던 불같은 회개와 

은혜의 비를 간구하며 드렸던 그 큰 갈급함을 사모하자!


그리고 우리 삶에 보여지는 작은 구름 조각 하나하나를 붙잡으며 

우리 삶의 하늘에서 다가오는 큰 비의 소리를 듣자. 

큰 비의 은혜를 맞자! 

이제 옛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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