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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왕상 18:41-46) 


17장에 처음 등장하는 엘리야

아합왕 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바알과 앗세라의 숭배자들이 가득하던 때. 

성전에도, 나라에도, 곳곳에 바알과 앗세라의 기복신앙, 쾌락 신앙, 세속 신앙이 가득하던 때

풍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예배를 대신하던 때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이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이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이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분노하며 아합왕에게 나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제 내 말이 있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내 말이 떨어지면 

"너희의 복이 끝날 것이다. 이제 복에 겨워 오만방자하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이 복이 끊어질 것이다"고 우렁차게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선포한 것이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다. 자신의 믿음이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신념이다. 

신념은 때로 강한 용기로 나타나지만 능력이 없다. 보장이 없다. 

그 말을 하자 여호와의 말씀이 비로서 임한다. 

순서가 바뀌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서 전하는데, 엘리야는 선포하고 나서야 말씀이 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숨어라. 내가 널 먹이겠다." (왕상 17:3-4절) 


무엇인가? 이젠 내가 널 훈련시키겠다. 양육하겠다. 널 진짜 선지자로 만들겠다. 

마치 열성가득한 모세처럼, 호기 충만한 모세가 애굽 군사 하나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듯이 감히 아합왕 앞에 나가 충만히 선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숨기시고 훈련시키셨다. 


마치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머물면 머물게 하고

만나가 내리면 먹고 물이 나오면 마시고, 메추라기가 떨어지면 배불리 먹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은 그릿시냇가가 마를 때까지 엘리야에게 

고독의 훈련, 만나 (말씀의 훈련) 을 시키셨다. 

이 훈련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을까? 

나는 정말 무력하다. 나는 정말 할 수 있는게 없다. 세상은, 신앙은 신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없는 믿음은 단지 신념이다. 

무능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릿 시냇가가 마르니까 바알과 앗세라의 수괴, 이세벨 여왕의 고향, 그 중심 사르밧으로 엘리야를 보낸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동역자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한다. 

거기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는 우선수위의 훈련을 한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내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서 언제나 내 믿음, 내 생각, 내 환경, 내 감정을 우선했던 실패를 되돌아보고 이젠 실패하지 않도록 훈련시키신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늘 실패하는 훈련, 이기적인 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훈련

기복적인 신앙인이 매일 같이 위선 속에서 자기를 속이는 그런 훈련. 

먼저하고 나중에 하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니까 결국 하나님이 채우시고 보장하신다는 것을 경험케 하신다. 

풍요로울 때에 그 훈련을 시키시지 않으셨다. 

마지막 먹고 죽으려 할 만큼 기근이 극심할 때

없어도 정말 없을 때에 하나님의 것 먼저 할래? 결국 네것 하다가 죽을래하는 훈련을 시키셨다. 


그리고 나서 죽은 아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기도의 능력을 알게 하신다. 

죽은 한 영혼을 살리는 기도

기도는 결국 한 사람을 향한 애끓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간절한 기도는 사랑에서부터 나온다. 다급함에서부터 나온다. 

한 영혼을 위한 기도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 간절함에서부터 기도가 시작된다. 

바알과 앗세라를 향한 영적인 전투에 앞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영적인 죽음을 살리는 기도에 앞서, 연약함 가운데 죽은 한 영혼을 향한 기도를 시키신다. 


그리고 다시 아합왕에게 보낸다. 

18잘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제 순서가 바로 잡혔다

순서가 바로 잡히기 까지 "많은 날이 지났다"고 말씀이 증거한다. 

하나님은 순서가 바로 잡히기 까지 우리를 훈련시킨다. 

우리는 서둘고 급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서둘지 않으신다. 

차곡 차곡,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첫 번째 큰 비는 노아 때 왔었다.

그 큰 비는 죄악을 다 씻어 내렸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다 씻기 위해서는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비는 심판의 비가 아니다. 반대로 이 비는 은혜의 비다. 모든 기근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 쏟아지는 비다. 

우리의 냉랭한 신앙이 물러가고 눈물이, 은혜가, 평화가 찾아오는 비다. 

그야말로 큰 비다. 


(큰 비에 대한 묵상) 바알과 앗세라가 도저히 줄 수없는 은혜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해도, 가진 것이 많아도 비가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큰 비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의 복이다.  단순하지가 않다. 

또 이것이 세상 사람들을 다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엘리야는 이 은혜를 맛보면 아합과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꼐로 돌아올지 알았지만 그들은 비가 없어도, 또한 비가 와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 이 실망이 로뎀나무의 사건을 인도한다. 

이것은 믿는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은혜다.쉽게 정의할 수 없는 은혜가 큰 비다. 우리는 1년동안 이 큰비의 은혜를 묵상할 것이다. 


그런데 큰 비의 약속을 받은 엘리야가 바로 큰 비를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아합왕에게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싸그리 모아 갈멜산에 모이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백성에게 질문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언제까지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면서 여전히 바알을, 돈을, 쾌락을, 정욕을 쫓을 것인가 묻는다. 

백성들이 한 마디 말도 답변하지 못한다


여호수아 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가 오직 여호와를 따르겠습니다 말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도 해깔린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모여 기도하기 시작한다. 

제단 주위에서 뛰어 놀고, 큰 소리로 울부 짖다가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한다. 

미친 듯이 떠든다. 미친 것이다. 


거라사 지방의 군대귀신 들린자가 미친 듯이 떠돌아 다니며 소란을 피우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모습이다. 

미친 예배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미친 짓이다. 예배는 내가 미쳐서 날 뛰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서 춤추는 것이다. 

내 감정에 들떠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감격하는 것이다. 

성령은 내 가슴을 찢고, 목이 쉬도록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예배는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예배이다. 

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는 훈련이 담겨 있는 예배고, 순종이 담겨 있는 예배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는 고백이 담겨 있는 예배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한다. 

자기 감정의 예배, 축복만을 부르짖는 정욕의 예배, 쾌락을 위한 예배를 무너뜨리고 말씀의 예배,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다시 드린다. 


31절: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32절: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36절: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성령 충만은 순종이다. 그 분의 뜻대로 따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엘리야는 제단과 번제물에 물을 가득 붙고서 기도한다. 

한 죽은 아이를 살렸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회복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해서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왜 비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제단에 불을 내리시는가? 

회개가 없이는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회개없는 은혜는 오히려 타락이고 교만이고, 죄악을 낳기 때문이다. 


아합은 우리 안의 죄이다.  

바알과 앗세라는 우리 안의 돈을 사랑하는 탐심이고, 음란함과 쾌락이고, 화려함과 외모를 최고로 하는 우리 안의 이세벨이다. 


이것을 몰아내시지 않고선 비를 내릴 수가 없다. 

은혜를 맛볼 수가 없다. 큰 비는 우리 안의 하나님의 성전, 우리 안의 바알과 앗세라, 우리 안의 아합가 이세벨을 죽이지 않고서는 내리질 않는다. 


큰 비를 맞아야 하지 않는가? 

복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복이 되어 돌아가냐 하지 않는가? 


그러면 다시금 갈멜산에 올라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여야 한다. 

번제물에, 제단에 성령의 물을 뿌리고 그 성령이 내 죄를 불태우도록 해야 한다. 


내 감정에 들떠서 날 뛰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신 것과 당신은 나를 되돌이키시는 분임을 알게 하옵소서."  


단지 내가 원하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의 복,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복, 하나님 나라의 심령이 열리기 위해서 내 안의 바알과 앗세라. 내 안의 아합과 이세벨을 몰아내야 한다. 


불로 태워야 한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태워야 한다. 

내 안의 불평, 내 안의 판단, 내 안의 정죄, 내 안의 교만, 내 안의 탐욕, 내 안의 변명, 내 안의 핑계, 

내 안의 게으름, 내 안의 모든 죄를 태워야 한다. 


불을 내려달라 기도했던 엘리야가 이젠 물을 위해 기도한다. 

3년 6개월동안 이나 오지 않던 비를 위해 머리를 무릎에 쳐박고 기도한다. 

엘리야는 바알과 앗세라가 없는 것을 가졌다. 아합왕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을 가졌다. 

그것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 열쇠는 오직 믿음을 동반한 기도에서 나온다. 


첫번째 기도는 회개를 위한 기도였다. 불을 위한 기도는 회개의 기도이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 죄를 불태우게 된다. 자기 안의 모든 우상을 불태우게 된다. 하나님 외에 의지했던 세상의 물질과 힘과 권력을 던져버리게 하신다. 


두 번째 기도는 은혜를 향한 기도다. 이제 하나님으로 살겠다는 기도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겠다는 기도다.

회개를 하게 하신 하나님은 성결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비를 향한 기도는 성령 충만을 향한 기도요, 성결을 위한 기도다. 

회개의 기도가 비움을 위한 기도라면 은혜를 향한 기도는 채움을 위한 기도다. 

우리는 은혜로 채우지 않은면 넘어진다. 

성도는 은혜로 산다. 은혜가 없으면 죽는다.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시다.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왕상 18:42) 


-겸손한 기도, 간절한 기도

회개 후에 만족하지 않았다. 교만하지 않았다. 이제 이것으로 되었다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목말랐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물릴쳤을 때에 승리감에 도취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산꼭대기로 기도하러 올라간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불쌍한 죄인이 되어 엎드린다. 

하루에 삼천명을 회개하게 했던 베드로가 평소랑 똑같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에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보게 된다. 은혜는 또 기도할 때 온다. 또 무릎꿇을 때에 온다. 

예수님의 승천을 본 제자들이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성령이 임한다. 


그름조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그 증거품이 구름조각이다. 

7번의 기도는 그 증거를 향한 변함없는, 끊질긴 간절한 기도.... (1년동안 묵상해야 할 것들...)  

7번-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기도이자 순종이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법칙이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씻을 순종이다. 

7번은 끝까지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을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손바닥 만한 작은 구름을 통해 큰 비를 보았다. (18:44) 

아합에게 선포할 때 이미 큰 비의 소리를 들었다. (18:41) 

작은 것 안에 담긴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 작은 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축사... 

겨자씨 하나에 담긴 100배의 열매... 


(겔 34: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말랐던 강들이 물로 가득차게 되고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 온 나라 백성이 비에 젖게 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부자인고로 (누가복음 18장 18-23절) 


올 한 해 교계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문제, 지금도 되고 있는 문제는 명성교회 세습 사건입니다.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일이 교계에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계속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대형교회에서도 이른바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승계하는 세습의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명성교회의 일이 이렇게 크게 다루어 지는 이유는 명성교회와 김삼환 목사, 그리고 그 아들 김하나 목사 역시도 성도들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목사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김삼환 목사하면 떠오르는 그의 목회 철학은 이른바 머슴목회입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의 머슴으로, 성도들의 머슴으로 자청했습니다. 대형교회의 목회자하면 떠올리는 권위주의적이고 카리스마넘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은사나 기적을 말하지도 않았고 그저 머슴처럼 섬기고 일하는 목회자의 모습을 표방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부흥해도 40퍼센트 원칙을 유지하면서 교회 재정의 40퍼센트를 선교하고 구제하는 것을 유지했습니다. 국내외 1000여개의 어려운 교회를 섬기고, 수많은 선교사와 학교, 병원, 선교단체를 후원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교회를 후원하는 교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명성교회하면 떠올리는 특징은 한국의 새벽예배를 대표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가난한 유년시절 시골교회의 새벽종을 울리는 것을 맡으면서 새벽예배에 다니기 시작해서 평생 새벽예배의 영성을 강조하는 목회자였습니다. 평소에도 역 5000여명의 성도들이 새벽예배에 참석하며 3월과 10월 두차례 열리는 특별새벽예배에는 새벽예배에만 5만명 가까운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해서 새벽예배만 4부예배를 드리는 한국에서 가장 새벽예배를 많이 드리는 교회로 이름이 높습니다. 


또한 그 아들 김하나 목사도 유학생을 사이에서도 대형교회 목회자의 자녀를 전혀 티내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실력을 갖춘 평판이 좋은 목사였고 아버지와 아들 목사가 다 같이 자기들은 절대 세습을 안할 것이라고 여러번 공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 심지어 일반 사회단체나 뉴스까지 보도하면서 세습을 비판하고 성명서를 내고, 비난하는데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세습을 했습니다. 단지 욕심때문에, 탐심때문에라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일을, 자기 스스로의 공언을 부정하면서까지 행한 것입니다. 


속사정을 들어보면 일면 수긍이 가는 면도 있습니다. 사회의 반대와는 달리 명성교회의 공동의회는 70퍼센트가 넘는 찬성으로 아들 김하나 목사의 세습을 찬성했습니다. 왜 사회가, 신학생들이,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반대하면서도 명성교회와 두 목사는 세습을 감행했는가? 


소속된 목회자만 100여명, 교회 관계된 교회  안밖의 기관들, 교회내의 카페나 주차, 식당, 서점, 선교기관, 교회 밖의 학교나 병원등과 같은 관련기관에서의 유급 직원들만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들의 안정을 위해서 세습을 절대적으로 찬성한 것입니다. 

그들도 사회에서, 외부에서 외치는 비판의 소리를 어찌 듣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교회 안에 딸려있는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다른 외부의 리더십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자기 교회의 안정을 위해 사회로부터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비난을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용납되어 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받는 상처는 훨씬 더 깊은 것이고, 또한 그 교회는 더더욱  외부로부터 단절된, 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깨끗하지 못한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일이 나에게 나타난다면 난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의 선택에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달려있다면 난 과연 그런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지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 공관 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청년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관리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세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나이도 젊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유는 영생을 얻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무엇을 얻는데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꿓은 것을 보면 열정도 있고 성실함도 있는 사람입니다. 

운좋아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성실이 몸에 베고 목표가 분명하여 그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좋은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성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생은 내가 얻고자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엡 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그것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고 이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우리 인생이 구원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많이 들었지만 또한 너무나도 자주 잊어버리는 말씀입니다. 


그가 예수를 가리켜 무엇이라 말합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말은 무엇이냐면 내가 어떤 선한 일을 더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 나온 이유는 예수로부터 천국가기 위한 어떤 방법, 특별한 행위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절) 


이 구절만 놓고 놔서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데 예수님도 선한 분이 아닙니까?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선한 일을 통해 구원받을 거라 생각하느냐? 네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여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다가갈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거룩하라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들을 청년에게 묻습니다. 

(눅 18: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청년이 의기양양해서 말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한 이 계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다 빠지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계명만 묻습니다. 

다시 말해 네가 미쳐 모르는 그 것- 넌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구와 함께 사는가를 보십니다. 


청년이 주님을 찾은 이유는 선한 일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의 목적을 얻으면 예수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 부족함을 채우는 그저 부분일 뿐입니다. 

이게 우상숭배입니다. 

내 문제, 내 부족,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믿는 것- 그것이 채워지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 세상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따르라, 나와 함께 거하자는 것입니다. 

너 가진 것 뒤로 하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눅 18: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근심하여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를 채울지는 알았어도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릴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말합니다. 

(눅 18: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그냥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천국가기가 불가능하다? 여러분 이게 납득이 됩니까? 

구약의 아브라함,이삭, 야곱, 요셉, 다윗....수많은 부자들... 

록펠러, 스텐리 템...사회 각층의 유능한 크리스찬들.... 그들은 천국못가는가?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네가 복이 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은 말씀에 의지해서 떠나는 것이다. 


신앙은 말씀을 따라 내가 익숙한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떠나는 것이다. 

애굽에서 의지하고 있는 나일강을 비롯한 열가지 신을 떠나는 것이 열가지 재앙이고 사마리아 여인이 의지했던 다섯 남편을 떠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맛보는 것이다. 

떠나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것,  모든 것을 버려두고 산에 오르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것....그런데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것을 붙잡는 사람... 자기 능력, 자기 의, 자기 물질, 자기 것을 붙잡는 사람....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를 채울지는 알았어도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땅보다 자기 가축을 위해서 여기에 머물르기를 더 좋아하는 르우벤, 갓, 므낫세와 같은 사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하다는 것은 의지할 자기 것이 없는 사람, 주님의 말씀 앞에서 놓지 못할 것이 없는 사람들...그들이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눅 18:29-눅 18:30]

(눅 18: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눅 18: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받아들이기 힘든 구절...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삭을 받쳐야 하는가? 

주님을 위해서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려야 하는가? 

너무 한 것 아닌가? 

더군다나 30절의 말씀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말씀...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아내를 버리고 자녀를 버렸더니...여러배를 받았다는 것은 여러번 장가갈 수 있다는 소리인가? 


우리가 우리 가진 것에 집착하는 이유, 핑계, 명분...가족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물질에 집착하는 이유... 가족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가족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하고 매달렸더니 가정이 건강해지는가? 그들이 만족하는가? 감사하는가? 

오히려 물질로 인해 싸우고 깨지고, 버리고, 죽이고 사는 것이 세상.... 

탐심의 이유로 가족을 들먹이지 말라. 그것은 자기 기만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순종하면 너의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보호할 것이다. 안전할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행하면서 교회의 안정을 위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라고 변명하는 이들....

그것이 정말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을 지키는 것일까?


말씀을 위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가 의지하는 것을 다 주님 앞에 맡길 자세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내 딸린 것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버릴 것인가?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Posted by 소리벼리

마가복음 2장 1-12절 - 생명을 향한 열정 - 사랑


이번 주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의 한 의사의 인터뷰가 제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지난달 13일 한 북한 병사가 공동경비구역 (JSA)을 넘어 한국으로 귀순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발의 총상을 맞고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병사를 치료한 아주대 중증외상 센터장인 이국종 교수의 인터뷰였는데  언뜻 들으면 굉장히 말투가 투박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해서 뭐 저런 사람이 있나 할 수도 있는데 그 내용을 들으면 그 분의 말투가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중증외상 센터라는 곳은 그야말로 심각한 외상을 입은 환자들, 총상이라든지, 교통사고라든지, 심각한 부상을 당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입니다. 일년이면 200여번을 심각한 사고를 당한 환자를 급히 치료하기 위해 헬기를 타고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생명이 위독한 사람에게 1분 1초가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시급을 다퉈 수술을 해도 전체 환자의 70-80페센트는 수술 중이나 수술 후에 사망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일년이면 200여번을 헬기를 타고 이동해서 급히 환자를 실어 수술하는데 그 수술을 통해 구해내는 환자는 30퍼센트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급을 다투고, 그래도 그 결과가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과에 지원하는 의사도 너무 부족하고 간호사들도 위급하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서 그만두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위급한 사람들을 치료하다보니 사망하거나 치료 이후에도 치료비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지요. 소말리아 해적에게 잡혔다가 구출된 선장도 몇차례 수술끝에 살아나게 되었는데 선박회사도 치료비를 내지 못한 채 파산하고 국가도 책임을 떠맡지 않아 결국 병원이 수술비를 떠맡았다고 합니다. 이번 북한 귀순 용사의 수술도 병원장의 말을 빌면 국가에게 청구는 했는데 받을 수 있을는지는 미지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힘들기는 제일 힘든데 지원하는 의사도 간호사도 턱없이 부족하고 병원도 이 과가 돈이 안되기 때문에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사도 병원도 성형외과나 안과나 치과같은 치료과정이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성공확률이 높고, 사업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훨씬 효율적인 그런 과를 선호하고 확장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외상 센터의 일인자로 일년 거의 쉬는 날 없이 수술을 하는 바람에 한쪽 눈은 거의 실명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다른 인터뷰에 보니까 자기가 죽을 적에 자기 관에 자기가 수술한 환자들의 명부를 가지고 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고, 한쪽 눈이 거의 실명이기 때문에 앞으로 의사로서 수술할 날들이 얼마남지 않았지만 이 외상센터가 힘들고 돈이 안된다고 외면받지 않고 선진국의 수준에까지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하는 것이 자기의 소임임을 밝혔습니다. 


참 존경할 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인터뷰를 들으면서 사람의 생명을 앞에 두고 정말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그 의사를 모습이 저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이 힘든 일을 한다고 그렇다고 성형외과나 다른 과를 택한 의사들을 탓하거나 폄하하지도 않습니다. 그들도 그들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자기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위급한 환자들 때문에 다른 의사가 어떤지 신경쓸 여력이 없다고도 합니다. 

생명을 다해 사력을 다하는 의사의 모습을 보며 목사의 임무는 무엇인가? 좀 더 넓게 우리 크리스찬의 임무는 무엇일까? 

바로 영혼을 구하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저는 그런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오히려 다른 종교, 다른 성도, 다른 교회를 비판하면서 정작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임무에는 정말 너무 게으르고 소극적이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3년간의 시간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1분 1초가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을까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의 삶으로만 보아도 33년간의 생애서 대중앞에 나서서 일한 3년간의 시간은 정말 소중한 시간입니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제자를 삶고 사람들과 함께 했던 3년간의 시간은 정말 귀중한 시간 중에서도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공생애의 삶의 내용을 보면 효율적인 측면에서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보들을 보게 됩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사마리아 땅에 가서 한 이름없는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부정한 여인을 만나 구원 사역을 행합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삭개오의 집에 거하셔서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합니다. 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멀리 거라사 지방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러 갑니다. 

왜? 인류구원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이루는데 대중을 상대하신 것이 아니라 한 영혼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한 사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베풀고, 귀신을 떠나가게 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 같은데 주님은 그저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위험을 무릎쓰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바쁜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그럴 시간이 없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한 영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한 무리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와 똑같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른 구원 사역에 비해 좀 특별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적이나 구원사역에서 필요한 것은 본인의 믿음입니다. 믿음을 통해 역사가 나타납니다. 구원의 일은 누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회개하고 본인이 무릎꿇고 본인이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삭개오) 

때로는 주님께서 전적으로 역사하실 때도 있습니다. (38년된 병자,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그런데 마가복음 2장의 이 본문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신 것도 아니고 본인이 메달린 것도 아닙니다. 중풍병을 앓고 있는 본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오직 네 명의 친구들의 믿음의 행위를 통해 기적이 나타납니다. 

(막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신 것 뿐만 아니라 죄 사함을 얻게 했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신학적으로 잘 설명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지옥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주 전에 그 악한 아합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자랑하듯 저가 이렇게 겸손하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탕자라도 돌아오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하나님이 구원을 그토록 원해도 사람들이 안받아들이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시고, 때로는 경고하시고, 때로는 심판하시기도 해도,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남는 것은 재앙입니다.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그의 믿음의 행위가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죄사함을 선포합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한 구절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 사람이 믿는 자건 안 믿는 자건, 오래 믿었건 짧게 믿었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효력이 있는 믿음은 무엇인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들은 이 중풍병자를 사랑했기에 힘을 모았습니다. 네 사람이 한 짐을 지는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두 사람만 되어도 발과 키를 맞추지 않으면 걷기 힘듭니다. 네 사람은 똑같이 발을 맞추어야 하고, 높이도 맞추어 떨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한사람이 앞장 서도 안되고 한 사람이 뒤로 빠져도 안됩니다. 네 사람이 한 사람처럼 되게 한 힘은 바로 이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무리들 때문에 더 이상 나갈 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갈 생각을 합니다. 지붕을 뚫고 지붕에서부터 예수에게 내려보낼 생각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오직 이 사람 하나 살려야 겠다는 생각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상상력을 발하게 합니다. 

이 정도면 할 도리 다했지....정도가 합니다. 사랑은 없는 길도 만들어 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으면서 내가 죽어서라도 반드시 널 구원시키겠다는 순교의 각오입니다. 

그 각오가 불가능한 일을 만들어 냅니다. 


믿음은 목적이 분명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겠다고 작정한 삭개오는 나무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합니다. 어린애가 아니라 그 지역의 유지인 어른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주님을 보겠다는 각오로 나무를 탑니다. 

말씀을 사랑한 다윗이 언약궤 앞에서 옷이 흐트러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춥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 앞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평범한 믿음과 역사하는 믿음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불멸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보다 더 강한 힘은 없습니다. 

지금은 참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돈이 사랑을 우선하고 내 유익이 사랑으로 포장됩니다. 내가 좋아야 사랑이지 내가 희생만 하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손해를 손해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이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먼길을 다니신 것은 한영혼의 가치를 숫자로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랑은 수치로 매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좀 깊은 신앙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기복신앙을 비판하고 경계합니다. 

기복신앙은 철저히 이기적인, 수치적인, 계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이 만큼 했으니 복달라는 자기 의에 도취된 신앙입니다. 

그런데 기복 신앙의 반대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기복신앙이 자기 복을 위한 신앙이라면 이와 반대되는 것은 타인의 구원을 위한 신앙입니다. 

예수를 왜 닮아야 합니까? 왜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자고 하니까 그냥 좋은 성격 가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일을 향하셨습니다. 


저는 성공하는 목회를 바라지 않습니다. 

높이 솟은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와 성도들이 정말 사랑으로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협력하고, 한 사람의 불신자를 위해, 연약한 지체를 위해 함께 발걸음을 맞추어 기도하고, 함께 키를 맞추어 동역하고, 그 사랑 속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 남이 안된다고 하는 일들, 저 사람은 절대로 안된다는 그런 사람도, 그런 일들도, 그런 상황들도 사랑의 힘으로 이기고, 극복하고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세상의 의사도 자기 눈이 실명이 되면서까지 험한 길을 자처합니다. 우리는 영생을 전하는 자입니다. 영생의 구원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기에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오늘도 힘을 합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기적을 함께 이루어 가는 우리 로고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로뎀나무에서 (왕상 19:1-8절) 


엘리야의 시대 - 아합왕 때 

경제적, 정치적으로는 대 부흥기였지만 신앙적으로는 극심한 타락기 

바알과 앗세라가 하나님을 대신하던 시기 

성경엔 이러한 시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첫 타락 -아담...어디에서? 에덴 동산 (기쁨, 행복의 공간. 부족함이 없는 공간..) 그 곳에 임한 사탄의 유혹..너 그거 없잖아! 

가나안의 타락 - 어디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왜? 가나안 족속을 쫓지 않아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가축이 너무 많아서..

사울의 타락- 블레셋을 물리친 후..왜? 다윗의 인기가 자신보다 높아서..

다윗의 타락 - 전쟁의 휴무기에 성적인 타락과 인구조사의 타락 

솔로몬의 타락 - 지혜를 얻은 후에..

부자청년... 너무 부해서 


우리의 신앙 판단 기준- 상황이 좋으면 믿음생활도 좋은지 착각---상황이 신앙을 보장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 성공이 그 삶의 신앙을 보여주는 잣대가 절대 아니다! 

교회의 성도수가 그 교회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첫 번째 만날 때는 훈련받지 않고 자기 신념, 자기의 말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자기 믿음으로 만났습니다. 

두번째 만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만났습니다. "큰 비를 내릴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합을 만납니다. 그러나 큰 비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모두 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사이의 엘리야의 신앙적 여정 

1. 그릿 시내가- 말씀의 훈련 

2. 사르밧 ㅡ 말씀의 적용 훈련, 우선순위의 훈련..

           -- 동역의 훈련 

           --중보의 훈련 


그 다음 말씀을 따라 아합왕에게 가서 큰 비의 소식을 전함. -이것은 중요한 부분이므로 다시 한 번 다룰 것임. 

 

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고 우리를 살게 하는 신인지 그동안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이른바 갈멜산 전투를 벌여 하나님이 불을 내려 심판하게 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게 만들고 급기야 비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년동안 하나님의 충실한 대변인,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리더. 온갖 기적이 일어났고 이방 신에 빠져 있던 그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가 왔습니다. 모든 기도가 응답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는 한 세력- 아합왕과 이세벨이 다시금 엘리야를 옥 죄어 옵니다.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네가 그 예언자들을 죽였듯이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무서운 벌을 내릴 것이다. (19:2) 

80인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영적 선지자 엘리야가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않아 '이제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그 수많은 위협과 위기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하나님이다고 외쳤던 믿음의 선지자가,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회개의 선지자, 능력의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 한 명의 위협에 도망하였을 뿐 아니라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지만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고도 삶의 작은 어려움이 오면 또 다시 무너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 지금 엘리야의 모습을 야고보서 기자는 그도 우리와 성정, 마음이 똑 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합니다. 


* 성경에 등장하는 3대 영적 침체

민수기 11장 - 모세의 침체, 열왕기상 18장 엘리야의 침체... 

복음서의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말씀을 통해 본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은 무엇입니까? 

1. 형편을 보고 (모세, 엘리야, 예수) 

믿음 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그의 형편이 좋았을 때가 있었던가? 아합왕을 처음 만나던 시절부터 그는 그릿 시냇가로,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애 딸린 과부와 함께...그리고 지금도...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는 형편에 갇히게 되었는가? 


2.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합왕에게 맞섰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다. 피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주저 앉고 싶다. 이것은 이세벨이 강해서가 아니다. 엘리야가 약해진 것이다. 갑자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이젠 나를 위해 좀 살고 싶다. 나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3.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골방의 기도, 겟세마네의 기도...하나님 앞에 단독...예수님-> 제자들과 함께..) 

혼자 있고 싶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자기 속 동굴로 들어간다. 자기를 돕는 사환마저도 귀찮고 싫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4. 죽기를 원하여 (엘리야와 모세는 죽기를 간구-그러나 이것은 삶에 대한 역설적 소망, 예수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갈기를 간구->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죽고 싶다. 사는 것이 낙이 없다. 허락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의욕이 살아졌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까지 사라져버렸다. 


5.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빠진다.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난 불행해 보인다.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이끌어온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드러나 있는 영적 교만감 - 내가 열심이 특심하여.... 

모세) 내가 그들의 아버지입니까?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 뒤에 숨겨진 원인

1. 응답, 열매, 승리 뒤의 공허감. 

연극이 끝나고 빈 좌석을 보면서 맛보는 허전함. 주일 예배 뒤의 월요일 공포증.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갈멜산에서만 승리하면 아합왕이 무릎꿇고 이세벨은 떠나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엘리야의 기대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3. 육체적 탈진

갈멜산의 예배와 기도

850명을 직접 죽임. 

또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

그리고 아합왕을 향해 달려감.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때 공격받았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 

그 때의 비난과 공격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영적 산후 우울증이다. 

애를 낳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자기 몸을 조심하고, 죄악을 삼간다. 

모든 관심을 애를 향해 맞춘다. 그런데 정작 애가 나오면 자기 인생이 불쌍해 진다. 

막상 애를 낳으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많다. 

밤에 잠도 못자고 애를 떠날 수가 없고 애를 위해 자기를 보살펴주던 식구들은 자기보다는 애만 바라본다. 자존감이 상한다. 

이런 피곤함이 평생 갈 것만 같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목회자) 설교 이후에 성도들에 대한 기대...


  • 하나님의 다루심 

1. 책망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신다. 공감해 주신다. 

응답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먼저 나오는 것이 판단이고 비판이다.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염치도 없다. 


2. 어루만지심. 쉬어라. 천사를 보내어 돌보심. 

기다릴 뿐만 아니라 돌봐 주신다. 필요를 채워주신다. 쉬도록 시간을 주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어 만지시고,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신다. 

예수님, 배반해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와서 밥먹자! (요 21:12)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3. 로뎀에서 호렙산으로 인도... 

그의 보살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다. 

침체가 오면 먼저 일어나는 현상. 

기도 할 수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은 곧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오면 말씀과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산, 성령을 받은 곳,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수 있는 곳. 

피하기 위해 떠났던 로뎀나무가 이젠 호렙산 꼭대기가 된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