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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산의 예배 (왕상 18:17-24)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까지 다 마친 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한 자리에 모아 들이고 말씀합니다. 

이제 가나안 땅의 주인은 너희다. 그런데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 사람들과는 혼인도 하지 말고 왕래도 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어 너희를 준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멸망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그 유명한 세겜언약을 선포합니다. 


(수 24: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수 24:16)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그런데 이것을 듣는 여호수아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맹세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 심정이 여호수아 24장 19절부터 나옵니다. 


(수 24:19)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수 24: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수 24: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수 24:22)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수 24:23)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수 24:24)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그런데 23절에 보니까 가나안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이방 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가져나온 신인지,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새로 얻은 신인지 불분명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백성이 이미 우상들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호수아가 끝나고 사사기 시대가 열리게 되자 이 세겜 언약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가나안땅에 들어간 가나안 제 1세대들이 죽자 

(삿 2:10)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구절이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 순종하며 그 분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긴장이 풀어졌을 때에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이제 말씀을 따라가 아니라 "자기 뜻, 자기 소견"이 앞서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래되는 사람이 드는 착각도 이것입니다. 

말씀도 오래 읽었고, 기도도 오래 한 사람이 이젠 나도 하나님의 뜻을 좀 안다 하면서 자기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인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내가 과거에 얼마나 기도를 하고 과거에 얼마나 성경을 읽고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교제하고 있는가? 지금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가? 신앙의 기준은 항상 현재입니다. 

자기 뜻을 주장하는 사람이 끝까지 자기 뜻대로 고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사사기서나 그 이후 열왕기, 역대서를 보면 처음에 자기가 왕이 되어 살던 사람은, 이제 사무엘 상 와서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기는 싫고 자기 자신이 왕되어  살아보았자 감당이 안되니까 이제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왕이 우상을 섬기면 따라 섬기고 왕이 하나님을 섬기면 따라  섬깁니다. 책임지지 않고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단독적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다고 떠난 사람이 결국 무당을 찾고, 절에 들어가고, 도박에 빠지거나 알콜 중독에 빠집니다. 무언가 기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데 하나님을 피하고 택하는 것은 우상숭배 아니면 쾌락, 중독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우상이 바로 바알과 앗세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차 하나님과 바알과 앗세라를 겸하여 섬기다가 이제 아합때가 되면서 아얘 하나님을 부인하고 바알과 앗세라를 섬깁니다. 앗세라 선지자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고,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며 하나님을 믿는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여 없앱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잠잠히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부귀 영화는 이때까지도 이어지고 오히려 아합왕때 절정에 이르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을 잊고 바알과 앗세라가 주는 쾌락과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라는 여호수아 24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복을 내리신 이후에 그들의 배신을 보시고 잠잠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망하기를, 멸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하나님과 함께 할 모세와 같은, 여호수아와 같은 동역자, 일꾼을 키우십니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엘리야입니다. 


그는 신앙의 뜨거움은 있지만 열정은 있지만 훈련되지 아니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합왕한테 달려나가 이제 당신들의 영화는 이제 끝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적인 신념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그를 훈련시키시기 시작합니다. 

열정만 가득했던 엘리야를 그릿시냇가로 보내어서 그의 열정을 잠시 식히고 홀로됨 가운데 말씀과 기도의 수업을 시작하십니다.

열정있는 자가 홀로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리고 말로만 전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까마귀를 통해서 있을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세벨여왕의 고향인 사르밧으로 가서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거기서 우선순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자기 소견대로 아합왕에게 나갔던 엘리야에게 반드시 말씀이 임한 후에 행동하게 하고, 사르밧 과부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먼저, 나를 위해서는 그 다음이라는 말씀 먼저, 하나님 먼저의 훈련을 3년 동안 철저히 시키십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간절한 기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알게 하십니다. 


신앙생활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 나를 먹이신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기도가 곧 능력이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다 아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정말 없는 중에 하나님이 나를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훈련되지 않으면 자꾸만 기웃기웃 하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 같고, 저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심 같고 하면서 자꾸 주위를 살피게 되고, 눈치 보게 되고 비굴해집니다. 

그런데 광야 가운데 나를 책임지시는 것을 경험하고 훈련하면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눈치보며 기웃기웃 하지 않습니다. 

더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난의 때를 이겨나갑니다. 


말씀 먼저, 하나님 먼저....는 우리가 가장 실패하는 훈련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 것 먼저 챙깁니다. 

신앙 생활은 남는 시간, 남는 힘, 남는 물질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먼저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먼저 기도하고, 힘있을 때 먼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 먼저 드리고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훈련된 사람은 입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푸른 신앙생활을 유지 합니다. 

그것이 훈련 안되면 문제신앙인이 됩니다. 문제 터지면 후다닥, 문제 꺼지면 잠잠한 신자가 됩니다. 

그러면 그런 신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언제나 문제 안에서 살게 합니다. 문제가 떠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 기도만 하면 되냐?하는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기도하면 기도만 하게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무엇할지를 가르켜 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내뜻만 주구장창 부르짖다가 기도 다했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뢰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의 능력이요, 호흡이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마친 엘리야가 다시 아합왕께 나옵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보며 하는 첫 마디가 얼마나 기가 막힌 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지금 엘리야 때문에 고난이 왔다는 것입니다. 너만 없으면 우리가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합입니까? 엘리야입니까? 

이스라엘의 고통이 아합으로부터입니까? 엘리야로부터입니까? 

아합때문입니다. 아합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쾌락에 젖어 있으며 영적으로, 지금은 땅이, 온 나라가 기근에 휩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 들면 기도가 죽습니다. 예배가 소흘해집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인지, 그냥 인생 자체가 문제인지 논쟁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 때 그 때 다르기도 하고 두가지 이유가 다 맞기도 합니다 .

그런데 자기 믿음이 식어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탓을 하고 목사 탓을 하고 교회 탓을 합니다. 

내가 교회만 안 다녔어도 이런 꼴을 안다니는데 하면서 마치 교회가 자신에게 고통을 준 것처럼 말합니다. 

아합의 입술입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다녀서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처소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고난 받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탕자가 집나가서 고난을 당하니 길거리 신세가 됩니다. 돼지 먹이를 먹고 끼니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 하는 사람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잠시 방황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 아닙니까?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 앗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에 모아 누가 참 신인지 가리자고 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웃기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뭡니까? 그들도 정답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누가 복을 주는지 누가 참 하나님인지 지금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오늘날 섬길 자를 섬기라 물었을 때에는 모든 백성이 한 목소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묵묵부답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제사장으로 가득차 있었던 성전이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이 꽉 찰때까지 그 백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는 850명의 우상주의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다 없어지고 세상이 주는 풍요와 쾌락에 아 이것이 하나님이구나 하면서 점점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가나안 그 두려웠던 민족들을 하나 하나 정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절하고 섬기면서 그들의 노예로 다시금 빠져가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수 23:10)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그런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훈련 받은 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들 우상 주의자 1000명이 와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하나를 잘 훈련시켜서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1000명의 두 마음을 가진 성도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온전히 헌신된 한 명의 엘리야와 같은 성도가 됩시다.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그들의 신께 예배 합니다. 

26절: 뛰놀더라. 

28절: 피가 흐리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리라. 

29절: 미친 듯이 떠들며 


막 5:1-5 - 거라사 귀신 들린 자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소리지르며.....


엘리야: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 신령과 진정으로, 성령의 예배를 드려라.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붇고 그 위에 불이 붙기를 기도하는 것? (번제물- 온전한 헌신, 완전히 받쳐진 마음, 나무- 엘림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불은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사마리아 예배: 산당예배,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데서 영향 받은 예배. 

그들이 볼 때에 이스라엘의 예배는 열정이 없고, 죽은 것처럼 여겨지는 예배. 


예배는 드리는 자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예배이다. 

우리의 감정이나 열정이 바탕이 되어서는 안된다. 


(왕상 18:37)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얼마나 간절했을까?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다시 고백하기를 소망했을까? 

그리고 39절에 

(왕상 18:39)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하는 고백을 듣고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저는 생각만 해도 막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납니다. 

물을 부은 제단과 번제물에 불이 붙은 것이 기적이 아니라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을 떠났던 자들이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천상 천하에 유일하신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믿는 하나님 여호와 이십니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 살아갈 땅과 양식과 비도 내리시는 분입니다. 

땅의 법칙이 우리를 복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칙이 내세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바알과 앗세라의 영향력, 풍요와 쾌락을 통해 우리에게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결국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중독되어 파괴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노예삼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벗 삼으시는 분입니다. 

항상 우리에게 선택을 물으시고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무너져 버린 신앙, 다시 한번 하나님께 돌아와서 깊은 안식, 기쁜 평강을 누리시는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뜻과 때 (왕상 18장 1-19절)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 방법 - 하나님의 뜻과 때.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 -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              

  • 그릿 시냇가 - 세상으로부터 격리하여 하나님 주시는 양식으로 살아가는 훈련, 광야의 훈련, 만나의 훈련
  • 사르밧의 훈련 - 
    • 말씀의 적용 훈련, 우선순위 훈련(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 동역의 훈련: 왜 동역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동역을 통해서 사역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신다. 동역하는 것 자체가 전도이다. 
    • 하나님을 주인삼는 훈련- 영접은 구호가 아니라 실재다. 사르밧 여인, 하나님을 섬겼지만 결코 주인삼지 못했다. 그 분을 주인삼으려니 자신의 죄가 드러난다. 
    • 중보의 훈련- 한 영혼을 위해 금기를 깬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초월이자 완성이다. 한 영혼을 위한 사랑이 결국 하나님 일의 시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만을 가지고 일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 뜻대로 사는대도 일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부딪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살아가는 훈련이 준비의 기간이라면 이 뜻을 "하나님의 때"를 통해서 성취된다. 


(왕상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숨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왕상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제 드디어 엘리야에게 다시 아합왕에게 가라 명하신다. 

(단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광야의 때를 바꾸어 이제 엘리야를 드러내게 하신다. 갈멜산의 계절이 왔다.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때는 측량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작용한다. 만물의 통치자가 만물의 때를 알아 바로 그 때에 실행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고, 숨어라 하면 숨고, 드러내라 하면 드러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드러나기를 좋아하지만 숨어지내는 것은 못견뎌 하는 사람이 있다. 

남이 함께 있고 남들이 날 인정해주고 하면 행복감을 느끼지만 남이 없이 홀로 되면 우울해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활발한 것 같지만 자기의 의미를 남들이 시선을 통해서 찾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기에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다. 오히려 남들에게 나서는 자리는 피하고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그 사람은 건강한 것 같지만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다. 홀로 있을 때만 편안한 사람은 "일어나 가서 제자를 삼아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보다 귀찮고 부담스럽고 어려운 명령이 없다. 

그런데 주님은 때로 우리가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드러나게 하신다. 

이 홀로 있을 때 드러날 때의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균형잡힌 사람이다. 숨어 기다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내공을 쌓고 준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내공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연구하고 훈련하여 얻는 것이 내공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숨어 있는 기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동안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 "온유"한 자가 된다. 온유란 말씀으로 길들여진 사람에게 붙이는 성경의 전문 용어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광야의 전문가가 되어 향후 40년동안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생활을 인도하는 인도자가 된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그 집의 감옥에서의 13년간을 집 안일을 돌보고, 감옥을 돌보는 총무로서의 훈련을 쌓았다. 그 훈련이 나라를 책임지는 총리가 되게 한다. 그 곳에서 요셉은 애굽의 언어와 문물을 배우고 떡맡은 관원과 술 맡은 관원등을 만나 정치를 배운다. 무엇보다도 요셉은 감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 받는다. 


[시 105: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아버지의 편애로 자기 밖에 모르던 요셉이 배려의 사람이 되고 검소한 자가 되고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된다. 


  • 엘리야의 또 다른 만남

오바댜 - (왕상 18:2-6)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 -

(왕상 18: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아합왕을 섬기기는 하지만 아합왕과 다른 길을 가는 자. 여호와를 따르는 자. 

(왕상 18: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 7절: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그동안 아합: 각 나라마다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기심을 얻은 엘리야는 아합의 손길에서 피할 수 있었다. 

오바댜에게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전하라....그러나 내가 그 말을 하면 내가 죽임을 당할 것이니이다. 

그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았음에도 이전의 엘리야나 사르밧 과부처럼 훈련 받지 아니한 자. - 몰래 주의 선지자들에게 물과 고기를 가져다 주는 선한 일을 하였지만 언제나 아합과 이세벨을 두려워하면 고통을 당하는 자. 


그러나 엘리야와 만난 오바댜는 죽음을 무릎쓰고 아합에게 엘리야를 말한다. 

(왕상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엘리야를 통해 아합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는 자가 된 것이다. 아합이라는 공포를 이긴 것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믿음


아합과 엘리야의 대면 :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인가? 

[왕상 18:17-18]

(왕상 18: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왕상 18: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아합: 현재의 현상- 엘리야의 말대로 기근이 왔으므로.... 세상의 사람들의 관심. 당장의 눈앞에 현실에 민감...

엘리야: 그 근원, 원인... 하나님과의 관계... 


무엇이 진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고 누가 우리에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신가???? 영적 전투를 선포 


자. 하나님의 사람에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은 말씀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 내는 것이다. 

말씀이 없는 신앙 생활은 우상숭배다. 황금 송아지 신앙이다. 그들의 고정관념대로, 경험대로, 전통대로 신앙생활을 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황금 송아지를 하나님인 줄 알고 섬겼다. 

황금 송아지는 권력과 힘이다. 물질과 성공이요, 쾌락과 방종의 신이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으로 훈련된 자는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때는 하나님의 전권적인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다. 때로 숨어 있어야 하고 피해 있어야 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런데 그 삶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일어나게 하시고 드러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시고 바알과 앗세라를 무너뜨리게 하시고, 큰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신다. 

그 때를 얻기까지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내공을 쌓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충성함으로 삶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게을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영성은 일상에서 훈련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왕상 17:17-24절 이제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때의 선지자였습니다. 그 때에는 명목상의 하나님 신앙도 다 사라지고 바알과 앗세라, 돈과 쾌락만이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던 자였고, 이런 시대는 하나님이 결코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기를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아합왕앞에 섭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7:1)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고 누구보다도 열정이 뛰어나고 의기에 찬 엘리야였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한 시대에 의로운 청년 엘리야를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아합왕에게서 떠나서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훈련을 시키십니다. 

지난 주 우리가 나눈 첫 번째 훈련은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릿시냇가는 "고립, 분리"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 곳에서 엘리야는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심을 경험하며 자신의 신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훈련을 합니다.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의 사르밧 땅으로 보내십니다. 

이 곳은 어디냐? 바로 그 악한 이세벨의 고향이요, 이세벨의 아비였던 엣바알이 통치하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의 시대를 심판하시기 위해 엘리야를 이세벨의 본 고장 사르밧으로 보내어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와 함께 우선순위의 훈련을 합니다. 사르밧은 "용광로, 제련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릿 시냇가가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이었다면 사르밧에서는 그 말씀을 가지고 적용하는 훈련,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를 훈련시키십니다. 

그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를 통해 떡을 만들어 자녀와 함께 죽고자 헀습니다. 


  • 믿음의 순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우선할까?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를 위하여


(마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믿음을 보십니까? 

정말 급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에, 무엇을 먼저 할래? 네것을 먼저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느냐?  


이것이 지난 금요일날 나눈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르밧에서의 훈련 두번째 시간으로 엘리야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사건을 다룹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있어서 과부, 고아, 나그네는 가장 소외된 자, 도움이 필요한 자, 믿음의 사람들이 돌봐야 하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로 표현됩니다. 이건 좀 특별하고 영적인 표현 입니다. 


고아는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고, 과부는 남편을 잃은 사람이고, 나그네는 집,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들은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의 도우심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아, 나그네, 과부를 돌보라는 율법은 단지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선교적인 명령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돌보아 그들이 잃어버린 남편, 아버지, 본향을 회복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만 해석하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방 땅에 그것도 애 딸린 과부의 집에 유한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입니다. 그것도 3년간이나 유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시선으로도 이것은 부정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한 그녀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하나님이 그 집안의 가장이 되시고, 주인된 하나님의 집으로서 그 사르밧 과부를 구원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과 엘리야의 만남은 하나님을 믿지만 불완전하던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훈련받아 성숙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훈련시키시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열정으로 가득차 있지만 훈련 되지 아니한 엘리야가 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했지만 능력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던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체험하는 학교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함으로서 우리 또한 엘리야가 받았던 교육, 사르밧 과부가 체험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17절은 "이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우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을 위하여, 그 다음 너를 위하여 하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약속을 성취한 후입니다. 한 줌의 가루, 기름 조금이던 그녀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먼저 심었더니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체험한 후입니다.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중에 일어날 적에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확실한 믿음이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참으로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늘 내 것을 우선하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것을 나중에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백만 있고 체험이 없습니다. 생각만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순종에서 나오고 순종을 통해서 훈련 받으면 우리 삶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제는 과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편이 되시고 그 집의 주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일 후에" 다음의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이 집의 주인 되는 여인"이라 이 과부를 표현합니다. 기름 조금, 가루 한 웅큼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가난한 여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마땅히 그 집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주인 되셔야 할 공간에 여전히 주인은 그 여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주인 삼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자기가 주인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릅니다. 죽음을 앞둔 여인처럼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와서 부르짖습니다. 도와 달라고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이루어지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감사헌금 한 번 드리면 그만입니다. 그 다음 삶은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주님은 문을 열라 하시는데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다락방 구석에 몰아 놓고 자기가 또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언제까지?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기까지 자기가 주인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고가 나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 증세가 점점 위중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고 표현합니다. 병이 들어도 엘리야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증세가 악화 되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영이 죽고, 병들어도 깨닫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을 때까지 그를 찾지도 않습니다. 


아이가 숨이 끊어진 뒤에야 비로서 엘리야에게 나옵니다. 나와서 하는 말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7절) 


1.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었던 여인이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 나를 왜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느냐? 왜 자꾸 간섭하느냐? 

자기가 주인되어 사는 사람의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샤머니즘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샤머니즘은 뭡니까? 

문제가 일어나면 찾아갑니다. 빌고 굿하고 부적 부치고 무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끝나면 돈주고 그만 딱입니다. 더 이상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 다음 자기 맘대로 살다가 또 문제 터지면 찾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함께 하기 위해서 입니다. 동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분이 내 남편이요, 내 아버지요, 내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에야 안전하고 완전하고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우리 신앙은 이것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엘리야를 다락방에 가두어 두고 대화 하지 않듯이 주를 영접하고 성령이 내 안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죽을 때까지, 문제가 터질 때까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2.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아들의 죽음 앞에 비로서 자기의 죄를 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죄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깨닫는 것이 회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나가 심문 당하는 것을 보니 자기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뉘우쳤다" "후회했다"고 표현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깨닫게 합니다. 

깨달았으면 주님 앞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고 돌이켜야 하는데 사람이 미련한 게 잘못을 알았어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분개합니다. 탓을 하고 변명을 하고 오히려 성을 냅니다. 

인정해야 할 때에 숨기고 회개해야 할 때에 성냅니다. 

그런데 일찍 회개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3.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가 오기 전에 그 여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2절)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너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애굽에 종살이가 힘들어서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출애굽기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출애굽 시켜서 광야로 보냈는데 당장 물이 없다고 백성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우리를 나오게 했습니까? 거기서는 우리가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고, 부족함이 없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오고 위기가 오면 우리는 하나님 탓을 합니다. "잘되면 내 덕, 안되면 하나님 탓."

성경에 어디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을 것이다. 위기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죽을 지경이 되도록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 죄 아닙니까? 


그런데 은혜가 되는 것은 엘리야의 반응입니다. 

여인의 항변에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하나님 잘못이냐? 네가 잘못하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왔느냐?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 했느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텐데 그냥 여인의 분노를, 하소연을, 원망을, 묵묵히 듣고 참습니다. 

여인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 지킨 것이고 아들은 다른 문제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하며 외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을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들이 십자가로 몰려 들어 침을 뱉고, 욕을 하며, 빈정대고, 소리칩니다. 

옷을 찢고,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하늘 가는 마지막 길에 주님이 하신 기도는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랬습니다. 

저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변호합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요? 하나님 잘못한 것 알지만 저들의 편에서 생각해 주세요. 


은혜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원망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죄하고 싶고, 꾸짖고 싶고,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애굽이 훨씬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 보면 그럼 애굽으로 가서 실컷 먹고 살아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화가 나서 저 사람 어떻게 저래요? 하면서 기도하다 보면 광야 생활하면서 피곤한 그들의 모습, 만나를 먹으며 지겨워 하는 모습, 광야 가운데서 불기둥 구름기둥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고 그 연약함을 위해 울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고통을 알았습니다. 그녀에게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를 잃은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묵묵히 그녀의 아픔을 자기 품에 앉고 자기의 기도처소로 옮니다. 

여인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품에 가득 안고 자기 침소에 가지고 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여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인의 편에서 하나님께 변호합니다. 

이것이 근데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죄인을 구하는데, 죄인의 편에서 죄인을 이해하며 그들의 아픔을 안타까지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시고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습니다 .

"주께서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주님, 이 집의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나를 이곳에 보내심은 하나님께서 이곳의 주인이 되심이 아니십니까? 

주인 잃은 여인의 주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면서 여인이 마음으로 "왜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여인의 언어로서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시체는 부정한 것입니다. 시체에는 근처에도 가면 안됩니다. 

일단 죽은 시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시체를 자기 품에 안았습니다. 그 시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자기가 그 위에 엎드립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구약 어디에도 이전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자 앞에 두고 기도할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살리시려면 진작 했겠지 여기까지 오게 하셨을까? 

어차피 우리는 영생을 얻었으니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지 그런거 기도해서 "하나님도 부담, 나도 부담, 괜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자식이 죽어도 그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살려달라고 간절히 시체를 앞에 두고서라도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 하는 사람,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기에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분명하기에 자기 뜻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아직 포기하라는 응답이 없으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립니다. 아니 그의 기도가 오히려 수넴여인이 아들을 살리는 엘리사의 기도,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기도를 앞서는 전례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세번씩이나 그 몸에 엎드려서 자기의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기도자의 마음입니다. 

그냥 정도껏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자는 문제있는 자의 문제를 자기가 짊어지는 것입니다. 짊어지고 주님앞에 나와서 그 짐을 옮겨드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기가 그 문제을 안고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하면 됩니다. 남의 문제를 내가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만 담대하게 선포하면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많은 영적인 리더들이, 설교자만 되려고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자된 삶, 참된 목자는 형제 자매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내 양을 치라하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설교자는 신학교 나오면 될 수 있지만 목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자가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목사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목자는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저 또한 목사라는 이름보다 목자라는 이름이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로고스 모든 식구들이 서로의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영적인 목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문제를 자기 품에 안았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앞에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기도를 시키시기 전, 한 여인의 문제를 위해 목숨을 건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이 기도의 훈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갈멜산에서의 영적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아이를 안고 내려오는 엘리야와 아이를 건네 준 사르밧 과부가 마주칩니다.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그 이전에는 안믿었을까요? 

아니요 그 이전에도 그녀는 하나님을 믿었고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믿음이 단지 지식적인 믿음이었다면 이젠 온 몸으로 체험된 믿음이고 삶으로 고백된 믿음입니다. 

이제 여인은 온전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

엘리야는 이제 사르밧 신학교를 마칩니다. 디셉 사람 이름없는 무명의 사람에서 이젠 하나님의 선지자로 공인됩니다. 자기 스스로 인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심젇을 가진 자, 죄짐 맡은 자,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 모두가 그리스도를 다락방이 아닌 내 중심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서로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