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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장 8-16절   악의 가장 중심에서 



아합과 이세벨 여왕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부흥과 함께 영적인 타락이 오게 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축출되고 그 자리에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음란한 제사를 드리면 예루살렘 성전을 변질시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때에 홀연히 일어난 선지자가 엘리야 입니다. 

가문도 지파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집안 사람 무명의 선지자가 엘리야 입니다. 

그 이전이 모세나 다윗의 집과는 근본 태생이 다른 선지자입니다. 

그가 감히 아합왕 앞에 서서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열정으로 가득한 선지자였습니다. 자기말대로 그는 열심이 특심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열심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열정은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훈련되지 아니한 이 엘리야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훈련시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17장의 첫 절은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사람 엘리야"로 시작되지만 마지막 절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그릿 시냇가와 오늘 나눌 사르밧 신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8장 그 유명한 갈멜산에서의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950명과 1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엘리야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며 홀로 되는 훈련을 시킵니다. 열정이 가득한 자에게 홀로되는 훈련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릿 시냇가가 마를 때까지 엘리야에게 홀로되는 훈련, 매일 같이 까마귀로부터 공급받는 만나의 훈련기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열정에 훈련이 더해질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헌신된 열정이 있어도 훈련받지 않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이제 그릿시냇가가 말랐다"

사르밧의 훈련은 이제 홀로 하나님과 고립과 기근을 통해 대면하던 그릿 시냇가의 시기가 끝났을 때에 시작됩니다.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 끝이 납니다. 신학교 1학년이 끝이 난 것입니다. 

이제 훈련이 끝났을까? 아니 이제 정말 제대로 된 2학년 생활을 시작합니다. 사르밧의 의미는 "용광로, 제련"이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욥 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에서 말한 대로 정금이 되기 위해 용광로로 들여보내십니다. 


9절에 등장하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이 어디인가? 

(왕상 16:3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시돈은 이스라엘에 죄악을 가져다 준 이세벨의 고향이고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통치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세벨을 정복하기 전에 엘리야를 이세벨의 고향으로 들어가게 해서 그 땅을, 그 땅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의 왕궁에서 훈련시키신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애굽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요셉을 군대장관의 가정 총리로, 감옥의 총무로 훈련시키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악의 시대를 정복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악의 중심지에서 엘리야를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 가기 싫은 땅,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그 땅에서 하나님은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그토록 가난한 과부일까?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사르밧 과부의 헌신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읽고 들었습니다. 

없는 중에 하나님께 헌신한 과부의 헌금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곳에 보내셨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눅 4: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예수님께서 고향 땅 나사렛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 당하자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고 예를 드신 것이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사르밧땅 과부를 택하셨을까?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땅 문등병자가 아니라 수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치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믿음을 찾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사르밧 과부에게서, 나아만에게서 참 믿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이세벨의 고향, 바알의 땅에서 살고 있는 이름 없는 가난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었던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왕상 17: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 17: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을 섬기고 성공을 섬기고 권력을 쫓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선 엘리야의 출사표는 무엇입니까? 

17장 1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2절 사르밧 과부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대에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심을 믿는 두 명의 믿음의 사람을 만나 동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단지 선지자 엘리야가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으려는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나에게 그 음식을 줘라' 하는 것을 들으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그렇게 무정하신 하나님이냐? 

아무리 복을 주셔도 그렇지 죽으려는 사람 앞에서 그 음식을 가지고 시험하는 하나님이라면 누가 이 시험을 통과하겠는가? 하면서 많은 신앙인들에게 부담감과 절망감,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야로 하여금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하시고,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를 만나게 하시는가? 

각자의 처소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상황에 얽메이지 않고 믿음 만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는 두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만나 고난의 때를 이기고 훈련 받아 이스라엘과 시돈 땅 사르밧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무너뜨리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이를 해산하지 못하거나 남편이 없는 여인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할 신을 잃어버린 것이요,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세벨의 고향 사르밧에서 과부가 되어 자식과 같이 죽으려 하는가? 

이세벨의 신, 바알을 의지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면서 자원하는 고통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라합처럼 자기 민족의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자기 동족의 반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땅에서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녀가 이 사르밧에서 바알을 믿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 중심에서 하나님의 만나와 같은 매일 매일 기적과 같은 연명함이 있었겠지만 이제 그 은혜마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공급함을 받고, 사르밧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영적 죽음의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좁은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이 이제 이세벨의 고향 사르밧에서 기가 막히게 대면한 것입니다. 


(왕상 17: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냥 무작정 헌신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믿음 안에서 보장을 주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순종 할때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약속은 씨앗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읽다가, 설교를 듣다가, 기도를 듣다가 약속을 받고 보장을 받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것을 성취하고 열매맺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의 씨앗은 믿음의 순종으로 추수하는 것입니다. 


  • 믿음의 순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우선할까?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를 위하여


(마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믿음을 보십니까? 

정말 급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에, 무엇을 먼저 할래? 네것을 먼저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느냐? 


여러분,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훈련을 이기면 정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믿음이 됩니다. 

열성만으로, 열심 만으로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 열매맺는,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말만 번드르하고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말과 삶이 함께 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말씀이 능력이 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 아시지요? 내 마음 아시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넘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은 자기 일 우선하는 사람이 대부분 아닙니까?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셔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시니까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르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에 사르밧 과부의 고백은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나는 떡이 없고 다만 기름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아주 처절한 고백입니다. 

그냥 있는 떡 주는 것도 어려운 것인데 그걸 가지고 요리까지 해서 주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몸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 믿는다고 애썼지만 결국 내 처지가 이렇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내 처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안다. 아니까 두려워 말고 먼저 그 나라를 구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이라." 

하나님도 그 처지를 아시니까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씨앗은 우리의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 믿음의 행위가 있는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기에 두려워말고 믿어라. 순종해라. 하는 것입니다. 


  •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행할 때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절대로 말로 인해서 "믿습니다"한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함 없이 보여달라고 그러면 믿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행하라 그러면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팽팽히 맞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맞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굽히고, 자기 의지를 꺽고 말씀에 순종하면 은혜를 맛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10절의 "물 조금"과 11절의 "떡 한조각"입니다. 

 대단한 것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 만한 믿음, 그렇지만 정말 나를 죽일 수 있고 헌신 할 수 있는 땅에 떨어져 죽을 수 있는 작은 씨앗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에 얽매인 우리는 그것이 전부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사르밧 과부에게 말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고 훈련을 받는 것은 사르밧 과부가 아니라 엘리야입니다. 

 이 말씀의 대상은 사르밧 과부가 아니라 엘리야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에게 동역자로 주어진 사람이 사르밧 과부입니다. 그는 이방여인이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이세벨의 고향사람이고 가난하고 율법도 모르는 수준낮은 사람입니다. 길에서 보면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힘든 때에 그녀와 함께 사르밧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에게 붙여주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주신 사람,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붙여 주신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과 함께 동역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옆에 붙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마음 들어 결혼했던 사람도 며칠 지나고 몇 년 지나면 마음에 안들지 않습니까? 

하물며 정말 모르는 사람을 교회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가정에서 만나 함께 어우러 사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일하도록" "사로 맞추어 나가도록"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난 이 사람 안맞아. 난 이 사람과는 도저히 못하겠어..하는 사람은 결국 난 하나님 하라는 대로는 절대로 못살아. 

난 내맘대로 살거야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내 맘에 들도록 하십니까? 

"먼저 나를 위해 그 다음 너를 위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 함께 신앙 생활 하는 사람, 함께 일하는 사람,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동역자구나 하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은 완전합니다. 선합니다. 나보다 지혜로우십니다. 내게 꼭 필요하니까 그런 사람, 그런 장소, 그런 사건들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 때에 믿음을 보이십시오. 순종하십시오. 

결국 신앙 생활은 내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열심만 있던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의 훈련을 통해 이제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고립과 고독의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십니다. 왜 고립하게 하십니까? 사람이 고립되기 전까지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이름 부르지만 결국 자기 의의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용광로와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연단은 우선순위의 훈련입니다. 급한 것과 중요한 것 중 무슨 일을 할래? 

육신의 일과 영적인 일 중 무슨 일을 먼저 할래? 

너 자신을 위한 일과 하나님을 위한 일중 무슨 일을 먼저 할래? 


그것을 통해 내 정욕을 끊고, 내 자아의 무거운 성을 무너뜨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특별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훈련이 특별합니다 보통 사람 엘리야를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을 통해서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라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Posted by 소리벼리

신념에서 말씀으로 (왕상 17:1-6절) 


지난 금요일부터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증거합니다. 주보의 목회컬럼에도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습니다. 

내년도 표어와 주제의 말씀도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획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왕이었습니다. 

북왕국에는 19명의 왕들이 집권을 하게 되는데 이 왕들은 모두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왕들을 소개할 때에는 항상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라고 설명합니다. 

여로보암은 북왕국의 백성들이 유다왕국의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지 못하도록 벧엘과 단에 따로 예배 처소를 만들어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것도 큰 죄악인데 그들은 산당에 황금송아지를 가져다 놓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예배를 드렸고,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을 세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을 소개하면서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황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전이 아닌 그들 마음대로의 장소에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정한 레위인이 아니라 그들이 세운 제사장을 통해 예배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라고 말했고 사도 바울도 그런 신앙인들을 가리켜 "그들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정작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 실재로는 그들의 배를 부르게 물질을 믿는 것이요, 우상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금송아지는 지금으로 말하면 맘몬신, 돈신, 물질신입니다. 


[왕상 16:30-31]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그런데 아합왕은 형식적으로나마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예배드리던 이전의 왕들보다 더욱 악하여 아예 바알 숭배자요, 앗세라신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던 여사제 이세벨과 결혼하여 성전의 제사장들을 다 죽이거나 몰아내고 바알제사장과 앗세라 사제들로 대치하고 아얘 국교를 바알과 앗세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젠 공식적인 물질 숭배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 부르는 엘리야 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대를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심판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엘리야는 부모 이름도 소개 되어 있지 않고, 어떤 가문인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저 길르앗의 우거하면서 디셉사람이라 소개합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도시입니다. 요단 강 동편, 가축이 많은 연고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지 않은 르우벤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머문 곳입니다. 

신앙 보다는 물질을 택한 지파의 땅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자 했던 자가 엘리야 입니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가 어떤 연고로 아합왕 앞에 나갔는지 소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등장은 다른 선지자의 등장과 다른 특색이 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리고 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전하는 자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먼저 선포하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2절에 임합니다. 

1절에서 아합에게 선포되는 내용도 다른 선지자의 어조와는 다릅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내 말"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자기의 말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전에도, 나라에도, 곳곳에 바알과 앗세라의 기복신앙, 쾌락 신앙, 세속 신앙이 가득하던 때

풍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예배를 대신하던 때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이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이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분노하며 아합왕에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제 내 말이 있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내 말이 떨어지면 

"너희의 복이 끝날 것이다. 이제 복에 겨워 오만방자하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이 복이 끊어질 것이다"고 우렁차게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신념입니다.  

신념은 때로 강한 용기로 나타나지만 능력이 없고 보장이 없습니다.  


그 말을 하자 여호와의 말씀이 비로서 임합니다. 타락한 세대에 분노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서 엘리야에게 임한 것입니다.  


"숨어라. 내가 널 먹이겠다." (왕상 17:3-4절) 


무슨 말씀입니까? 이젠 내가 널 훈련시키겠다. 양육하겠다. 널 진짜 선지자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널 훈련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열성가득한 모세처럼, 호기 충만한 모세가 애굽 군사 하나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듯이

감히 아합왕 앞에 나가 호기 어리게 선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숨기시고 그 때부터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 그릿이라는 말은 '고립시키다, 잘라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를 철저히 아합으로부터도, 세상으로부터도 고립시키면서 장차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로 가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릿시냇가에서 세상과 다른 우상, 잘못된 가치관과 삶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잘라내어 하나님 앞에서 홀로되는 훈련, 기다리는 훈련, 그리고 낮아지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은혜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까마귀가 아침과 저녁에 날라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그릿 시냇가의 물을 마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먹을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삽니다.


그것이 얼마동안이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7절에 보면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즉 그 시내가 마를 때까지 그릿 시냇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릿 시내가 마를 때까지 시냇가에 머물면서 까마귀가 날라주는 것을 먹는 삶. 


어떤 목사님들은 다른 사람들은 가뭄으로 고난 받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가뭄 중에서도 떡과 고기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은혜라고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몇날인지 모를 날들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숨어 있는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쉽게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광야 가운데서 만나를 먹으면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합왕이 나타내는 세상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자기를 위하여 쌓아두고 모아두어 항상 풍족함을 누리는 삶일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삶, 풍족하여서 걱정할 필요가 없고 언제나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 삶을 바라고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바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앗세라를 믿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만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 쾌락적인 삶을 따릅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건축함으로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다시 쌓는 자들에게는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입니까? 그들의 풍요로움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흥한 것 같지만 그 풍요로움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방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이나 오늘 엘리야의 그릿 시냇가의 삶은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에서 그분이 주시는 대로, 그 분이 공급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목마름이 없지만 넘치지도 않습니다. 아니 하루 하루 아침과 저녁 한 시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달이 나고 조급해지며,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고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댄 삶입니다. 


왜 이런 시간들이 필요합니까? 역시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 때문입니다. 

왜 우리 인생에 광야와 같은 그릿 시내와 같은 인내의 시간, 고독의 시간, 훈련의 시간이 필요합니까? 그런 시간이 없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를 비판하고 교회와 성직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합니다. 이래서는 안됀다고 너도 나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 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본인들도 그러한 시대의 일부분이 되어 갑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수 없다고 타협하고 변명하고 굴복합니다.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격리시켜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홀로 만드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만날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없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분을 의지하지만 늘 부족한 것 같고 모자란 것 같은 시간에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 홀로된 시간을 통해 우리는 고독하지만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비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게 하기 전 40년 동안을 홀로 미디안 광야에 머물게 하십니다. 요셉이 애굽을 다스리기전 홀로 감옥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합니다. 

함께 하기 위해 홀로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이 가장 조화있게 사신 삶의 모델을 보여 줍니다. 

홀로 있음을 통해 내가 살아왔던 잘못된 습관,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거룩함입니다. 성결입니다. 

때로 풍요로움이 우리를 게으르고 방탕하게 한다면 고독은 우리를 근면하고 성실하며 성결하게 합니다. 

그릿 시냇가의 삶은 하루 하루 사는 삶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뜨겁게 기도한 다음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만나시길 원합니다. 

날마다 만나지 않으면 또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릿시냇가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장소입니다. 

까마귀가 날라준 음식은 진수성찬이 아닙니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에서도 죽은 음식만 먹은 꺼름직한 새였습니다. 그 새가 날라준 것을 날마다 먹는 다는 것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왔습니까? 

자신의 기도 때문이고 자신의 선택때문입니다. 


(약 5: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그는 하나님이 없이 풍족함을 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안타까이 분노하며 하나님께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위해 자기 자신도 물이 마르게 되는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축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불편함을 통해서라도 간절히 회개를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잊어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풍요로움을 포기하고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자신의 기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육신이 의지하고 있는 시내가 말라가는 것을 바라보는 엘리야의 심정은 어땠을까? 

말라가는 시내를 보면서 자신의 객기어린 선포를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숨기시고 훈련시키시며 연단하셔서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아합왕을, 아합왕이 꿈꾸는 세상을, 아합왕을 움직여서 바알과 아세라의 세상을 이룩하려는 이세벨의 세계를 무너뜨리게 하십니다. 


때로 우리 인생의 부족함, 모자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자랄 때에 하나님이 손길을 더욱 경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생활 동안 항상 모자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앗습니다. 그들이 굶지 않았고 신발과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왜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풍성함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는가? 왜 가나안 전에 광야생활을, 갈멜산 전투 이전에 그릿 시냇가에 머물게 하실까? 

그 시간과 그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왕상 17: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이름 없던 촌 사람 디셉사람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와 다음 시간에 나눌 사렙다에서의 삶을 통해 디셉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단지 열정있는 호기 어린 신앙인에서 그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진실한 신앙인으로 변합니다. 


작년도 표어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말씀을 교회 표어로 삼은 교회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2017년도를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게, 저와 우리 성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정말 그릿 시냇가의 삶처럼, 때로 고독하게, 고립시키고, 외로움에 내려두고, 하늘의 도움밖에 의지할 것이 없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 동안 다른 어느 때보다 말씀을 가까이 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첫 학기는 바울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을, 이번 학기에는 모세 오경을 비롯한 구약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게 하시고, 성도들과는 매일 같이 큐티 훈련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신념의 신앙에서 말씀의 신앙으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내년의 표어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그릿 시냇가의 삶을 잘 이겨오게 하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지식의 신앙, 자기 신념의 신앙에서 이젠 말씀 중심의 신앙, 순종의 신앙, 훈련의 신앙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남은 엘리야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시면서 내년 한 해, 엘리야가 경험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엘리야의 등장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한 왕은 누구일까?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아합왕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다고 말들을 합니다. 

대부분 악한 왕들이 행한 것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서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는 이른 바 산당 예배를 드리며 우상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왕상 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 여로보암의 죄: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못하게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가져다 두고 그것에게 경배하게 한 죄. 레위인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아 자기들 마음대로 예배드리게 된 죄. 거짓 예배. 


그러나 아합왕 때에는 완전히 하나님 믿는 믿음에서 떠나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던 무당과도 같은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하나님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로 성전을 점령하게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과 아세라의 신전, 그들을 위한 제단. 

이세벨- 엣바알의 딸, 바알은 고상하다는 뜻 


또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는 여리고성을 짓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합왕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짓지 말라는 여리고성을 재건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은 바벨탑과도 같은 자기 자아의 성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문을 완전히 닫고 자기로만 가득찬 성이 여리고성입니다. 아합왕은 바알선지자를 아내삼아 자기 사랑으로 가득찬 성을 짓고 자기 사랑, 우상 숭배로 무장한 이스라엘 역대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왜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겼을까? 

그것은 영적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농사를 풍요롭게 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짓고, 이른 바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땅의 신을 섬겨야 한다는 세속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가 하나님만을 믿는 유일신 신앙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일반적인 역사로 볼때 아합왕때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풍요를 누리고 도시의 확장과 화려한 건축물들이 세워지게 되는 풍요을 누리게 됩니다. 


솔로몬의 때, 이를 이은 여로보암의 때, 모두 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기였다는 것을 살펴보면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반드시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타락했던 때,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 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여기는 엘리야는 바로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왕때에 하나님이 세운 자입니다. 

1절에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사람 엘리야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다른 인물들과 다른 소개입니다. 

대부분 인물들을 소개할 때에 그의 부모가 누군지, 누구의 자손인지를 통해서 그의 인물을 짐작케 합니다. 

더군다나 열왕기상하는 왕들의 족보입니다. 어느 집안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부모가 누군지, 심지어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 사람인지조차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디셉이라는 지명조차 지금은 사라지고 어느 지역인지 역사적으로 고증이 되지 않은 지명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남겨준 힌트- 길르앗- 요단 동편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아니한 자- 왜? 그들의 가축이 많아서... 결국 가장 먼저 멸망당하는 자....그 땅에 우거하는 한 사람- 엘리야. 


이름 없는 집안 이름없는 태생의 한 선지자가 가장 악한 왕의 때에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 선택된 것입니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아합이 거짓 예배로 판치던 때에 참 하나님을 예배했던 자. - 엘리야 


이 때의 엘리야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차라리 하나님 못믿어서 백성들이 힘들고 어려우면 회개를 촉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에게 너희들 지금 잘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분노하신다 하면 콧웃음을 칩니다. 

더군다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도 없고 겉보기에도 투박한 사람이 외치는 소리는 미친 사람의 소리로밖에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런 시대에 엘리야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과 이세벨을 심판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고, 천재지변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무명의 한 사람, 그것도 죄악의 땅에서 출생한 한 예배자를 택해서 그를 아합왕과 맞서게 하신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기도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시대의 아픔을 느끼며 말씀으로 맞서고자 하는 한 사람을 택하신다. 


엘리야는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에 용기를 준 인물이다. 그는 신념도 있었고 광야를 걸었으며, 탈진도 경험하고, 때로 교만하기도, 외로운 삶을 살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평범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하나님은 그가 가장 힘들 때에 그를 책망하거나 탓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버리고 도망한 제자들에게 찾아와 음식을 먹이신 예수님처럼 로뎀나무가운데 그를 어루만저 주셨다. 


그는 외로움을 벗으로 삼았지만 동시에 세상과 맞설수 있는 용기 있는 자였다. 그는 바알과 앗세라 950명과 맞서는 용기있는 자였는가 하면 이세벨 여왕의 한 소리에 기가 질려 도망하는 연약한 자이기도 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나는 엘리야의 삶을 통해 내년도 표어와 말씀을 받을 수 있었다. 



Posted by 소리벼리

오래된 병자 (요한복음 5장 1-15절) 


  1. 배경 

  • 유대인의 명절 (시간) 
  • 예루살렘
  • 양문 : 이중적인 장소 - 희생과 제물의 문 Vs 절기 때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 왜? 가지고 온 제물을 검사맞고 교환하고... 성전 정화- 예배를 두고 장사하는 곳. 
  • 베데스다 : "은혜의 집, 자비의 집" 이라는 뜻.


2. 문제제기 

  • 그런데 은혜의 집에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은혜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은혜를 찾을 수가 없다. 정작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3. 그들이 지금 기대하고 있는 은혜는 어떤 은혜인가?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올 때 물이 진동하고 그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을 듣고 기대하고 있다. 


4. 이것이 정말 은혜인가? 

  • 때- 가끔 (결코 풍성한 은혜가 아니다). 백화점 경품 추천보다도 확률이 낫다. 그런데 백화점 경품은 추첨이라도 하지 이 은혜는 언제 있을지 모를 물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야 한다. 그럼 이건 은혜라기 보다는 경주이다. 1등하면 상주는 것은 어디에서나 있는 경제적 거래이지 더 이상 은혜라는 말을 쓰기가 민망한 것이다. 
  • 대상- 그리고 지금 이 곳에 은혜를 기다리고 있는 대상들을 보면 더욱 은혜라는 말을 의심하게 된다. 

               맹인(보지 못하기 때문에 물이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다) 

               다리 저는 사람 (그는 다리가 불편에 경주할 수 없는 사람이다)

               혈기 마른 사람 (중풍병자, 그 역시 기력이 없어 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을 모아 놓고 눈에 불을 키고 있다가 아주 가끔 천사가 나타나 요이 땅 하면 제일 먼저 들어오는 자에게 기적을 베푼다. 이건 은혜라기 보다는 정말 잔인한 게임이다. 이건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도 더 불가능한 확률을 가지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만약 어떤 돈 많은 사람이 경품을 걸고 이러한 일을 진행한다고 하면 그를 칭찬하기 보다는 잔인하다고 비판을 할 것이다.  


5. 기독교인들의 믿음 

언젠가 나에게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나타날 거야...(막연한 기대) 

내가 은혜받지 못하는 이유는 정성이 모잘라서, 남보다 믿음이 없어서, 열정이 없어서 그래...

언젠가 나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거야

먼저 못에 들어간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막연한 기대를 품지만 정말 그런 은혜는 희귀한... 


6. 율법 주의자들의 신앙

은혜가 임할 때에 그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입니다. 무능한 사람은 절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에 얽매인 자들의 구원관이 이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것도 흠없고 거룩한 율법의 완수자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어린 양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릴 때에만 선택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은혜라는 말을 쓰기 민망할 정도로 시험보고 면접 보아서 뽑힌 영적인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아주 가끔 받을 수 있는 은혜였습니다. 


7. 38년된 병자

여기에 삼십팔년 된 병자가 누워 있습니다. 그는 그나마 전혀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누워서 일어날 수 없는 자가 기껏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동할 때에 남들이 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요 5:7)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가 38년 못에 있으면서 경험한 것은 남들이 고침받는 모습을 보거나 들은 것이 전부... 그에게는 절대로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갈 기대나 확률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그가 살아가는 목적은 확률없는 기대에 의지해서 헛된 소망을 품고 매일 같이 이 곳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38년이나 지나면서 그의 기대는 절망으로 바뀌고, 은혜는 메말라가고 목마름은 더해갑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남들에 대한 원망으로 변했습니다.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 가데스 바데아 - 여호수아가 열두 정탐꾼을 보낸 땅. 우리 힘으로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한 땅. 

        ->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 곳에 들어가리라 하며 38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의 모습과 광야 가운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우리 힘으로 절대로 그곳에 들어갈 수 없어하면서 유리구걸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우리는 삼십 팔년이라는 그 환자의 병력에서 구약에 나와 있는 어떤 영적인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가데스 바네아가 어느 땅입니까? 바로 여호수아가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낸 땅입니다. 그들의 보고가 무엇입니까? 우리 힘으로는 그 땅에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그들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힘만을 생각하다가 가나안 땅 앞에서 38년동이나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 곳에 들어가리라 하며 38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의 모습과 광야 가운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우리 힘으로 절대로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어 하면서 방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자기 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다가가고자 하는 비참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똑같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 모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거한 곳은 모두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정작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은 한없이 무력하고 무능하고 연약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분명 존재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내 여호와가 되지 못합니다. 

남들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너무 무정하고 엄격한 분이십니다. 

 

8.  예수, 복음으로 다가오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주님: 자기 힘으로 노력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다가 38년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하며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이것이 복음이다!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데스다만 죽어라 바라보고 있다. 자기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열심히 달려 구원을 이루리라 베데스다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은혜가 임했다고 다 잘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열두제자에게 찾아오셨다. 그들에게 은혜가 임한 것이다. 그런데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는 그 은혜를 저버렸다. 은혜에 원수로 반응했다. 

       부활하신 후 500여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은혜가 임한 것이다. 그들 중 120명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께서 약속한 더 큰 은혜를 기다렸다. 500명이 다 그 말씀을 들었는데 380명은 떠나고 120명은 끝까지 기다렸다. 

  •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마음 속에 낫고 싶은 소원을 일깨워 주시는 질문. 그 소원 때문에 38년을 기다림.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소원이 약해지기 시작.. 누워 있으면서 좌절도 경험... 소원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어느 날 부터인가 소원의 강도가 약해지기 시작. 그 사실을 알고 그의 마음의 소원에 불을 붙여 주신다. 
  • 이것이 38년된 병자에게는 얼마나 울화통 터지는 질문입니까? 

아니 그가 여기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낫기 위해서입니다. 

낫기를 포기하면 여기 나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운데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앞에 두고 그들은 자기들은 힘이 없어 못들어간다고 포기하고 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는 어느덧 낫기를 포기하고 그저 익숙한 공간에서 남들이 은혜받는 것을 바라보는데에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왜 교회 나오십니까?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우리 영혼이 낫기를 원해서 아닙니까?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사람들로 부터 상처 받고, 나 자신으로부터도 상처받은 영혼 낫기를 기대해서 나온 것 아닙니까? 

아니면 아무 기대도 없이 이 자리에 와서 앉아 계십니까? 

그저 익숙해서 이렇게 하다보면 하나님이 나에게도 기회를 주시겠지 하고 앉아 계십니까? 


9. 네가 정말 낫고자 원하느냐? 

은혜는 내가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오시는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경주해서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주의 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 분이 오셨을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땅에 오신 예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남들의 이목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리를 재치고 앞에 나와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도발적인 질문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질문입니다. 

아니 병낫고자 베데스다 연못에 나와 있는 환자에게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 이 질문을 하십니까? 

정작 은혜받으러 온 사람들이 은혜 받는 통로를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익숙해져 버린 방법에 의지하다가 그저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두리뭉실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그저 난 할 도리 다한다고 자기 위안 삼으면서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기 때문입니다.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건 자기 변명입니다. 하느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그러는 것입니다. 


정말 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내가 익숙한 방법이 아닌 그 분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분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10.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변화는 변명이 아닌 순종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여자가....

당신이 만드신 뱀이....

다윗 때문에...


핑계는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 입니다. 


능력은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순종할 때에 일어납니다. 


예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지금까지 그는 자리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 자리는 38년동안 그가 의지하던 그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에 의지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똑같이 38년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날 변화시키지 못하고 내 영혼을 치유하지 못하고, 내 삶에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방법을 버리고 내 말을 좀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의지하던 방법을 버리고 내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닌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38년된 신자는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우리 안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타성에 젖어 버리고, 자기 변명하기에 급급한 신앙입니다. 

어떻게든 다가가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우리 신앙의 어두운 과거입니다. 


은혜는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오심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분의 지시하신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래된 병자들 입니다. 

죄악의 병에 너무 오래 빠져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 지, 빠져 나와야 될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으니....

확률은 없지만 그냥 막연히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믿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이삭을 바치기까지 순종해서 믿은 것이지 어떻게 될꺼야 하고 막연히 믿은 것이 아닙니다. 

타성에 젖어 신앙생활 하면 우리는 똑같이 38년된 병자처럼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인생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무런 변화없이 평생 막연하고 메마른 병자와 같은 신앙생활 할 것입니다. 

그저 원망하고 남탓 하면서 그래도 언젠간...하는 무기력한 신앙생활....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진짜 낫기를 원하냐? 네가 진짜 은혜받기를 원하냐? 

그럼 일어나라. 떠나라. 자리를 들고 안주하지 말고,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하라!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