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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입니까? (빌립보서 1장 1-2절) 


사도바울이 자기의 편지의 인삿말에 주로 사용하는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된 나 바울은..."이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는 말씀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원래 사도로 인정이 되려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이거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사도로 인정함을 받은 자여야만 하는데 바울은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나 직접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사도권은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아니 그가 죽은 후에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늘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표현 할 때에 늘 자신을 사도로 표현할 정도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직분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여기고  그 직분에 충성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사도 하면 열두 제자를 떠 올리기 보다는 사도의 대표자로 바울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전도사님은 참 전도사님 같지 않아요...목사 같지 않아서 좋아요...하는 말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 소리 안에는 목사 하면 떠 올리는 딱딱하고 권위적이고, 근엄한, 위선적인 모습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정말 목사 같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참 목사이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진짜 목사 같아요...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라는 말을 소중히 하듯이 지금은 어떤 말보다 좋은 목사, 참 목사 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이 즐겨 쓰는 또 다른 표현은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둘로스라는 말로 종, 혹은 노예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 빌립보서 1:1,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 소개합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4장 12절에서는 자신의 동역자 에바브라에게, 디모데후서에서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도, 더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바울 뿐만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장 1절에서는 베드로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말하고 야고보서 1장 1절에서 예수님의 동생중 하나인 야고보도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표현합니다. 

신약 뿐만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다니엘 등 구약의 신앙인들에게도 성경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씁니다. 

사도라는 말, 선지자, 혹 왕은 영화로운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종이라는 말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직분과는 다른 말입니다. 쓰기 싫어하는 말입니다. 

특히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이라는 표현은 끔찍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했었고, 그 이후에도 앗시리아에게, 바벨론에게, 페르시아에게, 로마에게 끊임없이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종이라는 표현은 트마우마를 일으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 뿐만 아니라 신구약의 중요 인물들이 자신을 스스로, 혹은 성경이 그들을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벗어나서 교회의 현장을 들어서도 이 말은 메아리칩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스스로, 혹은 성도들에 의해서 주의 종이라고 부르고, 여집사님이나 권사님들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종이라는 표현을 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종입니까? 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노예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이 종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눅 17:7-10]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수고했다는 말이나 삯을 요구할수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와도 주인이 또 일을 시키면 군소리 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도 난 그저 종이다 할 뿐 어느 권리도, 칭찬도, 바랄 수 없습니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돌리라고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이 말을 들으면 반감을 먼저 가집니다. 

난 내 몸을 판 적이 없는데 예수가 그 피로 날 사셨다고 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살라고 한다. 나한테 복종하라고 한다. 칼만 안들었을 뿐이지 강도아닌가? 

뭔가 반감이 생기고, 자기의 몸을 주장하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이라곤 전혀 찾아보기 힘들고 마치 빚쟁이 같은 두려움과 부담감만 생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이십니까?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분들이십니까? 그럼 종된 삶을 사시고 계십니까?  


저는 어머님이, 또한 삼형제가 다 목회를 하고, 또한 장인어른도 목회를 하셨지만 그 분들이 하나님의 노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제가 노예라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우리가 정말 종이라면 우리의 기도 대부분은 잘못된 기도이지 않겠습니까? 

종이 어떻게 주인보고 이거 좀 도와줘라... 이것 좀 응답해줘라 합니까? 주인이 종한테 요구하는 것이지 종은 주인한테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든 구하라. 기도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아뢰라 말씀합니다. 

어머님도 저도, 때로는 기도하면서 힘들다고도 말하고, 도와달라고도 하고, 떼쓰기도 하고, 불평도 합니다. 

종이라면, 하나님의 노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기도들이지요. 


그리고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다룬 가장 크고 대표적인 사건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킨 사건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자에게 죄의 종,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게 해 준 다음에 이제는 나의 종이 되라 한다면 애굽이나 하나님이나 나를 다스리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구원했다고 하면서 십계명이나 수많은 율법을 주면서 지키지 않으면 심판하신다고 하면 애굽보다 더 무서운 분 아니십니까? 


[요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제자가 되면 자유를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도 예수를 믿으면서 자유를 얻으면 얻었지 종이라고 여긴 적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오직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선택하고 행동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그 자유의지를 반납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은 그럼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유를 반납하고 종으로 산 사람들입니까? 

목사님들은, 주의 종들은 자유를 반납한 사람들입니까? 


마치 신부가 하나님을 위하여 스스로 독신을 선택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반납하고,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종이 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까? 

독신은 물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는 자유의지를 반납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입니까?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전반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정말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나를 완전히 없애고 성령이 사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일까?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 된 다는 표현은 어떤 의미일까? 


창조- 모든 만물을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완전히 순종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지구는 창조된 이후로 한번도 자전의 속도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 하루에 한번, 1년에 365바퀴를 돕니다. 철새들은 정확히 때를 맞추어 이동하고,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은 계절이 오면 반드시 겨울잠을 잡니다. 발정기가 되면 수정을 하고 번식을 합니다. 물고기는 물을 벗어나지 않고, 새들은 땅에서 뛰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명령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기계적으로, 타율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자연만물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게 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 모든 행동에 있어서 자율적인 선택을 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밤이 되면 자고 낮이 되면 일하는 시간도 일반적으로 주어졌지만 개개인마다 시간이 다릅니다. 발정기 때에만 수정하는 것도 아니고 또 스스로 절제할 수도 있습니다.   

땅에서 걷고 뛰는 인간이 수영도 배우고 기계를 이용해 하늘을 날기도 합니다. 그런 자유의지를 통해서 선택하고 결정할 삶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타락을 했습니다. 처음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을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모습이었는데 사탄이 유혹하여 하나님과 떨어져 나가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서 선택하면 더 자유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결정하니까 하나님과 정반대의 선택만을 합니다. 

창세기 3장에 아담이 범죄하고 4장에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6장에 가니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모든 것이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라, 너의 권리를 포기하라는 의미의 상징적인 행위는 할례이고, 신을 벗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99세의 나이에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끊기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할례 명령에 따라 순종하게 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무기력하게 무능력하게 삶을 살다가 떨기 나무 아래에서 그를 불러 신을 벗게 하십니다. 이제 네 방법대로 살았다면, 이제 내 말을 듣고 내 방법대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종으로서의 절대적인 복종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널 도울 것이다. 내가 널 책임 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런 종됨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이사야서는 전제 66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39장 까지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죄악과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고 40장부터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그 회복의 메시지가 나오는 40장부터 이른바 종의 노래, 종에 대한 언급이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사 41:8-10]

(사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사 41: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그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도 내의 주인인 내가 너희를 책임질 것이요, 찾을 것이라. 그러면서 그들을 나의 벗이라 칭합니다. 


(사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 종은 심부름꾼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드시는 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 하나님이 택한 자....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


[사 44:1-사 44:2]

(사 44:1)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사 44: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 내가 너의 부모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사 44:21-22]

(사 44: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사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 어떤 죄를 지었어도 내가 너를 구할 것이다. 내가 너를 책임 질 것이다. 


사 54:1-8절 

-> 네 남편...


종-> 벗-> 아버지-> 남편

내가 너를 책임 질 것이다. 내가 너의 벗, 아버지, 남편이 되어 줄 것이다. 


주의 종이라는 말-> 인간의 고백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네가 죄를 짓고, 네가 나를 떠나도 내가 너를 책임질 것이고, 내가 너를 구속할 것이고, 내가 너의 힘이 될 것이라. 


결혼전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남자 - 마마 보이, 커서도 엄마말만 듣는 사람. 

그런데 마마보이보다 더 대책이 없는 사람... 누구 말도 않듣는 사람..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 자유의지가 꽉 막혀 자기 속에 갇힌 사람. 소통 불능... 도대체 말이 안통하는 사람. 


그런데 바울을 비롯한 인간의 선언- 난 하나님의 종이라 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던 나를 구원하신 그 분을 인정하는 삶을 살 것이다는 고백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구한 지혜 - 듣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구한 것, 백성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구한 것) 


종의 마음의 모델 - 예수 그리스도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313년 기독교 공인 후 로마에 의해서 국교화 되고 난 후 교황의 시대.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교황이 전 세계를 통치하던 시대 - 1000년 왕국의 시대 

그런데 역사는 그 시대를 암흑기라 합니다. 왜 교황이 섬기는 종이 아니라 왕이 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의미는 내 자유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권리를 다 버리고 예수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유의지로, 나의 자율적인, 자원하는 마음에 의해서 이제 내가 왕 된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을 듣는 사람이 되겠다는 자원함의 표현입니다. 

왕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순종을 통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모델을 따라 살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선언이요, 주님이 하신 말씀처럼 그냥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살겠다는 내 자율적인, 의지적인 선포입니다. 

그렇게 내가 왕된 것에서 벗어나 주님을 따라 섬기며 살 때 왕이 되어 살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참 자유, 참 평강, 참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창조의 전과 후 (창세기 1장 1-3절) 


지난 주 인가요? 박성진 교수라는 분이 중소 벤처 기업부 장관 후보 청문회에서 자격 불합격으로 의견이 모아져 결국 후보를 자진 사퇴를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불합격으로 판정된 이유가 무엇이었냐 하면 그가 과학기술적 사고를 바탕으로 기업들을 선도해야할 중소기업부 장관으로서 부적절한 창조과학 신봉자이자 적극적인 활동가이기 때문이다는 이유였습니다. 

창조과학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나자 박성진 후보자는 "나는 창조론을 믿는 것이지 창조 과학을 믿는 것이 아니다"고 변명을 했지만 그는 창조과학회에서 이사까지 역임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이력이 소개되면서 자신의 이력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믿느냐?"라는 질문에 지구나이는 지식적인 나이와 신앙적인 나이가 다르다고 설명하면서 지식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신앙적으로 믿는다는 답변을 해서 주위를 또한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 사이에 창조론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라는 말들을 하거나 기독교 전체를 폄화하는 말들이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금을 내는 것을 연기해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회의원들이나 교회의 성명까지 더해져 기독교 인은 국회의원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적인 관심이 되는 이러한 논란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혹은 변호하거나 해야할 교회들이 이번 사건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론과 창조과학이 어떻게 다른지, 지구 6000년천 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지...어느 누구도 이번 논란에 끼어 들려 하지 않습니다. 


창조론과 창조과학은 다릅니다. 창조론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창세기 1장 1절의 선언과 성경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만 창조과학은 성경은 진리이므로 성경의 모든 내용은 과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객관적으로 입증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입증가능의 문제입니다. 

위키피디아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창조과학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창조과학은 통일교와 제7일 안식교에서 기원한, 극보수주의적 기독교 근본주의적 신앙 혹은 근본주의 이슬람 신앙에 기초하여 과학을 받아들이는 종교적 반지성주의의 대표적 사례이자 사이비과학이며, 세부 분류로는 쓰레기과학에 해당한다.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 할만한 학문적 가치나 과학적 방법을 거친 논문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보통 창조과학 지지자들은 축자영감설에 입각하여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가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주장은 극보수주의계열의 근본주의를 제외하고 기독교전반에서는 수용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그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라는 것은 비물질, 비형상, 그래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과학적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신앙적, 혹은 철학적으로는 다가갈 수 있을지 몰라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너 귀신을 믿어?" 하면 믿는 사람도 있고 안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귀신을 믿는 사람은 귀신을 체험했거나,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귀신의 역사, 무당이 굿하는 모습이라던가 점 보았던 일이 사실이 된다던가 하는 간접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영적인 존재이기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증거하기에 창조를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것이지요. 


진리- 신앙적인 진리는 과학적으로도 진리여야 한다? 

꽃씨를 키우는 과학자의 시각과 시인의 시각, 언어의 차이. 과학자는 진리이고 시인은 거짓을 이야기하는가? 아닙니다. 둘 다 자기의 입장에서의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과학자의 시각에서 시인의 표현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시인의 입장에서 과학자들의 표현은 전혀 미학적인, 심미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진리를 전하는 입장,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은혜 받았어...성령께서 역사하셨어...하는데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입니까?


지구 6천년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지구의 나이가 6000천년이라고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구 6000년설의 근거는 창세기나 마태복음 1장, 그 외 성경 전반에 나와있는 족보를 따져 보니까 6000년쯤 되더라는 성경의 족보에 근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일 동안의 창조에 대해서도 이 6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아담과 하와를 해석하면서도 이를 구체적인 개인으로 볼 것인가? 왜? 아담의 뜻이 남자, 혹은 인류, 하와의 뜻이 여자의 의미기 때문에 이것은 구체적인 개인이라기 보다는 인류를 설명한 언어이다는 주장이 제기 되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나와 있는 족보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설명하기 위한 선택적인 족보이지 모든 세대를 포함한 족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문맥 안에 감추어진, 생략되어 있는 내용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신 책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어떻게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 갈지를 드러낸 책입니다. 

어느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 흐르는 진심을 읽으려고 하지 않고 말 한 마디 마다 그 말을 증명해봐라. 과학적으로 증명해 봐라. 한다면 그 편지의 본심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한국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합니까? 

몇몇의 대형 교회들이 창조과학회를 뒷받침하며 후원하고 있고, 그런 교회들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열며, 마치 한국 교회 전체가 창조과학회를 지지하는 것처럼 활동하다가 할 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나마 저도 여기에 관심이 전혀 없다가 작년에 신앙과 과학 세미나를 통해 이런 내용들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서두가 너무 길었습니다. 

창세기는 영어로는 Genesis, 첫 시작, 기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에는 우주의 시작, 인류의 시작, 가정의 시작, 죄의 시작, 확장(죄-> 살인 -> 심판), 문명의 시작, 예배의 시작, 믿음의 시작, 이스라엘의 시작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는 전체 50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11장까지는 그 중에서도 원역사라고 하고, 12부터는 아브라함이 나오면서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 위한 족장사가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읽은 창세기 1장 1-3절은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의 전후가 설명이 됩니다. 


  1. 창조 이전의 세계 (혼돈, 카오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 1:2A) 


혼돈이라는 것은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kaos로, 어떤 성경에서는 formless로 번역했습니다. 

뒤엉켜 있다는 것입니다. 무질서 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허하다는 것은 "empty" 하다, 즉 nothing,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흘려 가면서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말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혼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있긴 있는데, 아주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있어서 무질서 하다는 것이고, 공허라는 것은 아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창조 이전의 세계를 묘사하면서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설명합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요? 

창조: "ex nihilo" create -> made from nothing이냐 made from something이냐를 두고의 논쟁. 

성경에서 창조는 하나님께만 쓰는 단어. 왜? 그는 없는 것에서부터 만들어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데 한편으로 인간을 만드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흙이라는 재료로서 사람을 지으심... 그런데 이 때도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 그러니까 두 가지 관점이 다 소개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물질서 하고 뒤섞여 있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혼돈은 곧 공허함,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질서가 잡혀 있지 않는 가정은 없는 가정의 역할을 못합니다. 

질서가 잡혀있지 않는 삶은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흑암의 깊음 입니다. 흑암이 깊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불안함이라는 것입니다. 

거식증, 안먹어도 늘 배불러 있는 것 같은 포만감. 

폭식증, 먹어도 먹어도 늘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무언가 뻥 뚫려 있다....알 수 없는 흑암이 중간에 가득 채워져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손을 대시기 전, 말씀 하시기 전 세상의 모습은 이같이 무질서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창조가 무엇이냐, 무질서 하던 것이 질서 있게 만들어 지고, 아무런 열매 없는, 의미 없는 삶이 의미를 발견하고 목적을 찾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의 삶의 재료가 많아도, 물질이 많고, 학식이 많고, 건강이 있어도 무질서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안한 것이고, 하나님의 손길 아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은 삶이 정리가 되고, 질서가 잡히며, 의미있

고 열매 있는 삶을 살고, 평안 중에 거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의 삶의 재료가 많아도, 물질이 많고, 학식이 많고, 건강이 있어도 무질서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안한 것이고, 하나님의 손길 아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은 삶이 정리가 되고, 질서가 잡히며, 의미있고 열매 있는 삶을 살고, 평안 중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읽으면 그래서 우리 삶의 질서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날: 빛과 어둠 

둘째 날: 수직적 구분 - 물과 물을 수직으로 나누어서 궁창위의 물(하늘) 과 궁창 아래의 물(바다)  

셋째 날: 수평적 구분 - 땅의 물을 나누어서 바다와 육지 


넷째날- 태양과 달과 별을 첫째날의 장소에

다섯째 날 - 하늘 위의 물에 새를 궁창 아래의 물에 물고기를 

여섯째 날 - 육지에 동물과 마지막으로 사람을.... 


그러니까 첫째 날 부터 셋째 날까지 어둠과 빛을 나뉘게 하시고,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뉘게 하시고, 땅과 육지를 나뉘게 하신 뒤에,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각각 나뉘어진 공간에 살아가도록, 각각의 창조물들을 파송하신 것이지요. 이것이 창조의 이야기입니다. 첫째 부터 셋째 날까지 나눔과 분리를 통해서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은 각각의 자리마다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셔서 그것을 보시기 좋았다, 곧 복이라 명하십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나뉘고 분리하게 하신 다음에 그 다음에는 각각 나뉘어진 공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의 열매인 창조물들고 채워나가는 것,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채워 나가는 것, 이것이 창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온전한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 안식입니다. 그래서 안식은 곧 거룩하고 복된 것입니다.


율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율법은 다름아닌 정결예식이라 합니다. 이 목적은 거룩하라는 것인데 거룩하라는 것은 속된 것으로 부터 나뉘어서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즉 거룩은 곧 구별되고 분리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죄 

아담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을 없앰. (마땅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게 함)  

가인 - 선악의 구분을 없앰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함) 

바벨탑 - 하늘과 땅의 경계를 없앰. (언어가 혼잡) -> 혼돈과 공허...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혼돈과 공허한 삶, 흑암이 가득한 삶을 그냥 외면치 않으십니다. 

다시금 아브라함을 택해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마치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듯, 궁창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뉘게 하듯, 그리고 땅과 육지를 나뉘게 하듯, 내가 혼란과 공허함 속에서 머물고 있는 곳에서 떠나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가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이 명한 땅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그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비로서 참 안식을 얻습니다. 


애굽에서 뒤섞여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애굽에서의 삶은 어떻습니까?  질서가 없습니다. 아무리 일해도 열매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공허한 삶입니다. 종ㅅ살이하는 인생에 안식이란 없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부터 분리해 내십니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반복되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그리고 홍해를 통해 애굽사람들은 완전히 혼돈에 빠지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동행으로 말미암아 질서가 잡히고, 제도가 생기고,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주신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가 우리 삶을 채울 때마다 주신 것 - 말씀... 

창조의 말씀


빛이 있으라. 

선악과를 먹지 말라. 

방주를 지어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거듭나라. 

성령을 받으라. 

나를 믿어라... 


출애굽에서 안식의 의미로 주신 것이 곧 성막이다. 성전이다. 이 곳에서 영원히 너희와 내가 함께 할 것이다는 안식이 약속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는 무엇인가? 


혼돈스럽고, 공허하며, 두려움이 가득한 삶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살면서 내가 떠나야 할 곳, 떠나야 할 행동, 떠나야 할 생각은 무엇인가? 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거룩하게 분리한 그 장소, 그 행동, 그 생각 속에 무엇을 채울까?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품어야 할 생각, 내가 마땅히 해야 할 행동들은 무엇일까? 를 말씀 안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참 안식을 약속하신다. 


신앙생활은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다. 

사탄은 무엇인가? 죄는 무엇인가? 

우리 삶에 질서를 깨뜨려서 혼돈스럽게 하고, 공허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그러한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떠나 

마땅히 거해야 할 곳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신앙은 곧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다. 

떠나야 할 대상을 찾아 떠나는 것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머물르라 하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떠남이 없는 신앙, 비움이 없는 신앙은 형식에 젖은 자기 만족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것을 향하지 않는 신앙은 정체된 신앙이다. 

떠나고 머무르고 비우고 채우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고 비로서 참 안식을 누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출애굽기 20 18-26절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은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성경은 그러한 영이신 하나님을 본 자들의 이야기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등 그분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Ish (인간) + 라흐 (보다) + (하나님, 하나님을 대면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야곱에게 주신 이름이 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뜻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되어 있지만 문자적인 이스라엘의 의미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해서 야곱이 본 것은 하나님 그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를 보고 겨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를 보고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고 하니까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온 모세입니다. 모세를 설명할 때에 성경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본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 33:11a)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

 

그런데 그 앞 절에 보면 모세가 대면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기둥"이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간절한 소망을 담아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이것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친밀히, 자세히 보고자 하는 모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울 베푼다" 말씀하시며 하시는 말씀이 

"네가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하면서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지날 때에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그의 등을 보이십니다. 등을 보였다고 번역된 이 구절은 하나님의 흔적을 남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석 위에 세워 하나님을 보게 한 것은 신약적 관점에서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흔적을 대한 후에 어떤 일이 발생하냐면 출애굽기 3429~33절에 보면 모세의 얼굴에도 밝은 광채가 나서 백성들이 두려워서 그의 얼굴을 쳐다 보지 못하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반 백성들이 모세의 빛 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여러 증언들을 살피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를 대면했거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나 빛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거나, 혹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대면한 것"을 말합니다

음성이라는 것은 "언어"를 통해 그 분과 대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이렇게 증언합니다

(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럼 믿겠습니다"하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냐면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 그러니까 하나님은 "첫 째, 영이시므로 우리가 볼 수 없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시기 위해서 때로는 천사로, 때로는 구름이나 빛 가운데서 음성으로, 언어로 다가오신다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증거하신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접적인 통로를 거쳐서라도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들의 공통정인 반응은 무엇인가

바로 두려움입니다

·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후에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놀라는 장면이나 

·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보좌와 주의 옷자락과 천사들을 보며 한 탄식 

(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         사도요한 

(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왜 하나님의 대면하여 본 자는 죽는다고 여겼을까? 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자마다 두려워떨었을까요

그 분의 거룩함 앞에 비춰진 우리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 분 앞에 대면하게 설 때에 그것이 음성이든, 흔적이든, 다른 사물을 통해서든 하나님을 대면한 자의 첫 일성은 두려움, 나로 죽게 되었다는 것, 나를 떠나소서...오늘 읽은 본문처럼

직접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면서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서 있었다고 전합니다

?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숨겨진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사건... 중생

중생 할 때 함께 일어나는 사건...회개

그런데 그 회개가 그냥 내가 한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그런 회개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내 죄를 드러나게 하는 사건... 

내가 무심코 살아왔던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럽고 무섭고 그리고 내 안에 가득했었는지....그런 것들이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내 입술을 통해서 낱낱이 고백되어 지는 것

나 뿐만 아니라 중생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게 되는 성령의 역사 

내 안의 영이 본질적으로 탄식하게 되는 사건 

"내가 저지른 죄가 죽을 만큼의 죄구나. 아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구나..." 

 

시내산에서 음성으로 다가오신 말씀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을 통해서 언어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언어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영광의 증거들,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연기 가운데서 울려 퍼졌습니다

그 분의 임재가 드러나자 백성들은 두려워 멀리 떨어 졌고, 모세는 가까이 갔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자 모세를 통해서 듣겠다고 아우성칩니다. 직접 들으면 죽을것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직접 하나님을 보고자했던 백성들이 오히려 스스로 간접적으로만 하나님을 뵈올 것을 소원합니다

 

21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를 앞에 두고 상반된 두 반응을 전합니다

( 20:21)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 장소를 흑암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빛이 아니라 흑암으로 표현했을까? 다가가면 갈수록 하나님은 신비로서 우리의 모든 감각과 생각과 이성을 벗어나시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밝게 빛나실 때도 있지만 어떨 땐 가까이 가면 갈 수록 더 모르겠을 때가 있습니다. 영성의 전통에서도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신학과 부정신학, 빛의 신학과 구름의 신학 두갈래 전통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상반된 두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눈으로 보고, 만지고, 대면할 수 있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손으로 만져서 내가 지니고, 내 감각의 확실함 가운데 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비겨서 은이나 금이나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하는 것이라고 경계합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일까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우상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 왜? 숭배하기 위해서...그런데 그 숭배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Fan이냐 제자냐? 

우상하면 영어로는 idol- 우리 문화에서는 청소년 들이 좋아하는 가수...

일단 가수의 팬이 되면 청소년들은 그 가수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모든 노래를 듣고 따라부르며, 외우기도 합니다. 콘서트를 찾아가며,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집을 방문하여 그 얼굴을 보고자 합니다. 

온 집안에 그 사진을 붙여놓고 자기의 모든 정성을 쏟습니다. 

그것이 우상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늘 우상과 팬의 관계이지 일대 일의 인격적인 관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수의 노래를 따라부르고 외워도 우리가 그 가수 자체를 닮을 수 없고, 그와 함께 살 수도 없고, 그와 동행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우상은 우상으로서 서 있는 것이고 우상의 팬은 그 우상을 위해 정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가까운 관계에 들어가려 하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순한 팬으로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그 분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분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팬을 넘어 자녀가 되고, 신부가 되고,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가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분명 역사상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성육하신 하나님으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지만 그 분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역사상의 예수를 바라보려 하지 않고 자기들이 꾸며내는 예수, 백인이며, 잘생긴, 훤칠한 예수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성경의 계시와는 전혀다른 예수의 이미지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말씀조차도 그것이 물건으로 우상이 되지 않도록 돌판을 치우고, 원본을 없애고, 오직 성령으로 인한 말씀의 현존을 사람들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그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꾸만 영이 아닌 물질로 만들려고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황금을 가지고 화려한 어떤 것을 통해 하나님처럼 만들려고 하고, 자신이 하나님이라 하는 사람들을 더욱 붙잡으려고 합니다

 

이만희 같은 사람, 문선명 같은 사람....4천쌍 합동결혼)

자신이 하나님, 자칭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붙드려고 합니다

말두 안되는 사람이 자기를 예수라 하는 데도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붙잡으려 하는 자들은 그런 말두 안되는 자를 하나님으로 받듭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은 무시하고 외면하고 냉대합니다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를 비겨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지 말고

흙으로 제단을 쌓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24절과 25절에 보면 제사를 드릴 제단을 쌓을 때는, 토단을 쌓거나, 다듬지 않는 돌로 쌓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토단은 흙으로 만든 제단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너 자신이 흙과 같은 미천한 존재임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듬지 않는 돌로 제단을 쌓으라는 말씀 역시도, 하나님 앞에 의식적으로 꾸미지 솔직한 모습으로 나와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26절에는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단을 만들 때 층계를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층계는 인간의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체가 드러난다는 말은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오려 하면 그것이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 될거라는 말씀입니다. 즉 인간의 교만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십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가

(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또 하나님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게 하심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 시험한다는 말은 넘어트린다는 말이 아니라 단련시키고 훈련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범죄하지 않도록 단련시킨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두려움 가운데 떨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함게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냐면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분이지만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말씀으로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현존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숭배를 받으시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에게 팬십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fellowship, family-ship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참된 예배 (요 4:21-24) 


[요 4:21-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예배의 본질,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요한 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율법학자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 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종교적이고 많이 배우고 그가 열심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구원을 갈망해도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예수를 주로 영접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알지도 못하고 찾아오지 않은 한 여인을 찾아 가십니다. 

[요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이 사건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그렇습니다.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다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섰을 때에 북왕국에 위치한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였고 때로는 그들과 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우상숭배하고 이방인들과 혼인을 한, 날 때부터 부정한 여인이라고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였습니다. 

성전건축에 배척을 당하자 사마리아인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자, 이번에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끼리 소위 ‘사마리아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에 성전이 두 개가 세워지게 된 것이지요.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간다는 것은 상식에 벗어난 일일 뿐만 아니라 남들이 알면 굉장히 부정하고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우연히,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통과해서 가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이전에 일면식도 없고 그녀가 자기를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는 여인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도착해서 보니 시간이 여섯시쯤 되었더라고 6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6시는 우리 시간으로 하면 정오입니다. 사막지역에서 낮 12시는 가장 더울 때입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그 시각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르러 왔습니다. 그녀는 왜 남들이 다니지 않는 시각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의 복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렇듯 목이 마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였기 때문에 영적인 만족감이 있어야 만족합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영적인 만족감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갈증을 느끼고 우물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 목마름은 그러나 세상의 어떤 우물로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눈과 귀가 멀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래도 성경을 알고 말씀을 통해서 미련하게 나마 예수님께 찾아오는 열심이라도 있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나마 무엇이 자기를 갈증에서 해결 해 줄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그날도 자신의 공허함과 갈증을 매꾸고자 우물을 찾은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길이 없어 갈급해 하던 여인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야말로 복음이었지요.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을 주리라. 

그러니까 여인이 흥분해서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 이런 수고, 이런 방황하지 않게 나에게 생명의 생수를 주소서. 간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희한한 말씀을 합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절)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8절) 

뭐,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왜 여기서 남편을 이야기합니까?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을,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너에게 아무런 위안도, 해결도 될 수 없음을 고백하라는 것이지요. 


그 말씀을 마친 후에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인 예배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바뀌게 됩니다. 

그녀의 갈증, 갈망,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렇지만 여전히 수고하고 뙤약볕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 다섯 남편을 통해서도 한 번도 안식이 없었던 여인에게 이제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리라 하니까 이제 그녀의 육신적인 의지가 다 사라지고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 나에게 깨닫게 하시는 분을 인정하게 될 때에 비로서 영적인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영적인 의문을 달아서 질문합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2절 말씀을 먼저 보면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의 예배: 이방예식이 혼합된 예배, 성경은 모세의 5경만을 따르고...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고, 충성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예배: 구약성경을 모두 받아드리며 구원에 대해서 가르침을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그들은 예배의식을 모두 가추고 예배를 드렸으나 예배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요나- 말씀도 알았고, 체험도 있었고, 순종도 하였지만....그가 없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사마리아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 이는 예배의 두 극단이다. 그리심산에는 열광적인 이단이 자리하고, 예루살렘에는 황폐하고 생기없는 정통이 자리했다. 유대인들은 예배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모두 갖고 있었으나 뜨거운 마음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뜨거운 마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모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중에 하나라도 결핍하게 되면 참된 예배가 아니다.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정열적인 예배는 휼륭한 예배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기초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예배를 드려야한다.


그러니까 21절에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내 말을 믿으라...-> 잘못된 표현 -> Believe me.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그러면서 사마리아의 예배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예배도 아니고 너희 아버지께 예배 드려라. (예배는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의 문제이다. ) 

참된 하나님을 믿는가?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이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찌니라." 


  • 영과 진리의 예배가 무엇인가? 

1)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의 예배를 드려라. -> 예배는 신자가, 성도가 드리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 믿으라고 서비스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 거룩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것-> 살아계신 예수님을 앞에 모신 여인: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와 통하고 그를 경배하는 것. VS. 예수님을 알기 전의 여인- 어디에서 예배드려야 합니까? 누구 앞에서? 예수 앞에서... 바리새인, 유대 종교지도자들. 예수님을 앞에 두고 성전 모욕죄로 예수님을 무시, 고발.

눈 앞에 없는 예수-> 성령 안에서 예수와 교제하고 예배함.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예수. 

왜 예수를 눈 앞에 두고도 그를 믿지 못하였는가? 너무 평범해서. 너무 초라해서.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그를 볼 수 있었다.  

21절)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어디서 예배합니까? 나를 믿으라. 


2)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라. 

 [롬 12:1-2]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삶을 드리는 예배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창 3:23)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자기만을 가꾸며 살아가게 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했다. 

자기 만을 위해 살다가 드리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 

아벨의 예배: 양의 첫 새끼와 기름... 죄를 회개하는 예배.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배 


3)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라. 

[고전 2:10-12]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4) 입술의 열매 삶의 열매를 드려라 

[히 13:15-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마리아 여인 

- 남과 관계하지 않는 소극적, 소외적, 도피적 여인. 왜? 자신의 죄, 남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지만 육신의 목마름을 가지고 뜨거운 중에 물을 찾아 갈망하는 여인 

- 사마리아땅에서 열광적인 예배를 드리는 여인이었지만 예수님은 예배를 통해서 그녀를 만나신 것이 아니라 일대 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서 그녀에게 찾아오신다. 

- 주님은 언제나 내게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찾아오신다. 물론 예배가 그 수단과 장소가 될 수 있지만 그 안에 속해 있다고 그 관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열쇠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알아보고 대화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사마리아 여인- 곧장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전한다. 

-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만나고 마을로 달려가 그동안 기피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 예수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사람들을 피하지 않는다. 예수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베드로에게 우리가 내려가자. 우리가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만나기 위해 왔다고 증언한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또한 사람들을 만난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예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이고 세상 밖의 전도이다. 

성령의 역사는 항상 공동체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는 더 많이 만나고 어울리게 하신 역사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