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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마음을 치유하라 (행 1:20) 


(행 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를 배반하고 은 30냥에 팔아넘긴 가룟유다가 그 값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오면서 죽은 후에 그 유명한 마가 다락방에 120여명의 문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유다의 직분을 대신할 새로운 사도를 뽑기 위해 구약성서의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이 말씀 그대로 유다가 샀던 밭은 피밭이라 불리우며 아무도 사지 않는 황폐한 땅이 되었고 잘 알다시피 유다의 직분은 제비뽑기를 통해 맛디아가 대신하게 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다윗의 이 시편은 과연 다윗이 미래의 유다를 예언하기 위해 영감을 받아 지은 시인가? 


베드로가 인용한 구절은 시편 109편에서 인용된 말입니다. 

시편 109편을 펴놓고 함께 읽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시 109:1-3]

(시 109: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시 109:2)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시 109: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 이 구절은 어떤 주석을 보아도 그 배경이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추측하기로 다윗이 누군가에게 굉장히 심한 공격과 핍박을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절까지는 다윗을 핍박하는 자가 복수로 나오다가 6절부터는 특정한 한 개인에게 집중되어 그를 향해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런데 이 6절부터의 내용을 보면 이게 과연 기도인가? 과연 다윗이 이러한 기도를 드렸을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6절)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의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절)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절) 베드로가 인용한 바로 그 구절-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여기까지만 해도 감히 읽어 내려가기가 힘이 든데 그 뒷 구절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9절)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절)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머먹게 하소서 

11절)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이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3절을 보면 -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도의 저주를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17-19절)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그들이 날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 기도를 보면 누가 누구를 저주하는 것인지...


21절)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나를 건지소셔->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주소서 

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며 중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시 109:28)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 이 구절은 형대에서는 거의 읽혀지지 않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에 의해 과연 다윗이 썼을까 의문시 되었던 본문입니다. 


왜? 

다윗은 구약의 인물 중 누구보다도 인격적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핍박했던 사울도 다윗은 두 번이나 죽을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용서하고 그가 죽을 때에는 진심을 다해서 울었습니다. 

그의 자녀 압살롬이 배반을 하여 그를 죽이려 할 때에도 말없이 피해 있다가 그가 죽자 통곡을 하며 그를 죽인 장수들을 짍책합니다. 

왕으로 피난을 갈 때에 시므온이라는 일개 백성이 그를 저주하였어도 그는 그 저주를 들으면서 복수하지도 반응하지도 않고 묵묵히 그 앞을 지나 갔습니다. 


온유함의 대 명사 모세 조차도 백성들의 거듭되는 원망에도 화를 내는데 다윗은 자기를 핍박하는 자에게 악으로 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다윗이 109편의 시를 썼을까? 그렇게 기도했을까? 


다윗은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목자일 때나 왕일 때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습니다. 실수는 해도 반역은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린아이 같이 순전하며 목자일 때나 왕일 때나 찬양이 끊이지 않습니다. 

저는 다윗을 좋아하고 다윗을 닮고 싶고 다윗같이 목사가 아닌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다윗을 좋아하고 다윗의 영성을 연구하다가 저는 이 기도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어떤 시편보다 이 109편의 시편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 강해가 끝나고 지금까지 저는 2011년부터 제가 깊이 묵상하며 해왔던 설교를 창세기부터 시기별로 정리하며 다시 한 번 제 설교와 신학, 신앙을 되돌아 보고 있습니다. 

제가 해 온 설교 중에서 시편 109편의 설교는 제가 가장 깊이 은혜 받고 또 아끼는 설교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행했던 기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하는 기도, 스데반이 똑같이 행했던 기도에 익숙합니다. 

어제 새벽기도회 말씀 제목이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나누었는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상대하며 받은 상처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실꺼야.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이 비록 이러이러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상하게 기도해 놓고 나서 정작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우르르 무너집니다. 고상하게 기도해놓고 나서 저질스럽게 삽니다. 


  • 창세기 3장 15절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옷을 지어 입는 것이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고서는 부끄러워 서로를 바라볼 수도,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이후, 사람이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도, 그리고 사람들 끼리 상대할 때에도 민낯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가려야 합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내 죄를 가려야 하고, 옷으로 피부를 가려야 하고, 천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고, 화장으로 민낯을 가립니다. 맨 모습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악의 결과입니다. 


  • 20세기를 변화시킨 가장 위대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정신 분석학의 프로이트는 사람의 본질은 결국 본능, 이드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육이나 교양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포장하지만 깊은 곳에는 결국 식욕, 성욕, 탐욕같은 본능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리고 있는 것을 다 걷어내면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원초적인 욕망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육이나 종교를 통해 교양을 쌓아 자신을 가리는데 그렇게 가려진 인격을 가리켜 Super Ego 하고 하지만 이 super ego는 본래의 자기가 아니라 억압되고 포장되고 가려진 자기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느정도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악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연 상태의 인간입니다. 

그런데 과연 super ego가 억압된 자아만을 가리키나요? 

신앙으로 정말 의롭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가요? 


  • 저는 목사이고 목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성령과 피로 거듭남을 체험하고 성화를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과 사랑과 은혜가 나를 정결하게 바꾸어 줍니다. 

그것은 왜곡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 안에서 우리가 죄악을 벗고 참 자유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된 우리가 저절고 깨끗해 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긾은 내면에 주님이 임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 모습, 자기의 민낯, 자기의 본능을 우리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가릴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가리는데 익숙합니다. 

기도는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깊은 은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더럽고 죄악된 세상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똑같이 그 분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가장 깊은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죄와 어둠의 공간에 거하시길 원합니다.


  •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죽자 예수님은 삼일을 지체하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원망을 하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 거하는데도 주님은 심일을 지체하시고 삼일 만에 오셔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무덤 앞에 서서 "돌 문을 치워라"고 하십니다. 그 돌문을 치운 후에 "나사로야 나오아, 사망과 절망과 어둠에서 나와 이제 새 사람을 입으라"고 외치십니다. 

 

 다윗의 영성의 가장 깊은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어떤 필터링도 없이 가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통스러운데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고, 미워하는데도 사랑한다고 사랑하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미워 죽겠다고, 저 사람 좀 죽여 달라고, 그것도 모잘라서 그의 자녀도 후손들도 아얘 뿌리채 뽑아 달라고.... 

 

 하나님은 다윗이 그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나무라지 않습니다.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언어를 다 품으시고 안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다윗은 자신의 언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 보다 더 심하게 저주하고 더 극단적으로 미워하는 자신을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의로운 자기가 아니라 그들과 똑같고,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러워서 감히 얼굴을 들 수 조차 없는 자기의 소리를 듣고 몸서리 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그 추한 모습을 보는 순간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것입니다. 

 누구도 자기보다 악하지 않으며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으시며 인내하시고 사랑하셨는지 다윗은 울었을 것입니다.

 

 내 모습을 다 보였을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납니다. 

 

 고상하게 기도한다고 해도, 화장을 이쁘게 했다고 해도 우리의 본질이 바뀌진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고상하게 기도하면서 저질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저질스럽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만지심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모습이고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다윗은 이런 개인적인 내용을 하나님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앞에서 부르면 회중들이 따라 불렀다는 소리입니다. 따라 부르면서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이 저질스런 기도를 합창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합창하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습니다. 

어떨 때에는 정말로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기도도 너무 고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고상한 척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예수님 앞에서 위선자, 누룩이라는 혹독한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미워하는 데에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꼭 정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 본문에는 두 사람의 서로 저주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그 미움을 사람들에게 푸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미워하게끔 하면서 자신은 의로운 양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그러한 미움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저주를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직접 저주하면 사단이 납니다. 부작용이 심합니다. 뒷 감당하기 힘듭니다. 자기가 견디고 참으면 홧병납니다. 우리의 육체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아뢰면 그 분이 우리를 만지십니다. 때로는 기도하는 그 대상을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만지시고 위로하신 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간관계에서 빈틈이 없던 자였습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도, 압살롬과의 관계에서도,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와의 관계에서도 다윗은 언제나 인격적인 승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감정을 가지고 자신이 필터링 하고 검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 가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민낯을 가져 가십시오. 

그리고 그 분께 아뢰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십시오. 기도로서 마음을 치유하십시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