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042018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  
  •  
  •  

 

예수를 욕망하라 (요한복음 13:12-17) 


히브리어에서 사람은 "ish"로 표기합니다. 이 뜻은 불, 욕망의 의미입니다. 

성경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욕망적인 존재로서 묘사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것도 욕망과 관련이 있지요. 

선악과를 무엇이라 표현하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요 이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절)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라는 표현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그것을 먹으면 내가 지혜를 얻을 줄로 알고 그것을 desirable, 갖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맨 마지막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욕망이라는 것, desire, 번역하기에 따라서 욕망이라고 하면 좀 부정적인 의미를 띄지만 소망, 갈망하면 좀 성스런 느낌을 주기도 하지요. 이 욕망은 현대 철학이나 심리학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 특별히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인간 행동의 가장 근원에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id가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아무리 교육이나 물질로서 인간을 포장해도 인간은 욕망, 본능의 존재임을 드러냈습니다. 더 나아가 지라르나 라캉같은 학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철저히 해부하면서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비로서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우리가 욕망하는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내 고유한 욕망이라기 보다는 결국 타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 혹은 타인이 욕망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목적을 자기 욕망을 이루는 데에 두고 삽니다. 

자기가 갖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그것이 사람들이 공부하고 일하는데에 동기가 되고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결국 남의 것이라는 결론은 좀 씁쓸함을 줍니다. 

더군다나 성경에서는 남의 것을 탐하는 것- 그것을 죄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가장 끝에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싶어하는 욕망, 하나님의 간섭이나 하나님의 계명없이 나 스스로, 나를 위해 살아가고 싶은 욕망..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바벨탑의 사건에서 인간 문명의 시작을 하나님처럼 되자는 욕망에서 시작됨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왕 된 삶을 살다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받을 영광을 자신이 취하고자 했던 타락한 천사 루시퍼는 결국 사탄이 되어 본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로,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취하라는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은 힘이, 능력이 주어지게 된다면 과연 행복이 올까?

아니 그 분의 능력, 전능하심의 혹 부분이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요즘, 사회적으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 ME TOO운동

미국에서 부터 시작된 여성들이 사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받고 있는 성처행, 성폭력, 성차별의 고발사건....

연예인, 정치인, 교수, 성직자....

그런 일들을 고발하는 내용들을 들어보면 

힘의 관계, 불평들의 관계, 권력의 관계, 금전의 관계로서 강자가 약자를 강압하는, 조금이라도 자기가 우위에 있으면 그 힘을 내세워서 그 힘으로 약한 자를 괴롭히는 행위....

급기야 지난 주에는 한 유명 배우이자 학교의 교수가 자기의 학생들의 연이은 성추행 고발에 의해서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소속사에서도 계약해지 되고, 출연하던 모든 드라마에서 하차하게 되면서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자신에게 있던 힘이 사라지자 너무 연약한 한 인간이 되어 버린 인간의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대통령이라는 권력이 최순실이라는 여인에게 주어졌을 때에 일어나게 되는 나라 전체가 소용돌이 치는 참담한 현실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능력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지는 일을 당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에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 오랫동안 신앙생활에서 이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근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훈련하고 금욕함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억눌렀습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이 욕망에서 기인한다고 정의하며 인간의 욕망을 벗어나기 위한 무아의 길, 해탈의 길을 제시코자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욕망을 버릴 수 있을까? 히브리어가 말하듯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욕망덩어리인데 그 욕망을 과연 제어할 수 있을까? 훈련해서, 금욕해서 이 욕망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떤 신앙인들은 "욕망을 누르거나" "참으라"고 말하는 대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하나님이 가지신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갈망하는, 그 분을 닮고자 하는, 그 분처럼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헨리나우엔 같은 영성가는 "흔히 사람들은 욕망을 물리쳐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곧 갈망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다른 모든 갈망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영성이란 욕망을 뿌리뽑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갈망으로 질서를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주 강한 열정, 열망을 영어로는 Passion이라고 씁니다. 욕망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욕망입니다. 삶을 전부 불태울 수 있는 열정과 욕망이 Passion입니다. 그런데 Passion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Passioin of Christ라는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번역됩니다. 

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리스도의 수난을 Passion이라는 말로 사용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른바 최후의 만찬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입니다. 

그 사건을 다룬 13장 1절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배반할 것과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갑작스레 겉옷을 벗고 수건으로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그 발을 닦습니다. 


이것이 즐겁고 기쁜 순간에 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이 배반할 것과 자신이 죽을 것을 아셨을 때에 행한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을 배반할 자들 앞에서 성육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체에서 가장 더럽고 추한 발을 씻기십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라 칭하니 그 말이 맞다. 

네기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 바르다.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난해한 해석이 요구되는 절은 16절입니다. 

(요 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자 보다 크지 못하니


이말은 이 장면에서 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지난 시간 너희가 이제는 종이 아니요 내 친구라 말씀하신 주님을 나누었습니다. 다른 구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시간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할 때에라고 나누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말을 듣는 자가 종이요 똑같이 평등한 것이 친구인데 신앙에서는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종이요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가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라고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종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자들은 종이다.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해도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보다 크시다. 

그런데 너희가 하나님을 본받으려 하면, 큰 자가 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 하나님의 참 능력은 사랑이다. 사랑을 갈망해라. 

그 사랑의 절정이 바로 가장 뜨거운 사랑, 인간의 모든 죄를 씻어주는,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겨주는 십자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 그리스도의 삶의 내용,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우리가 가장 욕망해야 할 대상 하나님의 정체,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마20:26)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곧 사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곧 소명자, 사도들입니다. 

말씀안에 사는 자는 크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섬기는 자요, 발을 닦는 자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갈망하는 자입니다.


사람은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훈련하고 금욕을 해도 우리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잠하던 욕망은 다시금 일어납니다. 

문제는 무엇을 욕망하면서 사는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것을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제것이 줄 알지만 결국은 남의 것이고, 남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나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은 비참한 인생입니다. 왜? 우리는 결국 다 버리고 가야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싸우고, 갈등하고, 병들고, 하나님과 대적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보여주신 하나님을 욕망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고통, 희생, 십자가야 말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가장 뜨겁고, 강하고, 용광로 같은 욕망이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남의 것은 빼앗으면 싸우게 되지만 섬김은, 희생은, 사랑은 우리가 가지면 가질수록 복이 됩니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살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고 말합니다.

예수를 갈망하십시요 십자가를 갈망하십시요! 그것이 바른 길이요 행복한 삶의 길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