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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8장 사랑, 고통, 그리고 복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성경에 이보다 더한 슬픔을 표현한 구절이 있을까?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십자가 상의 가상칠언에 비견되는 슬픔의 표현이 바로 이 구절 

다윗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런 순간 


사울을 피해 도망하는 모습과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는 다윗-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국가적 애도)- 압살롬의 애도- 요압으로 말미암아 슬퍼할 시간도 주지 못함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 교통사고 사망률, 암 발생률....어디가 높을까? 

당연히 믿는자가 더 적을까? 아니 차이가 없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삶의 고통스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그 순간을 어떻게 견디고 극복하고 회복하는가의 문제다. 

하나님과 친밀히 예배한 자, 찬양하는 왕 다윗 역시 이러한 고통의 순간을 겪는다. 


그 원인과 과정과 극복의 순간을 통해서 우리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압살롬과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하 13장에서 시작되어 18장에서 끝맺는다. 물리적인 시간에서도 10년이 넘는 기간이다. 


1. 13장 - 암논과 다말의 사건 

배다른 형제였던 암논이 압살론의 누이동생이었던 다말을 짝사랑했다. 상대방도 역시 공주이고 어머니가 다르긴 하지만 형제인지라 함부로 하지 못하고 꾀를 내어 자신을 문병하러 오게 한 후에 그를 범한다. 그리고 범한 후에 헌신짝처럼 그녀를 냉대했다. 

다말이 재를 무릎쓰고 슬퍼허자 이 소식이 성안에 두루 퍼지게 된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마치 홉니와 비느하스를 꾸짖지 못하는 엘리 제사장 처럼 말이다. (다윗의 첫번째 잘못) 


2. 압살롬의 암논 살해 

2년이 지난 후 압사롬은 일을 꾸며 암논을 죽인다. 양털을 깎는 것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큰 축제의 기간이었는데 형제들을 초헝하여 술에 취하게 한 다음 무참히 그를 죽인 것이다. 그를 죽이고 다윗을 두려워 한 압살롬은 어머니의 고향인 그술 지방으로 도망하여 삼년을 보내게 된다. 그동안 다윗은 그리워하면서도 부르지 않는다. 꾸짖지도 않는다. 


3. 압살롬의 이스라엘 복귀 

다윗의 충신이었던 요압이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함을 알고 꾀를 내어 다윗으로 하여금 그를 예루살렘으로 불러오게 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오게는 하였어도 다윗은 그를 대면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는 용서했지만 형제를 죽인 그를 아버지로서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기독교는 용서와 회개의 종교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자를 하나님은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 

그런데 신앙인의 인간관계의 파탄은 회개하지 않고 용서만을 바라거나 회개하였어도 내가 용서하지 못했을 때에 일어난다. 


탕자의 비유) 나를 품꾼의 하나로 여기소서 (아버지께로 돌아온 탕자- 회개) 

회개한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자녀의 지위를 회복케 하신다. 

그런데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에서 진정한 회개도 없고, 따라서 진정한 용서도 없다. 

그저 어색한 조우와 얼굴을 외면하는 냉랭한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압살롬은 거꾸로 아버지를 쫓아내리라 마음먹는다. 

4년의 시간동안 치밀하게 백성들의 재판을 도맡아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쳤다(삼하 15:6)고 표현한다. 


헤브론으로 자리를 옮겨 스스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한다. 치밀한 압살롬의 반역에 천하의 다윗이 두려워 떨며 성전을 버리고 도망하기 시작한다. 골리앗을 물리쳤던 다윗이, 사울의 공격에도 꼼짝 않던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도망가는 그에게 자기의 친구요 모사가였던 아히도벨마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편에 가담했음을 듣는다. 고통의 순간은 이렇게 한꺼번에 덮친다. 


그때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 시편 55편이다. 

[시 55:4-8]

(시 55:4)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시 55:5)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시 55:6)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시 55:7)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시 55:8)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시 55:12- 14]

 12)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 기독교인의 의로움이란 관계가 바른 것이고 뚫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지금 다윗은 관계가 막혀 있다. 자식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를리 없다. 


이 긴 기간동안 다윗의 신앙은 어떠했을까?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압살롬의 사건을 보면서 평소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묻던 다윗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잘못을 해도 꾸짖지 못하고 돌아와도 용서하지 못하는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만이 드러날 뿐이다. 다윗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하나 있다. 


(삼하 16: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아히도벨의 배반이 그토록 다윗에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다윗은 그동안 아히도벨의 말을 하나님의 말처럼 의지했기 때문이다. 늘 하나님과 교제하고 묻고 기도하던 다윗이 어느 때부터인가 지혜로운 모사가 아히도벨의 말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압살롬에게 넘어갔으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광애 - 회복의 장소 

시편 55편의 다윗의 기도처럼 다윗은 멀리 광야로 피한다. 


사울을 피해 머물던 곳,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다윗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곳.... 

세상 사람들이 보면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한 곳이지만 신앙인들에게 광야는 회복의 장소요, 훈련의 장소이다. 


그곳에서 다윗은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교제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던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다. 

아버지 답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이젠 왕이 아닌 연약한 죄인으로 자신의 민낯을 보기 시작한다. 

성전에서 왕으로 살아가던 다윗이 이제 광야에서 비로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가 된다. 고통 속에서 다윗은 겸손을 찾는다. 


광야생활 동안 다윗은 시므이를 통해 자신을 바라본다. 도망하는 자신을 끝까지 쫓아오면서 저주하는 시므이를 자신을 보위하던 장수들이 죽이려고 하자 다윗이 막는다. 

(삼하 16: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삼하 16: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광야에 선 다윗은 모든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전 안에서 끊임없이 드렸을 헛된 예배 대신에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아픈 소리이지만 그것은 회개의 소리고, 참회의 소리고, 동시에 은혜의 소리요, 회복의 소리였다. 


[시 3:1-시 3:8]

(시 3:1)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시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시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시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도망치던 다윗이 기도 가운데 다시 그의 머리를 하나님께로 든다. 죽지 않고 일어나는 자신의 목숨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낀다.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다시 '주의 백성'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회복되자 돌아온 마음의 결과가 무엇인가? 

바로 진정한 용서이다. 진정한 아버지 모습의 회복이다. 

용기를 회복한 다윗이 전열을 정비하여 전쟁에 나서려 하자 군대 장관들은 "임금님은 우리들 만명과 다름이 없습니다"하면서 출정을 막고 전쟁에 임한다. 

떠나는 그들에게 다윗의 말이 무엇인가? 

(삼하 18: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나를 생각해서라도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는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반역자요 패역한 자식이지만 다윗은 그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가 살아돌아 올 수 있도록 장관들에게 부탁한다. 


오히려 군사들과 백성들은 그 소리의 진정성을 알지 못하고 배반자 압살롬을 처참하게 죽인다. 


전쟁의 승패는 다윗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는 압살롬에게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나를 용서해다오 말하고 싶었던 게다. 


  •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 길을 따라 됴단 광야로 내려갔던 여정은 거꾸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르셨던 여정과 겹친다. 그리고 똑같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이 배반하기 전 날 밤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전하셨다. 내가 선생되어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 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던 버림받은 예수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끝으로 십자가의 사명을 완수하셨다. 


고통의 순간은 어느 때에도 임한다. 그리고 대게 그 고통의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죄에 대하여 눈감고, 용서하지 못한채로 사람들을 대하며, 겉으로는 하나님께 예배하지만 사람들의 말을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습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 때 우리가 아파해야 할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막혀있는 관계이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막혀 있는가?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난 용서했는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예수님은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주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삶임을 가르쳐 주셨고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을 보이셨다. 

 

 다윗은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다. 위험할 때마다 나단을 통해, 시므이를 통해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 

 오늘 저의 소리가 그들의 소리처럼 여러분들의 막혀진 통로를 뚫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간구한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