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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없는 삶 (마가복음 11장 11-14절) 


마가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자들과 함께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백성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면서 왕의 입성에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성전을 둘러 보시고는 성전에 머물지 못하시고 베다니로 와서 주무십니다.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3km쯤 떨어진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 촌과도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남매의 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가난한 마을 베다니에 적어도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왜? 예루살렘에, 그 성전에 도저히 예수께서 머무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밤을 유하신 후에 이튿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12절에 보니까 길을 나섰는데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가난한 집에서 한꺼번에 열세 명을 대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예수님은 한 끼라도 부담을 덜어주시려고 아침도 드시지 않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길을 나선 것일 겁니다. 그렇게 지나가시다가 무화가 나무를 본 것입니다.  

 

당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아주 흔한 나무여서 어디를 가든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열매는 맛도 좋고 사람 몸에도 좋아 가난한 자들이 길에서 먹을 수 있는 식사대용이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유대 땅에 널려 있었고, 길 거리에 있는 무화과 열매는 누구든 따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시장하신 예수님도 무화과 열매로 식사를 대신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는 잎사귀만 있고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 열매 없는 나무를 보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건너 뛰어서 마가복음 11:20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는 잎만 시들해지고 줄기만 마른 것이 아니라 뿌리째. 아예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 완전히 말라버려 죽게 된 것입니다. 아니, 아무리 열매가 없어서 실망하셨다고는 하지만,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13절에 보니까 "아직 무화가의 때가 아니라"고 까지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기적은 남을 살리는데만 사용하셨다. 본인을 위해서는 어느 기적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배가 고파서 때가 아닌 무화과의 열매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니 곧 뿌리째 말라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표면적인 이 구절의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이상했던지 베드로가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니까 이 구절은 '어찌하여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까?'하고 묻는 구절로 나옵니다. 순식간에 무화나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 제철이 아닌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행위 또한 이상했기에 질문한 것일 것입니다. 

 

어떤 의도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단지 주님이 배고프신데 배를 채울 수가 없었기에 화가나서 아직 제철도 아닌 나무를 죽기까지 하신 것일까요? 

자신의 화풀이의 대상으로 나무를 저주하셨을까? 그것은 주님의 속성상 인정할 수 없는 가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적인 문제, 즉 육신의 배고픔의 문제 때문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배가 고파서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의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영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가 먹을 수 있도록 풍성했던 것이 무화과 나무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전은 화려해지고, 성전에서 매일같이 제사가 드려지고, 성전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지만, 허울 좋은 잎사귀 뿐이었던 것이다. 열매없는 형식만 남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모습이 바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지자 마자 관심을 가지고 돌아본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그 곳에 머물수가 없어서 날이 저물면 베다니로 피신하셨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금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도저히 주님이 머물 수 없게 되어 버린 성전. 왜?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화화 나무 사건 중간에 나오는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성전 정화의 사건입니다. 그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 그 이면에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욕망에 눈 먼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사치들, 환전상들이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기 보다는 오직 자기 중심적, 자기 의, 사랑은 없고 오직 자기 의로움만 있는 겉만 화려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외형적인 신앙만 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자기 이익만을 밝히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이 더럽혀지게 된 이유- 처음엔 좋은 의도였을 것입니다.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아니 이방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까지 그들은 예루살렘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제물, 양과 염소와 같은 가축, 성전세....그런데 성전세는 반드시 세겔로만 납부...

오는 길에 제물은 상하고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바꾸기 위해서, 예배의 편의를 위해서 성전에 환전상과 장사치를 허락...

그런데 유월절 같은 절기에 드나드는 사람들만 백만명 이상- 환전이나 매매를 통해 이루는 수입이 어마어마...-> 결국 이 수입을 놓고 제사장들과 세금을 걷는 관리들, 장사치들이 서로 뒤엉킨 이익집단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였다.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었다. 헤롯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화려하고 장엄하게 지어지고 있었고 그 곳에서는 수 많은 제사장과 서기관들,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도, 그 분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그들의 전통이나 고집하며 주님을 오히려 죽이는데 앞장을 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예로 들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고, 성전이라 하더라도 열매가 없다면 말라버릴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그러면 이같은 심판의 메시지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No! 

 

(마 7: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소용이 없다. 즉,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의 저주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고의 메시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열매와 잎사귀입니다. 

여기서 무성한 입사귀가 뜻하는 것과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과연 무엇인가가 우리 신앙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혼동이 일어나니까 신앙생활도 혼동스러운 것이요, 목적이 뒤틀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서 내 삶에 열매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가 이룬 성과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공부해서 그 만큼 성적이 나와야 열매가 있는 것이고,  일하는 자에게는 그 만큼 소득이 있어야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농사 짓는 자에게는 그 만큼의 소출이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신앙생활의 열매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앙 생활을 통해 거둔 내 소득, 내 성과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신앙생활해서 얼마나 부유하게 되었는가? 내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열매는 숫자와 업적과 함께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과 무화과 나무를 통해서 본 열매와 무성한 잎사귀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 삶의 열매는 무엇이고, 잎사귀는 무엇인가 분별할 수 있고, 또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이 무성한 잎사귀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그 어느 성전보다 크고 화려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기 보다는 로마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세상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다. 거기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오히려 넘쳐났습니다. 아이들과 여인들의 출입을 제한했고, 부정한 자들이나 병자들의 출입은 제한 되었습니다. 

그곳은 수입이 넘쳐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받은 제물은 가난한 자들에게 되팔아져 또 부정한 소득을 거두었고 성전세를 환전하는 것도 그들의 마음대로 였습니다. 


교회의 크기, 교회의 사람, 교회의 제정....이런 것들이 바로 잎사귀이지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교회의 열매를 교회 크기, 사람 수, 그 교회의 제정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은 잎사귀이지 열매가 아닙니다. 


그럼 주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열매의 첫번째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1)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겉모양인 잎사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직분을 받았는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판단하는 것입니이다.  성령의 열매는 외적으로 여는 열매가 아니라 성품의 열매요 삶의 열매입니다.  

 

2. 빛의 열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8-9)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다. 또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빛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 빛의 열매는 우리의 행실로 나타납니다.  즉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행실이 빛의 열매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반드시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두운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질 수 있습니다. 

 

3. 의의 열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9)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야고보 사도는 여기에 덧붙여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을 심는데, 그때 맺는 것이 의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의의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공동체를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공동체에 불화를 주고,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킨다면 그 사람은 의의 열매가 없는 사람이다.  

4. 입술의 열매 (히 3:15)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5. 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8) 


아니, 하나의 열매도 맺기 어려운데 이런 다섯가지 열매를 어떻게 맺습니까? 죽어도 못합니다. 난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가? 

열매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무진장 애써야 되는가? 


(막 11: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제사장과 서기관들, 장사치들, 환전상들이 그렇게 성전 안에서 사리사욕을 탐하고 욕망에 눈이 멀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그 말씀을 의심했다. 당장이 이익 앞에서 말씀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고 자기 당장 앞의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다. 그런 삶의 끝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사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무화과 나무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제대로 믿어야 한다.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믿음의 구체적인 행위가 기도이다.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해서 구하는 것을 다 받아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기도하는 삶에 달려 있다. 기도의 양과 질은 곧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과 비례하는 것이다.


열매를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으로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잉태하는 것입니다. 여인이 해산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열매 없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잉태치 못하는 자들이 해산하는 것으로 구원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잉태하지 못하는 자가 해산하는 역사와 함께 합니다. 

 

 어찌보면 구원의 이야기는 잉태치 못하는 자가 잉태하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잉태치 못하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하지 못하는 마노아가 순종함으로 삼손을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하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앙태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잉태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한 해 동안 다루었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입니다. 

한나는 자기가 잉태하지 못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브닌나가 속을 뒤짚어 놓아도 브닌나를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했던 한나는 술에 취하듯 성령에 취했고 그런 그에게 엘리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다시는 근심하지 않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열매맺은 신앙의 모델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