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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1-12절 - 생명을 향한 열정 - 사랑


이번 주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의 한 의사의 인터뷰가 제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지난달 13일 한 북한 병사가 공동경비구역 (JSA)을 넘어 한국으로 귀순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발의 총상을 맞고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병사를 치료한 아주대 중증외상 센터장인 이국종 교수의 인터뷰였는데  언뜻 들으면 굉장히 말투가 투박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해서 뭐 저런 사람이 있나 할 수도 있는데 그 내용을 들으면 그 분의 말투가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중증외상 센터라는 곳은 그야말로 심각한 외상을 입은 환자들, 총상이라든지, 교통사고라든지, 심각한 부상을 당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입니다. 일년이면 200여번을 심각한 사고를 당한 환자를 급히 치료하기 위해 헬기를 타고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생명이 위독한 사람에게 1분 1초가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시급을 다퉈 수술을 해도 전체 환자의 70-80페센트는 수술 중이나 수술 후에 사망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일년이면 200여번을 헬기를 타고 이동해서 급히 환자를 실어 수술하는데 그 수술을 통해 구해내는 환자는 30퍼센트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급을 다투고, 그래도 그 결과가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과에 지원하는 의사도 너무 부족하고 간호사들도 위급하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서 그만두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위급한 사람들을 치료하다보니 사망하거나 치료 이후에도 치료비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지요. 소말리아 해적에게 잡혔다가 구출된 선장도 몇차례 수술끝에 살아나게 되었는데 선박회사도 치료비를 내지 못한 채 파산하고 국가도 책임을 떠맡지 않아 결국 병원이 수술비를 떠맡았다고 합니다. 이번 북한 귀순 용사의 수술도 병원장의 말을 빌면 국가에게 청구는 했는데 받을 수 있을는지는 미지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힘들기는 제일 힘든데 지원하는 의사도 간호사도 턱없이 부족하고 병원도 이 과가 돈이 안되기 때문에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사도 병원도 성형외과나 안과나 치과같은 치료과정이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성공확률이 높고, 사업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훨씬 효율적인 그런 과를 선호하고 확장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외상 센터의 일인자로 일년 거의 쉬는 날 없이 수술을 하는 바람에 한쪽 눈은 거의 실명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다른 인터뷰에 보니까 자기가 죽을 적에 자기 관에 자기가 수술한 환자들의 명부를 가지고 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고, 한쪽 눈이 거의 실명이기 때문에 앞으로 의사로서 수술할 날들이 얼마남지 않았지만 이 외상센터가 힘들고 돈이 안된다고 외면받지 않고 선진국의 수준에까지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하는 것이 자기의 소임임을 밝혔습니다. 


참 존경할 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인터뷰를 들으면서 사람의 생명을 앞에 두고 정말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그 의사를 모습이 저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이 힘든 일을 한다고 그렇다고 성형외과나 다른 과를 택한 의사들을 탓하거나 폄하하지도 않습니다. 그들도 그들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자기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위급한 환자들 때문에 다른 의사가 어떤지 신경쓸 여력이 없다고도 합니다. 

생명을 다해 사력을 다하는 의사의 모습을 보며 목사의 임무는 무엇인가? 좀 더 넓게 우리 크리스찬의 임무는 무엇일까? 

바로 영혼을 구하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저는 그런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오히려 다른 종교, 다른 성도, 다른 교회를 비판하면서 정작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임무에는 정말 너무 게으르고 소극적이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3년간의 시간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1분 1초가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을까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의 삶으로만 보아도 33년간의 생애서 대중앞에 나서서 일한 3년간의 시간은 정말 소중한 시간입니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제자를 삶고 사람들과 함께 했던 3년간의 시간은 정말 귀중한 시간 중에서도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공생애의 삶의 내용을 보면 효율적인 측면에서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보들을 보게 됩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사마리아 땅에 가서 한 이름없는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부정한 여인을 만나 구원 사역을 행합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삭개오의 집에 거하셔서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합니다. 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멀리 거라사 지방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러 갑니다. 

왜? 인류구원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이루는데 대중을 상대하신 것이 아니라 한 영혼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한 사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베풀고, 귀신을 떠나가게 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 같은데 주님은 그저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위험을 무릎쓰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바쁜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그럴 시간이 없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한 영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한 무리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와 똑같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른 구원 사역에 비해 좀 특별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적이나 구원사역에서 필요한 것은 본인의 믿음입니다. 믿음을 통해 역사가 나타납니다. 구원의 일은 누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회개하고 본인이 무릎꿇고 본인이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삭개오) 

때로는 주님께서 전적으로 역사하실 때도 있습니다. (38년된 병자,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그런데 마가복음 2장의 이 본문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신 것도 아니고 본인이 메달린 것도 아닙니다. 중풍병을 앓고 있는 본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오직 네 명의 친구들의 믿음의 행위를 통해 기적이 나타납니다. 

(막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신 것 뿐만 아니라 죄 사함을 얻게 했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신학적으로 잘 설명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지옥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주 전에 그 악한 아합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자랑하듯 저가 이렇게 겸손하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탕자라도 돌아오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하나님이 구원을 그토록 원해도 사람들이 안받아들이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시고, 때로는 경고하시고, 때로는 심판하시기도 해도,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남는 것은 재앙입니다.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그의 믿음의 행위가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죄사함을 선포합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한 구절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 사람이 믿는 자건 안 믿는 자건, 오래 믿었건 짧게 믿었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효력이 있는 믿음은 무엇인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들은 이 중풍병자를 사랑했기에 힘을 모았습니다. 네 사람이 한 짐을 지는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두 사람만 되어도 발과 키를 맞추지 않으면 걷기 힘듭니다. 네 사람은 똑같이 발을 맞추어야 하고, 높이도 맞추어 떨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한사람이 앞장 서도 안되고 한 사람이 뒤로 빠져도 안됩니다. 네 사람이 한 사람처럼 되게 한 힘은 바로 이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무리들 때문에 더 이상 나갈 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갈 생각을 합니다. 지붕을 뚫고 지붕에서부터 예수에게 내려보낼 생각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오직 이 사람 하나 살려야 겠다는 생각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상상력을 발하게 합니다. 

이 정도면 할 도리 다했지....정도가 합니다. 사랑은 없는 길도 만들어 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으면서 내가 죽어서라도 반드시 널 구원시키겠다는 순교의 각오입니다. 

그 각오가 불가능한 일을 만들어 냅니다. 


믿음은 목적이 분명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겠다고 작정한 삭개오는 나무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합니다. 어린애가 아니라 그 지역의 유지인 어른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주님을 보겠다는 각오로 나무를 탑니다. 

말씀을 사랑한 다윗이 언약궤 앞에서 옷이 흐트러지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춥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 앞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평범한 믿음과 역사하는 믿음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불멸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보다 더 강한 힘은 없습니다. 

지금은 참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돈이 사랑을 우선하고 내 유익이 사랑으로 포장됩니다. 내가 좋아야 사랑이지 내가 희생만 하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손해를 손해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이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먼길을 다니신 것은 한영혼의 가치를 숫자로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랑은 수치로 매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좀 깊은 신앙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기복신앙을 비판하고 경계합니다. 

기복신앙은 철저히 이기적인, 수치적인, 계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이 만큼 했으니 복달라는 자기 의에 도취된 신앙입니다. 

그런데 기복 신앙의 반대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기복신앙이 자기 복을 위한 신앙이라면 이와 반대되는 것은 타인의 구원을 위한 신앙입니다. 

예수를 왜 닮아야 합니까? 왜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자고 하니까 그냥 좋은 성격 가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일을 향하셨습니다. 


저는 성공하는 목회를 바라지 않습니다. 

높이 솟은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와 성도들이 정말 사랑으로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협력하고, 한 사람의 불신자를 위해, 연약한 지체를 위해 함께 발걸음을 맞추어 기도하고, 함께 키를 맞추어 동역하고, 그 사랑 속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 남이 안된다고 하는 일들, 저 사람은 절대로 안된다는 그런 사람도, 그런 일들도, 그런 상황들도 사랑의 힘으로 이기고, 극복하고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세상의 의사도 자기 눈이 실명이 되면서까지 험한 길을 자처합니다. 우리는 영생을 전하는 자입니다. 영생의 구원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기에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오늘도 힘을 합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기적을 함께 이루어 가는 우리 로고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