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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17-24절 이제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때의 선지자였습니다. 그 때에는 명목상의 하나님 신앙도 다 사라지고 바알과 앗세라, 돈과 쾌락만이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던 자였고, 이런 시대는 하나님이 결코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기를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아합왕앞에 섭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7:1)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고 누구보다도 열정이 뛰어나고 의기에 찬 엘리야였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한 시대에 의로운 청년 엘리야를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아합왕에게서 떠나서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훈련을 시키십니다. 

지난 주 우리가 나눈 첫 번째 훈련은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릿시냇가는 "고립, 분리"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 곳에서 엘리야는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심을 경험하며 자신의 신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훈련을 합니다.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의 사르밧 땅으로 보내십니다. 

이 곳은 어디냐? 바로 그 악한 이세벨의 고향이요, 이세벨의 아비였던 엣바알이 통치하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의 시대를 심판하시기 위해 엘리야를 이세벨의 본 고장 사르밧으로 보내어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와 함께 우선순위의 훈련을 합니다. 사르밧은 "용광로, 제련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릿 시냇가가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이었다면 사르밧에서는 그 말씀을 가지고 적용하는 훈련,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를 훈련시키십니다. 

그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를 통해 떡을 만들어 자녀와 함께 죽고자 헀습니다. 


  • 믿음의 순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우선할까?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를 위하여


(마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믿음을 보십니까? 

정말 급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에, 무엇을 먼저 할래? 네것을 먼저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느냐?  


이것이 지난 금요일날 나눈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르밧에서의 훈련 두번째 시간으로 엘리야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사건을 다룹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있어서 과부, 고아, 나그네는 가장 소외된 자, 도움이 필요한 자, 믿음의 사람들이 돌봐야 하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로 표현됩니다. 이건 좀 특별하고 영적인 표현 입니다. 


고아는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고, 과부는 남편을 잃은 사람이고, 나그네는 집,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들은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의 도우심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아, 나그네, 과부를 돌보라는 율법은 단지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선교적인 명령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돌보아 그들이 잃어버린 남편, 아버지, 본향을 회복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만 해석하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방 땅에 그것도 애 딸린 과부의 집에 유한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입니다. 그것도 3년간이나 유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시선으로도 이것은 부정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한 그녀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하나님이 그 집안의 가장이 되시고, 주인된 하나님의 집으로서 그 사르밧 과부를 구원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과 엘리야의 만남은 하나님을 믿지만 불완전하던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훈련받아 성숙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훈련시키시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열정으로 가득차 있지만 훈련 되지 아니한 엘리야가 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했지만 능력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던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체험하는 학교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함으로서 우리 또한 엘리야가 받았던 교육, 사르밧 과부가 체험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17절은 "이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우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을 위하여, 그 다음 너를 위하여 하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약속을 성취한 후입니다. 한 줌의 가루, 기름 조금이던 그녀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먼저 심었더니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체험한 후입니다.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중에 일어날 적에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확실한 믿음이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참으로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늘 내 것을 우선하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것을 나중에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백만 있고 체험이 없습니다. 생각만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순종에서 나오고 순종을 통해서 훈련 받으면 우리 삶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제는 과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편이 되시고 그 집의 주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일 후에" 다음의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이 집의 주인 되는 여인"이라 이 과부를 표현합니다. 기름 조금, 가루 한 웅큼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가난한 여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마땅히 그 집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주인 되셔야 할 공간에 여전히 주인은 그 여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주인 삼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자기가 주인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릅니다. 죽음을 앞둔 여인처럼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와서 부르짖습니다. 도와 달라고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이루어지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감사헌금 한 번 드리면 그만입니다. 그 다음 삶은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주님은 문을 열라 하시는데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다락방 구석에 몰아 놓고 자기가 또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언제까지?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기까지 자기가 주인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고가 나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 증세가 점점 위중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고 표현합니다. 병이 들어도 엘리야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증세가 악화 되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영이 죽고, 병들어도 깨닫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을 때까지 그를 찾지도 않습니다. 


아이가 숨이 끊어진 뒤에야 비로서 엘리야에게 나옵니다. 나와서 하는 말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7절) 


1.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었던 여인이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 나를 왜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느냐? 왜 자꾸 간섭하느냐? 

자기가 주인되어 사는 사람의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샤머니즘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샤머니즘은 뭡니까? 

문제가 일어나면 찾아갑니다. 빌고 굿하고 부적 부치고 무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끝나면 돈주고 그만 딱입니다. 더 이상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 다음 자기 맘대로 살다가 또 문제 터지면 찾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함께 하기 위해서 입니다. 동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분이 내 남편이요, 내 아버지요, 내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에야 안전하고 완전하고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우리 신앙은 이것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엘리야를 다락방에 가두어 두고 대화 하지 않듯이 주를 영접하고 성령이 내 안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죽을 때까지, 문제가 터질 때까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2.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아들의 죽음 앞에 비로서 자기의 죄를 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죄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깨닫는 것이 회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나가 심문 당하는 것을 보니 자기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뉘우쳤다" "후회했다"고 표현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깨닫게 합니다. 

깨달았으면 주님 앞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고 돌이켜야 하는데 사람이 미련한 게 잘못을 알았어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분개합니다. 탓을 하고 변명을 하고 오히려 성을 냅니다. 

인정해야 할 때에 숨기고 회개해야 할 때에 성냅니다. 

그런데 일찍 회개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3.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가 오기 전에 그 여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2절)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너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애굽에 종살이가 힘들어서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출애굽기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출애굽 시켜서 광야로 보냈는데 당장 물이 없다고 백성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우리를 나오게 했습니까? 거기서는 우리가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고, 부족함이 없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오고 위기가 오면 우리는 하나님 탓을 합니다. "잘되면 내 덕, 안되면 하나님 탓."

성경에 어디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을 것이다. 위기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죽을 지경이 되도록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 죄 아닙니까? 


그런데 은혜가 되는 것은 엘리야의 반응입니다. 

여인의 항변에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하나님 잘못이냐? 네가 잘못하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왔느냐?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 했느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텐데 그냥 여인의 분노를, 하소연을, 원망을, 묵묵히 듣고 참습니다. 

여인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 지킨 것이고 아들은 다른 문제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하며 외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을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들이 십자가로 몰려 들어 침을 뱉고, 욕을 하며, 빈정대고, 소리칩니다. 

옷을 찢고,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하늘 가는 마지막 길에 주님이 하신 기도는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랬습니다. 

저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변호합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요? 하나님 잘못한 것 알지만 저들의 편에서 생각해 주세요. 


은혜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원망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죄하고 싶고, 꾸짖고 싶고,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애굽이 훨씬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 보면 그럼 애굽으로 가서 실컷 먹고 살아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화가 나서 저 사람 어떻게 저래요? 하면서 기도하다 보면 광야 생활하면서 피곤한 그들의 모습, 만나를 먹으며 지겨워 하는 모습, 광야 가운데서 불기둥 구름기둥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고 그 연약함을 위해 울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고통을 알았습니다. 그녀에게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를 잃은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묵묵히 그녀의 아픔을 자기 품에 앉고 자기의 기도처소로 옮니다. 

여인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품에 가득 안고 자기 침소에 가지고 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여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인의 편에서 하나님께 변호합니다. 

이것이 근데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죄인을 구하는데, 죄인의 편에서 죄인을 이해하며 그들의 아픔을 안타까지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시고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습니다 .

"주께서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주님, 이 집의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나를 이곳에 보내심은 하나님께서 이곳의 주인이 되심이 아니십니까? 

주인 잃은 여인의 주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면서 여인이 마음으로 "왜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여인의 언어로서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시체는 부정한 것입니다. 시체에는 근처에도 가면 안됩니다. 

일단 죽은 시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시체를 자기 품에 안았습니다. 그 시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자기가 그 위에 엎드립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구약 어디에도 이전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자 앞에 두고 기도할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살리시려면 진작 했겠지 여기까지 오게 하셨을까? 

어차피 우리는 영생을 얻었으니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지 그런거 기도해서 "하나님도 부담, 나도 부담, 괜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자식이 죽어도 그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살려달라고 간절히 시체를 앞에 두고서라도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 하는 사람,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기에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분명하기에 자기 뜻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아직 포기하라는 응답이 없으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립니다. 아니 그의 기도가 오히려 수넴여인이 아들을 살리는 엘리사의 기도,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기도를 앞서는 전례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세번씩이나 그 몸에 엎드려서 자기의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기도자의 마음입니다. 

그냥 정도껏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자는 문제있는 자의 문제를 자기가 짊어지는 것입니다. 짊어지고 주님앞에 나와서 그 짐을 옮겨드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기가 그 문제을 안고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하면 됩니다. 남의 문제를 내가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만 담대하게 선포하면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많은 영적인 리더들이, 설교자만 되려고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자된 삶, 참된 목자는 형제 자매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내 양을 치라하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설교자는 신학교 나오면 될 수 있지만 목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자가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목사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목자는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저 또한 목사라는 이름보다 목자라는 이름이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로고스 모든 식구들이 서로의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영적인 목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문제를 자기 품에 안았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앞에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기도를 시키시기 전, 한 여인의 문제를 위해 목숨을 건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이 기도의 훈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갈멜산에서의 영적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아이를 안고 내려오는 엘리야와 아이를 건네 준 사르밧 과부가 마주칩니다.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그 이전에는 안믿었을까요? 

아니요 그 이전에도 그녀는 하나님을 믿었고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믿음이 단지 지식적인 믿음이었다면 이젠 온 몸으로 체험된 믿음이고 삶으로 고백된 믿음입니다. 

이제 여인은 온전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

엘리야는 이제 사르밧 신학교를 마칩니다. 디셉 사람 이름없는 무명의 사람에서 이젠 하나님의 선지자로 공인됩니다. 자기 스스로 인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심젇을 가진 자, 죄짐 맡은 자,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 모두가 그리스도를 다락방이 아닌 내 중심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서로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