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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에서 말씀으로 (왕상 17:1-6절) 


지난 금요일부터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증거합니다. 주보의 목회컬럼에도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습니다. 

내년도 표어와 주제의 말씀도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획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왕이었습니다. 

북왕국에는 19명의 왕들이 집권을 하게 되는데 이 왕들은 모두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왕들을 소개할 때에는 항상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라고 설명합니다. 

여로보암은 북왕국의 백성들이 유다왕국의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지 못하도록 벧엘과 단에 따로 예배 처소를 만들어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것도 큰 죄악인데 그들은 산당에 황금송아지를 가져다 놓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예배를 드렸고,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을 세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을 소개하면서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황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전이 아닌 그들 마음대로의 장소에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정한 레위인이 아니라 그들이 세운 제사장을 통해 예배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라고 말했고 사도 바울도 그런 신앙인들을 가리켜 "그들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정작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 실재로는 그들의 배를 부르게 물질을 믿는 것이요, 우상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금송아지는 지금으로 말하면 맘몬신, 돈신, 물질신입니다. 


[왕상 16:30-31]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그런데 아합왕은 형식적으로나마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예배드리던 이전의 왕들보다 더욱 악하여 아예 바알 숭배자요, 앗세라신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던 여사제 이세벨과 결혼하여 성전의 제사장들을 다 죽이거나 몰아내고 바알제사장과 앗세라 사제들로 대치하고 아얘 국교를 바알과 앗세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젠 공식적인 물질 숭배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 부르는 엘리야 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대를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심판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엘리야는 부모 이름도 소개 되어 있지 않고, 어떤 가문인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저 길르앗의 우거하면서 디셉사람이라 소개합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도시입니다. 요단 강 동편, 가축이 많은 연고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지 않은 르우벤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머문 곳입니다. 

신앙 보다는 물질을 택한 지파의 땅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자 했던 자가 엘리야 입니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가 어떤 연고로 아합왕 앞에 나갔는지 소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등장은 다른 선지자의 등장과 다른 특색이 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리고 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전하는 자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먼저 선포하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2절에 임합니다. 

1절에서 아합에게 선포되는 내용도 다른 선지자의 어조와는 다릅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내 말"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자기의 말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전에도, 나라에도, 곳곳에 바알과 앗세라의 기복신앙, 쾌락 신앙, 세속 신앙이 가득하던 때

풍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예배를 대신하던 때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이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이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분노하며 아합왕에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제 내 말이 있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내 말이 떨어지면 

"너희의 복이 끝날 것이다. 이제 복에 겨워 오만방자하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이 복이 끊어질 것이다"고 우렁차게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신념입니다.  

신념은 때로 강한 용기로 나타나지만 능력이 없고 보장이 없습니다.  


그 말을 하자 여호와의 말씀이 비로서 임합니다. 타락한 세대에 분노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서 엘리야에게 임한 것입니다.  


"숨어라. 내가 널 먹이겠다." (왕상 17:3-4절) 


무슨 말씀입니까? 이젠 내가 널 훈련시키겠다. 양육하겠다. 널 진짜 선지자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널 훈련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열성가득한 모세처럼, 호기 충만한 모세가 애굽 군사 하나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듯이

감히 아합왕 앞에 나가 호기 어리게 선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숨기시고 그 때부터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 그릿이라는 말은 '고립시키다, 잘라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를 철저히 아합으로부터도, 세상으로부터도 고립시키면서 장차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로 가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릿시냇가에서 세상과 다른 우상, 잘못된 가치관과 삶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잘라내어 하나님 앞에서 홀로되는 훈련, 기다리는 훈련, 그리고 낮아지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은혜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까마귀가 아침과 저녁에 날라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그릿 시냇가의 물을 마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먹을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삽니다.


그것이 얼마동안이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7절에 보면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즉 그 시내가 마를 때까지 그릿 시냇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릿 시내가 마를 때까지 시냇가에 머물면서 까마귀가 날라주는 것을 먹는 삶. 


어떤 목사님들은 다른 사람들은 가뭄으로 고난 받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가뭄 중에서도 떡과 고기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은혜라고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몇날인지 모를 날들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숨어 있는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쉽게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광야 가운데서 만나를 먹으면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합왕이 나타내는 세상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자기를 위하여 쌓아두고 모아두어 항상 풍족함을 누리는 삶일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삶, 풍족하여서 걱정할 필요가 없고 언제나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 삶을 바라고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바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앗세라를 믿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만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 쾌락적인 삶을 따릅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건축함으로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다시 쌓는 자들에게는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입니까? 그들의 풍요로움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흥한 것 같지만 그 풍요로움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방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이나 오늘 엘리야의 그릿 시냇가의 삶은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에서 그분이 주시는 대로, 그 분이 공급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목마름이 없지만 넘치지도 않습니다. 아니 하루 하루 아침과 저녁 한 시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달이 나고 조급해지며,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고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댄 삶입니다. 


왜 이런 시간들이 필요합니까? 역시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 때문입니다. 

왜 우리 인생에 광야와 같은 그릿 시내와 같은 인내의 시간, 고독의 시간, 훈련의 시간이 필요합니까? 그런 시간이 없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를 비판하고 교회와 성직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합니다. 이래서는 안됀다고 너도 나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 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본인들도 그러한 시대의 일부분이 되어 갑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수 없다고 타협하고 변명하고 굴복합니다.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격리시켜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홀로 만드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만날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없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분을 의지하지만 늘 부족한 것 같고 모자란 것 같은 시간에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 홀로된 시간을 통해 우리는 고독하지만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비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게 하기 전 40년 동안을 홀로 미디안 광야에 머물게 하십니다. 요셉이 애굽을 다스리기전 홀로 감옥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합니다. 

함께 하기 위해 홀로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이 가장 조화있게 사신 삶의 모델을 보여 줍니다. 

홀로 있음을 통해 내가 살아왔던 잘못된 습관,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거룩함입니다. 성결입니다. 

때로 풍요로움이 우리를 게으르고 방탕하게 한다면 고독은 우리를 근면하고 성실하며 성결하게 합니다. 

그릿 시냇가의 삶은 하루 하루 사는 삶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뜨겁게 기도한 다음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만나시길 원합니다. 

날마다 만나지 않으면 또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릿시냇가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장소입니다. 

까마귀가 날라준 음식은 진수성찬이 아닙니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에서도 죽은 음식만 먹은 꺼름직한 새였습니다. 그 새가 날라준 것을 날마다 먹는 다는 것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왔습니까? 

자신의 기도 때문이고 자신의 선택때문입니다. 


(약 5: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그는 하나님이 없이 풍족함을 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안타까이 분노하며 하나님께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위해 자기 자신도 물이 마르게 되는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축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불편함을 통해서라도 간절히 회개를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잊어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풍요로움을 포기하고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자신의 기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육신이 의지하고 있는 시내가 말라가는 것을 바라보는 엘리야의 심정은 어땠을까? 

말라가는 시내를 보면서 자신의 객기어린 선포를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숨기시고 훈련시키시며 연단하셔서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아합왕을, 아합왕이 꿈꾸는 세상을, 아합왕을 움직여서 바알과 아세라의 세상을 이룩하려는 이세벨의 세계를 무너뜨리게 하십니다. 


때로 우리 인생의 부족함, 모자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자랄 때에 하나님이 손길을 더욱 경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생활 동안 항상 모자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앗습니다. 그들이 굶지 않았고 신발과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왜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풍성함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는가? 왜 가나안 전에 광야생활을, 갈멜산 전투 이전에 그릿 시냇가에 머물게 하실까? 

그 시간과 그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왕상 17: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이름 없던 촌 사람 디셉사람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와 다음 시간에 나눌 사렙다에서의 삶을 통해 디셉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단지 열정있는 호기 어린 신앙인에서 그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진실한 신앙인으로 변합니다. 


작년도 표어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말씀을 교회 표어로 삼은 교회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2017년도를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게, 저와 우리 성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정말 그릿 시냇가의 삶처럼, 때로 고독하게, 고립시키고, 외로움에 내려두고, 하늘의 도움밖에 의지할 것이 없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 동안 다른 어느 때보다 말씀을 가까이 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첫 학기는 바울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을, 이번 학기에는 모세 오경을 비롯한 구약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게 하시고, 성도들과는 매일 같이 큐티 훈련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신념의 신앙에서 말씀의 신앙으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내년의 표어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그릿 시냇가의 삶을 잘 이겨오게 하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지식의 신앙, 자기 신념의 신앙에서 이젠 말씀 중심의 신앙, 순종의 신앙, 훈련의 신앙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남은 엘리야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시면서 내년 한 해, 엘리야가 경험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