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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3장 5-10절

회개가 곧 부흥입니다.  


  • 요나서를 바라보는 두 관점 

- 하나님께서 요나라는 선지자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은혜)  

- 요나의 체험이 주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공동체 차원에서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의 은혜 체험을 통해 주위를 변화시키는데 있다. 

이스라엘의 선택의 이유-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을 구원하는데에 있다. 나에게 적용을 하면 나에게 은혜 주시는 이유는 나를 통해 주위를 변화시키는데 있다. 


  •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 

-> 하나님께 연단 받아서 사명을 완수한다. 영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cf) 우리의 한계 : 모든 하나님의 다루심과 연단을 개인적 차원에서밖에 해석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난 하나님께 연단 받아서 이러이러한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에서 그친다. 

-> 사명의 완수와 공동체적인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내가 받은 은혜를 통해 주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그것을 볼 수 있으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앙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병행한다. 

하나님사랑이 개인적 차원에서의 신앙의 목표라면 이웃 사랑은 그것이 공동체적으로 어떻게 영향력을 발하며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무리 복을 받았어도 그것이 교회나 사회나 아무리 적어도 가정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드러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온전한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항상 나를 통하여 가정을, 교회를, 사회를, 열방을 구원하는 데에 뜻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가 읽은 본문은 어찌 보면 요나서 전체의 클라이맥스다. 요나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이방민족인 니느웨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는가하는 내용이 바로 본문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도 부흥하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창조 이후로부터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데 요나서를 통하여서 부흥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이 드러난다. 


1. 부흥을 외칠 자의 준비 – 비전, 소명, 

부흥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시작된다. 세례요한, 마틴 루터, 영국의 부흥(찰스 스펄전, 요한 웨슬리), 미국의 제2의 부흥(조나단 에드워드)..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2000여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아도 부흥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흥을 위해 먼저 은혜를 받은 자가 있었다.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선포 자, 외칠 자를 준비시킨다. 신실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사명이 주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부르심(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편에서는 소명, 비전)이라 할 수 있다. 


2. 준비된 자의 순종..

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비전은 받았어도 비전의 이루어짐이 없고 부르심에 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인간이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가 순종할 때에 부흥은 일어난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순종의 훈련에서 넘어져서 사명에 실패한다. 요나의 불순종이 결국 회개의 시간을 지연시켰다. 은혜 받은 자의 불순종이 공동체의 부흥을 지연시킬 수 있다. 


3. 듣는 자의 믿음과 회개 

-> 선포하는 자, 외치는 자가 외치는 말을 듣고 반응하여 회개 할 때에 부흥이 일어난다. 그래서 부흥은 곧 회개에서부터 시작된다. 부흥은 내가 잘되고 축복받고, 사람이 많아지고 이런 것이 아니다. 부흥은 내가 바뀌는 것이다. 

죄에서 돌이키고 주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 맘대로 살던 자가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흥하면 연상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숫자나 건물이나 경제적인 축복을 생각할 때가 많다. 

부흥은 회개이다. 죄인이 돌아오는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부흥이다. 


교회의 실패가 어디에서 오나, 회개 없이 건물 이쁘게 지어가지고,,, 성도들의 입맛에 맛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간 중심으로 기획하고 꾸미고 해서 성도들을 동원하지만 그것은 참된 부흥이 없다. 부흥이면 우리의 심령이 변하고 삶이 회복되며 치유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인데 교회가 성도들이 늘어도 끊임없이 분란이 생기고 변화됨이 없다면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부흥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부흥과 성장은 다르다. 부흥에 힘써야 하는데 성장에만 힘쓰면 교회가 아닌 기업이 된다. 부흥은 회개와 변화이다. 그러나 성장은 단지 이윤추구이다. 성장이다. 


이렇게 부흥의 관점에서 요나서를 보면 요나서 1:1~ 3:4까지는 니느웨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선지자 요나를 부르시고 준비시키시고 순종케 하시는 내용이고 3: 5절부터는 듣는 자의 믿음과 회개가 나타나는 부분...


부흥은 믿음에서 시작되는데 믿음은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외치는 자의 믿음과, 이것을 듣고 반응하는 듣는 자의 입장에서의 믿음, 이 두 가지가 맞아 떨어져야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믿음만을 가지고서도 부흥은 일어나지 않는다. “네 믿음이 널 구원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믿음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주님이 계셔도 역사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삭개오와 같은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백부장과 같은 믿음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  


@듣는 자 입장에서의 믿음..

니느웨 백성 입장에서 요나는 한 작은 나라의 이방인에 지나지 않다. 변방의 약소국사람으로 3일 길을 걸어왔을 요나를 생각해보면 그는 아마도 행색도 초라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외쳐도 니느웨 사람 입장에서는 흔히 넘겨버릴 수 있는 초라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나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서 니느웨 사람들은 왕에서부터 끝의 백성까지 철저히 회개한다. 

이것이 바로 듣는 자의 믿음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물론 목회자나 교역자, 그리고 영적인 선배로부터 올 때도 많겠지만 때로는 전혀 생각지 못한 변방의 사람, 자기가 무시하고 평가하지 않았던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촉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행동하면 바로 부흥을 경험하는 것이고 무시하고 불순종하면 그러그러하게 살다가 끝나는 것이다. 


4절에 요나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외친다. 

그런데 5절에 보면 그것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굵은 베 옷을 입었다고 증거한다. 

그들은 믿고, 믿은 바를 선포했고, 선포한데로 행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유대인의 적, 이방인이었다. 

그들이 요나라는 선지자가 외치자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이 복주신 다는 것을 믿은 것도 아니다. 

노아는 백년 동안이나 방주를 지으며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외쳤지만 사위들조차 비웃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열명의 믿는 자만 있어도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그 열명의 믿는 자가 없어서 불타 버렸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경외하는 것이다. 

그분의 심판을 바라보는 것이다. 

니느웨 백성 입장에서 볼 때 요나의 외침은 그저 한 이방인의 소리일 뿐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반응을 한다. 

한 사람 뿐 아니라 낮은 자에서부터 높은 자에게 까지, 6절에 보면 왕과 대신들까지 그 말씀에 반응한다. 

그것이 은혜다. 

몸은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데, 말씀을 들으며 내 영혼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죽은 것이다. 


@ 말하는자, 외치는 자의 믿음 - 요나의 믿음..

만약 요나가 순종하기까지의 연단의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니느웨에 부흥이 일어났겠는가? 외치는 자는 전하기 전에 먼저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해야 한다.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준비하면서 먼저 은혜없이 설교를 준비하면 은혜가 없다. 그룹의 리더가 먼저 전할려는 말씀에 은혜 없이, 개인의 부흥없이 말씀을 나누면 오히려 그룹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기 전에 먼저 체험과 삶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니느웨에 가서 선포했다. 

내가 스올의 골짜기에서 구원되었듯이 너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이 나타날 것이다. 


죽음 앞에서 찬양하고 서원하고 하나님을 체험한 요나,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을 체험한 그들의 능력은 바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냥 말씀을 전하지 않았고 말씀이 체험되었을 때에 그것을 믿었고 증거하여 변화시켰다. 대부분의 현대 교회 설교는 체험하지 않은 들은 말씀, 읽은 말씀, 전해진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설교의 홍수 속(tv, 라디오, 인터넷)에서도 변화가 더딘 것이 아닌가? 


우리가 체험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신념과 신앙,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 할 때에 “우리가 어이할꼬.”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베드로만, 요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쓰일 수 있다.



요나의 말씀을 듣고 니느웨 백성은 회개한다. 

회개라는 말은 ‘돌아오다’이다. 

내 죄를 자백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소극적) 내가 잘못가고 있는 길을 180˚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다.(적극적) 소극적인 회개만 할 때 변화가 없다. 매일 자백하고 또 회개하기 때문에 오히려 개인의 자존감만 깨진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회개의 모습, 회개하는 그들의 믿음을 살펴 보자. 

1) 금식 선포 

금식 - 1) 일상에서 떠나 (일상-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타락한 도시의 공통점) 

          -> 가던 길을 중단하는 것

       2) 목숨을 거는 최고의 결단..-> 금식은 내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죽는 것을 표하는 것이 금식이다. 

cf) 우리의 금식 태도 - 

이왕 금식하는 거 어차피 아침에 늦게 일어나니까 아침금식..

이왕 금식하는 거 저녁에 금식하면 다이어트도 되니까 저녁금식

->이중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금식하라. 그것이 온전한 금식... 밥을 안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이 중요..


2) 굵은 베옷을 입음..

베옷은 두 가지 경우에 입었다. 첫째, 사람이 죽었을 때 , 둘째, 참담히 회개할 때

회개의 깊이가 깊을 수록 굵은 베옷을 입었다. -> 세상적인 정욕을 끊는 의미

지금까지의 옷 - 세상적인 사치의 옷

베옷 - 세상의 가치관과 허영으로부터 단절...

금식 - 육신의 정욕을 제어.... 베옷 -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철저히 끊는 것.

-> 여기가지의 회개는 백성들 개개인이 한 것, 여기서 그쳤다면 몇몇 회개하는 자들만 부흥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 니느웨의 부흥은 각각 개인의 부흥을 국가적인 부흥으로 이룩한 부흥이었다.        

         - 국왕이 주도한 부흥(리더자) 


국왕이 모범 

1) 조복을 입음 - 왕복을 벗었다

  ->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같은 베옷을 입었다. 리더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할 때 공동체가 따라온다. 자기 있는 것을 누리려 하지 말라. 

위에서 포기하면 영적인 파급효과가 크다. 

2) 베옷을 입음 -> 나도 당신들과 똑같은 죄인이다. 

3) 재에 앉았다. 

재 위에 앉고 재를 뿌린 것은 인생의 참 모습을 깨닫는 것, 한 줌의 재 밖에는 안되는 초라한 인생. 나의 나됨을 고백... 한계인, 나의 죽음을 상징...

4) 모든 짐승과 사람이 다 먹지말라. 굵은 베옷을 입고 부르짖어라. 

짐승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에게 말한 것이다. 

동물도 먹게 하지 말라.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고 오직 회개와 믿음에 전심하라. 

형식적으로 금식하지 말고 일상을 다 제하고 오직 기도와 회개에 전심전력하라. 

일이 많을 때에는 금식하지 말라.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메어 달릴 때에 금식하라. 


다급하고 간절한 회개...

-> 니느웨의 놀라운 각성...

5)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부르짖음에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떠났다. 돌이켰다. 부르짖고 또 그짓을 하면 그건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떠나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다. 

부흥의 역사는 곧 회개, 뉘우침의 행위와 함께 한다. 이제껏 잘못했던 것을 고백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곧 부흥의 시작이다. 


구체적 죄의 고백과 단절..


악한 길 - 모든 죄를 통칭

강포 - 구체적으로 드러난 죄된 행위    

-> 떠날 때 역사가 일어난다. 


@돌이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바뀔 수 있는가? 하나님이 뜻이 변경될 수 있는가? 

있다. 그런데 그 분의 변화는 우리처럼 원칙없이, 우유부단하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런데 공의로운 분이시기키 무조건적으로 구원하지 않으신다. 죄에 대하여는 심판하신다. 

그런데 심판받을 자가 돌이키면 그 분도 돌이키신다. 

그 분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0절의 말씀은 구원의 메시지이다. 

우리가 온전히 회개하면 그 분은 돌이키신다는 것이다. 사망과 전쟁과 지진과 부조리와 모든 종말을 향해 가는 길에서 우리가 온전히 회개하면 그 분은 돌이키신다. 회개는 멸망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회개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회개는 늦은 때가 없다. 

회개는 소망의 시작이다. 

부흥은 교회가 커지고 성도가 느는 것에 있지 않다.

하나님을 떠난 심령이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남이 변하고 상황이 변하고 외적인 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고 내 안이 변하고 내 심령이 변하는 것이다.

회개가 곧 부흥이다.

Posted by 소리벼리